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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176화 (1,933/2,000)
  • 2176화. 전륜왕(轉輪王)

    *

    “봉인을 풀어드렸으니 약속대로 안내를 부탁드립니다.”

    한립은 뒷짐 쥔 손에 빛을 응결하고 말했다.

    “유명의 땅은 원래 귀화(鬼話)가 난무하는 곳이다! 누가 그런 허튼소리를 믿으라더냐? 내 도끼의 밥이나 되거라!”

    미친 듯 소리친 머리 없는 사내가 손에 커다란 핏빛 도끼를 불러냈다.

    쿵.

    한 손에 도끼를 든 사내는 강대한 기운을 드러냈다.

    “대라 최고봉의 인물이 어째서 여기 봉인되어 있었던 겁니까? 정체가 뭡니까?”

    손목을 돌려 청죽봉운검 한 자루를 불러낸 한립이 소리쳤다.

    “내 이름은, 혈려다!”

    머리 없는 사내가 바닥을 쿵, 박차고는 온몸에 붉은 광채를 둘렀다.

    연달아 허상이 보이고 아무도 그가 어디로 가는지 모를 때 제혼 뒤에서 도끼가 날아들었다.

    “조심!”

    한립이 시간법칙을 운용해 순식간에 그를 따라잡았다. 제혼도 앞으로 튀어 나가 도끼의 칼날을 피하고 있었다.

    서걱!

    제혼의 등 쪽 의복이 터지면서 피가 튀었다.

    거의 동시에 한립도 혈려 뒤에서 장검을 찔러 넣었는데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등지고 있던 혈려의 관절에서 달칵, 하는 소리가 들리고 팔이 반대로 꺾여 핏빛 도끼로 한립의 청죽봉운검을 막은 것이다.

    눈을 번득인 한립은 청죽봉운검에서 금빛 뇌전을 방출했다.

    치지직!

    천도신뢰가 날아가 혈려를 뒤집었다.

    금색 뇌전이 스치자 가슴의 두 눈을 감은 혈려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때 제혼은 몸을 피해 금동 옆으로 이동해 있었다.

    금동이 힐끗 보니 제혼의 등이 좍 갈려 등뼈가 보일 정도로 깊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

    화가 치민 금동이 금빛을 반짝이며 혈려를 향해 달려들었다.

    흐오오!

    이때 괴성을 지른 혈려의 도끼에서 주술문자가 날아올라 핏빛 소용돌이를 이루고 한립의 금색 뇌전을 모조리 빨아들였다.

    곧이어 타닥타닥 금색 뇌전을 머금은 핏빛 도끼가 한립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걸 본 한립은 맞서지 않고 옆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자 흡수한 도천신뢰를 전부 써버린 혈려의 도끼가 다시 핏빛 광채를 내면서 잔영처럼 그를 뒤쫓았다.

    그렇게 절반쯤 갔을 때 금빛으로 변한 금동이 돌진했다. 혈려는 맹렬히 몸을 돌려 도끼로 금동을 가르려 했다.

    그 순간, 금빛을 터트리며 서금선 본체로 돌아간 금동은 도끼를 피하지 않았다.

    쨍!

    핏빛 도끼날은 교차한 금동의 두 앞발에 단단히 붙잡혀 있었다.

    혈려가 이채를 띠며 힘을 싣자 금동의 몸이 아래로 푹 내려갔지만 그래도 도끼를 놔주지는 않았다.

    그렇게 금동과 혈려가 대치하는 사이, 고공에서 어느새 거대한 금색 뇌전 구름이 뭉쳐 콰릉, 하는 소리와 함께 웅장한 천문을 만들어냈다.

    “피하거라!”

    한립의 외침에 금동이 앞발을 풀고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가 물러섰다.

    이어서 고공에서 금빛 거검이 하늘을 가르며 떨어졌다.

    심상치 않은 공격에 혈려가 핏빛을 일으켜 피하려는데 현란한 광채가 드리워 눈앞이 흐릿해지고 혼백이 영향을 받았다.

    콰르르.

    천뢰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금색 뇌전 거검에서 치직거리는 뇌전 줄기들이 주변 천 리를 덮고 있어 혈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피하기엔 늦었다.

    그는 짜증스럽게 술법을 펼친 제혼을 힐끔 보고 커다란 도끼로 위쪽을 내리찍었다.

    핏빛이 수백 배로 퍼져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고 허공에서 금색 뇌전 거검과 충돌했다.

    꽈광!

    무언가 폭발해 현란한 빛이 터지고 호선형의 파동이 아래와 위로 갈라져 퍼져나갔다.

    쿠쿠쿠쿠…….

    엄청난 파랑이 세상을 휩쓸어 한립 일행을 쫓던 귀물 대군까지 재로 변해 사라졌다.

    수행이 높은 귀물들이 운 좋게 살아남아 귀곡성을 내며 몰려오려는 후방의 대군에게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파랑 속에서 금동도 숨이 막혀왔기에 부상을 당한 제혼을 지키면서 부단히 뒤로 물러서야 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빛과 먼지가 가라앉았다.

