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2192화 (1,949/2,000)
  • 2192화. 흩어지다

    *

    윤회 전주의 술법이 펼쳐지고 뒤로 쓰러졌던 금동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가 서서히 암홍색 연못 깊이 잠겨 들었다.

    검은 세상으로 이동해 어떤 감각도 느낄 수 없을 것 같던 금동은 느닷없이 귓가에 굉음을 들으며 깨어났다.

    세상천지가 요란하게 흔들리고 큰 파도가 전해져 머리가 어지러웠다.

    “거린, 천라지망이 펼쳐져 있는데 어디로 도망가려 하느냐. 투항하지 않으면 네게 남은 것은 죽음 뿐이다.”

    냉정한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하늘을 울렸다.

    고막이 불타는 것 같은 느낌에 고개를 든 금동은 수백 리 바깥에 선 몸이 청록색 비취 덩어리 같은 수십만 장 크기의 반라의 사내를 보았다.

    몸에 구불구불한 털이 난 사내는 몸에서 노란빛이 화염처럼 반짝여 전대미문의 강력한 흙 속성 법칙의 힘이 느껴졌다.

    멀리서 마주 보는 데도 금동은 산이 떨어지는 것 같은 중압감에 어쩔 줄을 몰랐다.

    “도조?”

    온몸에 식은땀이 난 금동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진정한 압박감에 두려움 대신 불같은 화가 치솟았다.

    “하하하! 헌원걸, 이 더러운 천정의 폭도! 네 놈이 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이때, 호탕한 목소리가 파도처럼 퍼져나갔다.

    금동이 아래를 내려다보니 드넓은 바닷속에서 거대한 거품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쏴아아아.

    거대한 격랑에 휘말릴 수 없어 급히 몸을 띄운 금동은 만장 고공으로 올랐고 엄청난 걸 보았다.

    그녀가 바다라 생각했던 해역은 끝없는 허공에 뜬 실락대륙(失落大陸)으로 강력한 힘에 의해 어딘가에선가 강제로 뜯겨 올라온 것 같았다.

    머리 위로는 새까만 역외공간이, 실락대륙 주변으로는 수천 명의 천정 실력자들이 떠있었다.

    강렬한 흙 속성 법칙의 힘을 지닌 수백 명의 수사들이 진법을 이뤄 거대한 거품을 공격하자, 드디어 대륙이 붕괴되며 그 안에 품고 있던 거대한 무언가가 빠져나왔다.

    십만 장 크기의 금색 딱정벌레가 여섯 장의 날개를 펄럭일 때마다 금빛 돌풍이 몰아쳐 세상을 뒤흔들었다.

    “이 기운은…….”

    금동은 금색 딱정벌레가 서금충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자신보다 경지가 훨씬 높은 서금선 도조였다.

    서금선의 금색 껍데기는 흉하게 부서져 두 수정빛 날개도 뼈가 드러나 있었고 비취색 거대 사슬이 엉켜 꼴이 처참했다.

    헌원걸이라 불린 비취 거인이 주먹을 들어 사방팔방에서 모여든 비취색 빛으로 소용돌이를 이루고, 서금선 도조의 머리를 내리치려 했다.

    “하하, 어디 쳐봐라!”

    포효를 터트린 금색 딱정벌레가 두려움이 없이 솟구쳐 거대 주먹을 향해 입을 벌렸다.

    파사삭.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비취 거인의 팔뚝 절반이 터지고, 금색 딱정벌레의 몸에 감겨 있던 사슬들이 찰랑거렸다.

    그러나 금색 딱정벌레도 금빛으로 터지며 마치 파편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하하하. 헌원걸, 넌 이 몸을 차지할 수 없다. 내가 돌아오는 날이 네놈들 천정칠견(天庭七犬)이 사라지는 날인 줄 알거라! 난 반드시 돌아온다!”

    금색 딱정벌레는 광소를 남기고 요란한 금빛으로 퍼져 삽시간에 주위의 천정 수사 수백 명을 터트리며 사라졌다.

    “거기 서!”

    헌원걸의 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언할 수 없는 힘에 몸이 파괴된 서금선은 흐릿한 여인의 허상으로 돌아가 가루처럼 부서졌다.

    이어 금동은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느낌을 받으며 암홍색 연못에서 떠올랐다.

    머리 위에는 회전을 멈춘 육도윤회반이 떠 있었다.

    한마디 말도 없이 물속에서 빠져나온 금동은 심각한 얼굴로 한참을 서 있다가 발을 뗐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금빛이 전신을 타고 흐르며 물기를 증발시켜 버렸다.

    그녀를 본 한립은 깜짝 놀랐다.

