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2190화 (1,947/2,000)
  • 2190화. 두 번의 생

    *

    아련히 한립을 향해 걸음을 떼려던 남궁완의 고개가 교삼에게도 돌아갔다.

    교삼은 검은 가면을 벗어 버리고 진정한 얼굴을 드러낸 채 그녀만 보고 있었다.

    그녀를 발견한 남궁완은 교삼에게 다가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네가 구진이구나!”

    조심스럽게 교삼의 뺨을 감싸는 손에 애정이 묻어났다.

    고개를 힘껏 끄덕인 교삼의 눈에도 눈물이 떨어져, 두 사람은 소리 없이 흐느꼈다.

    한립은 가슴에 무거운 돌이 올려진 기분으로 윤회 전주를 돌아보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원래 그녀의 것이었던 잃어버린 기억과 수행을 찾아준 것뿐이다.”

    윤회 전주는 덤덤히 답했다.

    교삼은 한립이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대신 설명했다.

    “전주께서 육도윤회반으로 어머니 전생의 기억을 찾아주신 거예요. 제 어머니, 감여상의 기억을요.”

    “감여상……. 감여상이 나와 무슨 관계란 말입니까. 난 내 반려인 남궁완만을 알 뿐입니다.”

    한립이 분노에 차 언성을 높였다.

    동시에 금빛을 터트려 시간영역을 퍼트리려 했으나, 윤회 전주가 대충 손을 저어 윤회의 힘으로 한립의 시간법칙을 다시 한립의 몸으로 돌려 넣어 버렸다.

    오가는 소리를 듣고 있던 남궁완이 갑자기 비틀거렸다.

    두 인생의 기억이 동시에 머릿속으로 흘러들면서 표정은 일그러지고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럽게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한립이 놀라 다가가려 했지만 윤회 전주가 한발 앞서 그녀의 뒤에서 등을 받치고 머리를 쓸어내려 주고 있었다.

    차차 고통이 가신 남궁완은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막 수행을 회복해 전생과 현생의 기억이 중첩되니 부담이 된 모양이구나.”

    윤회 전주는 그녀를 교삼에게 맡기고 몸을 일으켰다.

    “당신이 뭔데 그녀의 전생의 기억을 깨운단 말입니까!”

    주먹을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관절이 도드라진 한립은 아주 오랜만에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전생에 내 아내였고, 내 유일한 반려였으니까.”

    윤회 전주의 평온한 대답에 한립과 교삼이 눈을 부릅떴다.

    “구진아, 넌 내게 아비는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다고 했었다.”

    윤회 전주가 교삼을 향해 몸을 돌려 늘 머리에 쓰고 있던 검은 삿갓을 벗었다.

    이 순간에는 윤회 전주의 위압감도 강대한 수행도 전부 사라지고 오직 그의 본모습만이 노출되었다.

    그의 얼굴을 본 한립과 교삼은 벼락을 맞은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평범하고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윤회 전주의 얼굴은 교삼의 상상처럼 노쇠한 노인의 모습이 아닌 맑은 눈을 가진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한립과 똑같은 얼굴로!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한립이 시간영역을 터트리며 따졌다.

    자신의 아내는 다른 사람의 아내라 하고, 타인은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변신술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그야말로 똑같은 기운과 느낌까지 한 치의 오차가 없는 같은 사람!

    법칙의 힘이 다르지 않았으면 눈앞에 서 있는 게 자신의 잃어버린 분신이라고 해도 믿었을 것이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나는 한립이고, 너도 한립이지만.”

    윤회 전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죠?”

    교삼이 놀라 정신을 잃은 남궁완을 껴안고 중얼거렸다.

    “난 한립이다. 시간을 역전해 과거로 돌아가 시간법칙을 포기하고 윤회법칙을 수련한 한립.”

    윤회 전주의 차분한 설명에 교삼이 깜짝 놀라 생각에 잠겼다.

    “당신이 한립이라면, 난……. 난 누구란 말입니까?”

    손을 뻗어 윤회 전주를 가리킨 한립이 아연히 입을 열었다. 사고가 정지된 것처럼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분신도 아니고, 화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참시도 아니라면 정말 나란 말인가?

