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2186화 (1,943/2,000)

2186화. 천기(天機)

*

“혈려!”

귀무 잔혼이 큰 소리로 불렀지만 혈려의 행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쿵.

한립은 간단히 금색 손바닥 자국을 만들어내 핏빛 도끼 허상을 막았다.

몸을 돌려 거북 위로 돌아온 혈려는 손바닥 인장이 구름층에 남긴 선명한 자국을 보고 배를 출렁이며 웅얼거렸다.

“어, 어떻게…….”

백골 사내가 목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며 고공을 힐끗 보다 한립을 내려다보며 눈구멍에서 귀화를 번득였다.

“혈려 수사! 머리가 없다고 정말 생각도 없어진 겁니까! 아니, 다짜고짜 공격은 왜 하는 거예요? 나와 명왕이 함께 있는 걸 보지 못한 겁니까?”

귀무가 드디어 말할 기회를 잡고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헉, 귀무! 네 놈이 살아 있었단 말이냐!”

혈려는 정말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못 들었는지 깜짝 놀라워했다.

귀무가 그런 그를 모른 척하고, 푸른 빛을 증폭해 잔혼의 몸을 몇 배로 늘려 거북 등 위의 백골을 향해 멀리서 예를 올렸다.

“귀무가, 골황 선배님을 뵙습니다.”

그는 허리를 푹 숙여 극진히 예를 다했다. 그러자 골황이라 불린 백골이 입을 열었다.

“유명계 인물이 어째서 진선계 수사와 함께 다니는 것이냐.”

탁한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중첩되었다.

“골황 선배님이 여기까지 오신 이유는 전륜왕밖에 없겠지요? 마침 여기 한 수사와 제 목표도 같습니다. 저희도 함께 전륜왕을 상대해도 될지요?”

귀무가 급히 내뱉는 말에 한립은 언뜻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은 육도윤회반 때문에 온 것이지 전륜왕을 상대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 전륜왕을 노린다니! 골황 선배님,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그 소리를 들은 혈려가 백골에게 의견을 구했다.

“몇 놈이 늘든 줄든 달라지는 건 없다.”

백골은 아무렇지 않게 답했고, 한립에게 제대로 눈길을 주지도 않았다.

“귀무 수사, 이건 말이 다르지 않습니까?”

한립이 냉랭히 물었다.

“한 수사, 육도윤회반은 전륜왕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걸 쓰려면 전륜왕과의 싸움은 피할 수 없지요. 제가 보장하건데 전륜왕만 격퇴시키면 육도윤회반을 쓸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을 들은 한립은 그래도 거절할 마음이었다.

금동과 자령 등 일행까지 있는데 유명계의 분쟁에 끼어들 마음은 전혀 없었다.

특히 상대의 전력을 전혀 모르는 지금은!

“저기 골황 선배님은 유명계의 실력자입니다. 도조급의 존재라 혈려나 나 같은 이와는 차원이 다르다고요. 성정이 괴팍해서 선인도 죽이고 마인도 죽이고 범인도 죽이고 귀물도 죽인다지만 같은 목표를 위해 움직이면 이보다 더 좋은 지원군은 없단 말입니다.”

그가 거절하기 전에 귀무가 전음으로 설득을 계속해나갔다.

“주인님, 이곳에서 전륜왕과 싸우기를 거절하면 저들과 싸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뜻에 따라 함께 이동하다 전투가 벌어지면 우린 따로 움직이는 게 어떨까요?”

제혼도 전음으로 의견을 냈다. 침묵하던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한립은 배를 거두고 거대 거북 위에 올라 혈려 등과 함께 호수 중심부로 날아갔다.

오래지 않아 그들은 황천대택 가운데 위치한 외딴 섬에 도착해 그 주위를 철통처럼 두른 혈운장벽을 앞두었다.

“골황 대인,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골황 뒤쪽에 서 있던 흑면(黑面) 거한이 앞으로 나섰다.

골황과 혈려를 제외하고 나머지 여섯 명도 전부 대라급으로 그중에서 이 흑면 거한의 수행이 가장 높아 한립과 같은 대라 중기 최고봉이었다.

그 외에 검은 장포를 입고 유령처럼 흐릿한 인물이 대라 중기, 나머지가 대라 초기였다.

흑면 거한은 골황이 반대하지 않자 곧바로 수결을 맺었다.

머리가 둘, 팔이 넷 달린 거무스름한 허상이 그의 뒤에 떠올라 방대한 귀기를 내뿜었다.

이에 옆에 있던 자령이 비틀거리자 한립이 옆에서 잡아 주었다.

“고마워요, 한 형.”

거무스름한 귀물 허상의 주먹질에 검은 소용돌이들이 나타나 혈운 장벽을 강타했다.

쿠쿠쿠…….

