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2191화 (1,948/2,000)

2191화. 선택

*

“구진과 장천병에 관해서는 또 다른 도조인 진단도 연관이 있다.”

윤회 전주가 한립이 처음 듣는 이름을 언급했다.

“천정은 시간도조 고혹금을 위주로 다른 여섯 명의 도조들이 연합해 천도칠군(天道七君)을 이루고 진선계를 다스리고 있다. 그중에는 네가 아는 구원관 이원구도 있고. 진단은 일곱 도조 중에 가장 신비스러운 자로 예언도조라고 불리지.”

“예언도조요?”

“시공간초월을 할 때 난 모든 힘을 잃은 상태라 장천병을 조종하지 못했다. 그렇게 장천병은 광음의 강 속으로 흘러 들어갔고, 법칙의 비호도 남은 선령력도 없던 나는 구진과도 흩어져 버렸다. 내가 태어나기 수천만 년 전으로 이동했다면 구진은 네가 탄생했던 시점과 비슷한 곳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인계 어딘가에서 공력도 없고 법보도 전부 잃어버린 범인과 같던 나는 과거 수행을 했던 경험을 살려 작은 문파에 기탁해 다시 선도에 발을 들였다. 결국에는 다시 길고 긴 세월을 지나 구진의 행방을 찾고 내 딸을 구해냈지. 그 당시 윤회법칙으로 대라 최고경의 경지에 다시 오른 나는 윤회전을 설립하고 구진에게 교삼이라는 신분을 주어 선계 전역에서 활동하게 했다.”

“저를 찾고 난 다음에 왜 사실대로 말씀하지 않으셨나요!”

교삼이 참다못해 가장 묻고 싶던 말을 꺼냈다.

“예언도조의 존재 때문이다. 내가 너와 부녀임을 인정하면 운명 속의 관계가 형성되어 예언도조 진단이 예언법칙으로 너를 감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나를 찾으려 혈안이 되어 있는 천정에서 너를 발견하면 가만히 두었겠느냐?”

윤회 전주는 사정을 설명하면서도 미안한 눈빛이 스쳤다.

교삼은 윤회 전주이자 아버지를 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오랜 세월 이해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어째서 전주는 자신의 실력배양에 힘을 썼는지, 윤회전에서 수많은 자원을 내주며 자신의 성장을 도운 이유가 무엇인지.

지금까지의 수행이 막힘없이 순조로웠던 이유는 무엇인지.

자신은 천애 고아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고 평생 부친의 비호 아래 성장한 사람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교삼의 눈에 눈물이 차올라 뺨을 적셨다.

한립도 마음이 이상해졌다.

친딸을 곁에 두고도 자신이 아버지라 밝히지 못하며 살아온 세월이 그 고통이 어떠했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여상 역시 그러했다. 고혹금과 진단이 알아차려 그녀와 너에게 해가 갈까 감히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윤회 전주의 탄식이 들려왔다.

“그렇다면 이제 와서 왜 완이에게 여상의 기억을 강제로 되살린 겁니까?”

상대의 말을 거의 믿게 된 한립이 따져 물었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거든. 더는 아무것도 숨길 필요가 없어졌다. 오늘 너도 나의 실력을 보았을 것이다. 윤회전 내부를 청소했으니 이제 고혹금에게 복수를 할 날이 머지않았다. 이해타산이 분명한 네 성격에 윤회전의 힘을 보아야 결정을 내리겠지.”

윤회 전주가 눈을 번득였다.

“하하……. 이제 와서 나와 같이 적과 맞서 싸우자? 그럴 거였으면 완이는 끌어들이지 말았어야지!”

얼굴에 분노가 어린 한립이 냉소를 흘렸다. 그 소리를 들은 윤회 전주도 인상을 찡그렸다.

“여상은 원래 내 처이자 구진의 어미였다. 고혹금을 죽이고 천정을 멸하는 것을 여상이 확인하게 하여 과거 나를 위해 희생한 것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려는 게 무엇이 잘못이란 말이냐! 난 그녀를 저버리지 않았다.”

“여상이 아니라 완이다. 감여상이 아니라, 남궁완!”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에게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난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오직 여상을 위해 살았다. 그녀를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어. 헌데 너는 어떤가? 자령이라는 여인이 있으면서 남궁완이 네게 무엇이 될 수 있지?”

윤회 전주가 서늘하게 질책했다.

그 소리에 표정이 씁쓸해진 한립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걸 보고 있던 윤회 전주가 표정을 풀었다.

“여상의 기억이 지배적이기는 하나 남궁완이었던 기억도 남아 있다. 내가 고혹금을 격퇴하는 걸 보여준 뒤에 여상의 기억은 거두어 줄 수도 있다.”

