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4화.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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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이 지나는 동안 잡다한 귀물들의 습격이 있기는 했지만 황혼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몸 주위로 검은빛들이 혼란스럽게 노닐던 제혼의 기운도 점점 안정을 찾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앉아있던 제혼이 번쩍 눈을 뜨고 마치 봉황의 울음이나 호랑이의 포효소리 같은 긴 울음소리를 내 숲을 뒤흔들었다.
석천공 등이 놀라 깨어나서는 그런 제혼을 바라보았다.
기이하게도 기운이 부쩍 강해진 제혼의 피부에 마치 진령혈맥의 문양 같은 검은 문양들이 떠올라 있었고 등 뒤로 흐릿하게 검은 그림자가 떠올랐다.
한립도 의외인 광경이었다.
“체내의 형수 혈맥이 각성하려나 봅니다.”
귀무가 전음으로 말했다.
“형수 혈맥? 그 말은 꼭 형수도 어느 종족이라는 소리로 들립니다.”
눈을 반짝인 한립도 전음으로 물었다.
제혼이 형수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간 대체 형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아낼 수 없었다.
“당연하지요. 형수는 유명계의 신비한 종족으로 거의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명왕과 나, 혈려가 같이 유명계를 통치했던 것이 특이했달까요. 형수의 본명신통은 매우 강해 제대로 형수혈맥을 각성하면 한 수사도 상대가 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까? 기대되는군요.”
귀무가 웃으며 하는 말에 한립이 답했다.
긴 포효를 마친 제혼이 자리에서 일어나 미안함을 표했다.
“석 수사, 자령 수사까지 저를 위해 며칠이나 지체하게 만들어 미안합니다.”
“뭘요. 어차피 동행하는 것 서로 돕고 사는 거지요. 제혼 수사가 이번에 수행이 크게 는 것 같으니 축하할 일입니다.”
석천공은 밝게 축하 인사를 건넸지만 속이 좋지 않기도 했다. 한립도 그보다 강한데 제혼까지 그를 넘어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하지는 않지만 금동도 수행을 종잡을 수 없는 게 만만히 볼 수 없었고 말이다.
“갑시다.”
한립의 말에 일행은 다시 출발했다.
며칠 뒤 백귀삼림 중심부.
어느 산맥에서 경천동지할 폭음이 들려왔다.
검은빛과 하얀빛이 맞부딪쳐 격렬히 교전하는데, 바로 제혼과 황혼 귀물이었다.
나무들이 꺾여 평지가 되어가고 인근 구름이 찢어져 흩어지는데 한립은 멀리 거목 위에 서서 나서지 않았고 다른 일행들도 방관했다.
제혼이 요구한 바였다.
“제혼 수사 혼자 황혼을 상대할 줄이야…….”
석천공이 탄식했다.
“제혼의 신통이 원래 귀물들을 억제하는데 특화되어 있습니다. 승부는 이미 난 것이나 다름없지요.”
한립이 가볍게 답했다.
정말 오래지 않아 황혼의 몸이 펑, 터지면서 귀무(鬼霧)가 퍼져나갔고 검은 거대 원숭이로 변한 허상이 그것을 집어삼켰다.
“형수의 본명신통은 직접적으로 의식에 공격을 가할 수 있군요.”
멀리서 한립이 중얼거렸다.
“서혼(噬魂)이라……. 가장 강력하다고 불리는 의식 공격술답군요.”
귀무도 찬사를 잊지 않았다.
의식이 강대한 한립도 제혼의 서혼공격에 자신의 혼백까지 요동치는 것을 느끼고 미간을 좁혔다.
시간법칙 수련에 성과가 있어 어떤 괴이한 공격이라도 막을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는데 이 의식 공격만은 예외였다.
제혼은 검은빛으로 변해 귀기를 전부 잡아먹고 대라 초기 최고봉의 기운을 드러냈다.
피부의 검은 문양들도 한층 또렷해져 있었다.
한립 등이 기뻐하는 그녀 옆으로 날아왔다.
“제혼, 대단한데? 검은 원숭이 허상은 신통이 거의 일격필살(一擊必殺)의 수법 같았어!”
싸움을 지켜보던 금동이 칭찬을 늘어놓았다.
“소화할 시간이 필요하더냐?”
한립이 제혼의 기운이 강해진 것을 느끼고 희색을 보였다.
“아뇨, 이유는 모르겠는데 황혼 귀력의 반항이 약해져서 억누를 수 있어요. 모두의 시간을 빼앗을 수 없으니 어서 가요.”
검은 기운을 갈무리한 제혼이 고개를 저었다.
“형수혈맥을 각성해 가고 있기 때문인가……. 그래, 그러자꾸나.”
그런데 다시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귀무가 기쁨에 차 탄성을 터트렸다.
“왜 그럽니까?”
“이런 행운이! 한 수사, 좌측 전방으로 가보세요!”
