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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193화 (1,950/2,000)

2193화. 바다의 힘

*

피부가 매우 하얀 사내는 노란 장발을 높게 묶어 올리고 눈썹에도 드문드문 노란 털이 섞여 있었다.

기다란 눈꼬리를 지닌 사내의 눈동자에 언뜻 붉은 핏기가 보이는 게 그리 인상이 선해 보이지는 않았다.

어쨌든 사내는 명실상부한 대라 후기의 대선(大仙)이었다.

“대어라, 그건 내 영수를 일컫는 말입니까, 아니면 나를 일컫는 말입니까?”

청년은 한립을 주시하며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허약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목소리가 저음이었다.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시지요.”

힐끗 위쪽을 쳐다본 한립은 대충 답했다.

자령과 석천공은 탈출하지 못했는데 그들을 막은 것은 결계 금제가 아니라 영역 보호막과 수백 명의 천정 수사들이었다.

복색으로 보아 감찰선사들과 순찰선사들이 대거 몰려온 듯했다.

“제가 나선 이상 그물을 빠져나갈 수 있는 물고기는 없을 겁니다.”

마른 사내가 그걸 눈에 담고 담담히 말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성함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지요, 저는 수장천이라 합니다. 한 수사를 잡아 오라는 명을 받았는데, 순순히 잡히시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힘을 써야 할까요? 제게 억지로 잡힌 다음에 후회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하하, 수장천! 좋은 이름입니다. 수장(水葬)당하기에 딱 좋은 이름이 아닙니까?”

한립의 웃음소리가 맑게 퍼져나갔다.

그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일흔두 자루의 청죽봉운검을 불러내 검신에서 수백 수천 가닥의 금색 뇌전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결집된 거대한 검진에서 우렁차게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콰르르.

천겁이 도래한 듯 물항아리 굵기의 뇌전 기둥들이 하늘에서 후두둑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고래가 낑, 신음을 흘리더니 머리를 물에 박아 천뢰기둥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냈다.

“두려워할 것 없다. 겨우 도천신뢰인데 무엇을 두려워하느냐!”

수장천이 웃으며 영수를 달래고 남색 장창으로 바다를 후려쳤다.

백만리 해역의 물이 들끓으며 수많은 물줄기가 수룡(水龍)처럼 솟구쳐 천뢰 기둥과 충돌했다.

쿠콰콰콰콰!

천지간에 푸른 물과 금빛 뇌전만이 가득 차 펑펑 터지면서 모든 풍경이 흐릿해졌다.

고개를 든 수장천은 혼돈 속에서 반짝이는 금빛 안에, 천정에서 죽이든 살리든 상관없으니 반드시 끌고 오라던 녀석이 아무렇지 않게 팔짱을 끼고 떠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떻게?”

수장천을 내려다보던 한립은 자령과 석천공이 천정 수사들과 싸우며 벌써 수만 리 정도 멀어진 것을 확인했다.

“내 요즘 기분이……. 썩 좋지가 않습니다. 당신이 운이 없군요.”

한립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서늘했다.

금색 영역이 삽시간에 퍼져 만 리 해역을 감싸고 망망대해에 느닷없이 달과 별이 뜨고, 금빛 폭포 속에 만 리 산맥과 산봉우리들을 휘감는 강이 생겨났다. 울창하게 자라난 산의 나무들이 강 위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천인경 영역…… .”

수장천은 주변의 변화와 자신을 억압하는 막대한 시간법칙의 힘에 미간을 좁혔다. 이제야 자신의 준비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천정에서 전해온 정보에 따르면 분명 대라 초기라 했는데 한립은 이미 대라 중기 수사에 대라 후기를 한걸음 앞두고 있었다.

“시간법칙을 이 정도까지 익힌 것은 의외지만, 시간법칙을 택한 순간 그 길이 막혀 있다는 것쯤은 알았어야 합니다.”

전신에 짙은 남색 빛을 일으킨 수장천 주위로 금빛들이 자글자글하게 왜곡되며 밀려났다.

손에 든 장창을 휙 돌리는데 시간법칙의 제약을 받는 것 같지 않게 움직임이 빠르고 매끄러웠다.

“무정풍파(無定風波)!”

수장천의 외침에 장창에서 남색 고리들이 퍼져나갔다.

격동하던 해역이 무형의 손바닥이 꾹 누른 듯 평평해지고 천지영기 또한 고정되었다.

손을 뻗어 일흔두 자루의 청죽봉운검을 합일해 거검을 손에 든 한립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훌륭한 술법입니다. 물의 법칙 속에 공간법칙의 위력을 담아내다니.”