“두 생의 기억을 견디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생각해 봤나? 그리고 감여상으로 남을지 아니면 남궁완으로 돌아갈지는 네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결정할 일도 아니고. 그 선택은 완이가 직접 해야 할 것이야.”

한립은 천천히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러지. 보천종의 예언은 만만히 볼 것이 아니다. 게다가 너와 난 동시에 두 삶을 살고 있기에 천기를 흩트려서 잠시는 숨을 수 있을지언정 일단 네가 대라 최고봉에 이르면 결코 진실을 숨길 수 없을 것이다. 고혹금에게 걸려 이용을 당할 것인지, 아니면 나와 같이 세상을 바꿀 것인지 알아서 선택하거라.”

고개를 끄덕인 윤회 전주가 말했다.

“내 실력에 당신과 시간도조의 쟁투에 휘말렸다가는 대라 최고봉에 이르기도 전에 죽을지도 모르는 것 아닙니까?”

한립의 말에 교삼이 입을 떼려는데 윤회 전주가 손을 들어서 막았다.

“너와 난 다른 삶을 살았지만 심성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누이가 시집을 가던 날, 난 산촌으로 돌아갔지만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과거의 인과를 끊고 오직 수련에 매진하기로 마음을 먹어서였지.”

윤회 전주가 옛이야기를 꺼냈다.

한립도 산촌으로 돌아가 누이가 꽃가마에 오르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분명 둘은 같은 사람인데 시간법칙과 시공간초월로 다른 두 사람이 되었다.

그럼에도 운명처럼 그도 진선계에 이르러 시간법칙을 익히고 있었고.

“내 존재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거란 걸 안다. 내 존재로 인해 네 삶에도 수많은 변수가 생겼으니 말이다. 미라도조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겠지. 당초 난 그에게 윤회전에 가담할 것을 제안했지만 그는 홀로 수행을 하며 평안을 꿈꾸다 그렇게……. 달리 말해, 네가 나를 돕는 것이 바로 자신을 돕는 길일 것이다.”

“이 일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습니다.”

한립은 심란한 마음에 당장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렇다면 더는 아무 소리 하지 않겠다. 여상이 깨어나는 대로 그녀의 의지를 물을 것이다. 너를 따라나서겠다면 말리지 않을 것이고. 허나 지금의 네가 그녀를 보호할 능력이 되느냐?”

“완이는 당신 때문에 너무 깊게 이 일에 휘말리고 말았습니다. 내 곁에서는 안전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 곁이…… 더 안전하겠지요.”

윤회 전주의 말에 고개를 저은 한립이 말했다.

“알겠다.”

한립은 교삼이 안고 있는 남궁완을 지긋이 보다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기려 했다.

“너와 네 일행은 육도윤회반을 사용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일 게다. 윤회반을 사용해 보지 않고 가려느냐?”

윤회 전주의 말에 한립이 걸음을 멈추었다.

“구진, 넌 일단 어머니를 모시고 가보거라.”

“예, 아버지.”

교삼이 복잡한 얼굴로 전주를 한 번보다 한립을 한 번 보고는 남궁완을 안아 대전 안쪽으로 들어갔다.

순간 윤회 전주의 눈에 희색이 돌았다 사라지며 대전을 감싸던 암홍색 영역이 사라졌다.

“들어오라 하거라.”

윤회 전주의 말에 한립은 전음으로 제혼과 자령 등을 불러들였다.

그들이 들어왔을 때 시공간초월을 하여 윤회법칙을 익힌 ‘한립’은 다시 삿갓을 쓰고 전신의 기운과 모습을 가려 안개 속에 가려진 윤회 전주로 돌아가 있었다.

“가지.”

윤회 전주는 짧게 말하고 덤덤히 걸어갔다.

한립이 동의하듯 일행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는 대신 그를 따라갔다.

자령은 한립의 표정을 보고 걱정이 되었지만 몇 걸음 뒤에서 쫓았고, 제혼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묻지 않았다.

금동이 ‘아저씨’라고 불렀지만 한립은 대답 없이 걸어갔다.

석천공은 윤회 전주의 뒷모습을 보며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어디서 봤는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들은 암홍색 연못이 있는 육각 제단과 그 위의 거대한 윤회반이 떠있는 장소까지 걸어갔다.

“육도윤회반은 윤회법칙의 지극한 보물이라 윤회법칙 뿐 아니라 사람의 운명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걸 사용한다고 해서 모두가 득을 얻는 것은 아니니 잘 결정하도록. 전생에 깊이 빠져들어 허우적거리게 되면 윤회의 늪에서 고뇌하다가 수행이 떨어질 수도 있다. 정말 윤회반을 사용하기를 원하는지 아닌지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것이다.”

