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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183화 (1,940/2,000)
  • 2183화. 황혼(荒魂)과 환생

    *

    “……전주, 여상 낭자와 한립은 대체 무슨 관계인지요? 한립이 여상 낭자를 무척 신경 쓰는 듯했습니다.”

    “여상은 한립이 하계에서 취한 반려이다.”

    교삼이 망설이다 한 질문에 윤회 전주가 조각을 하며 담담히 답했다.

    “그랬군요.”

    이제야 교삼도 한립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그간 고생이 많았을 것이니 돌아가 쉬도록.”

    윤회 전주가 몸을 돌리고 말했다.

    내부가 어두워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오관의 윤곽으로 보아 무척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는 듯했다.

    “전주께서는 구원관 임무를 마치는 대로 제 신분에 대해 말씀을 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구원관 일이 일단락 난 것 같은데, 제 부모가 누구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는지요?”

    교삼은 물러나지 않고 결연한 눈빛으로 윤회 전주를 응시했다.

    윤회 전주가 그런 교삼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리 알고 싶다면 어쩔 수 없구나. 내 네 부모가 누구인지 말해주겠다.”

    한숨을 내쉰 윤회전주가 입을 뗐다.

    교삼은 거의 숨을 죽이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 여상을 윤회전으로 데리고 온 것은 한립만을 위해서는 아니고, 너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그 말씀은 여상이 제…….”

    교삼은 너무 놀라 뒷걸음질쳤다.

    “……그래, 여상이 네 어미이다.”

    * * *

    얼마 뒤 교삼이 대전을 떠나고 윤회 전주는 조각을 이어나갔다.

    들쑥날쑥하던 옥돌이 고르고 매끄럽게 변하면서 궁장 차림의 여인으로 변했지만 끝내 얼굴은 조각하지 않았다.

    윤회 전주의 조각 솜씨는 대단해서 얼굴을 완성하지 않았는데도 생동감이 넘치고 아름다운 자태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손끝으로 여인의 볼을 쓸며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 * *

    유명계.

    한립 일행은 어차피 행적이 드러났기에 더는 은신을 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이동하고 있었다.

    자령과 석천공도 수행이 높아져서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그들은 목적지로 직행하지 않고 귀무의 안내에 따라 수없이 방향을 틀면서 귀족들의 영역을 피하고 불필요한 싸움을 줄였다.

    며칠 뒤 까만 숲 앞에 도착한 이들은 무성한 이파리를 지닌 언덕이나 산만한 거목들을 보았다.

    거목의 나뭇가지와 이파리는 새까맣게 빛을 흡수해 버렸고, 숲속에는 귀기가 가득해서 대낮에서 바람을 타고 귀곡성이 들려오는 듯했다.

    “여기가 백귀삼림이라고요? 유명계에서 위험한 곳으로 손에 꼽힌다는데 이곳을 통과해 갈 거란 말입니까?”

    석천공이 한립을 돌아보았다.

    “이곳만 지나면 황천대택까지 얼마 남지 않게 될 겁니다. 황천대택은 염라역의 사대 귀족 세력 중간에 있어서 그들에게 발각을 당해 쫓기느니 백귀삼림을 지나는 것이 편할 거예요.”

    한립의 대답은 경전에서 본 것과 귀무의 설명을 섞은 것이었다.

    석천공과 자령을 만난 이후 귀무는 목소리를 내지 않고 한립과 의식으로만 소통해서 석천공, 자령은 그의 존재를 몰랐다.

    “그렇다고 해도, 백귀삼림이 굉장히 위험하다고 알고 있는데 이곳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가 그냥 들어가는 것은 위험부담이 크지 않을까요?”

    “석 수사, 이곳에 대해 얼마나 조사를 해오셨습니까?”

    “아는 게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백귀삼림 안에 황혼(荒魂)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 정도요?”

    “황혼이라면…….”

    한립의 물음에 제혼과 금동 그리고 자령도 석천공의 설명을 기다렸다.

    “혼백이 환생할 수 있는 기회는 제한되어 있습니다만, 그것도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어떤 혼백들은 천부적으로 능력을 타고나거나 특수한 기연을 얻어 환생을 여러 번 하고도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고 오랜 세월 동안 연화되어 황혼이 된다고 합니다. 황혼은 혼백이기는 하지만 이성은 없고 살육에 대한 본능만 지니고 있어 상대하기 까다롭지요. 이 백귀삼림은 특수한 환경을 조성해 황혼들이 밀집해 있다고 들었습니다.”

