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2189화 (1,946/2,000)

2189화. 돌아올 수 없는 길

*

교삼은 몸 안에 차오르는 따스한 기운을 느끼며 소진되었던 선령력이 절반은 차올라 밝은 얼굴로 일어설 수 있었다.

부상을 입지 않은 제혼 등은 윤회 전주의 기세에 놀라 한립 옆으로 모여들었고, 금빛을 거두고 선 한립은 윤회 전주를 보며 넋을 잃고 있었다.

전신이 모호하니 어떻게 생겼는지 보이지는 않았는데 아무래도 너무 낯이 익었다.

윤회 전주가 그런 한립을 힐끗 보고 골황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골황 수사, 오랜만입니다.

“난 줄곧 너를 볼 날을 기다렸지. 오늘이 그 날이로구나!”

“날을 아주 잘 잡으셨더군요.”

“잘 잡은 정도가 아니라 다시없을 기회겠지. 어차피 내가 더 수행이 높은데 다른 일로 힘을 뺐으니 내 적수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골황의 눈두덩이에서 귀화가 흔들거렸다.

“여전하십니다. 도조의 법칙의 힘까지 쓰고, 육도윤회반이 그리 탐이 났단 말입니까?”

표표히 몸을 띄워 암홍색 보호막 바깥으로 나간 윤회 전주가 물었다.

“육도윤회반의 주인이 바뀔 때가 된 것뿐이다.”

차갑게 소리친 골황이 두 손을 뻗어 각기 다른 방향으로 기괴한 수결을 맺었다.

두 눈의 귀화가 활활 타오르고 기운이 치솟는데 전신의 뼈는 어쩐 일인지 갈라진 흔적들이 드러났다.

거대하기 짝이 없는 백골 영역이 도래하고 있었다.

그 영역이 얼마나 큰지 흑하역, 지명역, 삼라역을 전부 품고도 계속 커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유명계 전체가 백골 영역에 뒤덮일 것 같았다.

이때 하늘이 갈라지고 뼈 모양의 빛이 번득였다.

무거운 중압감이 천도법칙의 강림을 알리는 것 같았다.

반면 백골영역 안에서 그나마 수행이 높은 귀물들은 각자의 신통으로 방어를 했지만, 그렇지 못한 약자들은 뼈가 분리되어 영역으로 빼앗기고 있었다.

유명계 전체에 재난이 닥친 것과 같았다.

억만 귀물들이 손가락 한번 튕길 시간에 소멸해 백골이 거대한 강을 이루고 한 덩이의 소용돌이로 뭉치는 중이었다.

그런 백골들이 사방팔방에서 몰려들어 골황의 영역 안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백골산을 쌓아갔다.

이제야 골황이 진정한 도조의 저력을 보이고 있었다.

윤회대진 안에서 자령이 기절하는 바람에 한립이 그녀를 부축했다. 이어서 석천공, 제혼 등도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 엉덩방아를 찧었다.

금동은 그나마 상태가 나았는데도 식은땀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한립도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뿌옇게 변하려 했지만 시간법칙과 연신술로 겨우 정신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이게 도조의 힘!

윤회 전주가 미소를 지으며 전방을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하늘을 가리며 나타난 육각판 허상 속에서 수많은 신영들이 나타나 형언할 수 없는 기운을 내뿜었다.

윤회 전주의 조종에 육각판 위 신영들이 움직이고 있다.

이건 마친 천만 계면의 수많은 생사윤회가 윤회 전주의 손아귀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인족, 마족, 귀족도 그의 손아귀 그러니까 윤회의 굴레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육각판이 천천히 돌기 시작하자 펑! 하고 백골 거산이 와해 되었다.

달걀을 깨트리는 것도 이것보다는 어려울 것 같았다.

허공에 떠있던 골황은 가슴 아래 부분과 한쪽 팔이 조각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달아나고 싶어도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내게 도전했던 도조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듣지 못했나 봅니다. 다들 윤회의 길로 들어서거나 내게 굴복했는데, 당신에게는 다른 길이 없을 것 같군요.”

고개를 저으며 탄식한 윤회 전주가 소매를 펄럭였다.

그러자 육각판에서 힘이 느껴지고 골황이 쉭! 윤회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어 천지에 깔려 있던 백골들이 사라지고 육각판 마저 없어지고 나니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공간은 적막해졌고 모든 것은 평화로워 보였다.

“삼천대도(三千大道)는 결국 먼지로 돌아가게 되는 것. 이제 가서 언제 다시 보게 될 것인가.”