윤회 전주가 입을 열었다.

자령 등은 그 말에 미간을 좁히고 망설였지만 금동은 그냥 신나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과거에 발목을 잡히고 싶지 않아요. 과거의 은원 때문에 고단한 삶을 살고 싶지도 않고요. 저는 육도윤회반을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제혼이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선언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놀라거나 의외라는 얼굴이었다.

윤회 전주가 그런 제혼을 보며 검은 천에 가려진 얼굴로 칭찬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수고스러우시겠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전주.”

고민을 마친 자령이 평소의 표정을 회복하고 앞으로 나섰다.

윤회 전주는 윤회반 아래 연못을 가리켰다.

“들어가거라.

자령은 연못 바깥에서 심호흡을 하고는 치맛자락을 잡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과 달리 물은 차갑지 않았고 가슴까지 밖에 차오르지 않았다.

표정이 몽롱해진 자령은 겹겹이 겹쳐지는 환각에 휩싸여 뒤로 넘어갔다.

연못에 둥실 떠오른 자령을 본 윤회 전주가 주문을 외며 윤도윤회반에 윤회의 힘을 불어넣었다.

웅!

육도윤회반에서 내려온 붉은 빛기둥이 자령을 감싸고 있었다.

* * *

향 하나가 탈 시간이 지나고 연못에 가라앉았던 자령이 팟, 숨을 터트리며 수면 위로 올라왔다.

물에 흠뻑 젖어 연못을 빠져나온 그녀는 초점이 흐릿했는데, 딴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듯했다.

한립이 번득 그녀의 뒤에 나타나 가볍게 어깨를 감쌌다.

“자령.”

그의 부름에 몸을 떤 자령은 마치 처음 본 사람처럼 한립을 보다 정신을 차렸다.

“한립…….”

힘없이 그의 이름을 부른 자령이 돌연 그의 허리를 두 팔로 껴안고 가슴에 안겼다.

한립은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복잡한 마음으로 어깨를 쓸며 위로해주었다.

홀딱 젖어서 한립에게 꼭 달라붙어 있던 자령이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 귀가 뜨끈뜨끈해져서 품에서 빠져나왔다.

곧 빛을 반짝인 그녀는 의복이 전부 말라 있었다.

“미안해요, 정신이 없어서 그만…….”

자령이 부끄러운지 말끝을 흐렸다.

“괜찮다. 몸은 괜찮은 것이냐?”

한립의 질문에 조용히 고개를 저은 자령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제야 그녀의 수행이 태을 최고봉에서 태을 중기로 떨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수행이…….”

“괜찮아요.”

한립은 놀랐지만 오히려 자령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의 수행은 본래 선인이 관정술(灌頂術)을 이용해 억지로 높인 것이었다. 근본이 불안정한 상태에 윤회의 길을 되돌아봤으니 수행이 떨어지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윤회 전주가 설명했다.

한립은 자령을 향해 정말 그런 것이냐는 눈빛을 보냈다.

“저와 석천공 수사의 수행이 급격히 늘어난 것은 해 선배님이 관정술을 써서 높여준 것이지요. 비슷한 공법을 수행한 사람의 법칙의 힘을 빼앗아 강제로 몸에 주입하는 비술이요……. 그러니 이렇게 된 것도 어쩔 수 없지요.”

자령이 대놓고 답하지 않고 전음으로 설명했다.

한립은 그래도 의혹이 남아 있었다.

대체 육도윤회반으로 어떤 과거의 기억을 보았기에 수행이 떨어질 정도로 충격을 받았단 말인가?

“다음은 누구지?”

“자령 수사의 공력이 퇴보한 것을 보니 아마 저도……. 저는 윤회 비술은 맞지 않는 듯싶습니다.”

윤회 전주의 물음에 석천공이 미간을 좁히고 있다가 의사를 밝혔다.

“석 형의 수행을 높인 방식이 자령과 같아 일시적으로 수행이 떨어진다고 해도 먼 훗날을 생각하면 단련을 해두는 것이 유리할 겁니다.”

한립이 전음으로 조언을 해주었다.

“눈앞에 난세가 펼쳐져 있는데 언제 다시 수행이 오를 줄 알고 그런 시도를 하겠습니까? 게다가 해 숙부님이 근면 성실하게 수련을 하면 억지로 만든 경지라도 차차 안정을 되찾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대로 해보렵니다.”

석천공도 전음으로 답했다.

“나만 남았네요.”

금동이 입을 열었다.

“확실히 육도윤회반을 사용해야 마땅한 인물이 남았구나.”

윤회 전주가 그런 금동을 힐끗 살폈다.

금동은 그러든 말든 신나게 연못으로 가서 첨벙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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