    아직 불안정하기는 해도 대라 중기의 기운이 느껴졌고, 기이하게도 이전과 달리 진한 살기가 섞인 매서운 기세가 느껴졌다.

    “지난 생에 헌원걸과의 원한을 떠올렸나 보구나.”

    윤회 전주가 입을 열었고 금동이 사납게 그를 돌아보았다.

    “내……. 과거에 대해 아느냐?”

    금동의 목소리는 소녀 같은 음색이 사라지고 많이 낮아져 있었다.

    “괜찮은 것이냐, 금동.”

    “난 거린이다.”

    한립의 걱정에 금동이 한립을 돌아보며 싸늘히 답하다. 눈빛이 조금 누그러들어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거린이 내 진짜 이름이에요. 아무래도, 방금 지난 생의 기억을 본 것 같아요.”

    한립은 고개만 끄덕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린 도조는 충치족(蟲豸族)의 주인으로 진선계의 모든 곤충류를 통치했다. 후에 천정과 갈등이 생겨 흙의 도조 헌원걸에 의해 제압당하고 마지막 남은 혼백 한 줄기마저 억만 화신으로 변해 뿔뿔이 흩어졌다. 수없이 많은 서금충으로 흩어져 진선계는 물론 하계까지 흘러들게 된 것이다.”

    윤회 전주가 설명했다.

    한립은 금동의 과거가 의외였고 자령 등도 안색이 달라졌다.

    “헌원걸이란 자도 천도칠군 중에 1명인 것입니까?”

    석천공이 질문을 했다.

    “그래, 고혹금의 가장 충성스러운 옹호자이다. 거린이 죽은 뒤, 헌원걸의 명으로 그의 수하들이 미친 듯이 충치족을 학살해 구대 충왕들이 모조리 몰살을 당하고 일부 충족들만 하계로 달아났다……. 그렇게 흩어져 달아난 일부 충족들은 오랜 세월을 거치며 과거를 잊었고 결국에는 누구나 보면 없애야 한다고 소리치는 흉물스러운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윤회 전주가 대답해주었다.

    “헌원걸, 내 이 빚을 꼭 갚아주고 말겠다.”

    냉랭하게 다짐하는 금동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금동……. 아니, 거린.”

    눈을 빛낸 한립이 그녀를 불렀다.

    “됐으니까, 그냥 금동이라고 불러요. 기억을 회복했어도 아직 거린이라는 이름이 익숙하지도 않고. 일단 헌원걸을 죽이고 나서야 진짜 이름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금동이 한숨을 섞어 답했다.

    “한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금동 수사는 벌써 대라 중기에 이른 것 같은데, 어째서 참시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까?”

    석천공이 의문을 표했다. 다른 이들도 듣고 보니 퍽 이상했다.

    “그녀는 일반 수사들과 다르다. 천지영충, 태생적으로 탄서법칙을 지니고 있어 동족을 잡아먹으며 수행이 높아지고, 원래 도조였다가 분화가 된 존재라 수행이 높아지더라도 참시와 같은 과정을 반복할 필요가 없지. 오직 분화된 서금충을 하나로 모으기만 하면 도조의 실력을 회복할 것이다.”

    윤회 전주가 막힘없이 답을 주었다.

    “그래서 금동 너는 이제 어찌할 작정이냐?”

    “당연히 흩어진 분신들을 모아 그 자식에게 복수하러 가야죠.”

    한립의 질문에 금동은 반론의 여지 없이 답했다.

    “그래, 그래야겠구나.”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앞의 금동이 이전에 그가 알던 아이 같던 금동과는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으로는 함께 할 수 없겠어요. 지금까지 입은 은혜는 기회가 되면 꼭 갚을게요.”

    그런 그를 보는 금동의 눈빛이 흔들렸다.

    “각자 가야 할 길이 있는 것이니, 지금까지 함께한 것만으로도 행운이었다 싶구나. 몸조심하거라.”

    한립은 이번 헤어짐은 이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직감하며 마음이 허해졌다.

    고개를 끄덕인 금동이 더는 망설이지 않고 묵묵히 등을 돌렸다. 한립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차마 말리지 못했다.

    “아저씨, 실력을 회복하고 복수를 마치면 다시 만나러 갈게요!”

    홀연히 대전의 어둠으로 들어가 시선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금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한립의 입가에 잔잔히 웃음이 어렸다.

    “대라 중기의 서금선은 엄청난 전력인데 잡지 않는 것이냐?”

    윤회 전주가 입을 열었다.

    “어째서 잡아야 합니까.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듯 금동도 해야 할 일을 찾아 나선 것을요.”

    한립이 반문했다.