    법칙의 힘이 완전히 다름에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괴한 연계가 그게 맞다고 말하고 있었다.

    “넌 넌고, 난 나다. 우린 똑같이 인계의 외진 산촌에서 태어나 같은 부모 형제와 자란 범인 출신이지. 결국에는 속세를 떠나 천신만고 끝에 진선계에 이르고.”

    윤회 전주는 태연하게 말했다.

    약간 냉정을 되찾은 한립은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한 세상에 두 명의 한립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제가 시공간초월을 해서 만들어낸 존재인 겁니까?”

    자신이 어느 날 시공간 초월을 해서 현재로 돌아온다면 이 시점에 한립이 두 명일 수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자신은 어째서 윤회공법을 수련한 걸까?

    “아니, 시공간초월을 한다고 해도 머물 수 있는 시간에 한계가 있습니다. 시공간을 비틀 수 있는 법칙정사를 다 소모하면 다시 원래의 시공으로 돌아오기 마련이지요. 당신은 내가 아닙니다.”

    한립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말을 부정했다.

    “그래, 너와 난 한 번 태어나 두 번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난 너의 시공간초월의 산물이 아니고. 오히려 네가 내 시공간초월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겠지.”

    윤회 전주의 표정은 시종일관 물결이 일지 않는 고요한 수면 같았다.

    그 말을 들은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길고 긴 세월, 인계에서 영계 그리고 각종 공간을 거쳐 여기까지 오는 동안 지나왔던 일들이 속속 떠올랐다.

    곡혼, 문 대인, 려비우, 은월, 원요, 대연신군, 보화……. 그가 마주쳤던 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사건은 자신이 자신의 힘으로 지나온 것들이었다.

    그런데 윤회 전주의 시공간초월의 산물이 바로 자신이라고?

    “말도 안 됩니다, 말도 안 돼요. 당신은 윤회법칙을 익혔는데 어찌 시공간 초월을 한단 말입니까? 황당하기 짝이 없는 궤변입니다. 아니면, 이 모든 것이 환술일지도!”

    한립은 구유마동을 일으켰지만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병령 선배님, 병령 선배님! 어서 시공간초월로 이곳을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또 속으로는 병령을 애타게 찾으며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랐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것은 처음이었다.

    “한립…….”

    그때, 그의 머릿속에 병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멈칫한 한립은 그의 목소리가 정신을 일깨우기라도 한 듯 머리가 한결 맑아졌다.

    “그는 너를 속이지 않고 있다. 너뿐 아니라 나조차도 그의 시공간초월의 산물이 맞다. 그가 수천만 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린 후, 산촌에서는 또 한 명의 한립이 태어났고 그게 바로 너인 것이다. 바로 지금의 너.”

    병령의 말이 비수처럼 한립의 가슴에 박혔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직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아 한립은 중얼거리듯 물었다.

    “당시 난 인계에서 영계로 갈 수 있었고, 사령근(四靈根)의 자질을 지니고도 선계에 이르렀다. 결국에는 시간법칙을 수련해 수행이 최고봉이 이르고 시간도조 고혹금의 지위를 위협하게 되었지. 그와의 최후의 결전에서 패배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지만.

    그에게 죽음을 맞기 직전, 난 필생의 시간법칙의 힘을 모두 흩어버리고 모든 시간도문과 시간정사를 소모하는 대가로 고금을 통틀어 가장 강대한 양의 시간의 힘을 장천병 안에 결집할 수 있었다. 그때 장천병은 진정한 역전시공(逆轉時空)을 일으켜 나를 데리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지. 아주, 아주 오래전으로 말이다.

    윤회 전주의 가라앉은 눈빛에 드디어 빛처럼 보이는 것이 반짝였다.

    “당초 그가 시간법칙의 힘을 장천병 안에 주입했을 때 일어난 변화 중 하나가, 내 자아가 생겨난 것이다. 그때는 아주 미약했지만 세월이 흘러 지금의 병령이 될 수 있었지.”

    병령이 보충했다.

