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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181화 (1,938/2,000)

2181화. 마족

*

팟.

외딴 섬, 오래도록 고요했던 비석이 빛으로 반짝이고 한립이 나타났다.

제일 먼저 제혼이 눈을 떴다.

“아저씨, 이제야 나온 거예요?”

금동도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짐승을 던져 버리고 뛸 듯이 기뻐하며 말했다.

네모 상자 안에서 귀무 잔혼도 떠올랐다.

“축하드립니다, 한 수사. 수행이 크게 느셨군요.”

놀란 기색이 스친 귀무는 금방 태연한 얼굴로 축하를 건넸다.

“아저씨가 진작 안에 갇혀 죽었을 거라던 사람이 누구였더라?”

금동이 입을 비죽였다.

“한 수사같이 천운을 타고난 사람이 어찌 쉽게 목숨을 잃겠습니까? 제 말을 곡해하신 듯합니다.”

귀무는 안색도 변하지 않고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다들 오래 기다리게 했구나.”

한립은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한 수사, 난 염라부로 데려다준다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이제 수사가 날 육도윤회반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줄 차례입니다.”

귀무가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던 말을 했다.

“약속한 것은 지키겠습니다.”

한립은 담담히 답했다.

귀무는 그의 시선을 받으며 순간 가슴이 철렁했고 얼굴의 웃음기도 옅어졌다. 그러나 그런 기색을 재빨리 숨긴 귀무가 웃으며 말했다.

“안에서 기연이라도 만나셨나 봅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수행이 많이도 느셨어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제혼과 금동도 한립을 자세히 보았지만 별다른 점을 알아내지 못했다.

“과찬이십니다. 일단 황천대택(黃泉大澤)으로 가보시지요. 그곳으로 가는 길도 안내를 부탁드립니다.”

한립은 평온하게 미소를 띠고 말했다.

“그곳은 흑하역, 지명역, 염라역이 교차하는 지역에 있습니다. 이곳에서 출발해서 가려면 염라역의 여러 종족의 영토를 지나야 하고 전륜왕 본인도 자주 육도윤회반 인근에서 수련해서 그 휘하의 수하들이 황천대택 주변을 지키고 있을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가면 좋단 말입니까? 전륜왕이 이미 삼역을 재패했다면 우리 셋만으로는 대항하기 무리일 텐데요. 그 전륜왕이란 자의 수행은 어떠합니까?”

“전련왕은 강합니다. 그 옛날에 벌써 대라 후기에 이르렀으니 지금은 대라 최고봉은 되었겠지요. 허나 아직 도조가 되지는 못했을 거예요. 그랬으면 내가 반드시 감지했을 겁니다.”

귀무의 말에 한립이 미간을 좁혔다.

“전륜왕만 해도 대라 최고봉의 수사이면, 우리더러 죽으러 가란 소린가요?”

제혼이 어두운 목소리로 따졌다.

“그리 화낼 것 없습니다. 황천대택으로만 가면 내게 몰래 잠입할 방법은 다 있으니까요.”

귀무가 달래듯 말했다.

“그 방법이 뭔데?”

금동이 물었다.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니 양해해 주세요. 황천대택에 이르면 상세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귀무가 실실 웃음을 흘렸고, 그걸 본 금동과 제혼이 얼굴을 굳혔다.

“귀무 수사, 농담할 때가 아닐 텐데요? 지금 잠입할 방법에 대해 이실직고하는 게 좋을 겁니다. 저 아이들이 화가 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나만 예상이 되는 건 아닐 거예요.”

한립이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알겠습니다, 육도윤회반이 위치한 곳은 윤회와 환생에 관여하는 구역이라 일정 간격을 두고 정(正)과 반(反)의 돌풍이 불어 그걸 육도려풍(六道厲風)이라 합니다. 도조 급이라 해도 쉽게 접촉할 수 없으니 전륜왕과 수하들도 그때는 황천대택에서 물러나겠지요. 그때를 노려 들어가자는 겁니다.”

“수사의 말이 사실이면 우리는 어떻게 정반돌풍을 돌파한단 말입니까?”

“내가 오랜 세월동안 염라역을 관리하며 그냥 놀고먹기만 했겠습니까? 정반돌풍을 연구한 지 오래라, 파고들 구멍을 다 알아두었지요. 물론 우리가 겨우 한 번 왔다 갔다 할 시간밖에는 없겠지만요.”

“계획이 있다니 따라가 보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면 그때가서 대책을 마련하고요.”

“고맙습니다, 한 수사! 육도윤회반은 대단한 보물이라, 수사들에게도 도움이 될 거예요!”

한립의 결정에 귀무가 기뻐하며 말했다.

