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7화.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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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하게 남아 있던 진단노조의 팔이 소용돌이에서 나온 검은 수정실에 천천히 끌려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도 의자에 앉은 사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어떻습니까?”
“윤회 전주는 여전히 행적이 묘연하나, 그간 드러나지 않던 밀접한 관계의 인물을 찾아냈습니다.”
그의 미간에서 수정빛이 날아가 의자 사내의 손으로 스며들었다.
“한 번만 더 점을 치면 철저히 천도법칙 속으로 융합되어 사라지고 말겠습니다. 당신의 계획은 언제 성공하겠습니까…….”
소용돌이 속에 사로잡힌 진단 노인이 물었다.
“곧.”
의자 사내가 한 마디를 남기고 구름 속으로 떠올라 사라졌다.
“고혹금, 너를 위해 수많은 천기를 알아다 주었다. 내 노력을 배신하지 말거라…….”
진단노조가 고공을 올려다보며 탄식했다.
* * *
황천대택, 회백색 석전 깊은 곳.
윤회 전주가 육각 판을 운용해 남궁완에게 암홍색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눈을 꽉 감은 남궁완은 무척이나 괴로워 보여 옆에 서서 지켜보는 교삼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어렸다.
“전주, 왜 그러십니까?”
수결을 맺던 윤회 전주가 손을 멈칫하는 걸 교삼이 민감하게 알아차렸다.
“네 어미의 체질과 윤회법칙이 맞물려 기억을 단단하게 잡고 있구나. 강제로 술법을 강행하면 몸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까 걱정이구나…….”
“그럼 억지로 하면 안 되지요.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교삼이 급히 묻는데 윤회 전주가 입을 열려다 바깥을 쳐다보았다.
멀리서 함성 같은 것이 들리고 쿵쿵거리는 진동이 작게 들려왔다.
“누가 황천도(黃泉島)에 침입했나 봅니다!”
교삼이 흠칫 놀라 말했다.
“골황, 그 늙은이가 왔구나. 승복하는 척하더니 육도윤회반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어……. 내가 술법을 펼치는 것을 알고 이때를 노린 것인가? 오, 공교롭게 익숙한 얼굴이 더 있구나.”
“네?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윤회 전주는 손을 저으며 교삼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전주, 정반돌풍 때문에 주력 부대가 철수해 황천도에 병력이 얼마 없습니다.”
교삼은 심각하게 보고했다.
“내 안배해 둔 것이 있으니 무방하다. 이참에 내부 정리도 되겠구나. 예상한 것보다 수가 적기는 한데……. 일단 네가 가서 이 윤회령을 이용해 윤회대진을 발동해 골황을 막고 있으면 술법을 마치겠다.”
윤회 전주는 암홍색 융각 영패를 교삼에게 날려 보냈다.
육각판과 비슷한 영패에는 수많은 별자리 도안들이 들어가 빛을 반짝였다.
“네!”
영패를 받은 교삼이 바깥으로 날아갔다.
“내 직접 나섰던 것이 얼마나 오래전이란 말인가. 이제 고혹금은 알아도 선계에 나를 아는 자가 있겠는가.”
윤회 전주가 교삼이 떠나는 것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 * *
한립 등은 섬 위에서 골황을 따라 회백색 석전 인근에 도착해 암홍색 보호막을 보고 있었다.
보호막에는 강대한 윤회법칙의 힘이 담겨 있었다. 그 법칙의 힘에 한립은 알 수 없는 익숙함을 느꼈다.
“윤회대진? 그래봤자 주인 없이 얼마나 버틸까!”
골황은 냉소를 흘리고 하얀 뼈다귀 손을 뻗어 빛을 내뿜었다.
거대 뼈다귀 손이 이전보다 열 배는 강한 위력을 품고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대전 안쪽에서 누군가의 기합 소리가 들리고 눈부신 암홍색 빛이 퍼져 나왔다.
암홍색 보호막은 보약이라도 먹은 듯처럼 뼈다귀 손의 공격을 이겨내고 전보다 더욱 커졌다.
동시에 인근 황천대택이 빛나면서 붉은빛을 내뿜어 백골의 하얀빛과 충돌했다.
황천대택의 정반돌풍이 미친 듯이 몰아쳐 하얀빛과 경쟁하면서 일대를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그걸 본 한립 일행은 뭉쳐서 보호막과 선기 등으로 날아드는 공간 난류와 공간 균열의 기습에 방어했고, 혈려 등은 골황을 중심으로 뭉쳤다.
귀무는 망설이다가 검은 그림자로 변해 골황 쪽으로 붙었다.
눈을 반짝인 한립은 굳이 귀무를 말리지 않았다.
황천대택이 윤회 금제에 영향을 받아 떠오르며 공간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때 대전 안쪽에서 익숙한 신형이 떠올랐다.