    한립은 찬찬히 생각을 정리하다 마음을 완전히 가라앉힌 다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정말 저는 저이고, 당신은 당신이군요. 각자 다른 수행을 쌓을 수 있었던 것도 이해가 되고요.”

    “그리 생각해도 좋다. 내가 시공간초월을 한 탓에 네가 겪게 된 세상은 내가 처음 겪었던 것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 감여상을 만나야 했던 네가 낭궁완을 만나게 된 것처럼. 마계, 회계 그리고 만황계역과도 나보다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아마 네가 선계로 들어선 후로 길이 양 갈래로 갈라져 시간이 지날수록 아예 다른 삶을 살게 되었겠지.”

    “당신은 어쩌다 윤회 전주가 된 겁니까?”

    “극히 먼 과거로 시공간초월을 했을 때 나는 일신의 시간법칙이 전부 사라진 폐인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더 절망스러운 것은 그때도 고혹금은 이미 시간도조였다는 것이다. 내가 다시 시간법칙의 힘을 수련하면 결국에는 똑같이 그에게 죽임을 당하게 될 게 뻔했지. 그래서 윤회법칙으로 수련의 길을 돌려 지금의 내가 된 것이다.”

    미간을 좁힌 한립의 물음에 윤회 전주가 답했다.

    “저와 제 어머니는 어떻게 된 건가요?”

    한립 못지않게 혼란스러워하던 교삼이 창백한 얼굴로 자신에 관해 물었다. 윤회 전주가 그런 그녀와 남궁완을 바라보는데 눈빛이 한결 따뜻해 보였다.

    “네 어머니는 너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혹금에게 살해당했다. 나에게 달아날 시간을 벌어주고자 자신을 희생한 것이지. 그 전에 윤회의 힘 일부를 너의 몸에 봉인해 두었고. 나도 너를 보호하기 위해 시간법칙의 힘으로 널 옥결 선기 속에 봉인해 몸에 지니고 고혹금과 싸우러 나갔다. 결국에는 이길 수 없자 장천병을 발동하게 되었지만. 필생의 시간법칙의 힘을 전부 없애서라도 고혹금과 동귀어진이라도 하기 위해…….”

    “그 당시에 저도 함께였단 말씀이신가요?”

    “난 우리 부녀가 죽을 거라 절망했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장천병에서 병령이 탄생하며 시공간초월이라는 전대미문의 이능력을 발휘했다. 진정한 시공간초월을 해 시간도조의 손에서 벗어난 셈이 되었지.”

    “교삼과 당신이 함께 과거로 돌아갔단 말입니까?”

    듣고 있던 한립이 놀라 끼어들었다.

    “그렇다.”

    윤회 전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말은 그야말로 황당무계하며 믿을 가치도 없군요.”

    깊게 숨을 들이마신 한립이 질책했고, 교삼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교삼이 당신과 같이 극히 먼 과거로 돌아갔다면, 그녀의 자질에 지금의 경지에 머물러 있겠습니까? 게다가 장천병은 어째서 당신을 떠나 내 손에 들어왔고요? 시간도조가 시간법칙의 최정상에 서 있는 자라면 당신은 할 수 있는 시공간초월을 그는 왜 못한 겁니까?”

    한립이 떠오른 의문들을 연달아 내뱉었다.

    “그 질문들에 답하기 전에, 한 가지 묻지. 넌 장천병이 대체 뭐라고 생각하고 있지?”

    윤회 전주의 말에 한립은 시간법칙 보물이라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그렇게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솔직히, 지금의 나도 장천병이 대체 어떤 보물인지 정확히 모르겠다만. 그 안에 함유된 법칙의 힘이 시간법칙 하나만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필생의 시간법칙의 힘을 기반으로 하더라도 병령의 탄생과 시공간초월이라는 역천의 능력을 설명할 수 없을 테니까.”

    “그 말은 시간도조는 시간법칙의 힘을 장악해도 시공간초월은 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시공간초월이란 말 그대로 시간과 공간, 게다가 윤회까지 거스르는 일이다. 장천병을 지니지 않고서 시공간초월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그러니까 장천병을 지닌 자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시공간초월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윤회 전주의 말에 한립은 어느 정도 설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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