    “볼 일을 마쳤으면 다들 갈 길을 가거라.”

    윤회 전주는 더는 뭐라 하지 않고 안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그 목소리에 뭐라 특정하기 어려운 다양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갑시다.”

    한립이 대전 바깥쪽으로 몸을 돌렸다.

    자령과 석천공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따라가려는데 제혼이 움직이지 않았다.

    “주인님, 저는 유명계에 한동안 더 머물고 싶습니다.”

    “어째서 그런 마음이 들었지?”

    제혼의 말에 한립도 걸음을 멈추었다.

    “주인님을 따라다니며 세상의 수많은 강자를 만나보았습니다. 가면 갈수록 제 능력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알겠더군요. 주인님 곁에 있으면 도움이 되기는커녕 짐이 될 것만 같아요. 유명계는 제가 추구하는 대도와 기운이 흡사하니 이곳에 남아 수련을 하면 빨리 성장할 수 있을 거예요.”

    제혼이 정중하게 답했다.

    “선계에서 다시 만나 네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데 짐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냐. 하지만 네가 유명계에 남고 싶다면 그리하거라.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약속하마.”

    제혼의 말을 들은 한립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제혼이 허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한립은 그녀에게 걸어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전음으로 말했다.

    “내 의식 한줄기를 네게 남겨 놓을 것이다. 위기에 처하면 의식을 발동시키거라. 내 어디에 있던 너를 찾으러 올 것이다.”

    “주인님, 저는 누구의 비호도 받지 않고…….”

    제혼이 전음으로 거절을 하려는데 한립이 말을 끊었다.

    “삶과 죽음이 걸린 일에는 일말의 방심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무엇도 생명보다 중할 순 없어.”

    한립이 웃으며 하는 말에 제혼도 고개를 끄덕였다.

    * * *

    시간이 지나 몇 개월 뒤.

    이제 막 해가 뜨기 시작한 흑풍해 해역은 해무가 끼어 어슴푸레했다.

    그 해역과 겨우 수천 장 떨어진 곳에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졌는데, 먹구름이 진하게 핀 하늘 아래 집채만 하거나 산봉우리만 한 검은 돌풍이 용 떼처럼 휩쓸고 다녔다.

    그 돌풍 깊은 곳에서 귀곡성이 부단히 들려왔다.

    그 안에서 금빛이 번득이고 금색 영역을 두른 선박이 뚫고 나왔다.

    선박 위에는 영준하게 생긴 백발 청년, 푸른 장포를 입은 키 큰 청년 그리고 아름다운 보랏빛 의복의 여인이 타고 있었다.

    유명계에서 막 선역으로 돌아온 한립, 자령, 석천공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며 세 사람은 각기 다른 생각에 잠겨 말이 없었다.

    이때 한립의 눈썹이 꿈틀하는 것을 발견한 자령이 전음으로 물었다.

    “한 형, 왜 그러세요?”

    “포위당했구나. 적의 수가 적지 않고 수장은 최소 대라 후기 수사이다.”

    한립은 표정 변화 없이 알아낸 정보를 두 사람에게 전음으로 알렸다.

    자령과 석천공도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인물들이라 일이 터졌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려 합니까?”

    “급할 것 없으니 이대로 전진하면서 제 신호를 기다려 주세요. 석 형과 자령은 그때가 되면 최선을 다해 금제를 뚫고 나가주시고. 안 되겠으면……. 저랑만 멀리 떨어지면 될 겁니다.”

    석천공의 물음에 한립이 전음으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한 형, 조심하세요.”

    석천공과 자령이 답하고 선박이 해무 속으로 수천 리를 더 나아갔다.

    “지금!”

    돌연 한립이 소리쳤고, 석천공과 자령은 이야기를 나눈 대로 선박을 버리고 고공으로 치솟았다.

    다음 순간 아래쪽 해역에 거대한 파도가 치며 십만 장 규모의 산봉우리 같은 것이 심해 속에서 우뚝 솟아오르고 있었다.

    거대한 물체의 중앙이 쩍 벌어지며 심연과 같은 아가리를 드러냈다.

    “물고기라……. 대어(大魚)로구나.”

    한립은 물속에서 튀어나온 것을 보고 한립이 중얼거렸다.

    검은 비늘을 지닌 거대 고래는 날카로운 이가 다닥다닥 난 입안에 거대한 검은 소용돌이를 품고 있었고, 머리 위의 나선형 뿔에 금빛 광택이 흘렀다.

    하얀 비늘 갑옷을 입은 마른 청년이 한 손으로 고래의 뿔을 잡고 다른 손으로 남색 장창을 든 채 득의양양한 얼굴로 한립을 쳐다보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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