“주인님, 잠시만요. 한 가지 더 확인할 게 있어요.”

갑자기 제혼이 끼어들었고, 한립은 그런 제혼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제혼 수사, 이야기해 보시지요.”

귀무도 웃어 보였다.

“일정 기간이라는 게 대체 얼마 만이죠? 미리 말해두지만 우린 유명계에 너무 오래 머물 생각은 없다고요.”

“빈번한 편입니다. 천년 정도에 한 번씩 정반돌풍이 푸는데 다음번 돌풍이 백 년도 남지 않았어요.”

제혼의 물음에 귀무는 웃음을 거두고 진지하게 답했다.

“정반돌풍이 그렇게 강력하다면 육도윤회반은 그 속에서 어떻게 무사한 거죠?”

“육도윤회반은 유명계에서 탄생한 보물이라 천지대도의 화신이라 무척 단단합니다. 게다가 육도윤회반과 정반돌풍은 그 뿌리가 같아 돌풍이 육도윤회반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지요.”

“이곳에서 황천대택까지 가는 동안 거치게 될 귀물 종족들의 세력은 얼마나 강하지?”

금동도 입을 열었다.

“돌아가도 몇몇 종족들의 거주지는 지나칠 수밖에 없겠으나, 한립 수사와 두 분의 실력이면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리고 이곳 길에 익숙한 내가 있으니 곤란한 곳은 당연히 피해갈 것이고요.”

제혼과 금동이 여러 질문을 하는 동안 귀무는 인내심을 가지고 답변을 해주었다.

“귀무 수사께서 그간 세부적인 것까지 다 고려를 해두셨군요.”

“뭘요. 세 분의 도움이 없다면 제아무리 아는 게 많아도 가지 못할 길입니다.”

한립의 칭찬에 귀무가 미소 지었다.

세 사람은 바로 출발해 상혼애를 지난 다음, 귀무의 지시에 따라 서북쪽으로 날아갔다.

“귀무가 하는 말을 다 믿으시는 건가요? 혈려처럼 우리를 속이는 거면 어떻게 해요.”

제혼이 전음으로 한립과 대화를 나누었다.

“상대의 말이 거짓인 것 같더냐?”

“아뇨, 잔혼이기는 해도 의식의 힘이 강해서 혈려 때처럼 진짜인지 거짓인지 판단이 서지 않아요. 제 의식 감응으로도 진위를 분별할 수가 없어요.”

“괜찮다. 네 말대로 귀무는 잔혼에 불과한데 이상한 짓을 하면 바로 처리하면 되지 않겠느냐. 육도윤회반이 그리 신기한 위력을 지녔다니 내게도 의미가 크다. 속임수일 수 있다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확인을 해봐야겠어.”

한립의 말에 자신감이 묻어났다.

제혼은 아직도 약간 걱정이 되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보름을 날아 염라역 심처로 이동했고, 그동안 귀물 종족들이 빈번하게 나타났다. 그런데 부락이나 성을 이루고 모여 사는 염라역의 귀물 종족들은 흑하역의 혼란한 상황과는 달라 보였다.

그리고 귀무가 염라역 곳곳을 꿰고 있어 별다른 이변 없이 황천대택과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세 사람은 먹구름 속에 숨어 이동하고 있었고 한립이 가장 앞에서 날며 두꺼운 경전을 뒤적였다.

지나온 성에 잠입해 얻은 것으로 귀무가 이제껏 말한 내용과 책의 설명이 거의 일치했다.

“주인님, 앞쪽에서 누군가 싸우고 있어요.”

곁에서 제혼이 입을 열었다.

눈을 빛낸 한립이 책을 거두며 멈춰 섰고, 제혼과 금동이 그의 좌우에 붙어섰다.

“특이한 점이 있더냐?”

“오, 외부인이 유명계에 침입한 것 같습니다! 그것도 마역에서 온.”

귀무가 검은 상자 안에서 나타나 신기해했다.

그 말에 한립이 귀무를 힐끗 보고 제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맞아요. 마족이 있어요.”

제혼은 놀랐다는 듯 귀무를 살짝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잔혼 형태로도 꽤 멀리까지 내다보십니다?”

한립은 귀무를 향해 의문을 표했다.

“여긴 유명계입니다. 의식 파동을 조종하는 데 충분히 능숙하다면 이 정도 거리를 살피는 것은 일도 아니지요. 수사는 인족이라 의식 조종에 미숙한 면이 있다지만, 제혼 수사는 명왕의 환생이면서 겨우 여기서 싸움이 일어난 걸 알아차린 겁니까? 유명귀족(幽冥鬼族)의 능력도 잊은 겁니까?”

귀무가 오히려 제혼을 보고 이상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명왕인지 뭔지 기억나지 않는다니까요.”