    뇌전 구름과 천문은 사라진지 오래였고, 한립만 고공에 떠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돌다리는 무엇으로 만든 것인지 엄청난 충격에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고, 혈려도 도끼를 든 채 그 위에 서 있었다.

    머리가 떨어진 목의 단면에서 가슴 중앙까지 갈라져 그 틈으로 흐물흐물한 장기가 다 보였다.

    아직 우뚝 서 있기는 해도 살아 있는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죽었다고?”

    한립은 이상한 느낌에 인상을 찡그렸지만 무턱대고 다가가 알아보지 않고 금동과 제혼 쪽으로 내려섰다.

    “아저씨, 이긴 거예요?”

    금동이 서둘러 물었다.

    “부상은 어떠하냐?”

    한립은 고개를 내젓고 제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 심한 상처는 아닌데, 상처에 이상한 법칙의 힘이 맴돌아서 갈라진 자리가 안 붙고 있어요.”

    제혼이 간신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얼굴을 굳힌 한립이 그녀의 등을 살피고 손바닥으로 상처가 시작되는 목 뒤쪽을 감쌌다.

    시간법칙의 힘이 일어나 그의 손바닥에 보드라운 연둣빛 새싹이 트고, 기다랗게 뿌리가 자라 제혼의 상처 깊숙이 파고들었다.

    제혼은 고통스러웠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등의 갈라진 살 속에서 손바닥 크기의 금색 나무가 자라났다. 바로 한립의 동을신목이었다.

    나무 허상의 뿌리가 상처를 봉합하고는 금빛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저자가 모종의 윤회법칙의 힘을 써서 상처 부위가 반복해서 부상을 당했던 상태로 돌아가고 있었구나. 시간법칙의 힘으로 그 순환고리를 끊어두었다.”

    “주인님이 계셔서 다행이에요.”

    한립의 설명에 제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저 혈려란 자와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될 것 같구나. 귀물들이 언제라도 쫓아올 수 있으니 일단 떠나는 것이 좋겠다.”

    다들 같은 생각이었고, 금동은 특히나 더 떠나고 싶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돌다리 위 혈려의 몸에서 법칙 파동이 퍼져 가슴 위로 핏빛 소용돌이를 이루고 전신을 집어삼켰다.

    “왜 저러지?”

    제혼과 금동이 놀라 그것을 보았다.

    “뭘 하는 것이든 우린 가자꾸나.”

    먼 곳을 바라보던 한립이 제혼과 금동을 데리고 돌다리의 다른 쪽으로 날아올랐다.

    그들이 떠나고 보이지 않을 때쯤, 소용돌이 속에서 반라의 머리 없는 사내가 튀어 올랐다.

    혈려였다.

    부상이 나았는지 그는 기운이 최상의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쳇, 달아났잖아. 옛날에 당한 부상만 아니었으면 윤회술을 쓰는데 이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았을 것을!”

    혈려의 배가 출렁출렁 말을 했다.

    그러다 심장을 움켜쥔 몸이 비틀거렸다.

    그때 돌다리 위가 소란스러워지고 귀물들이 물결처럼 몰려왔다.

    귀물 병사들의 수장이 핏빛의 머리 없는 사내와 거리를 두고 한참을 다가서지 않다가 확인하려는 듯 그를 불렀다.

    “혈려 대인…….”

    머리 없는 사내가 그 소리를 듣고 휙 고개를 돌리자 배가 출렁였다.

    “음라, 너인 것이냐?”

    그제야 열심히 달려온 귀물 병사들의 수장이 혈려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조아렸다.

    “음라가 혈려 대인을 뵙습니다!”

    다른 귀물들도 그를 따라 꿇어앉아서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혈려는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오래도록 음라를 내려다보았다.

    “휴, 일어나거라.”

    “봉인에서 풀려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혈려 대인!”

    혈려의 말에도 음라는 바로 몸을 일으키지 않고 상반신만 든 채 축하를 했다.

    “선계 것들이 손을 써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들을 쫓는 중이었더냐?”

    “예, 어떻게 들어온 건지 막을 수가 없어 여기까지 쫓아오게 되었습니다.”

    “나도 죽이려 했으나 꽤 실력이 있더구나. 오랜 세월 봉인을 당했었고 내상이 남아 있어 놓치고 말았다.

    “대인의 부상은…….”

    음라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혈려가 손을 저어 말을 끊었다.

    “내가 봉인 당한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나 말해보아라.”

    “대인께서 실종되시고 저희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났습니다. 후에 어디서 퍼진 소문인지 대인께서 귀무의 얼경성(孼鏡城)에 구금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고요. 저는 음구, 번리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얼경성으로 쳐들어갔다가 처참하게 지고 말았습니다. 번리가 전사한 후에 그 휘하의 귀물들은 대부분 명왕에게 투항했고, 나머지는 귀무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음구는 어찌 되었느냐?”

    “음구는 원래부터 저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각자 갈 길을 갔습니다. 그래도 저는 저희 구역이었던 곳을 지키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소식이 끊기더군요. 들리는 말에, 그게……. 전륜왕에게로 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륜왕?”

