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0화. 스승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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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하지 마십시오, 사존. 최근 윤회전이 움직이고 회계의 침입이 시작되어 선역 전체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습니다. 천정도 한동안은 제게 신경을 쓰지 못할 겁니다.”
“윤회전은 모르겠지만, 회계는 고혹금의 눈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천정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너는 모르겠지. 일단 고혹금이 너를 위협으로 인지하면 네 수행에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이야. 그러니 조속히 대라 후기에 이르러야만 천정을 상대할 최소한의 능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사존, 첫 번째 참시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아 대라 중기의 수행도 간신히 안정시켰습니다. 두 번째 참시를 하려면 시일이 걸릴 듯싶습니다. 아직 충분한 선규도 뚫지 못하였고요.”
“넌 다른 수사들과 달리 법체쌍수이다. 현규를 그만큼 뚫었으면 대량의 선원석과 시간법칙 재료들을 모아 광음천선대진을 발동해 선규의 수를 늘리면 될 텐데, 다른 걱정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역시 사존이십니다. 솔직히 첫 번째 참시는 제가 수련해서 이룬 것이 아니라 누군가 강제로 참시부를 써서 그리된 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급히 참시에 도전하다 기초가 부실해 실패로 돌아가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지 않겠는지요?”
한립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괜한 걱정을 하고 있구나. 참시란 것은 어찌 되었든 인연이 닿아야 가능한 일이다. 선규가 충분하든 충분치 않든 이미 인연이 닿아 참시에 성공했으면 그만이란 이야기다.
물론 준비가 충분하고 수행이 안정되어 있으면 성공 가능성도 크겠지. 난 네가 속히 그 기초를 닦아 두어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네가 대라 후기에만 이르러도 도조가 친히 나서지 않는 이상 그 아래 경지의 수사가 널 어찌할 수 있겠느냐?”
“그렇군요. 가르침을 얻어갑니다.”
“그 전에 오행환세를 보충해 영역을 진정한 천인경의 경지로 끌어올려야 수련 속도를 높일 수 있겠지.”
“그게……. 다른 사정들이 있어서 아직 오행환세를 보충할 만한 선기를 찾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내가 너를 염라부로 오라고 한 이유가 무엇이겠더냐?”
난처해하는 한립을 보고 미라노조가 웃으며 물었다.
그 말에 한립은 자신의 머리를 탁! 쳤다.
미라노조는 그에게 금색 옥책과 세 가지 시간 보물들을 주려 했으나 시공간초월을 한 후 사라졌다.
그때 노조가 염라부를 찾아가라 했었다.
미라노조는 손을 저어 한립 앞에 푸른 고목, 깨진 남색 창, 황토색 둥근 돌과 금색 옥책을 불러냈다.
그 밖에 저물반지 두 개와 금색 옥간도 함께였다.
“저물반지 안에 선원석과 시간법칙 재료들이 들어 있어 네 수련을 보조하기에 충분할 것이야. 그리고 이 불후금운 공법은 네가 장공각에서 훔친 적이 있다만 가져가지 못한 것 같기에 챙겨둔 것이고.”
미라노조의 말에 한립은 허리 숙여 예를 올렸다. 그 모습에 미라노조도 허허 웃으며 그의 예를 받아들였다.
“시간이 없으니 일단 오행환세부터 철저히 수련하거라. 내가 너를 위해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이라 여기고.”
“감사합니다, 사존.”
한립은 물건들을 챙겨 확인했다.
푸른 고목, 깨진 남색 창, 황토색 둥근 돌은 품계가 높은 시간선기였고, 각각 나무, 물, 흙의 오행 속성을 지녀 미라노조가 그의 오행환세를 위해 준비한 것이 틀림없었다.
동을신목이 양생수와 융합해 실체화되었기에 고목은 쓸 수 없어도 창과 돌은 광음정병과 환진사루에 융합하면 될 터였다.
한립은 대추나무 아래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동을신목이 변한 숲에서 나무 그림자들이 빠져나와 겹쳐지며 양생수로 돌아가고, 진언보륜이 변한 달이 떨어져 한립의 등 뒤에서 원형으로 돌아갔다.
위쪽에는 흐르는 불길이 중앙에서 응결해 금색 횃불로 변하고 굽이굽이 흘러가던 강과 첩첩이 이어지던 산맥도 환영처럼 흐릿해졌다.
