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2화. 재회
*
도광검진 속의 마족들은 어쩐 일인지는 몰라도 외부에서 지원을 해주는 걸 알고 더 열심히 반격을 시도했다.
키 큰 마족이 은백색 비파를 꺼내 열 손가락으로 현을 튕기자 휙휙, 열댓 개의 공간 균열이 갈라져 도광검진의 허점을 공격했다.
“저건!”
한립이 눈을 크게 떴다.
흑의 여인은 소매 속에서 보라색 구슬을 던지고 있었다.
구슬들이 급속도로 커져 뇌전을 뿜은 보라색 괴뢰로 변하더니, 흑의 여인 본인과 비슷한 강력한 기운을 드러내며 검진을 향해 뇌전을 날렸다.
“갑시다!”
키 큰 마족이 곁의 여인을 붙들고 검진에 뚫린 구멍으로 빠져나왔다.
한립이 웃는 낯으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은…….”
두 마족은 포위를 벗어나 안심하다 한립이 접근하는 것을 보고 경계심을 드러냈다.
유명계 귀족들이 그의 신분을 알아챌까 봐 윤회전 가면을 써 흐릿한 귀물처럼 변신해 있었기에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금동과 제혼이 돌아왔지만 양 머리 귀물들은 끝을 보자는 듯 쫓아왔다.
“이곳은 대화를 나눌만한 장소가 아니니 일단 벗어납시다.”
한립은 손을 저어 금색 뇌전 줄기를 뿜었다. 그러면서 자신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수행이 크게 늘어 그냥 도천신뢰를 발동한 것인데 예상보다 강한 위력을 내고 말았다.
파칫!
다섯 개의 뇌전 줄기가 교차하며 새로운 뇌광진법을 이루었다.
그런데 그때 흑의 여인이 손끝에서 검은 실들을 뿜어 뇌광진법에 주입해 전송진의 작동을 정지시켜 버렸다.
“우릴 어디로 데려갈 참입니까?”
흑의 여인이 한립을 응시하며 물었다.
일행인 키 큰 사내도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뇌진이 전송 효과를 지닌 것은 알아보았지만 모르는 사람을 따라 아무 곳으로나 갈 수는 없었다.
순간 놀란 한립은 바로 평정을 회복하고 다섯 손가락에서 더욱 굵은 뇌전을 뿜었다.
검은 실들이 뜯겨나가고 뇌광진법이 순조롭게 발동되었다.
귀물들이 쫓아와 검은 곡도에서 도광을 비처럼 뿌렸을 때는 전부 사라진 후였다.
“모두 그만!”
위엄 있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다른 귀물들보다 체구가 큰 양 머리 귀물이 앞으로 나섰다.
다른 상양 귀물들보다 몸집이 두 배나 되는 것은 물론 머리에 두 개의 굽은 뿔이 나 있어 한눈에 보기에도 우두머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족장님, 침입자들이 튀었는데 쫓을까요?”
또 다른 거구의 상양 귀족이 물었다.
“쫓을 수는 있고? 침입자들의 실력에 우리가 진법으로 우위를 점하지 않았으면 지금까지 붙들어 둘 수도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몇 놈이 더 나타났는데 쫓아? 죽고 싶은 것이냐?”
상양 족장이 냉랭히 내뱉은 말에 말을 꺼냈던 상양 귀족이 더는 쫓자는 소리를 하지 못했다.
“돌아가는 대로 마왕족의 침입자를 발견했다는 전갈을 넣는다.”
* * *
수백만 리 밖, 검은 숲 위에 금색 뇌전 덩어리가 뭉쳐 진법을 이루었다.
그 안에서 한립 일행이 나타났다가 아직 흩어지지 않은 전송진을 통해 다시 어딘가로 사라졌다.
이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고 암홍색 사막에 도착해서야 뇌광진법이 흩어졌다.
“대체 당신들은 누굽니까?”
두 마족이 즉시 뒤로 물러나 거리를 두며 소리쳤다.
“납니다.”
한립이 그 둘을 보고 윤회전 가면의 환술을 풀었다.
“한 수사!”
키 큰 마족이 얼굴에 뒤집어쓰고 있던 걸 벗어버리며 기뻐했다. 그는 다름 아닌 석천공이었다.
예전보다 키도 크고 몸도 좋아진 걸 보아 육체의 수련에 성취가 있었던 듯싶었다.
“마계에서 헤어지고 유명계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한립이 석천공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그 옆의 흑의 여인을 향해 드물게 정감 어린 눈빛을 보냈다.
“자령, 여기서 다시 만나는구나.”
“한 형은 어쩌다 이곳까지 오게 된 거예요?”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던 흑의 여인도 절색의 얼굴을 드러냈다.
