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7화. 삼왕
*
한립은 강물이 시작되는 음침한 산맥 쪽을 쳐다보았다.
먹구름이 산 정상에 걸린 검은 산맥은 보기만 해도 답답해 보였다.
“아저씨, 가볼 거예요?”
금동이 물었다.
“조금 전 도깨비불은 미약한 잔혼이었을 것이다. 다만 우리더러 왜 오라는 것인지 모르겠으니…….”
“함정일까요?”
이번에는 제혼이 물었다.
“글쎄, 우린 유명계가 처음이고 귀병들은 뒤에서 쫓고 있으니 앞을 막아서고 있다가 함정을 팔 존재가 있을까?”
“왜 부르는지 가보면 알겠죠, 뭐.”
금동이 고민하기도 귀찮은지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해둔 곳도 없었으니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염라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제혼도 찬성했다.
“그래, 어디 한번 가보자꾸나.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당부를 마친 한립은 금동과 제혼을 데리고 상류 쪽 골짜기로 나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입구에 도착했는데 양쪽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길이 절벽을 따라 나 있었다.
세 사람은 왼쪽에서 왔기에 왼쪽 길을 따라 걸어갔다. 그러자 잠시 후, 옆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는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협곡을 따라 맹렬하게 흐르는 붉은 강은 꼭 만 마리 교룡들이 얽혀 싸우는 것처럼 보였다.
골짜기는 호리병 모양이라 처음에는 좁았지만 중간 부분의 면적이 넓었다. 골짜기 중부에 이른 한립 일행은 걸음을 멈추었다.
이미 옆 계곡의 폭이 수백 장에 이르고, 그 가운데 모래가 쌓여 만들어진 땅이 있었는데 하얀 모래 속에 금색 분말 같은 게 섞여 반짝였다.
이상한 점은 그 중간에 검은 고목이 불에 탄 듯 탄화가 되어 서 있고 그 가장 높은 가지에 똑같이 새까맣게 타버린 유골이 가슴을 뚫려 매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유골은 품에 네모나고 검은 큼지막한 상자를 품고 있었다.
“미약하지만 혼백 파동이 남아 있어요. 아까 말을 건 자가 저자인가 봐요.”
제혼이 유골과 멀찍이 떨어져서 말했다.
의식을 퍼트려 백 리 안에 이상한 낌새가 없는 걸 확인한 한립이 입을 열었다.
“그럼 가보자꾸나.”
그가 먼저 나서자 제혼과 금동도 날아올랐다.
발이 모래섬에 닿은 한립은 생각보다 지면에 부드러운 것을 느꼈다.
제혼이 곧장 몸을 숙여 모래를 한 움큼 들어 올려 보고는 놀란 얼굴을 했다.
“무슨 문제가 있느냐?”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 뼛가루에 금색 모래가 섞여 있어요.”
“금색 모래?”
한립은 의문을 드러냈다.
“산혼사(散魂沙)입니다. 혼백을 쫓아내어 의식과 관련된 술법이나 귀도 공법을 익힌 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재료이지요.”
이때 나무 위에서 불쌍할 정도로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립 일행이 고개를 들자, 까맣게 탄 유골에서 하얀 연기 같은 게 한 줄기 피어올라 바싹 말랐지만 인자하게 생긴 금색 깃털 옷을 입은 파파노인으로 변했다.
주변으로 안개가 떠오르고 뒤로 오색 후광이 비추는 것이 꼭 선인이 등장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보기에 그리 편하지 않았는데. 유골을 찌른 나뭇가지가 노인 허상의 가슴도 뚫고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부처의 자비는 한량이 없으니…….”
늙은 도사는 신비로운 미소를 띠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한립 일행은 멍하니 서로 시선을 마주치고 말없이 도사를 바라보았다.
“크흠, 저는 진선계 건원선역(乾元仙域) 태일문(太一門) 태상장로 천건자라 합니다. 백만 년 전에 사악한 자의 계략에 빠져 이 지경이 되었지만, 여러분을 만난 것도 다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저를 도와 곤경에서 빠져나가게 해주신다면 후에 크게 사례할 것입니다.”
노도사는 그들이 말이 없자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고는 자기소개를 했다. 그러면서 제혼을 힐끔거리는 게 그녀의 반응을 가장 신경 쓰는 듯했다.
“아저씨, 왠지 어디서 들어본 구절 같지 않아요?”
금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혈려라는 자가 한 이야기에서 이름만 달라졌네요.”
제혼이 듣고 웃음 지었다.
“너희 유명계는 사기를 치는 수법이 어찌 그리 한결같으냐? 좀 창의적인 대사는 없는 것이냐?”
금동이 멸시하듯 노도사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말에 노도사는 서둘러 물었다.