이어 한립의 손짓에 남색 창과 황토색 돌이 떠올라 산과 강으로 떨어져 내려 철썩, 물보라가 치고 산에서는 쾅, 소리가 들려왔다.
미라노조가 그걸 보고 밝은 얼굴로 초옥 문 앞으로 걸어가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두 손을 합장했다 펴자, 두 줄기의 금빛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한립은 그 금빛 속에서 몸이 편안해지고 마음이 차분해졌다.
산맥이 흔들거리며 진정한 산이 되고 강이 물결치며 출렁이는 물빛을 드러냈다.
이어서 진언보륜과 단시류화도 고공으로 날아올라 달과 별이 되고, 양생수는 산맥 위로 올라 뿌리를 내리고 숲을 이루었다.
강대한 시간법칙 파동이 퍼지며 오행환세가 완성되어 한립의 시간영역과 일체화되었다.
그야말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였다.
한립이 크게 기뻐할 때 미라노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자질은 사부보다 못하지만 운은 나보다 훨씬 좋은 것 같구나. 스승이 되어 제자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만, 남은 시간이 길지 않은 것 같구나…….”
“사존…….”
“관문 제자라고 거두어서는 스승이 가르침을 준 시간이 너무 적구나. 내 선물이니 헛되이 하지 말거라.”
미라노조의 목소리가 점점 환상처럼 사라져 갔다.
고개를 든 한립은 인자한 미소를 띤 노승의 모습이 흐릿해지다 민들레 꽃씨처럼 수많은 금빛으로 흩어져 주변의 영역으로 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존!”
다음 순간, 비경이 크게 흔들리고 빽빽하게 문양이 새겨진 거대 진법이 지하에서 올라와 한립이 발동하지 않아도 스스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주위를 살핀 한립은 진법이 광음천선대진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노조는 그가 이곳에서 폐관 수련을 하여 급속히 수행을 높이기를 바란 것이다.
광음천선대진과 한립의 천인경 영역이 부합하여 전대미문의 시간차공간이 만들어졌다.
마음을 다잡은 한립은 양손으로 수결을 맺어 미친 듯이 <대오행환세결>을 운용했다.
고공에서 금색 소용돌이가 들이와 그를 감싸고 정순하기 그지없는 시간법칙의 힘을 그의 몸속으로 주입하고 있었다.
“으…….”
하늘을 올려다보며 신음하는 한립의 눈코입귀에서 동시에 금빛 광선이 뻗어 나갔고 전신의 모공에 시간법칙의 힘이 깃들었다.
펑, 펑, 펑, 펑…….
느닷없이 수행을 안정시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의 몸에서 선규들이 연달아 뚫리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한립은 기뻐할 틈도 없이 거의 폭발적으로 몸에 쏟아져 들어오는 시간법칙의 힘을 감내하고 있었다.
진정한 대라 후기 수사라 해도 반드시 이 힘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가 폭주하지 않고 이성을 유지하는 것은 이미 전신의 현규가 거의 뚫려 있어 육체가 최상의 상태를 이루고 있는 데다 시간법칙 속에 미라노조의 법칙의 힘이 융합되어 있어 맹수처럼 몸 안에서 난동을 부리지 않게 도와준 덕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한립은 상상을 초월하는 통증을 참아내야 했다.
번쩍이는 금빛으로 씻김을 당하면서 한립의 의복은 재가 되어 사라진 지 오래였고 검은 머리카락들이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법칙의 힘이 변한 금색 바늘들이 빼곡하게 그의 몸으로 파고들어 피부에 핏빛 흔적들을 남기는데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아파 보였다.
그의 앞가슴에서 녹색 병이 날아올라 눈앞으로 떠올랐다.
이때 작은 병도 문양을 빛내면서 청록색 보광에 둘러싸여 있었다.
“운도 좋은 녀석이구나. 내 비호를 해줄 테니 의식을 개방하고 전력을 다해 시간법칙의 힘을 흡수하거라. 나머지는……. 내게 맡기면 된다.”
홀연히 병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립은 ‘이제야 모습을 드러냈느냐.’며 뭐라고 해주고 싶었으나 그런 말을 할 틈도 없었다.
병령의 말대로 더는 법칙의 힘을 통제하지 않고 온몸을 개방해 막대한 힘을 받아들였다.
쿠쿵!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의식이 침침해지고 육신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대신 의식세계의 변화에는 더 민감해졌다.