“지리적 이점을 취한 것이지요. 흑풍해가 중토선역의 해역보다는 작아도 해양법칙(海洋法則)을 쓰는 제게는 유리한 환경이니까요.”

수장천이 멀리서 장창으로 한립을 가리키자 평평하던 바다가 둘로 갈리며 한립을 향해 나아갔다.

한립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앞으로 쏘아져 나가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뒤쪽 만장 산맥의 금빛이 폭발해 파도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푸른 물과 금빛 흙이 맞부딪쳐 거대한 장벽을 이루었다.

훌쩍 뛰어오른 한립은 산맥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서서 청죽봉운검으로 허공을 갈랐다.

석천공과 자령은 천정 감찰선사들의 포위에 갇혀 있다가 느닷없이 밀려드는 거대한 파도에 진법이 혼란스러워지면서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틈에 자령이 힐끗 한립이 있는 곳을 보았는데 물안개가 뿌옇게 끼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지금 한 수사의 수행은 보통이 아니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우리나 무사히 달아날 수 있게 조심해야 할 겁니다.”

석천공이 그녀의 모습을 보고 충고했다.

자령도 그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았지만 마음이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유명계를 떠난 후 한립의 상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 * *

“당신의 오장육부에 해수(海水)가 침투해 꼼짝할 수 없을 겁니다. 고분고분 잡혀가지 않겠다면 이대로 당신의 심장을 터트려 버리는 수밖에 없어요. 몸속에서 무언가 터지는 경험을 해보고 싶지 않다면 항복하시지요.”

수장천의 신영이 바닷속에서 응결되어 장창으로 한립의 미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어디 해보십시오.”

눈을 똑바로 뜨고 그를 마주 보는 한립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미간을 좁힌 수장천이 손아귀를 쥐었는데 한립의 몸에는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글쎄, 이 해역에 당신의 조종으로 움직이는 해수가 얼마나 되려나요?”

한립은 가뿐하게 두 팔을 털어 남색 해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버렸다.

“그 강줄기가!”

안색이 달라진 수장천도 뭔가를 깨달았다.

한립의 광음강(光陰江)이 부단히 흘러 시간법칙을 바닷속에 침투시켜 둔 것이다.

시간법칙의 침식을 받은 해수는 당연히 수장천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괴성을 지른 수장천은 남색 빛을 폭발적으로 끌어내 한립의 미간을 향해 장창을 찔러 넣으려 했다.

진작 상대의 공격을 예상한 한립은 천살진옥공을 운용해 천팔백 개의 현규에서 빛을 발하며 전신이 비늘 갑옷으로 뒤덮였다.

쿵.

폭음이 터진 뒤 반경 만 리의 바닷물이 증발하며 거대한 파도가 환형의 해일(海溢)을 이루고 숨 가쁘게 나아갔다.

거세게 솟아오른 만장 파도는 거대한 산봉우리 같아 보였고 고공의 구름까지 닿을 듯했다.

고개를 든 석천공이 일대의 영역이 어쩐 일인지 거둬진 것을 알고 자령을 잡아 공간 비술을 펼쳤다.

그들은 즉시 수만 리 바깥으로 피했지만 천정의 감찰선사들은 운이 좋지 못해 분분히 만장 파도에 휩쓸려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이날 평화롭던 흑풍해에 난리가 났다.

전투 장소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해역에 있는 오몽도조차 갑작스러운 해일에 섬을 지키기 위해 펼쳐둔 거대 진법의 비호가 없었으면 수많은 사상자가 날 뻔했다.

폭발이 일어난 중심은 바닷물이 깨끗하게 증발해 해저가 드러났는데 강대한 기운에 의해 모든 게 정지해 밀려 나갔던 파도가 다시 되돌아오지 않았다.

한립은 해저 산맥의 산등성이에 서서 비늘갑옷을 거두고 있었다.

이마의 살이 벌어진 게 부상을 입은 듯했지만 양생수 허상이 미간에 나타나 빠르게 상처를 봉합하고 재생시켰다.

그와 수천 리 떨어진, 시간영역의 산맥이 우뚝 선 곳.

동을신목들이 미친 듯이 덩굴을 뻗어 수장천의 발목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수장천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모든 동작이 한없이 느리고 미약했다.

그 앞에 번득 한립이 나타나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장검을 들어 올렸다.

“안 돼! 날 이렇게 죽일 순…….”

수장천이 두려움을 내비치며 소리쳤지만 검날에서 금색 뇌전이 터져 나와 검이 떨어진 순간 수장천의 몸을 두부처럼 갈랐다.

그런데 검이 살을 가르는 순간, 수장천의 육신이 투명하게 액체화되어 거꾸로 청죽봉운검을 감쌌다.