혈운 장벽은 잘게 흔들릴 뿐 흠집도 생기지 않아 흑면 거한을 놀라게 했다.

이때 혈운 장벽에서 열댓 줄기의 핏빛 뇌전이 튀어나와 귀물 허상을 꿰뚫었고, 그 타격으로 흑면 거한이 비틀거리다 주저앉아 피를 토했다.

“아주 엉망이구나!”

골황의 질책에 흑면 거한이 고개를 조아렸다. 괜히 성급하게 나서서 낭패를 본 꼴이었다.

“육도윤회반으로 조성한 정반돌풍 방어막을 너희가 뚫을 수 있겠더냐. 내 절대적인 힘이 무엇인지 보여주마.”

골황이 코웃음을 치고 허공에 손을 뻗었다.

촤악.

하늘을 가리는 거대한 백골 손이 나타나 혈운 장벽을 종이처럼 찢어 구멍을 만들었다.

“골황 선배님의 능력은 이룰 말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혈려가 얼른 찬사를 보냈다.

“골황 선배님께서 나서셨는데 전륜왕 따위야 금방 쫓아낼 수 있겠습니다!”

귀무도 하하 웃으며 아부를 더했다.

원래는 전륜왕의 실력이 강해 걱정되었는데 골황의 능력을 보고 나니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한립은 골황에 대해 경계심이 더 커졌다.

“누가 우리 앞을 막느냐!”

장벽이 뚫리고 경계를 돌던 귀물 병사들이 날아들자 혈려가 도끼를 휘둘러 핏빛 천 같은 기운으로 허공을 갈랐다.

병사 수십 명의 허리가 두 동강이 나 떨어졌다.

골황을 따라나선 일곱 명이 동시에 나서 병사들을 상대하고, 한립 일행도 수수방관할 수 없어 선기를 꺼내 도왔다.

“모두 물러서거라.”

보고 있던 골황이 성가시다는 듯 말하고 몸에서 하얀빛을 번득였다.

하얀빛이 파도처럼 지나가는 곳마다 섬의 귀물 병사들이 살이 터지고 뼈가 갈라져 폭발했다.

섬 곳곳에 펑펑 소리만 들리다 피비린내가 진해졌다.

회백색 석전 인근의 병사들만 목숨을 보전하고 섬의 나머지 병사들은 전멸하고 말았다.

석전의 암홍색 반구형 보호막이 백골의 하얀빛을 막은 것이다.

“골황 선배님, 정말 전대미문의 능력을 지니셨습니다!”

혈려가 다시 제일 먼저 찬사를 보내고 나머지 인물들도 잊지 않고 한마디씩 보탰다.

석전 문 앞을 지키던 두 귀장이 이를 보고 남은 병사들을 문 앞으로 결집시켜 내부에 사정을 알렸다.

* * *

중토선역, 기천대륙(祈天大陸)이라 불리는 기괴한 대륙이 있었다.

이곳의 수사들은 선술이나 연단술, 연기술 같은 것에 열의가 없고 거의 다 점술에 심취해 있었다.

부룡망기(扶龍望氣), 줄여서 망기술이라 불리는 술법은 사람의 운명을 점치고 천지의 큰 흐름을 읽는 것이었다.

속세에서는 하늘의 뜻을 타고난 사람을 찾아 천자(天子)로 만들면 국가가 부흥하는 것처럼 수행의 좋은 싹을 찾아 각종 종문에 보내주면 풍부한 보수를 받을 수 있었다.

이렇듯 기천대륙의 부흥은 여러 종문과 긴밀한 연관이 있었다.

기천대륙 절반을 차지한 보천종(補天宗)은 무수히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유지되어온 명망 높은 점술 명가였다.

보천종은 선천신석(先天神石)으로 제련하는 천기의 조화를 예측하는 보물들로도 유명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선계와 영계 곳곳에 있는 ‘혼돈만령방’이었다.

천기의 변화를 읽어 현천영보의 탄생을 예측하는 것이었다.

보천종 수사들이 하산해 경험을 쌓을 때는 보통 보천종 출신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곳곳의 다른 종문으로 숨어들었기에 선계 전역에 손발이 뻗어 있다 할 수 있었다.

기천대륙 동부에 웅크린 용처럼 구불구불 이어진 와룡산(臥龍山) 위에 종문이 퍼져 있었고, 그중에서도 용기봉(龍起峰)은 보천종에서 가장 철저하게 관리되는 금지 구역 중 하나였다.

그곳으로 드나들 수 있는 것은 태상장로를 포함한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런 용기봉 맞은 편 핵심 제자들이 수행하는 봉우리에는 하늘을 향해 제단이 지어져 있었는데, 신중한 표정의 보천종 제자들이 엄한 표정의 노인을 따라 제단을 오르는 중이었다.

“부풍 장로님, 저희가 여러 선역으로 떠나기 전 해주실 말씀이 있는지요.”