    혈려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명왕, 귀무와 힘을 합쳐 대인을 봉인했던 그 신비인 말입니다.”

    “그자를 아느냐?”

    “대인을 봉인하고는 저희의 대부분 지역을 점령하고 스스로를 전륜왕이라 칭했습니다. 명왕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그를 보고 쳐들어갔다가 죽임을 당했고요. 그 심복이던 잔병들이 저희 쪽에 붙으면서 대인께서 봉인된 진상을 알려주었습니다. 그저 봉인을 풀 방법이 없어 이렇게 오랫동안 고생을 하시게 두고 보는 수밖에 없었지만요.”

    음라가 설명했다.

    “명왕도 그럼 벌써 죽었단 말이냐?”

    혈려는 마치 아쉽다는 듯 물었다.

    “명왕만이 아닙니다. 귀무도 죽었습니다. 모두 전륜왕에게 당했지요. 흑하역, 지명역, 염라역이 전부 전륜왕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뭐라?”

    혈려, 명왕, 귀무가 군림을 하는 동안 혈려의 전력이 가장 강하고, 명왕은 방어를 잘하며 귀무는 교활해서 균형을 이뤘었다.

    게다가 독하고 은밀한 손속은 물론이고 목숨을 보전하는 능력으로는 다들 일류였는데 전부 전륜왕에게 당했다는 게 놀라웠다.

    “이제 보니 우리가 다 전륜왕에게 놀아난 것이었구나. 윤회법칙 수련 비술에 눈이 멀어서 끝없이 서로 싸우기만 했던 것이 그놈이 파고들 기회를 준 것이었어! 그래, 다 자업자득인 게지! 하하하.”

    혈려는 갑자기 배를 울리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대인, 이제 깨어나셨으니 십만 년 정도만 요양하시면 전륜왕에게 복수를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음라가 포권을 해보였다.

    “십만 년은 너무 길다. 게다가……. 지금 복수할 기회가 없는 것도 아니고.”

    혈려가 냉랭히 중얼거렸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아까 쫓던 선계 수사들 중에 눈에 익은 자가 없더냐?”

    “음……. 흑의소녀의 신통이, 아무래도 명왕과 비슷한 것 같았습니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던 음라도 뭔가를 깨달았다.

    “그래, 내 확신하건데 그 아이가 명왕이 환생한 존재일 것이다. 전륜왕을 이기고 유명계를 되찾으려면 반드시 그녀의 기억을 되살려 우리에게 협조하게 해야 할 것이야.”

    “그렇다면 굳이 쫓아가 죽일 필요는 없겠군요?”

    “죽일 필요는 없되, 행적은 파악해 두어야 한다.”

    “존명! 당장 수하들을 붙이겠습니다.”

    “이 일은 네게 맡기마. 난 오래 묵혀둔 내상을 치유해야겠다.”

    혈려의 신형이 고공으로 치솟아 사라졌다.

    * * *

    굽이굽이 이어지는 음침한 산맥 앞에 혼탁한 검붉은 강물이 흘러갔다.

    산골짜기를 타고 내려온 물은 만 리까지 이어지며 드넓은 하얀 모래톱을 끼고 있었다.

    이때 고공에서 한립 일행이 날아들어 모래톱에 내려섰다.

    “아저씨, 쫓아오지 않는 것 같아요.”

    뒤를 돌아본 금동이 말했다.

    한립도 뒤를 살피고는 제혼을 향해 어떠냐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저도 추격병은 감지되지 않아요. 떨쳐버렸나 봐요.”

    제혼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한립이 주위를 둘러보다 미간을 좁혔다.

    발밑의 하얀 모래톱은 곳곳에 뼈다귀 천지였는데, 크기가 다양한 인족과 요수의 뼈였다.

    무릎을 굽혀 쌓여 있는 뼈들을 치워내고 하얀 모래를 쥐어본 한립은 그것도 뼛가루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많은 뼈가 나 어디서 나온 걸까요?”

    제혼이 의아해했다.

    “상류에서 오랜 세월에 거쳐 떠내려온 것들이 세월이 흘러 뼈만 남고 죄다 부식된 것 같구나.”

    한립이 말을 하는 동안, 돌풍이 상류 쪽에서 불어와 뼛가루들을 일으켰는데, 그 안에 콩알 크기의 녹색 빛이 반짝였다.

    강을 따라 나타난 녹색 불꽃을 보고 있자니 흐릿한 사람의 얼굴 같은 것이 떠올라 괴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체 뭐야?”

    금동이 이상하게 여겼고, 제혼도 당장 콧김을 불어 그것을 집어삼키려는 듯했다.

    “잠깐, 무슨 말을 하려 하는구나.”

    한립이 그들을 막자 녹색 불꽃 안에서 띄엄띄엄 말소리가 들려왔다.

    “골, 짜, 기…… 로…….”

    힘없는 목소리는 임종 전에 유언을 남기듯 작아지다 사라졌고, 불꽃도 빙글 돌더니 물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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