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5화. 윤회
*
“호수 면적이 너무 넓어서 우리가 출발하는 곳을 기점으로 수백 리 밖에는 담지 못했습니다.”
귀무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목소리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의식의 힘으로 수역 지도를 작성하느라 지친 것 같았다.
제혼이 그걸 보고 양손으로 수결을 맺어 검은 상자에 암홍색 빛을 한줄기 던져주었다.
파앗.
암홍색 빛으로 전신을 덮은 귀무가 한결 나아진 안색으로 제혼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빠르게 지도를 확인한 한립은 눈동자에 보랏빛을 일으켜 황천대택을 탐구했다.
구유마동을 펼치자 흔적을 찾기 어렵던 정반돌풍이 드러났다.
귀무의 말대로 워낙 불규칙해서 혼란스러워 보였고, 귀무가 말하던 숨겨진 길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귀무 수사, 지도와 정반폭풍의 분포가 약간 상이합니다?”
미간에 힘을 준 한립이 의문을 표했다.
“바람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분포가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이건 수로(水路)가 나타날 때의 지도라서 때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출발해야 합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워낙 돌풍이 변화무쌍해서 오랜 기간 관찰을 하지 않으면 정확한 시점을 말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혈운의 모습으로 보아 머지않았어요. 한 달 내로 수로가 나타날 수 있고, 길어야 일 년일 겁니다.”
“그럼 기다리죠.”
한립 일행은 호숫가에 돌을 쌓아 만든 보루 중 하나에서 잠시 머무르며 반년을 보냈다.
이날 황천대택의 바람이 강해지고 중심부에 몰려 있던 돌풍들이 호수 전역으로 퍼져 호숫가에서도 불과 수십 리 밖에는 떨어지지 않게 되었다.
“지금입니다! 하하.”
귀모가 웃음을 터트렸다.
“장난하십니까? 분명 이전보다 더 난장판인데요?”
석천공이 놀라 반박했다.
“원래 진법을 펼칠 때도 생문(生門)은 사문(死門) 속에 숨겨두는 것을 모르십니까? 정반돌풍이 중앙에 밀집해 있을 때는 길이 없지만 오히려 널리 퍼져 듬성듬성해지면 파고들 구멍이 생기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귀무가 설명했다.
눈동자에 보랏빛을 일으켜 호수 위 정반돌풍의 분포를 살핀 한립은 귀무가 그려준 지도와 일치하는 것을 확인했다.
“귀무 수사가 말한 수로의 입구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지도가 틀리지 않았군요.”
“시간이 없습니다. 얼른 출발하지요! 변수가 많은 곳이라 이런 상황이 몇 시진이나 지속할지 나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귀무가 모두를 재촉했다.
“나와 제혼이 귀무 수사를 데리고 배를 탈 것이니 나머지 사람들은 동천보물 안에서 기다리면 됩니다.”
이미 결정을 해둔 일이라 다들 군소리 없이 응했다.
한립이 은색 빛의 문을 만들자 금동이 집으로 돌아가듯 성큼 들어갔고, 석천공은 잠시 살피다 따라 들어갔다.
자령은 그 앞에 서서 한립을 돌아보며 당부했다.
“조심하세요…….”
미소를 머금은 한립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모두 들어간 뒤 한립이 은색 문을 닫고 제혼을 보았다.
“출발하자꾸나.”
“……가는 동안 의식 비술로 주위를 경계하는 동시에 귀무를 주시하거라. 이상한 행동을 하려 하면 즉시 제거해야 할 것이야. 내 너를 데리고 떠날 방법이 있으니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너무 걱정할 것 없다.”
말을 하면서 한립은 따로 전음을 보냈다.
대라 중기 최고봉에 이른 후 한립도 자신감이 충만해졌다.
“네, 주의 깊게 살필게요.”
두 사람은 황천대택 인근으로 가서 대나무 배를 띄우고 올라섰다.
“귀무 수사, 출발하겠습니다. 가면서 무슨 일이 생기면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한립은 허리춤에 걸어둔 검은 상자를 뱃머리에 내려두었다. 연기가 피어올라 귀무의 모습으로 변해 미소 지었다.
“말 그대로 한배를 탄 사이인데, 당연히 최선을 다해 도울 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한립이 소매를 저어 가벼운 바람을 일으켰다.
속도는 극히 빨랐지만 배는 물살을 가르기보다는 마치 빙판 위를 미끄러지는 것처럼 전혀 물결을 만들지 않으면서 나아갔다.
“조심, 조심! 저쪽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커다란 돌풍을 돌아갈 수 있습니다.”
놀란 귀무가 큰 소리로 방향을 안내했다.