제혼이 반복되는 말에 표정이 냉랭해졌다.

귀무는 잔잔히 웃으며 그냥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귀무 수사는 얼마나 멀리까지 감지가 가능한 겁니까?”

“잔혼의 몸이라……. 십이삼 만 리가 한계입니다.”

생각을 해보던 귀무가 답하자 한립은 내심 깜짝 놀랐다.

귀무의 감지 범위는 제혼의 오륙십 배에 달했다.

“우리는 같은 줄에 매인 메뚜기들과 같은 신세입니다. 귀무 수사의 감지 범위가 가장 넓으니 앞으로 정찰은 수사가 맡아주시지요.”

“허허,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럼 가보죠. 대체 누가 싸우고 있는 것인지.”

일행은 어느 산골짜기로 다가가 골짜기 바깥에 몸을 숨겼다. 제혼이 주문을 외워 얼마 전에 떠올린 은신술로 세 사람의 행적을 숨겼다.

이 비술을 오랜 시간 펼칠 수만 있었으면 오는 동안 더 길이 편했을 것이다.

“이건 명왕멸적주(冥王滅跡呪)! 이래도 명왕의 환생이 아니라고 할 겁니까! 명왕을 제외하고 이 신통을 익힌 존재는 한 명도 없단 말입니다.”

귀무가 그걸 보고 기뻐했다.

“명왕멸적주? 무슨 소린지 모르겠고, 난 제혼입니다. 명왕이 아니라.”

코웃음을 친 제혼은 말 상대를 하지 않았다.

산골짜기는 면적이 넓은 편이었고, 그 안에서 수많은 검은 그림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양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한 귀물들이 평범한 사람의 서너 배는 되는 몸에 검은 털을 기르고, 검은 곡도(曲刀)를 들고 검은 기운을 일으켰다.

전술을 알고 있는지 진열을 이루고, 곡도에서 섬뜩한 기운을 내뿜어 산골짜기를 가득 채웠다.

“상양귀족(商羊鬼族)입니다. 유명역에서 중급 세력이지요.”

귀무가 설명했다.

한립은 진법의 중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광이 번득이는 가운데 흑의인 두 명이 보였다. 한 명은 키가 크고 한 명은 작았지만 전신을 가리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검은 장포가 기이한 금제의 힘을 드리우고 있어 의식으로도 용모를 확인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상서로운 보라색 구름 도안이 그려진 네 개의 검은 깃발을 움직여 반구형의 보호막을 만들고 진법에 대항했다.

네 깃발의 품계가 상당해서 형성된 보라색 보호막도 견고했기에 쏟아지는 검은 도광에도 부서지지 않았다.

“확실히 둘 다 마족이구나. 수행도 높고. 마족들이 여기서 뭘 하는 걸까?”

두 흑의인 중 키가 큰 쪽은 정순한 마기를 뿜어내고 있어 이미 대라의 경지에 이른 인물 같았고, 키가 작은 쪽은 전신을 가리기는 했어도 윤곽과 기운으로 보아 태을 최고봉의 여수사였다.

두 마족의 실력은 강했지만 양 머리 귀물들의 수가 너무 많아 쉽게 도광 진법 안을 벗어나지 못했다.

“주인님, 이대로 가면 버티지 못할 것 같아요. 도와줄까요?”

제혼이 물었다. 그 말을 들은 한립은 귀혼을 보았다.

“귀무 수사, 상양귀물들을 공격하면 문제가 될 수 있겠습니까?”

“상양귀족 자체는 염라역에서 그리 대단한 귀족은 아닙니다. 염라역 사 대 귀족 중 하나인 마왕귀족(馬王鬼族)의 부속 종족이라 저들을 구하고 싶으면 속전속결을 한 다음 이곳을 뜨면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제혼, 금동 너희가 가서 저들을 구해오거라.”

한립의 명이 떨어지자 제혼과 금동이 쏘아져 나갔다.

제혼은 검은 짐승 발톱을 불러내 산골짜기 안의 진법을 공격했고, 금동은 집채만 한 서금선으로 돌아가 두 앞발을 휘둘렀다.

대량의 수정빛이 검산(劍山)을 이루고 제혼의 발톱과 어우러져 도광진법에 떨어졌다.

제혼의 은신술 때문에 그들의 나타난 줄 전혀 모르고 있던 상양귀물들은 뒤늦게 공격하려 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쿠쿵! 쿠쿠쿵!

도광진법 대부분이 박살이 나고, 검은색과 금색 파문이 골짜기 양쪽 산봉우리에 부딪혀 산이 허물어져 내렸다.

돌풍이 사방팔방으로 몰아쳐 주변 수백 리를 깎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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