홀로 허공에 뜬 윤회 전주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골황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혈려 등은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란 상태였다.

자신들의 상대라 여겼던 전륜왕이 그들은커녕 골황도 월등하게 초월하는 존재였을 줄이야!

“당시 내 분신이 너희에게 살길을 열어 준 것으로 안다. 허나 너희는 그 기회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가져다 버리려 하는구나?”

윤회 전주가 혈려 일행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전륜왕, 제발 살려주십시오…….”

혈려 등은 이미 저항할 의지를 상실하고 꿇어앉아 머리를 조아렸다.

“세상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너희 유명계 귀물들도 죽음이 닥쳐야만 후회를 하는구나. 하지만 대부분 후회는 이미 너무 늦은 법이지. 너희 스스로 제 무덤을 판 줄이나 알거라…….”

이런 말을 하는 윤회 전주의 시선이 언뜻 한립에게 향한 것 같았다.

그의 소매 속에서 핏빛이 흘러나와 혈려 등의 피와 살이 사라지고 뼈만 남아 엎드린 상태로 보존되었다.

잠시 후 그 뼈마저 바람에 날려 가루로 흩어졌다.

가만히 선 한립은 격동하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윤회 전주의 강함은 그의 상상을 한참 초월했다. 고개를 돌려 한립을 본 윤회 전주가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너를 만나려 했는데 직접 와서 수고를 덜었구나. 나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가자.”

그 말을 들은 한립의 눈에 이상하다는 기색이 스쳤다.

그렇다고 주춤거리지도 않았다. 그는 자령을 안아 들고 제혼 등과 함께 대전 쪽으로 걸어갔다.

“너와 교삼만 안으로 들고 나머지는 바깥에서 기다리게 하거라.”

윤회 전주의 명에 한립은 멈칫했으나 자령을 제혼에게 맡기고 석천공 등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준 다음 그를 따라갔다.

교삼이 그의 뒤에 서서 여러 감정이 뒤섞인 눈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천천히 대전의 문이 닫히고 내부가 어둑해졌다.

드넓은 대전 안쪽에는 검은 비석이 세워져 있고, 주홍색으로 윤회(輪回)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진선계에서 천정과 대항하며 암약하는 신비한 세력이 유명계에 숨어 있었을 줄이야.

눈앞의 신비로운 사내는 아직 도조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실제로는 평범한 도조 이상의 실력자였다.

이 모든 것이 윤회 전주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때 윤회 전주가 암홍색 영역으로 대전 내부를 장악했다.

불편함을 느낌 한립은 제혼 등과의 의식 연계를 비롯한 외부와의 모든 소통이 차단된 것을 느꼈다.

“한립, 그간 여러 윤회전 일에 참여해 주었고, 교삼을 도와주었으니 네게 은혜를 입었구나.”

“교삼 수사 또한 저를 도운 일이 많으니 은혜라 하실 것은 없습니다.”

윤회 전주의 말에 한립이 바로 답했다.

“연신술을 5성까지 익히고 노력이 가상하구나. 허나 당초 교삼이 연신술을 내주며 일러준 공법의 폐해를 잊은 것은 아니겠지?”

“알고 있습니다만, 그로 인해 얻은 이익이 막대하기도 하고 중간에 수련을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이리되었습니다.”

“그래, 이점이 아주 많은 술법이지. 내 솔직히 해줄 말이 있다.”

솔직히 해줄 말?

한립이 뭐라 말하기 전에 윤회 전주의 말이 이어졌다.

“연신술은 내 윤회비술의 기초라 혼백의 힘을 증폭시켜주는데. 이건 이번 생에 제한되지 않고 후생에도 이어진다. 윤회를 돌며 의식의 힘은 점점 쌓이고 수련은 결코 멈출 수 없어 시간이 갈수록 위력이 강해질 수밖에 없지.”

“그렇게 대단한 술법이라면 후환도 무궁무진 하겠습니다?”

섬뜩해진 한립이 물었다.

“의식의 힘이 과도하게 쌓여 한계에 이르면 후세에 윤회를 거친 혼백이 발작을 일으켜 미쳐버릴 수도 있다. 최상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분리된 의식의 힘을 하나로 합칠 수 있어야 새로운 균형을 찾으며 그런 화를 면할 수 있고.”

“그 말씀은 최상의 경지에 이르기 전에는 아무런 해도 없고, 거의 역천의 능력을 지닌 술법이란 소리로 들립니다.”