의식 공간에 찬란한 금빛 문자들이 떠올라 마치 그림을 그리듯 펼쳐졌다.
정신을 집중한 한립은 그게 미라노조가 준 금색 옥책에 기재되어 있는 내용이며 미리노조가 시간법칙 수련을 하며 얻은 깨달음과 진언문의 수많은 시간 비술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법언천지와 진언대수인 등 강력한 시간 비술들이 전부 들어있었다.
자세히 구불구불한 글자들을 살피던 한립은 마치 그 내용에 취한 듯 시간도 바깥 사정도 잊고 빠져들고 있었다.
* * *
냉기만 그득한 외딴 섬에서 십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푸릇푸릇하던 섬은 대량의 독무가 내려앉아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황량한 섬으로 변하였고, 제혼은 섬 중앙에 앉아 갈라진 비석 옆에서 정좌를 하고 있는 반면 금동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귀무 잔혼이 든 검은 상자가 제혼 옆 돌 위에 놓여 있었다.
갑자기 검은 상자가 흔들리고 귀무의 잔혼이 힘없이 떠올라 걱정스럽게 제혼을 보았다.
“비석 입구가 닫힌 지 십 년이 다 되어 갑니다. 수사의 주인은 진작 저 안에 갇혀 버린 것 같은데 고집스럽게 이곳을 지키고만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나를 데리고 육도윤회반을 찾으러 가서 전생의 기억을 떠올려 봅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을 낼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귀무의 충고에 제혼은 한두 번 듣는 소리가 아니라는 듯 표정 변화 없이 무시했다.
그때 바람 소리가 들리고 금빛이 떨어져 내려 귀무 잔혼이 그 여파에 흔들렸다.
금동이 연기처럼 그 안에서 나타나 손에 든 검은 짐승을 흔들어 보였다.
“또 자기를 데리고 가자든?”
“한두 번 듣는 소리도 아닌걸.”
금동의 물음에 제혼이 눈을 뜨고 미소 지었다.
“의식연계도 중단되었다면서 정말 주인이란 자가 돌아올 거라 믿는 겁니까?”
귀무가 포기할 수 없다는 듯 따졌다.
“당연하지. 아저씨니까!”
금동이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주인님은 반드시 돌아오실 거예요.”
제혼도 이번에는 간결히 답해주고 눈을 감았다.
금동은 귀무 잔혼을 한 번 흘겨주고 상자가 놓인 돌 옆에 주저앉아 잡아 온 작은 짐승을 만지작거렸다.
한숨을 푹 내쉰 귀무는 연기로 변해 상자로 돌아갔다.
* * *
그 시각 염라부 비경 안.
처음 그 자리에 앉은 한립 주위에 금빛은 사라졌고 몸 곳곳에 선규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1,319개의 선규는 대라 중기 최고봉 수준이었다.
“전에는 원치 않아도 오더니, 이번에는 바라고 바라도 오지 않는구나. 참시라는 것은 정말로 인연이 닿아야 하는 일이었어.”
천천히 눈을 뜬 한립이 탄식했다.
광음천선대진은 진작 거둬지고 천인경 영역만 펼쳐져 있었다.
사실 2년 전에 선규들을 다 뚫었건만 출관을 하지 않고 두 번째 참시를 해보려 했다.
그러나 참시부로 억지로 불러낸 악시와 달리 다음으로 해결해야 할 선시(善尸)는 어떻게 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광음천선대진 속에서 수십만 년을 수련했으니 바깥도 최소 십 년은 흘렀겠지. 아이들이 걱정하겠구나.”
한립은 툭툭 털고 일어났다.
오행환세결이 완전해지면서 광음천선대진의 시간차공간도 몇 배로 위력이 강해져 바깥의 일 년이 진법 내부의 삼만 년과 똑같았다.
손을 저어 오행황세로 산, 강, 달, 별, 숲 등으로 변했던 시간법칙 보물들을 불러들이니 법칙정사의 수가 천팔백여 개는 되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1,800개가 된 후로 법칙정사의 수를 늘릴 수 없었다.
수련하며 대라 중기 최고봉 경지에 이르고 법칙정사를 늘린 것 외에도 진언문의 강력한 신통들도 익힐 수 있었다.
미라노조의 바람대로 대라 후기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훨씬 강해졌다.
생각을 정리한 그는 손짓해서 금색 소용돌이를 만들고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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