“혈려를 만난 겁니까!”
“보았다마다요. 그 헛소리에 속았고요. 잘 아는 사이인가 봅니다?”
한립은 장난스럽게 물었다.
“아뇨, 아닙니다! 잘 알다니요, 철천지원수에 가깝지요!”
노도사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목을 움츠렸다.
“아, 그래요? 진선계 수사가 유명계 존재와 철천지원수라.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립이 냉소를 흘렸다.
노도사는 이제 포기한 것 같았다.
“하여튼 진선계 수사들은 하나 같이 영특해서 속이기가 쉽지 않단 말입니다.”
말을 마친 그가 탄식하고 하얀 연기로 돌아갔다.
연기가 사라지고 나타난 것은 쪼글쪼글한 검푸른 피부를 지닌 원숭이를 닮은 악귀였다.
머리는 크고 이마는 툭 튀어나와 뿔이 달렸고, 코는 낮은데 입은 툭 튀어나와 털 없는 원숭이가 따로 없었다.
헐벗은 상반신에는 오래된 상처가 가득했다.
악귀로 변한 다음에도 아주 쇠약하고 힘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진짜 정체가 무엇입니까?”
한립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휴, 말하면 될 것 아닙니까. 내가 3대 부군(府君) 중에 하나인 귀무왕으로 예전에는 혈려왕, 명왕과 함께 한 지역을 관장하고 수많은 귀물을 다스리는 신분이었습니다. 이간질에 당해 혈려왕을 다리에 봉인해 두고는 명왕과 사이가 벌어져 이간질한 자만 어부지리를 얻었지만요. 그러다 이 꼴이 난 겁니다.”
악귀가 길게 한숨을 쉬더니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는 말을 하면서 수시로 제혼을 힐끔거렸다.
“귀무왕?”
눈을 가늘게 뜬 한립은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상대를 훑었다.
“그냥 귀무라고 부르세요. 장수는커녕 병졸도 한 명 거느리지 못하고 있는데 왕은 무슨 왕입니까?”
“당신과 다른 왕들의 이야기에는 관심 없습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단 두 가지입니다. 첫째, 우리를 불러들인 이유. 둘째, 염라부의 위치.”
“당신들을 부른 거야 당연히 날 구해달라고 하기 위해섭니다!”
“우리가 왜 그래야 합니까? 방금 전에 인정을 베풀어 혈려를 봉인에서 풀어줬다가, 그자가 우리를 죽이려 들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혈려 그놈이 머리가 없다고 나까지 그런 줄 압니까? 당신들이 나를 구해줄 거라 믿는 이유는 첫째, 명왕과의 관계 때문이고. 둘째, 잔혼만 남은 난 어차피 당신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설마 잔혼마저 두려워하는 겁니까?”
귀무는 열성적으로 외쳤다.
“명왕이라니 여기서 명왕은 또 왜 나오는데?”
듣고 있던 금동이 끼어들었다.
“우리 셋 중에 가장 끔찍하게 당한 게 명왕이었지요……. 혈려는 봉인당하고 난 거의 죽을 뻔했지만 기억이라도 남았지면, 명왕은 죽어서 윤회를 했으니까요.”
귀무는 말을 하며 의미심장하게 제혼을 보았다.
그걸 본 제혼이 알겠다는 눈빛으로 금동과 한립을 보았다.
“이 아이가 명왕이 환생한 존재란 말입니까?”
한립이 입을 열었다.
“명왕이 환생한 게 아니라면 어떻게 혼백에 관련한 술법을 익혔으며, 또 어떻게 이런 독특한 혼백 기운을 지닌단 말입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들 중에 유일하게 이 모래섬의 산혼사에 반응했다는 겁니다. 이 산혼사는 원래가 명왕이 남겨 놓은 거니까요.”
귀무가 탄식하듯 설명했다.
“내가 명왕이었다고?”
제혼은 감히 믿기가 어려운 듯 혼잣말을 했다.
“믿기지 않으면 혼백의 힘으로 이 금색 모래들을 불러들이려 해보세요. 산혼사의 반응을 보면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게 될 겁니다.”
귀무의 말에 제혼이 반신반의하며 양손을 합장해 혼백 파동을 퍼트렸다.
잠시 후 모래섬이 웅웅, 떨리고 모래 가루 속의 금색 모래가 알알이 떠올라 비단처럼 길게 늘어졌다가 아래위로 자유롭게 움직였다.
천천히 눈을 뜬 제혼은 이게 가능한 게 믿기지 않았지만, 의식을 움직이자 금색 모래 띠가 날아들어 친근하게 그녀 옆을 맴돌았다.
“봤지요? 내 말이 맞지 않습니까!”
귀무의 눈빛에 희색이 어렸다.