그렇게 돌풍을 빙 돌아가는 데 전방에 거대한 붉은 구름 벽이 나타나 시야를 막아버렸다.
“이건 뭡니까?”
한립이 배를 세우고 묻는데 귀무가 입을 떡 벌리고 구름 장벽을 보고 있었다.
“이럴 리가, 분명 틈이 있어야 하는데…….”
귀무도 답답해하며 중얼거렸다.
제혼이 뒤쪽 배에 타서 귀무를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한립도 그를 지켜보았지만 일부러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돌풍의 분포에 변화가 생긴 걸까?
“음?”
“한 수사, 뭐가 보입니까?”
한립이 무언가를 발견한 것처럼 보이자 귀무가 급히 물었다.
“수로는 존재하는데 흩어진 구름에 가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귀무가 구름 장벽 아래쪽을 보니 정말 핏빛 구름이 그리 두껍지 않았다.
“가봅시다.”
한립이 긴 막대기를 불러내 허공을 쓸자 배가 구름 장벽을 향해 충돌했다.
퐁.
시야를 막고 있던 붉은 구름 안으로 들어가니 잠시 호흡이 가빠졌지만 금방 눈앞에 밝아졌다.
“빠져나왔습니다…….”
귀무가 안심하며 희색을 드러냈다.
구름을 지나 수로가 보이기는 했지만 가파른 협곡 사이를 지나는 것처럼 길이 좁아서 경계심을 늦출 수 없었다.
“한동안 긴장 풀어도 좋습니다. 주룡도(走龍道)에 들어섰으니 위험한 일은 생기지 않을 거예요.”
“주룡도요?”
“그냥 운수가 좋아지라고 붙인 이름입니다. 허허.”
귀무의 말에 한립은 말없이 배를 움직였다.
* * *
같은 시각, 황천대택 중앙.
돌풍들이 고리를 이루며 두꺼운 혈운 장벽을 이루고 마치 진법처럼 섬을 두르고 원형의 섬을 가리고 있었다.
호수 섬에는 놀랍게도 여섯 개의 산등성이가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뻗어 있어 위에서 보면 수레바퀴를 보는 것 같았다.
그 섬 위에 풀과 나무는 자라지 않았지만 곳곳에 산길을 오르기 위한 돌계단과 정자가 분포되어 있었고 섬 정 중앙에는 웅장한 회백색 석전(石殿)이 평탄한 광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광장에 진하게 드리운 안개 속에서 귀물 병사들이 순찰을 돌았다.
석전 정문 앞에는 대량의 귀물 병사들 외에도 체구가 우람한 귀장(鬼將) 두 명이 병장기를 들고 서 있었다.
흉악하게 생긴 커다란 양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한 귀장은 두꺼운 검은 철갑옷을 입고 해골 문양이 들어간 쇠방망이를 들고 있었는데, 쇠방망이 절반은 붉은색이고 절반은 남색이라 물과 불 두 가지 속성을 지닌 듯했다.
역시 사람의 몸을 했지만 길쭉하고 못생긴 말 머리를 한 귀장은 핏빛 갑옷을 걸치고 한 손에는 붉은 수정 사슬을 다른 손에는 하얀 갈고리를 들고 있었다.
음산하게 하얀빛을 반짝이는 귀물의 발톱으로 만든 갈고리에는 언뜻 검붉은 핏자국이 보였다.
두 귀장이 떡 버티고 선 궁전 앞은 귀기가 진득하게 퍼져 전설 속의 염라부가 따로 없었다.
* * *
궁전 지하 깊은 곳, 거대한 지하 공간.
육각형으로 된 제단이 중앙이 움푹 파여 암홍색 액체를 담고 있었다.
액체 위 붉은빛 속에 거대한 육각 판이 둥실 떠있었고, 다양한 주술문양에서 기이한 파동이 넘실거려 아득한 느낌을 주었다.
암홍색 물가 옆에서 그 육각 판을 바라보며 검은 천을 드리운 삿갓을 쓴 흑포 사내가 서 있었다.
얼굴뿐만 아니라 기운도 숨겨 평범한 사람 같으면서도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 태산과 같은 위엄이 느껴졌다.
멀리서 발소리가 들리고 검은 치마를 입은 여인이 남색 궁장 차림의 절색의 여인을 데리고 걸어왔다.
검은 치마를 입은 여인은 교삼, 남색 궁장 차림 여인은 그녀와 조금 닮은 ‘여상’이라 불리는 여인이었다.
교삼은 여상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부드러운 피부와 달리 그 기운은 서늘해서 따뜻한 자신의 손과 선명하게 비교가 되었다.
여상이 자신의 어머니였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는 원래의 담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전주.”
육각 제단 옆에서 교삼이 여상의 손을 놓고 삿갓을 쓴 사내에게 인사했다.