    “황혼이 아무리 강력해도 혼백이라면 그리 상대하기 어렵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유명계의 귀족 대군과 전투를 하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제혼이 입을 열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제혼도 있겠다. 그런 귀신 나부랭이 따위, 뭐 별거라고.”

    금동도 동조했다.

    “세 분의 의견이 그렇다면 백귀삼림으로 갑시다.”

    이를 들은 석천공은 더는 이견을 제기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일행은 백귀삼림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숲속은 진하게 안개가 드리워 시야를 확보하기보다는 의식을 퍼트려야 했다.

    가장 앞에서 날아가는 한립은 눈에서 보랏빛을 일으켜 주변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는데, 돌연 머리 둘 달린 작은 뱀이 번개처럼 그의 종아리를 깨물려고 달려들었다.

    파칙!

    한립의 몸에서 금빛이 반짝여 쌍두사(雙頭蛇)를 두 쪽을 내며 검붉은 피가 바닥에 튀었다.

    피가 묻은 바닥에서 검푸른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한립 일행은 진작 전방의 먼 곳으로 이동해 있었다.

    “황혼 말고 강력한 귀물들도 많은 것 같군요. 저렇게 극독을 품고 있으면 실수로 부상을 입을 수도 있으니 다들 조심하시죠.”

    석천공이 한립 옆에 붙어 뒤쪽을 힐끔 보고 당부했다.

    시간이 흘러 십여 일 뒤.

    백귀삼림 깊은 곳으로 들어설수록 귀물들이 많아져서 수시로 태을급에 이르는 귀물들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아니면 벼락같은 수단으로 빠르게 처리해 시선을 끄는 일을 최소화했다.

    * * *

    다시 보름 뒤 어느 날.

    검은 강줄기 주변에서 굉음이 쾅쾅 울리다 조용해졌다.

    푹푹 파인 강기슭에는 늑대의 형태를 띤 대형 귀물들이 두 동강이 나서 쓰러져 있었다.

    한립, 제혼, 석천공은 안색이 평안했으나 자령, 금동은 얼굴이 조금 창백했다.

    늑대 귀물이 강력한 의식 공격 수단을 지녀 상대적으로 의식이 약한 편인 자령과 금동이 피해를 본 것이다

    “괜찮은 것이냐?”

    한립이 둘을 살피며 관심을 보였다.

    “괜찮아요.”

    금동은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어 보였고, 자령도 숨을 고르고 고개를 저었다.

    “경전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황혼들의 의식 공격은 더 강력하다고 했습니다. 아직 백귀삼림 외곽 쪽에 가까워서 황혼들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곧 맞닥뜨리게 되겠지요.”

    석천공의 말에 자령과 금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강줄기 옆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바로 출발했다.

    “자령, 그간 마땅한 기회가 없어 묻지 못했는데 마역에서는 잘 지낸 것이냐?”

    한립은 자령에게 다가가 물었다.

    “네. 해 선배님과 석 수사가 잘 챙겨줘서 수련에만 힘쓸 수 있었어요.”

    “내가 마역을 떠난 지 천년이 되지 않았는데, 네가 갑자기 지금의 경지에 이른 것이 놀랍구나.”

    “다 해 선배님 덕분이죠. 특수한 공간을 마련해 주셔서 그 안에서 수련하면 수행을 빨리 높일 수 있었어요……. 게다가 한 형이 남겨주고 간 물건들도 큰 도움이 되었고요.”

    “해 수사가…….”

    하긴 마족 도조경 존재인 해 도인이라면 자령의 수행을 단번에 높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 같았다.

    “해 수사는 잘 지내고? 아직 적린공경에 머물고 있는 것이냐?”

    “해 선배님은…….”

    자령이 대답을 하려는데 한립이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일행이 멈춰 서서 긴장감 어린 표정으로 전방을 보았다.

    전방 숲속에 창백한 하얀 안개가 끼더니 지면과 나무에 살얼음이 맺히고 있었다.

    흉흉한 기운이 그 하얀 안개 속에서 불어와 한립 일행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황혼입니다……. 최소한 천만 년 이상 된!”

    석천공의 경고가 떨어지자마자 하얀 안개가 요동치면서 거대한 폭풍으로 변했다.

    그 폭풍에 휘말린 거목들이 터져 가루가 되었고 숲속 지면이 한 층 깎여 나갔다.

    일행을 향해 다가오는 하얀 폭풍 속에서 사람과 짐승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와 귀를 찔렀다.