그걸 본 한립이 코웃음 치며 청죽봉운검에서 연달아 금색 뇌전을 발산했다.

파칙! 파지지직!

액체화된 몸뚱이마저 뇌전에 의해 터져 가루가 되었다.

“대라 후기답게 이길 수는 있어도 죽이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검을 거둔 한립이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중얼거렸다.

그 방향으로 만 리 밖, 불똥 같은 작은 물기가 응결해 남색의 수장천 허상으로 변해 있었다.

“한립, 넌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오늘은 실패했지만 다음에 다시 만나면 네 놈을 가루로 만들어주고 말 것이다!”

“수 수사, 몸이 이상하다는 느낌은 못 받았습니까?”

수장천의 외침에 한립이 태연히 물었다.

그 말에 멈칫하던 수장천은 몸을 살피고 수행이 떨어진 것을 제외하면 이상한 점을 찾지 못했다.

“헛소리로 나를 속이려 들지 마라, 난…….”

그러다 점점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어떻게 수행이 이렇게까지 떨어진단 말인가!”

수장천이 당황해 중얼거리기 시작해도 한립은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오행환세 속에서 그리 오래 있어 놓고 수행이 퇴보하지 않기를 바란단 말인가?

“무슨 짓을 했든 바다에서 난 무적이나 다름없다!”

이를 악문 수장천은 냉정을 되찾고 두 손으로 기괴한 수결을 맺었다.

멀리 바다에서 물살을 가르며 거대 고래가 다가오고 있었다.

거대한 물소리와 함께 수장천 아래에 거대한 물의 소용돌이가 생겨 엄청난 양의 물을 이끌고 수장천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십여 리 바다의 해수가 십여 초 만에 자취를 감추고 해역에 살던 바다 생물들과 요수들이 바짝 말라 바닥에 누워 있었다.

영수라던 검은 고래의 사체도 그중에 있었다.

바다의 기운을 흡수한 수장천은 몸집이 만장 가까이 커지고 흐릿하던 몸이 진해져 남색 균열 같은 게 떠올랐다.

한립은 상대의 기운이 대라 최고봉에서 더 차오르는 것을 감지하고 표정이 서늘해졌다.

“해가 드리우고, 모래가 만 리를 덮으리.”

마치 신의 음성처럼 한립의 입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리고 금색 파문이 십만 리 허공을 장악했다.

태양과 같은 거대한 만장 불덩이가 고공에서 떨어져 바다를 말리고 해수가 고갈된 바닥이 더욱 바짝 말라 만 리에 이르는 모래사막처럼 변했다.

흡수하던 바다의 힘이 끊긴 수장천은 몸이 불 위에서 구워지는 것 같은 열기에 물 속성 법칙의 힘이 급속도로 고갈되는 것을 느꼈다.

“이런 환술이라니…….”

“환술? 하하, 그렇게 생각하고 받아보시지요.”

수장천의 믿기지 않는다는 말에 한립이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아니, 평범한 환술이라면 내 법칙의 힘에는 영향을 미칠 수 없을 것인데? 넌 시간법칙을 수련한 것이 아니더냐. 어떻게 이런 이상한 술법을!”

“법언천지, 말이 곧 법이 되어 따르리니. 말해 주어봤자 알아나 듣겠습니까? 당신의 죽음이 멀지 않았습니다.”

한립의 외침에 작렬하는 거대 불덩이가 수장천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 정도로도 널 상대하기에는 충분하다!”

두 팔을 앞으로 뻗은 수장천의 손에 물빛 궁이 생기더니 거대한 화살이 걸렸다.

화살이라기보다는 수장천이 사용하던 남색 장창과 같은 생김새였다.

슈욱!

거대 화살이 허공을 찢어 검은 구멍을 남겼다.

쿠콰쾅!

둥근 불덩이가 화살에 맞아 수많은 불 구슬로 변한 뒤에도 화살은 위력이 전혀 줄어들지 않은 채 한립을 향해 쇄도했다.

한립은 피하지 않고 천살진옥공을 운용해 천팔백 현규를 밝게 빛내고 손에 든 청죽봉운검을 수직으로 갈랐다.

쿠쿠쿠쿠.

뇌전 줄기가 실처럼 섞인 무지막지한 크기의 금빛 검 허상이 남색 화살과 충돌했다.

검 허상이 화살을 붕괴시킨 순간 그 자리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공간균열만 남고 한립은 보이지 않았다.

공간균열 하방으로 스치듯 이동한 한립은 거구로 변한 수장천의 심장에 장검을 찔러 넣으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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