귀무의 재촉에 한립은 미간을 좁혔지만 그의 말에 따라 방향을 틀었다.
석천공 등도 방향이 살짝 바뀐 걸 알았지만 이유를 묻지 않고 따라갔다.
검은 산봉우리 아래 드리운 산 그림자 때문에 청록색 호수 하나가 얼어 있었다.
쏴아…….
호수 주변 돌무지에 파릇파릇한 대나무들이 자라나 서늘한 바람에 댓잎이 부딪쳤다.
“이 대나무들 때문에 여기로 오라고 한 겁니까?”
호수 인근에 내려선 한립은 그걸 보고 물었다.
음기가 충만한 걸 제외하면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대나무는 무슨, 보는 눈도 없어서는! 살살 뽑아 가져가면 크게 쓸데가 있을 겁니다.”
귀무가 비웃음을 흘리며 직접 모습을 드러내 입에서 회색 안개를 내뿜어 대나무들을 감싸려 했다.
회색 안개는 푸른 대나무에 접근하지 못하고 갑자기 떠오른 회색 문양에 부딪혀 튕겨 나와 봉인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걸 본 한립이 눈을 반짝이고 손을 저어 초승달 같은 금빛으로 대나무와 지면의 흙을 통째로 파고 화지공간에 넣어 버렸다.
“제게 필요한 것이라 길을 약간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한립이 석천공 등을 향해 해명했다.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손을 저은 석천공이 귀무 잔혼을 보았다.
“귀무 수사입니다. 오는 길에 구하게 된 잔혼이지요.”
귀무의 신분은 특수해서 석천공과 가까운 사이라 해도 함부로 토로하지 않았다.
“귀무 수사, 이렇게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석천공이 공수를 해 인사를 하고 귀무는 그런 석천공을 향해 고개만 끄덕여주고 검은 상자로 돌아갔다.
다시 한 달 후, 한립 일행은 백귀삼림을 벗어나 잿빛 황원으로 들어섰다.
“황천대택까지는 이제 얼마나 남은 겁니까?”
먼 곳을 조망하던 한립이 입을 열었다.
“거의 다 왔습니다. 저기 멀리 붉은 지대가 보이지요? 바로 거깁니다.”
귀무가 서둘러 하는 말에 한립은 동공을 수축하고 시야의 끝까지 지면을 살폈다.
과연 암홍색 기운이 어리며 수증기처럼 모락모락 솟는 지역이 보였다.
그가 속도를 높여 앞으로 쏘아져 나가자 자령 등도 날아갔다.
형언할 수 없는 독특한 기운에 숨이 막혀오고 있었다.
머지않아 일행도 거대한 호수를 볼 수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은 호수는 마치 거울처럼 표면이 고요해서 물결도 치지 않았고, 호수 중앙 고공에 혈운(血雲)이 두껍게 끼어 혼란한 기류를 품은 거대한 혼돈 구역을 만들었다.
암홍색 호수의 북쪽으로 하늘이 찢기기라도 한 듯 핏빛 폭포가 쏟아져 하늘과 호수를 잇는 붉은 천처럼 보였다.
폭포는 콸콸 쏟아져 내리는데 호수에만 닿으면 깃털처럼 가볍게 흡수되어 사라졌다.
호수 연안에 거리를 두고 보궐 형태의 암홍색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고, 각기 다른 문양이 수놓아진 깃발이 펄럭였다.
어떤 것은 소머리, 또 어떤 것은 말 머리 등 다른 귀족 세력을 나타내고 있었다.
“저기가 사대 귀족의 주둔지입니다.”
귀무의 말에 한립이 의식을 퍼트려 암홍색 보궐들을 염탐했다.
그러고는 제혼을 돌아보았는데, 그녀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비어있군요.”
“보세요, 내 말이 맞지 않습니까? 수사를 속이지 않았단 말입니다.”
“성가신 일은 줄었습니다. 이제 말해보시지요. 그 육도윤회반이란 것은 어디 있는 겁니까?”
한립의 질문에 귀무 잔혼이 연기처럼 피어올라 호수 중앙을 가리켰다.
“저깁니다.”
귀무의 손이 가리키는 혈운이 가득한 혼돈 구역을 본 한립은 얼굴을 굳혔다.
“육도윤회반이 호숫가에 있을 거라더니 여기까지 와서는 말이 바뀌는 겁니까?”
“그, 그거야……. 황천대택 중앙까지 가야 한다고 하면 오지 말자고 할까봐 그랬지요…….”
안색이 달라진 귀무가 겁먹은 눈빛으로 변명을 했다.
하지만 한립은 황천대택이 어떤 곳인지 몰라 귀무가 그냥 호수 중앙에 육도윤회반이 있다고 했어도 겁먹고 안 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황천대택이 위험한 곳인가 봅니다?”