양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한 요족 제자가 포권을 하고 물었다.

“하산하게 되면 각 선역의 비선대에서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하계에서 비승한 자는 어떤 경우라도 경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외모, 심성, 자질이 어떠하든 선계 본토 수사와는 비할 수 없는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할 것이야.”

부풍이라 불린 노인이 느긋이 말했다.

“예! 본종의 영예를 위해 열심히 임무를 다하겠습니다!”

제자들이 대답했다.

“실락계면에서 올라온 이들은 특히……. 잘 지낼 수 있다면 되도록 잘 지내고, 아니면 단호히 끊어내야 할 것이야. 인과를 끊어내서 후환이 되지 않도록.”

부풍 장로가 혼잣말처럼 하는 말에 제자들은 무슨 소린지 잘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그러겠다고 했다.

제자들이 떠나고 부풍 장로가 옛일을 회상했다.

“그자는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석기전에 잠입해 있을 때 ‘고승’이라는 이름을 썼었다.

북한선역 비선대에 있을때 실락계면에서 올라온 비승 수사를 안내했는데 호기심이 화를 부른다고 부족한 망기술로 그자의 운명을 엿보려다 잘생긴 청년이었던 외모가 지금의 노쇠한 몰골로 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어떤 술법을 써도 이 외모를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그자를 포위해 죽이려다 실패하고 고승이라는 신분은 죽은 것으로 가장해 없앤 다음 보천종으로 돌아와 지금의 부풍 장로가 된 것이다.

그 후로 중토선역을 떠난 적도 그 일에 대해 남에게 발설한 적도 없었다.

그가 안내한 비승 수사가 한립이었다.

추억을 회상하던 노인이 용기봉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공에 구름이 끼고 바람이 몰려들고 있었다.

* * *

용기봉 정상, 구름이 가득한 가운데 검은 바위로 만든 팔각 제단에 팔괘(八卦) 문양 비슷한 것이 새겨져 있었다.

그 제단이 검은 먹구름을 소용돌이처럼 끌어들이는 흡입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잘 보면 소용돌이 속에 얼굴을 일그러트린 노인이 보였는데 마치 몸뚱이를 잡아 먹힌 듯 머리만 떠있고 팔과 다리는 소용돌이 바깥에 있었다.

반쯤 눈을 감은 노인은 죽은 사람처럼 생기가 없었다.

그때 하늘에서 소리 없이 무언가가 떨어져 제단 바깥의 복숭아나무 아래에 내려섰다.

눈꼬리가 긴 봉목에 콧대가 높고 입술이 얇은 사내는 옥간을 쓰고 검은 수염을 기른 모양새가 기품 있어 보였다.

하지만 몸이 불편한지 백옥을 깎아 만든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하얀 장포 자락 가운데 금색 허리띠를 매고 구룡(九龍) 옥패를 늘어트려 금빛을 반짝였다.

죽은 듯 있던 노인이 한쪽 눈을 뜨는데 눈동자가 휘황찬란한 금빛이었다.

눈동자 안에서 금색 용암이 용솟음치는 듯했다.

“왔습니까…….”

노인이 말을 길게 끌었다.

“내가 왔습니다.”

의자에 앉은 사내가 평온이 답했다.

“오기는 왔군요……. 하긴 하늘의 뜻이라는 것이 그렇지요.”

노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진단 수사, 점을 봐줄 일이 있습니다.”

두 손으로 바퀴를 밀어 다가간 사내가 입을 뗐다. 누가 이 말을 들었으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참혹한 몰골에 다 죽어 가는 노인이 보천종 개파조사인 ‘천기까지 바꾼다’는 진단노조라니!

추레한 노인이 예지법칙으로 천정에서 이름난 예언도조란 말인가!

“내 36번의 천괘(天卦)와 72번의 지괘(地卦)를 봐주기로 약속했었지요. 억만 세월동안 나머지는 다 써버렸고 천괘가 두 번 남았건만……. 난 오직 한 번만 더 답을 줄 수 있겠습니다.”

“윤회 전주에 대해 다시 묻겠습니다……. 그놈을 제거하지 않고는 대업을 이룰 수 없으니.”

의자의 사내가 덤덤히 말했다.

“윤회 전주는 윤회법칙을 수련해 진작 윤회대도에 몸을 숨겨 내 예언법칙으로도 염탐할 수 없었습니다. 앞서 계속된 점술로도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건만 정말 또 같은 걸 물어볼 생각입니까?”

“그럴 겁니다.”

확고한 대답을 들은 진단노조는 더는 말리지 않고 수결을 맺어 주문을 외워 하나뿐인 눈에서 금색 수정빛을 내뿜어 검은 소용돌이를 왜곡했다.

마치 검은 소용돌이와 진단노조가 하나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