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8화. 귀무와의 동행
*
제혼은 동요하듯 눈빛이 흔들렸다.
“명왕이 유명계로 돌아온 뒤 혈려는 봉인에서 깨어났고, 이 넓은 유명계에서 날 만났습니다. 이 모든 게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 운명으로 정해진 만남인 겁니다.”
귀무의 설득에 제혼이 망설이며 한립을 바라보았다.
“유명계의 세력다툼에 관심은 없다지만 육도윤회반은 찾아보아도 나쁘지 않을 듯싶습니다. 물론 그 전에 염라부에 가야겠지만요.”
고개를 끄덕인 한립이 원하는 바를 밝혔다.
“그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염라부가 어디 있는지 안다는 겁니까?”
“얼마나 빨리 이동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빨리 갈 수 있으면 보름밖에 안 걸리는 거리에 있습니다.”
귀무의 말에 한립은 속으로 기뻐하면서도 겉으로는 고민하는 척했다.
“수사가 염라부에 갔다가 나를 데리고 육도윤회반이 있는 황천대택으로 가준다고 약속만 한다면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그걸 본 귀무가 덧붙였다.
그제야 한립은 고개를 끄덕여 제안을 받아들였다.
“약속도 했겠다, 이제 봉인을 풀어주시죠?”
“산혼사는 제혼이 손을 쓰면 된다지만 나머지 두 봉인도 기괴하군요. 귀무 수사에게 생각이 있으십니까?”
“이 나무는 양시목(陽翅木)으로 만들어졌는데, 겉보기에는 다 탄 것 같지만 속에서 육신염(育神焰)이 타고 있습니다. 수사에게 이걸 억제할 만한 극음(極陰)의 기운을 지닌 물건이 있으면 내가 빠져나올 수 있을 겁니다.”
귀무가 답했다.
“그럼 이 상자는 어떻게 열면 좋겠습니까?”
“내 혼백이 달아날까 봐 특별 제작한 상자인데 그간 제가 애를 써가며 개조를 해두어서 이미 내 혼백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습니다. 이걸 그냥 열면 한 줄기 남은 내 잔혼이 바람만 불어도 흩어질지 모르니 그냥 이 안에 보관해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제혼, 산혼사를 거둬주거라.”
한립이 웃으며 말하자 제혼이 손을 저어 나무의 뿌리 쪽으로 쌓아둔 금색 모리들을 체내로 빨아들였다.
“네 몸을 보할 방법을 찾고 있었는데, 드디어 때가 되었구나.”
그걸 본 한립이 이렇게 말하는데 귀무는 누구에게 말하는지 몰랐다.
곧 한립의 어깨에 은색 소인이 나타나 펄쩍펄쩍 뛰면서 신이 나서 검은 나무로 뛰어들었다.
“이건…….”
“정염의 불입니다. 극양의 성질을 띠니 양시목을 억제하기보다는 자신의 것으로 흡수할 수 있을 거예요.”
“아이에게 조심 좀 해달라고 해주세요. 내 뼈가 다치지 않게 말입니다.”
귀무는 얼른 말을 마치고 연기로 변해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한립은 웃으며 그가 바라는 대로 정염 불새에게 주의하라고 말해주었다.
은색 불길이 활활 타올라 양시목을 삼키는 동안 한립 일행은 정좌를 하고 휴식을 취했다.
잠시 후 화염을 거두고 다시 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간 정염 소인은 마치 술에라도 취한 듯 비틀비틀 한립의 어깨로 튀어 올라 몸속으로 돌아갔다.
하얀 모래섬 위에 나무가 사라지고 검은 유골과 검은 상자만 바닥에 놓여 있었다.
“귀무 수사, 출발하겠습니다.”
한립은 제혼에게 눈짓을 해 산혼사로 유골과 상자를 감싸게 했다.
“이렇게 신중한 수사와 같이 다니게 되어 다행입니다.”
상자 안의 귀무는 원망하는 기색 없이 평온하게 답했다.
* * *
이레 뒤.
먹구름 가득한 하늘은 유난히 아래까지 내려와 있는 것 같고 공기 중에는 썩은 내가 진동을 했다.
한립 일행은 암석이 가득한 검은 산맥에 도착해 흩어진 뼈들이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도깨비불을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높은 절벽 길로 들어선 그들 옆으로 끝을 알 수 없는 만장 심연에서 피비린내가 올라왔다.
“아저씨, 이 녀석 말을 믿어도 될까요? 제혼도 아무것도 감응하지 못했다는데 그냥 날아가지 않고 힘들게 절벽 길로 갈 게 뭐예요.”