“그렇게 묻는 걸 보니, 황천대택이 황천(黃泉)이란 이름이 붙은 이유를 모르나 보군요.”
귀무의 말에 한립은 자령 등과 시선을 마주쳤다.
다들 모르는지 모여들어 귀무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 붉은 호수가 황천대택이라 불리는 이유는 호수 곳곳의 아래에서 서혼유천(噬魂幽泉)이 샘솟아 혼백들을 흡입하기 때문입니다. 흡수를 당한 혼백은 바로 윤회로 던져지고, 남은 육신은 가라앉아 천천히 썩어 사라져 호수의 일부가 되지요.”
“높이 날아서 지나가면 되는 거 아닌가?”
금동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말했다.
“맞는 말입니다. 호숫물에 닿지만 않으면 서혼유천의 흡입력에 당할 일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저기 호수 위에 뜬 혼돈혈운(混沌血雲)이 안 보입니까?”
귀무가 반문했다.
“혼돈혈운이란 것이 특별한 점이 있나 보군요.”
석천공이 말을 받았다.
“혈운 자체가 특별한 게 아니라 혈운에서 불어나오는 바람이 괴상합니다. 원래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위험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귀신탱이, 작작 끌고 얼른 그게 뭔지나 말하지?”
금동이 참을성이 다했는지 소리쳤다.
“지금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정반돌풍이라는 것은 바람이 세지도 않고 눈에 잘 띄지도 않는데. 거의 호수 전체에 드리워있어 일단 거기로 빨려 들어가면 몸의 살점이 휘리릭 벗겨져 나가는 건 일도 아닙니다. 태을 대라급이거나 만황종족이어도 걸리는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결과는 마찬가지죠.”
“더욱 난감한 일은 일단 정반폭풍에 휩쓸리면 중심을 잃고 호수로 떨어져 혼백마저 빼앗기고 윤회를 하게 되겠군.”
미간을 찌푸린 한립이 보충했다.
“어려울 것 있나요? 선박 형태의 선기로 호수를 건너면서 돌풍만 피하면 호숫물에 닿지 않고 중심부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제혼이 입을 열었다.
“절대 그런 짓 마세요! 여기 물은 병아리 깃털을 띄워놔도 버들잎을 올려놔도 절대 뜨지 않습니다. 제아무리 강력한 선박을 준비하더라도 그냥 다 가라앉아 버릴 거예요.”
귀무가 급히 말렸다.
그 말에 금동이 곧장 손목을 돌려 새하얀 털을 하나 불러냈다. 한립은 그게 흰둥이 털인 걸 알아보고 눈썹을 끌어올렸다.
무슨 이유로 금동에게 털을 잡아 뜯긴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훅, 바람을 뿜자 하얀 털이 떠올라 호수로 떨어졌다.
역시 귀무가 말한 대로 그 가벼운 털도 뜨지 못하고 호수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이것도 안 뜬다고?”
금동은 실망한 기색이었다.
지켜보던 한립이 무언가를 떠올리고 대나무를 불러냈다.
“이걸 챙기라 이른 게 호수를 건너기 위해서였습니까?”
“맞습니다! 눈치가 대단하십니다! 황천대택에 거의 유일하게 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이겁니다. 이 대나무로 배를 만들어 호수를 건너는 겁니다.”
귀무가 고개를 끄덕이며 하는 말에, 한립은 대나무를 작게 토막 내어 물에 던져 보았다.
호수에는 파문이 일지 않고 대나무 조각이 조용히 떠올랐다.
“배는 이렇게 만든다 치고, 정반돌풍은 어찌할 겁니까?”
“정반돌풍이 불규칙하게 호수 전역에 깔려 드나들 구멍이 전혀 없어 보이지만, 내가 수십만 년 동안 관찰한 결과 은밀한 길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그 길을 따라 배를 타고 가면 정반돌풍도 피할 수 있을 거예요.”
“의식으로 수역(水域)에서 정반돌풍을 피해갈 수 있는 길을 표시하세요.”
한립이 옥간을 던져주자 귀무가 어색하게 웃으며 의식으로 기록을 시작했다.
“호수에 돌풍이 퍼져 있어 길이 있다고 해도 그리 넓지는 않을 겁니다. 재료가 충분하다고 배를 크게 만들 수는 없으니 한두 사람이 탈 만한 배 두 척을 만들어 저와 다른 한 명이 한 척씩 타고 가고, 나머지 분들은 제 동천보물 안에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두 척을 준비하는 것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고요.”
“역시 한 수사의 치밀함은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한립의 제안에 석천공이 찬성했다.
금동과 제혼은 자신들이 칭찬을 받은 듯 뿌듯해했고, 자령도 한립을 보며 미소 지었다.
곧 한립이 대나무들을 이용해 두 척의 기다란 배를 만들었다.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꽤 세심하게 만들어진 배였다.
기다리고 있던 귀무가 완성된 지도를 한립에게 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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