여상도 예를 취했다.
“들어가거라.”
윤회 전주가 몸을 돌려 그들을 보았다.
교삼이 여상의 손을 끌어 물가로 가려 하니, 여상이 머뭇거리며 교삼을 보았다.
교삼은 그런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함께 가자는 눈짓을 했다.
치맛자락을 잡은 여상이 암홍색 물속으로 들어가 가운데로 걸어가니 물이 가슴까지 차올랐다.
자리를 잡은 그녀가 교삼을 돌아보려다 눈이 풀려 그대로 쓰러졌다.
교삼은 기절한 여상이 물 위로 떠오르는 것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전주, 왜 제게……. 어머니를 모셔오라고 하신 건가요? 어머니는 왜 저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시고요.”
“네 어미가 너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녀가 한 생을 다 살고 환생을 해서이다.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니 너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지.”
“환생을 했다니, 그게 무슨…….”
“그녀는 전생에야말로 네 어미였던 ‘감여상’이었고, 이번 생에는 남궁 씨에 완이란 이름을 쓰고 있다. 너를 기억하게 하려면 반드시 전생의 기억을 찾아줘야겠지.”
교삼은 남궁완이란 이름이 귀에 익다고 여기다 놀라 물었다.
“감여상이면, 감구진이란 제 이름은 어머니의 성을 따서 지은 건가요?”
그녀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의문이 떠올라 있었다.
어머니는 전생에 어쩌다 죽은 것일까? 그럼 아버지는? 윤회를 거쳐 새로운 삶을 사는 어머니를 그녀의 어머니라 볼 수 있을까?
마지막 질문은 입 밖으로 내어 물었다.
“그럼 저는 왜 어머니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요?”
“네 어미가 전생에 죽은 날이 네가 태어난 날이기 때문이지. 태어난 순간 한 번 본 어미를 어찌 기억하겠느냐.”
윤회 전주가 답했다.
“어머니가 저를 낳다 돌아가셨단 소립니까?”
교삼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니.”
“그럼 왜…….”
“알고 싶은 게 많구나. 여상이 기억을 되찾으면 이야기하자꾸나.”
윤회 전주는 냉랭히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의 소매 속에서 암홍색 법칙 파동이 퍼져나가 고공의 육각 판을 회전시켰다.
붉은빛이 드리워 물 위에 떠있는 남궁완의 육신으로 스며들었다.
* * *
황천대택 안, 한립과 제혼이 탄 배는 이제 협곡도 아니고 배수로 같이 좁은 물길을 따라 나아가고 있었다.
“여기만 벗어나면 호수 중심부는 금방일 겁니다.”
귀무의 말에 한립이 고개만 끄덕였다.
오는 동안 두어 번 정반돌풍에 휘말릴 뻔했지만 아무 일 없이 지나갔고 귀무가 알려준 수로는 문제가 없는 듯했다.
“이상한데. 어째서 무풍(無風)지대가?”
반 시진 후, 귀무가 혈운이 걷히고 돌풍이 사라진 앞을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
“바람이 없으면 좋은 거 아닌가요?”
제혼이 물었다.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 이곳이 무풍지대로 바뀌었다면 앞으로 나아갈 길에 다른 변화가 생겼을지도 모른단 말이 아니냐. 길이 막히면 우리는 호수 중간에 갇히고 말 것이다.”
한립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다 다른 방향의 혈운 장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구름 장벽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지고 있었다.
“저건…….”
귀무가 안색이 달라졌고 제혼도 기이하다는 얼굴을 했다.
길이가 천장에 달하는 거북이 혈운을 돌파하며 호수 표면과 가까이 저공비행을 하고 있었다.
“대체 어떤 짐승이기에 정반돌풍의 영향을 받지 않는 거죠?”
“유부명귀(幽浮冥龜)는 수십만 년 전에 멸종된 줄로만 알았는데, 어떻게?”
제혼의 질문에 귀무가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그 위에 사람이 타고 있군요.”
한립이 눈을 가늘게 떴다.
거북 등딱지 위에 8명이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맨 앞에 선 거구의 인물은 회색 장포를 입은 하얀 옥으로 된 해골이었고, 그 뒤로 붙어선 혈홍색 몸에 머리 없는 사내는 가슴에 눈이 달린 혈려였다.
혈려 뒤에 선 귀물들 중에는 한립 일행을 쫓은 적 있는 귀물 수령 음라도 있었다.
한립이 그들은 본 순간, 그들도 배를 타고 있는 한립을 발견했다.
눈을 매섭게 뜬 혈려가 당장 펄쩍 뛰어내려 커다란 도끼로 한립의 머리를 쪼개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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