금동이 전음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유명의 땅은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곳이니 제혼이 발견하지 못한 위험이 없을 거라 단정할 수 없다. 게다가 귀무가 우리를 속일 이유도 없고.”
“맞아요. 며칠 동안 길 안내를 잘했잖아요. 우리가 유명계의 귀성(鬼城)들을 다 피해 돌아갈 수 있게 해줘서 성가신 일도 줄었고요.”
제혼도 거들었다.
“귀무 수사, 이 상혼애(喪魂厓) 위에 도사리고 있다는 귀망(鬼蟒)은 대라급 실력을 지녔다면서 왜 이곳에 자리를 잡고 떠나지 않는 겁니까?”
한립이 입을 열었다.
“모르겠습니다. 복잡한 사정을 지닌 이무기라서요. 듣자니 생전에 용이 될 자질을 갖추었었는데 어린 자식을 대신해 천겁을 연달아 7번 맞고는 죽었답니다. 그 원한 때문인지 유명계에 와서도 부단히 수련해서 생전보다 더 강해졌다고 하고요. 이 상혼애에 머물며 고공으로 지나가려는 자들은 누구든 쫓아 죽이지만 산길로 얌전히 지나면 먼저 건드리지 않으니 피하는 게 상책이지요.”
귀무의 목소리가 한립이 허리춤에 맨 주머니에서 들려왔다.
“상혼애 상공에는 종일 먹구름이 가득하니 누군가 고공으로 지나면 구름이 요동쳐 꼭 천뢰가 떨어질 때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겠군요. 그래서 공격을 하는 것일 지도요.”
잠시 고민하던 한립은 이런 추측을 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고공의 먹구름 속으로 둔광이 번쩍 지나갔다. 누군가 하늘을 날아 산을 지나려는 것 같았다.
먹구름이 요동쳐서 천둥소리가 들리지 않을 뿐이지 정말 천뢰가 떨어지려는 현상과 비슷했다.
“하필 지금! 절벽 쪽으로 바짝 붙어 빠르게 지나갑시다.”
귀무의 목소리가 재촉했다.
한립 일행도 안색이 변해 속도를 높였다.
쿠쿠쿠.
심연 깊은 곳에서 바람이 몰아치고 거대한 신영이 치솟았다.
한립은 검은 ‘벽’ 같은 게 심연 깊은 곳에서 우뚝 솟아 구름까지 이어지는 걸 보았는데 크고 작은 비늘들이 절벽을 스치며 불똥이 튀고 있었다.
하늘로 완전히 떠오른 머리에 뿔이 달린 검은 구렁이는 길이만 수십만 장에 이르렀고 두 눈이 등대처럼 녹색 빛을 비추었다.
“수행이 또 늘었군요. 이제 대라경 후기쯤 되겠습니다.”
귀무가 찬탄했다.
“귀물이 그렇게 빨리 수련한다고?”
금동이 믿기지 않는 듯 말했다.
“만황계역에도 역천의 능력을 지닌 진령이 있는데 유명계라고 불가사의한 존재가 없을 이유가 있습니까? 저게 나보다 더 오래 살았을 겁니다. 우리에게 신경 쓰지 않을 때 얼른얼른 갑시다.”
귀무가 하는 말에 일행은 더욱 속도를 높였다.
그렇게 절벽 길을 지나 산봉우리의 다른 길에 이르렀을 때 문득 고개를 든 한립은 고공 구름 속 녹색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귀망은 그들의 존재를 인지하면서도 공격하지 않았다.
“귀무 수사, 솔직히 말씀해 보시지요. 귀망과 아는 사이인 것 아닙니까?”
한립은 안심이 되지 않아 다시 확인했다.
“난 정말 모릅니다. 귀망이 염라역에 자리를 잡고 있다지만 가까이 지낸 적이 없단 말입니다.”
“됐습니다. 앞으로 이런 존재가 있으면 멀리 피해가도록 하지요.”
“휴, 그러니까 내가 돌아가자니까 다른 귀성에 가지 않으려고 여기로 온 것 아닙니까.”
귀무가 한숨을 내쉬었다.
* * *
시간이 지나 한 달 뒤, 염라역 서부 변경.
산맥은 보이지 않고 거대한 호수가 시야를 가득 채우고 뿌연 독무와 썩은 내를 풍겼다.
그 동쪽 연안에 송곳니처럼 튀어나온 반도(半島) 끝에 키 큰 사내가 서서 고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바로 한립이었다.
다채롭게 반짝이는 구름이 겹겹이 껴서 호수와 달리 좋은 풍경을 이루었다.
“아저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그 혼례복 입은 처녀 귀신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금동이 그 뒤에 서서 농을 했다.
“금동…….”