“제혼, 그걸로 고목의 뿌리 부분을 덮어두거라.”
그러든 말든 한립은 냉랭히 말했다.
제혼이 그의 지시에 망설이 없이 따르고 있었다.
“뭐, 뭐 하자는 겁니까! 왜 이러는 거예요!”
곧바로 귀무가 비명을 지르며 불평을 해댔다.
“불쌍한 척 그만하시죠. 제혼이 금색 모래를 거두게 유도한 건, 당신이 금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내 짐작대로면 당신은 삼중으로 봉인되어 있습니다. 금색 모래, 고목 그리고 그 상자. 아마 혼백도 그 상자 속에 봉인되어 있을 테고요?”
한립의 차분한 분석에 귀무도 더는 억지를 부리지 않고 말했다.
“아주 대단한 안목을 지녔습니다? 그래요, 삼중으로 봉인되어 있고 혼백은 상자 안에 갇혀 있는 처지입니다. 어쨌든 당신들을 속인 건 아니지 않습니까. 오랜 세월 혼백이 거의 사라져, 이제 남은 건 다 죽어가는 이 잔혼 뿐이에요. 복수를 갈망하는 잔혼! 당신들에게는 아무런 적의가 없단 말입니다.”
“이 아이가 명왕이란 건 확실한 소립니까?”
“아마 내가 잔혼이라 더 확실히 느끼는 것 일지도요. 제혼이라는 수사는 확실히 명왕의 환생이에요. 예전에 남의 이간질에 내 육신을 멸하고 이곳에 봉인을 해두었지만 그녀도 좋은 꼴이 나지는 못했으니 우스운 일이지요.”
귀무는 조소하듯 말했으나 제혼은 기억이 없었기에 아무렇지 않았다.
“내가 빠져나가고자 하는 것은 꼭 복수 때문만은 아니고 유명계가 몰락해 삼계(三界)가 혼돈에 빠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서이기도 합니다.”
얼굴을 푼 귀무가 탄식을 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제혼이 물었다.
“기억을 잃었다지만 육도윤회반(六道輪回盤)은 기억하겠지요?”
“육도윤회반?”
귀무의 말에 제혼은 따라 읊조리기는 해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유명계의 보물인 육도윤회반은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의 윤회와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보물입니다. 그자가 우리를 이간질한 것도 그걸 노려서고요.”
귀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설명했다.
제혼은 그냥 듣고만 있었지만 흥미로운 얼굴이었다.
“우리를 하나씩 쳐낸 그 자는 스스로를 전륜왕이라 칭하고 유명계를 장악하고 있어요. 그는 귀물 세력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육도윤회반을 이용해 혼백의 환생에 관여하고 윤회의 힘을 흡수해 수련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거야말로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이대로 놔두면 유명계는 물론이고 다른 계면들도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겁니다.”
귀무는 계속해서 말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봉인되어 있었는데, 유명계 일을 어찌 그리 잘 알고 있는 겁니까?”
미간을 좁힌 한립이 질문을 했다.
“수사도 짐작을 했겠지만 이곳에 쌓인 백골들은 내가 그간 불러들여 양식으로 삼은 것들의 잔해입니다. 그러지 않았으면 강대한 금제의 힘에 진작 잔혼마저 사라져 버렸겠지요.”
귀무가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에게 속아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겠군요.”
“여기까지 어렵게 버텨 왔지만 이제 정말 꺼져가는 등불과 다름없는 신세입니다. 명왕과 수사들이 와주어 살길이 열릴 것 같지만요…….”
“나는 당신이 말하는 전생이니 윤회니 하는 것들을 모릅니다. 기억도 없고, 관심도 없고요.”
제혼이 인상을 찌푸리고 선을 그었다.
그녀가 명왕이었다는 근거는 잔혼이 지껄인 헛소리뿐이었고, 그녀에게는 영계에서 의식이 생긴 뒤에 한립과 보낸 세월만이 진짜였다.
“윤회를 하며 전생의 기억을 잃어서 그렇지, 전생의 기억을 찾기만 하면 그리 말하지 못할 거라 장담합니다.”
“전생의 기억을 찾는다고요?”
한립은 처음 들어보는 소리에 의문을 드러냈다.
“황천대택(黃泉大澤)으로 가서 육도윤회반만 찾으면 그걸로 전생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전생의 기억을 깨우치고 윤회비술로 전생의 수련경험까지 얻게 되면 법칙의 힘이 크게 늘겠지요. 그때가 되면 내가 혈려를 설득할 테니, 우리 셋이 동맹을 맺어 전륜왕을 물리칠 수 있을 겁니다. 유명계가 우리의 것이 되는 거라고요!”
귀무는 자신의 이야기에 스스로 고무되어서 눈을 반짝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