교삼이었다.
교삼도 한립 일행을 보고 신경 쓰이는 눈빛이었지만 상황이 긴박했기에 주문을 외면서 수결을 맺었다.
황천대택 내부에 품고 있던 암홍색 빛이 교삼의 술법에 육각판 모양으로 변화하면서 빠르게 회전했다.
그 중심에는 회백색 석전이 있었다.
쿠쿵.
수십 개의 굵직한 암홍색 빛기둥이 섬 전역에서 솟아올라 그 강대한 힘에 백골 거대 손이 튕겨 나갔다.
그 여파로 골황이 뒤로 물러섰고, 혈려 등 8명도 바람에 휩쓸린 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퍼퍼펑!
골황의 대라 초기 수하 네 명이 암홍색 빛기둥을 직격으로 맞고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우수수 뼈 파편이 되어 흩날렸다.
혈려, 흑면 거한, 흑포 유령만 수행이 높은 편이라 제때 피해 위기를 모면했다.
귀무는 잔혼이라 상식적으로 그중에서 가장 약한편 이었는데, 무슨 비술을 사용한 것인지 그들과 같이 피해있었다.
한립 무리는 미리 비교적 멀리 벗어나 있었고 암홍색 빛기둥이 나타나자마자 한립이 모두를 데리고 피신해 아무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주인님, 저 여인은 교삼 아닌가요? 왜 여기 있는 걸까요? 여기는 전륜왕의 영역이라고 들었는데요.”
제혼이 전음으로 한립, 금동과 교류했다.
“설마……. 전륜왕이 윤회전과 연관이?”
금동도 추측하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어쨌든 골황 등이 우리와 교삼이 관련이 있는 걸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된다. 상황을 보아 움직이자꾸나.”
한립의 전음에 제혼과 금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립은 석천공, 자령과도 의견을 나눠 그들이 무턱대고 나서지 않게 했다.
사실 석천공은 난감했다.
한립을 만났을 때 육도윤회반을 찾으러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는데, 지금 보니 육도윤회반을 원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골황이라는 유명계 도조도 그 앞줄에 서 있었고.
그러나 자령은 오히려 별 반응이 없었다.
워낙 살면서 괴이한 일들을 많이 당해서 무조건 한립의 결정을 믿고 따를 생각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화지공간에 들어가 있으면 됩니다.”
한립도 석천공이 불안해하는 걸 보고 한마디를 해준 다음 아래쪽 석전을 살폈다.
교삼의 술법으로 땅을 뒤흔드는 윤회법칙의 힘이 일어나 도조인 골황까지 밀어낸 것을 보면 석전 주위의 금제는 윤회 전주가 친히 설치한 것인 듯싶었다.
귀무의 말에 따르면 전륜왕은 제대로 된 신분을 노출한 적이 없다고 했으니 윤회 전주와 동일인일 수도 있었다.
홀로 골황을 상대하며 두려움 하나 없는 교삼의 얼굴을 보니 석전 안에 정말 윤회 전주가 버티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제의 힘으로 골황을 밀어낸 교삼의 얼굴에 고통스러운 표정이 스쳤다. 그녀의 힘으로 조종하기에는 금제가 너무나 강했다.
골황은 대라경인 교삼의 공격에 물러선 것에 화가 났는지 수하들의 죽음에도 신경 쓰지 않고 손을 뻗었다.
백골 손톱을 그러쥔 주먹 허상이 골황의 동작에 따라 암홍색 보호막으로 떨어졌다.
하얀빛과 붉은빛이 위력적인 빛의 고리를 이루면서 터지고 있었다!
백골의 하얀빛과 암홍색 빛이 어우러진 폭풍이 칼날 같은 힘을 품고 허공을 산산조각냈다.
가슴이 서늘해진 한립은 금빛을 폭발적으로 일으켜 석천공 등을 감싸고 피해 거대 폭풍의 여파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혈려 등도 서둘러 달아났지만 그들의 속도는 한립보다 약간 느렸다.
혈려는 곧장 몸에 핏빛 불길을 일으켜 쉭, 하고 사라졌지만 흑면 거한, 흑포 유령 그리고 귀무 셋은 그대로 폭풍에 휘말렸다.
아직 섬 주위의 금제 때문에 당한 부상에서도 회복하지 못한 흑면 거한이 안색이 달라져 머리 둘에 팔이 넷 달린 새까만 해골로 변했다.
해골의 뼈가 군데군데 부러져있는 게 부상의 정도를 알려주었다.
쉭!
검은 해골도 새까만 빛을 일으키며 폭풍을 뚫고 바깥으로 쇄도했다.