그게 자령이 아니면 누구겠는가?
막 격전을 마쳐서 얼굴이 약간 창백하고 숨이 가쁘기는 했지만 유명계의 침침한 빛 아래에서도 그 아름다움만은 퇴색되지 않았다.
그걸 본 한립은 복잡한 감정이 차올랐지만 강제로 억눌러 놓았다.
금동과 제혼도 변신을 하고 있었는데, 한립이 본 모습을 밝히는 것을 보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자령이 금동과 제혼을 보고 미간을 좁혔지만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금동과 제혼이다. 이전에는 영수였지만 수련을 통해 지금의 모습이 되었지.”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한립이 소개를 해주었다.
그 말에 자령은 마음속의 의구심이 사라지며 두 사람을 향해 미소를 보냈다.
금동과 제혼에 대해서는 한립에게 들은 바가 있었고, 인계에 있을 때도 서로 본 적이 있었다. 물론 금동과 제혼이 자아가 없을 때였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 악혼들을 집어삼키던 형수와 서금충이 이렇게 변하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금동은 자령에게 고개만 까딱이고 말았는데 제혼이 살갑게 말을 붙였다.
“자령 수사, 주인님께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마역에서 이미 만났었는데 그때는 제가 의식을 잃고 화지공간에 있어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했네요.”
“괜찮아요. 저와 석 수사를 도와주어 감사드립니다.”
자령은 두 사람에게 예를 취했다.
“우리가 남도 아닌데, 감사 인사까지 하실 것 없어요.”
제혼이 웃음 짓자 자령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상대에 대한 호감이 생겼다.
“이야, 한 수사 주변에는 미인들이 아주 차고 넘칩니다. 보는 사람 부럽게.”
석천공이 한립의 어깨를 두들기면서 전음으로 농을 건넸다.
“이상한 소리 마시지요. 금동과 제혼은 동료입니다. 그보다, 어쩐 일로 여기에 있는 겁니까?”
한립이 그의 손을 떼어내며 화제를 돌렸다.
그 말에 석천공은 망설이며 한참 답을 하지 못했다.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면, 묻지 않은 셈 치세요.”
한립이 먼저 손을 들고 말했다.
석천공과 자령이 같이 있는 것을 본 순간 해 도인이 떠올랐는데, 마역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석천공이 한숨을 돌리며 말했다.
자령이 그런 석천공을 보며 뭐라 말하려다 결국에는 입을 다물었다.
석천공도 한립 일행의 목적이 궁금했지만 자신은 말하지 않고 묻기도 민망했다.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그는 대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래서 여기는 어딥니까?”
“지형으로 보아 옥화사막(獄火沙漠)이란 곳 같습니다. 기후가 너무 뜨거워서 귀물들도 접근을 꺼려 강대한 귀족이 거주하지 않는 비교적 안전한 지역이지요. 격전을 펼쳤으니 좀 쉬는 게 어떻겠습니까?”
“조금 피곤하기는 하네요. 정말 쉬어야겠어요.”
석천공이 입을 열기 전에 자령이 답했다.
안 그래도 체력이 달려서 근근이 버티고 있었는데, 한립 일행을 만나자 마음이 한결 놓였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석천공이 소매를 털어 수백 줄기의 검은 빛을 뿜었다.
검은 진법 도구들이 인근 바닥에 떨어져 수백 장에 달하는 검은 보호막을 형성했다.
자령과 석천공은 각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마원석을 꺼내 마기를 회복했다.
금동도 바닥에 앉아 운기조식을 했다. 그러나 한립과 제혼은 쉬지 않고 그들을 위해 호법을 섰다.
“한 형.”
묵묵히 서 있는 한립의 귓가에 거의 들릴 듯 말듯한 자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석천공이 의심을 할 수 있으니 거기서 들으세요.”
“내게 할 말이 있느냐?”
자령의 말에 한립은 주변을 경계하는 척하며 전음으로 물었다.
“이번에 우리가 유명계에 온 목적을 이렇게라도 전하고 싶어서요.”
“무엇이지?”
“우리가 유명계까지 온 건 육도윤회반이란 보물 때문이에요. 세상에 다시 없을 귀한 보물로, 전생의 기억을 회복시켜주어 전생의 수련 경험을 융합해 수행을 크게 늘게 해준다고 해요.”
그 말에 한립의 눈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이상한 말로 들리겠지만, 사실이에요. 마역에서 누군가 이 방법을 써서 수행이 크게 늘었기 때문에 해 선배님이 우리를 유명계로 보낸 것이고요. 이건 야양왕조 황실의 비사이기도 해서 석천공은 발설하지 못한 거죠. 한 형, 조용히 나와 석천공 뒤를 밟아요. 육도윤회반은 한 형에게도 도움이 될 거예요.”