    석천공은 의식에 파문이 생겨 마기를 운용해 통제하며 급히 뒤로 물러섰다.

    제혼, 금동, 자령도 귀곡성이 혼백에 영향을 미쳐 뒤쪽으로 날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립만이 후퇴하지 않고 금색 고리들로 몸을 감싸고 눈에서 보랏빛을 뿜었다.

    “주인님!”

    “기다려. 아저씨가 충동적인 사람도 아니고 다 이유가 있으니까 저러겠지. 게다가 황혼도 한 마리뿐인데 아저씨 능력에 당하겠어?”

    제혼이 이를 보고 급히 뛰어들려는데, 금동이 옆에서 붙들었다.

    자령도 한립의 행동에 물러서다 말고 멈춰 걱정을 드러냈다.

    하얀 폭풍이 한립을 집어삼켰다.

    쿵!

    그 안에서 금색 광채가 크게 일어나 한립 주변으로 폭풍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크하학…….

    분노한 울음소리가 하얀 폭풍 속에서 들려오고, 그 안에 담긴 살심에 멀리 떨어진 석천공 등도 안색이 달라져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어리석은 것, 어렵게 몸을 숨기고서는 화를 다스리지 못해 위치를 노출하다니.”

    한립은 한심하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 오른손에 금빛을 일으켰다.

    금빛이 기다란 빛줄기로 변해 쏘아져 나가 하얀 폭풍으로 날아갔다.

    쿠쿵!

    굉음이 들리고 하얀 폭풍이 흩어져 사라지자 거구의 하얀 귀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르고 길쭉한 몸을 지닌 귀물은 대나무 같았다.

    하얀 장포를 걸치고 손톱을 길게 기른 귀물은 혓바닥을 입 밖으로 길게 내밀고 쉼 없이 휘둘렀다.

    방대한 귀기가 예전에 만났던 혈려 못지않았는데, 귀물의 가슴에는 금색 빛줄기에 뚫린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귀물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가슴에 난 상처를 내려다보았고 석천공 등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립이 손을 저어 금색 빛줄기를 상하로 움직여 하얀 귀물을 세로로 찢어버렸다.

    푸확!

    대량의 하얀 안개가 사방팔방으로 퍼지며 도깨비 불같은 하얀 빛알갱이들이 귀기를 내뿜었다.

    그 순간 검은빛이 뚝 떨어져 하얀 안개들을 모조리 흡수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몸을 수축한 검은 빛은 제혼으로 변했다. 그녀의 기운은 강해졌지만 불안정해서 위태로워 보였다.

    “괜찮은 것이야?”

    한립이 제혼을 보고 물었다.

    “괜찮아요. 황혼이 품은 귀기가 너무 방대하고 험악해서 소화하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제혼은 바로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고, 곧이어 석천공 등이 날아들었다.

    “한 수사, 그 사이에 수행이 이렇게 늘어난 줄 몰랐습니다. 또 우리는 멀찍이 남겨두고 혼자 앞으로 가십니다.”

    석천공의 눈빛이 복잡했다.

    부럽기도 하고 자신은 왜 그렇게 수행을 높이지 못했는지 아쉽기도 했지만 경탄하는 마음이 가장 컸다.

    자신도 마역에서 고되게 수련을 하고 해 도인이라는 도조의 보조까지 받았는데 이제 겨우 대라경에 이른 것이다.

    “운이 좋았습니다. 석 수사의 자질에 곧 저를 뛰어넘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한립은 언제나처럼 잔잔히 웃음 지었다. 그런 한립을 보고 입을 비죽인 석천공이 고개를 돌렸다.

    자령과 금동도 멍하니 그를 보고 있었다.

    “왜들 그러느냐? 낯선 사람을 보는 것 같구나.”

    한립이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뭐 이렇게 강한 아저씨는 처음 보긴 하죠.”

    금동이 씨익 웃음 지었다.

    “농담은 여기까지만 하자꾸나. 제혼이 황혼의 귀기를 흡수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니 기다려 줘야겠다.”

    한립의 말에 금동과 자령도 옆에 자리를 잡았다.

    “하하, 한 수사가 옆에 있는데 두려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석천공도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한립이 제혼 옆으로 걸어가 기다리는데 귓가에 귀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수사를 너무 과대평가한 것이 아닌가 했는데, 이제보니 얕잡아 보고 있었습니다. 대체 진짜 실력이 어느 정도인 겁니까?”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시지요.”

    한립의 대답에 헛웃음을 흘린 귀무가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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