흑포 유령은 기이한 소리를 내며 몸이 가늘고 길게 뱀처럼 변해 검은 해골보다도 더 빨리 날아갔다.
그런데 폭풍에 검은 해골과 검은 뱀이 휘말려 기운이 약해진 순간, 잿빛이 쏜살같이 검은 뱀의 체내로 달려들었다.
귀무의 잔혼이었다.
검은 뱀 유령에 사람의 얼굴이 나타나 고통스러워하다가 전신이 잿빛으로 뒤덮여 꿈틀거렸고, 뱀의 머리에 난 사람의 얼굴이 왜곡되다가 귀무의 모습으로 변했다.
검은 뱀이 다시 날아가 안전지대에 이르러 흑포 유령으로 돌아왔을 때, 혈려는 이미 그곳에 있었다.
그는 흑면 거한이 변했던 검은 해골과 흑포 유령이 혈려가 있는 곳으로 와서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귀무는 어디 있습니까?”
“못 봤습니다. 진작 폭풍 속에서 숨이 끊겼겠지요.”
혈려의 물음에 흑면 거한이 무표정하게 답했다.
확실히 폭풍이 사납게 몰아쳐 제때 달아나지 못했으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 같았다.
한립 일행도 비교적 안전한 곳에서 멀리 석전 쪽을 바라보았다.
암홍색 보호막은 격렬히 흔들리며 희미해져 있었고, 그 안의 교삼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중상을 입은 게 틀림없었지만 그래도 억지로 수결을 맺어가며 암홍색 보호막과 황천대택 내의 금제에 힘을 불어넣는 중이었다.
비웃음을 흘린 골황이 다른 손을 들어 올렸다.
손끝에서 이전보다 뿌연 하얀 파동이 일어나 암홍색 보호막과 부딪쳤다. 그러나 희미해졌을 뿐 멈추지 않고 교삼을 향해 날아갔다.
그걸 본 교삼이 안색이 변해 뒤로 물러서면서 양손으로 수결을 맺어 따로 암홍색 보호막을 방출했다.
그러나 백골의 파동은 순식간에 그녀를 따라잡아 보호막을 뚫었다.
순간 교삼은 전신의 골격이 삐걱대고 입에서 울컥 피를 쏟아대고 있었다. 온몸의 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찢겨 부상의 정도가 극심했다.
교삼이 윤회법칙을 익혀 백골 파동에 담긴 법칙의 힘이 일부를 막아내지 못했다면 몸이 터져 죽었을 공격이었다.
길게 숨을 들이마신 그녀는 쓰러지지 않고 버텼다.
그때 펑, 하고 골황의 손가락 뼈 하나가 폭발했다. 또 다른 백골 파동이 대형 보호막을 뚫고 교삼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간신히 서 있던 교삼은 달아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서서 한립이 있는 방향을 복잡한 시선으로 힐끗 쳐다보았다.
멀리서 그걸 본 한립이 미간을 좁혔다.
이때 두 줄기 그림자가 떨어져 그녀의 앞을 막았다.
대전을 지키고 있던 소머리, 말머리 귀장들이었다.
“소장사, 저희가 골황의 공격을 막고 있을 테니 어서 전주 대인께 상황을 알려주십시오!”
소머리 귀장은 앞쪽으로 쇠방망이를 내리쳤다.
태산과 같은 방망이 허상이 붉은빛과 남색 빛이 어우러져 백골 파동을 향해 나아갔다.
말머리 귀장은 붉은 수정 사슬과 녹색 갈고리를 들고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사슬 허상들이 이룬 장벽 사이사이에 귀신의 손톱 같은 갈고리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대라경에 이른 두 귀장이 힘을 합쳐 공격하니 위력이 상당했다. 그러나 소리 없이 퍼져온 백골 파동은 허공을 가득 채운 두 귀장들의 공격을 가볍게 깨버렸다.
자신들이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그들의 공격이 전혀 소용이 없자 귀장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그럼에도 그들은 물러서지 않고 반대로 백골 파동에 맞서 동시에 검은빛을 방출하며 몸을 부풀렸다.
뜻밖에도 자폭해서라도 백골 파동을 막을 요량이었다.
쿠앙! 쿠아앙!
두 번의 폭음이 들리고 살과 피가 흩날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백골 파동은 그들이 폭발하기 전에 귀장들을 스쳐 교삼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귀장들이 시간을 끌어주기는 했지만 교삼의 몸 상태가 워낙 엉망이라 그 잠깐 사이에 회복하는 것은 무리였다.
교삼의 얼굴에 쓴웃음이 어렸다.
그 순간, 웅! 하는 진동 소리와 함께 노한 파도처럼 금빛이 몰려들어 회백색 석전을 감쌌다.
먼저 출발한 백골 파동보다 수십 배는 더 빠른 속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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