“오해했구나. 네 말을 믿지 못한 게 아니라 우리도 육도윤회반을 찾아가는 길이었기에 놀란 것이다.”
한립의 전음에 이번에는 자령이 놀랐다.
“이미 알고 있었다니 다행이에요. 마역에서도 당신에 대해 여러 소식을 들었는데, 천정에서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면서요. 이런 기회는 흔치 않으니, 꼭…… 찾도록 해요.”
자령이 당부했다.
마음이 따뜻해진 한립은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결국에는 안심하고 회복에 집중하라는 소리밖에 하지 못했다.
이에 자령은 더는 전음을 보내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쉰 한립은 잡념을 미뤄두고 주변 경계에 집중했다.
반 시진이 지나 자령, 석천공, 금동이 차례로 일어섰다.
“오래 기다리게 했습니다!”
석천공이 미안함을 닮아 웃어 보였다.
“다들 푹 쉬었다니 다행입니다. 우리는 황천대택 방향으로 가는데 어디로 가십니까?”
한립도 웃으며 물었다.
“황천대택…….”
석천공이 움찔했다.
“그곳에 육도윤회반이라는 보물이 있는데, 전생의 기억을 돌려주어 수련에 큰 도움이 된다더군요. 신기해서 찾으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한립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진작 육도윤회반에 대해 알고 있었군요. 그런 줄도 모르고 괜히 말을 아꼈습니다. 나와 자령도 마침 그곳으로 가던 길이니 같이 가시지요.”
석천공은 머뭇거리다 쓴웃음을 흘렸다.
제혼과 금동이 그 소리를 듣고 조금 놀랐지만 별다른 말없이 한립의 뒤로 가서 섰다.
“이런 우연이 다 있군요. 그럼 같이 가면 되겠습니다. 가는 동안 서로 도움도 받고요.”
한립의 말에 일행들은 다 같이 황천대택 방향으로 출발했다.
* * *
그 시각, 혼돈공간에 떠있는 거대 성.
높은 건물들이 숲속 나무처럼 세워져 있는 성안은 널찍널찍한 길에 먼지 하나 떨어져 있지 않았고, 그 규모는 구원성과 유금성 같은 거대 성들과 비교해도 결코 작지 않았다.
그 위를 날아다니는 둔광들과 거리의 인파가 엄청나서 무척 번화한 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중에는 인족, 마족, 요족 심지어 귀물 종적이나 회선까지 섞여 조화롭게 지냈다.
진선계에서 이런 광경을 보면 놀랄 사람이 적지 않을 터였다.
그런 성의 중심에 암홍색 보루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암홍색 보루 주변에는 높이 담이 둘러싸여 있어 외부 수사들의 접근을 막았다.
그때, 암홍색 둔광이 멀리서 날아들어 중심부의 보루 안으로 내려섰다.
보루 안, 대전 앞에 선 사람은 붉은 치마를 입은 교삼이었다. 문 앞의 황포(黃袍) 호위들이 교삼을 보고 예를 취했다.
“소장사(少掌使)를 뵙습니다!”
교삼은 그들을 상대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섰다.
대전 내부는 어둑했고 양쪽 벽에 걸린 화로만이 귤빛 불길을 반짝였다.
높다란 단을 제외하고 별다른 구조물이 없는 대전 가운데 사람 키만 한 푸른 옥석이 놓여 있고 그 옆에 청포 사내가 서 있었다.
그는 몸을 약간 굽히고 작은 칼을 들어 옥돌을 조각하는 중이었다.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윤곽으로 보어 어떤 여인을 조각하는 듯했다.
“전주를 뵙습니다!”
교삼이 청포 사내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일어나거라. 일은 어찌 되었더냐?”
윤회 전주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계속 조각을 하며 물었다.
“금원선역 내부에서 구원관과 천정의 추적이 집요해 신분이 폭로된 인원을 철수시켰습니다. 남겨둔 인원들은 몸을 낮추고 있기에 그들이 어떻게 조사를 해도 잡아내지 못할 겁니다.”
“그렇다 해도 만전을 기해야 한다. 그들에게 소혼단(溯魂丹)을 분배해 정체를 들켜 전투 중에 사살된다고 해도 혼백이 유명계로 돌아와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예!”
“한립은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냈더냐?”
“각지에 연락을 해두었는데, 구원관을 떠난 뒤 초여선역 제호산에 나타난 뒤로의 행적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교삼이 미간을 좁혔다.
“어딘가에서 폐관수련이라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전력을 다해 찾고 있으니 곧 어디 있는지 소재 파악이 될 것입니다.”
“그럴 것은 없다. 어차피 여상을 만났으니 영원히 숨어 있지는 않을 것이야. 금방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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