미간을 좁힌 한립이 혼을 냈다.
“아니 왜요? 솔직히 아저씨가 그렇게 잘생긴 건 아니잖아요. 그 처녀 귀신이 죽기는 했어도 생긴 건 기가 막히던데. 아저씨에게 반했다는 귀신을 마음을 받아주기는커녕 검으로 그냥 베어 넘겨서야 쓰겠어요? 너무 무정한 처사였죠. 제혼, 네 생각은 어때?”
금동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뒷짐을 척 쥔 채 어른이 훈계하듯 말했다. 그러나 제혼이 옆에 서서 끼어들지 않고 웃기만 했다.
이들이 말하는 처녀 귀신은 고명한 환술을 쓰는 귀물로, 한립의 영목신통과 제혼의 의식 감응까지 썼는데도 사흘을 귀물의 환술에 갇혀 있었다.
그러다 귀무의 조언으로 환술 진법의 주축이 되는 물건을 발견해서 귀물을 잡아 죽였는데, 그게 금동에게 인상 깊었던 모양이었다.
한 달 동안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한립도 유명계에는 참으로 이상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귀무 수사, 호수가 평온해 보이기는 하지만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겠지요?”
한립은 금동의 장난을 받아주지 않고 말했다.
“후. 유명계에 안전한 곳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됩니다. 이곳도 풍경은 보기 좋지만 호수의 독무가 오래도록 퍼지지 않고 쌓여 하늘 위에도 오채색 독운(毒雲)이 드리운 겁니다. 하지만 다들 대라의 몸을 지녔으니 고공으로 비행만 하지 않으면 무탈할 거예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그래서 염라부는 대체 어디 있는 겁니까?”
“멀지 않았습니다. 곧 도착합니다.”
한립의 질문에 귀무가 가볍게 답했다.
“그 말만 몇 번째죠?”
제혼이 그런 귀무를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황량하기만 하고만. 주변에 건물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데 우릴 속여서 이상한 곳으로 데려갈 생각은 아니고?”
금동도 의심스럽다는 얼굴이었다.
“내가 이 꼴을 해서 수사들을 속일 리가 있겠습니까! 염라부는 실은 이 호수 중간에 있는 섬에 있습니다. 기괴한 진법으로 둘러싸여 있는 곳이라 아무도 들어간 적은 없지만……. 어떻게 이상한지는 직접 보면 알게 될 거예요.”
귀무는 급히 해명했다.
“직접 확인할 테니, 길을 안내해 주시지요.”
한립이 담담히 말했다.
“이 방향으로 삼십만 리 정도 가면 숲이 나오는데 일단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귀무의 말에 한립 일행이 날아올라 호숫가를 따라 저공비행을 시작했다.
얼마 후, 정말 시야의 끝에 검은 숲이 들어왔다.
나무들이 굵고 튼실했는데 마치 탄화된 듯 새까맣게 말라붙어 사방으로 뻗은 가지가 악귀의 손톱 같아 보였다.
그 아래 축 늘어진 덩굴에는 빼곡하게 썩은 시체들이 걸려있어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뒤쪽으로 독무가 진하게 껴서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런 숲이 간격을 두고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듯했다.
한립 일행이 다가가려는데 귀무가 경고했다.
“현시귀등(懸尸鬼藤)들은 한 번 엉키면 풀기 어려우니 가까이 다가가지 말고 이곳을 좌표 삼아 북쪽으로 백칠십만 리 정도 이동하면 귀신처럼 생긴 바위가 호수에 떠있을 겁니다. 그곳에서 서쪽으로 팔십만 리를 이동하면 염라부가 위치한 섬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 * *
귀무의 안내에 따라 한립 일행은 장장 사흘을 날아 호수 안의 외딴 섬에 도착했다.
천여 리 정도 규모의 섬은 결계가 쳐져 있어 독무가 격리되었기에 홀로 맑은 하늘을 지키고 있었다.
한립은 결계 속에 강대한 시간법칙의 힘이 담겨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결계 바깥에서 본 섬은 모든 것이 정지된 것처럼 보였다.
나뭇잎이며 풀 모두 바람이 흩날리던 그 모습으로 정지되어 있고, 하늘을 날아다니던 새조차도 날개를 펄럭이는 모습으로 하늘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곳이 염라부라고요?”
“맞습니다. 바로 여깁니다.”
제혼의 물음에 귀무가 답했다.
“신기하네.”
금동도 흥미를 보였다.
“결계 안에 시간법칙의 힘이 충만해서 내부를 강력하게 봉인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지요. 아무도 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적이 없고, 나오는 것도 당연히 본 적이 없습니다.”
귀무가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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