“지금의 생만 두고 보자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윤회를 거듭할수록 의식의 힘이 쌓여 남은 수많은 생을 백치나 미치광이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거라.”

“……어찌 되었든 이미 익히기 시작했으면 돌아올 수 없는 길이군요.”

윤회 전주의 말에 한참 생각해 보던 한립은 쓰게 웃음 지었다.

“남은 두 권의 공법이다, 받거라. 공법을 대성하면 이생에는 강대한 의식의 힘을 누리며 발작을 걱정할 이유도 없겠지. 그저 7성까지 모두 익히면 후세에 윤회를 통해 새로운 수도의 길을 걸을 수 없게 될지 모르니 알아서 결정을 내리거라.”

윤회 전주의 손에서 하얀 옥간이 날아가 한립에게 떨어졌다.

연신술의 마지막 공법들이 담겨 있었다.

“사실 전 제 앞에 오직 하나의 길을 보고 수련을 해왔습니다. 내생이 있다 한들, 그때는 일개 범인으로 태어나 평범한 삶을 살수도 있는 것이고 아예 윤회의 기회를 얻지도 못하고 이번 길에서 혼백이 흩어져 모든 게 끝날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한립은 공수를 해보였다.

“그래, 그리 마음을 먹었구나. 그리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더 먼 곳까지 갈 수 있을지도.”

윤회 전주는 자신의 말을 되뇌며 뒷짐을 쥐고 한립을 쳐다보았다. 마치 머뭇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제게 의문 거리가 있는데 답을 주실 수 있겠는지요.”

상대의 말을 기다리던 한립이 먼저 입을 뗐다.

“말해 보거라.”

“구원관에서 교삼 수사 곁에 있던 윤회술법을 쓰던 여인이 제가 알던 사람과 너무 닮았습니다. 그 사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제가 그 사람을 만나봐도 될지요?”

한립은 슬쩍 교삼을 살폈고, 교삼은 그의 시선에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결국, 그 여인이 네가 하계에서 아내로 맞은 남궁완이 맞는지 알고 싶은 것 아니냐.”

윤회 전주의 말에 한립은 깜짝 놀랐지만 겉으로는 표정을 유지했다.

상대가 이렇게 직설적일 줄 몰라서였다.

“예, 그걸 알고 싶습니다.”

“네가 알고 싶어 하는 여인은 이곳에 있다. 그저 네가 알던 남궁완이나, 너의 남궁완은 아닐 테지만.”

윤회 전주의 대답에 미간을 좁힌 한립은 상대를 향해 약간의 적의를 품게 되었다.

자신에게 악의는 없어 보였고, 심지어 연신술의 남은 공법을 그냥 내주기까지 했지만 남궁완이 걸려있는 문제에서 양보란 없었다.

남궁완은 그에게 역린(逆鱗)이자 그의 인생에서 가장 부드럽고 따뜻한 부분이었다.

“이곳에 있다면 만나보고 싶습니다. 제 아내가 맞는지 아닌지는 제가 판단을 할 것이고요.”

눈을 반짝인 한립의 말에 ‘윤회’라 적힌 비석 뒤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남색 궁장 차림의 선녀같이 고운 얼굴을 한 여인이었다.

갸름한 턱과 수려한 콧날 그리고 보는 사람을 멍하게 만드는 눈동자, 모든 것이 너무 익숙하고 따뜻하게 한립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런 여인이 남궁완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그런데 수행이 폭증한 남궁완은 불안하기는 하지만 대라급 기운을 지니고 한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아득한, 의혹, 미안함, 여한 등 수많은 감정이 가득했는데 유독 생사고락을 뚫고 반려를 만난 반가움만은 보이지 않았다.

“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한립이 윤회 전주를 노려보며 물었다.

“한, 한 수사……. 화내지 마세요. 전주, 전주께서는 어머니의 전생의 기억을 돌려주신 것뿐입니다.”

교삼이 참다못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어머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립은 황당했지만 남궁완을 자기 쪽으로 끌어오려 움직였다. 윤회 전주는 막지 않았고, 교삼도 걸음을 옮기려다 멈추었다.

한립이 부드러운 남궁완의 팔목을 잡으려는데, 남궁완이 무의식중에 물러서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대로 손이 굳은 한립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남궁완을 불러보았다.

“완이…….”

그 한 마디에 남궁완의 눈빛이 떨리며 온갖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어머니…….”

그때 교삼도 그녀를 소리쳐 불렀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