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2175화 (1,932/2,000)
  • 2175화. 다리 위의 조각상

    *

    한립이 소매를 펄럭여 불러낸 또 다른 청죽봉운검 36자루는 세 사람 앞 고공으로 떠올라 일(一) 자를 이루고 적들에게 칼끝을 겨루었다.

    이어 한립은 수결을 맺어 비검들이 대량의 금색 뇌전을 쏟아내 뇌전 검막(劍幕)으로 앞을 가리게 했다.

    금동은 서금충으로 변신하고 제혼도 유명귀조와 산혼귀적을 불러냈다.

    그들이 준비를 마쳤을 때는 귀물들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모양도 제각각이고 기운도 다양했지만 진선경이 못된 저계 귀물들 사이에 금선급도 끼어 있었다.

    심지어 태을 급 귀물도 있는 듯했다.

    수가 너무 많다 보니 기세도 대단해서 각종 공격을 쏟아내 뇌전검들을 웅웅 떨리게 했다.

    도천신뢰가 치직 거리며 일어나 전방의 저계 귀물들을 연기로 만들었지만 나머지 귀물들은 고계 귀물들의 지시를 받아 앞다투어 몰려들었다.

    귀물들은 검은 강을 굉장히 꺼리는지 전방과 좌우에서만 몰려와서 그들이 배수의 진을 치고 싸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었다.

    문제는 시야 가득 검은 그림자가 가득해 몰려든 귀물들의 수가 끝이 없어 보인다는 거였다.

    검막 방어진을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귀물들이 차례로 몰려들어 죽고 또 달려들고를 반복하다 보니 위태로워 보였다.

    제혼과 금동이 나서서 도우려 했지만 한립은 전음을 보내 힘을 비축해 두라고 했다.

    그때 멀리서 삐익,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고 미친 듯이 전진하기만 하던 귀물들이 뭉쳐 다섯 개의 거대한 진을 이루었다.

    휘휘휙!

    검 모양의 진을 이룬 귀물들이 검막에 달려들어 뇌전검막을 찢어냈다.

    튕겨 나온 36자루의 청죽봉운검들은 빛이 어둑해져 적잖이 영성을 잃은 것 같았다.

    얼굴을 굳힌 한립이 그것들을 몸 안으로 회수해 보양을 시작하고 주변을 지키던 다른 청죽봉운검들을 날려 보냈다.

    파치치칙.

    근처의 귀물 백여 마리가 한순간에 푸른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나머지 귀물들은 뒤로 밀려났다.

    금동과 제혼도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움직였다.

    제혼의 유명귀조가 검은 불길을 일으키고 귀물들을 할퀴었고, 그녀가 부는 산혼귀적에서는 검은 음파가 칼처럼 귀물들을 베었다.

    제혼는 귀물들을 죽이면서 검은 광채를 내보내 귀물들을 흡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립과 제혼에 비해 금동의 공격 효과는 퍽 떨어졌다.

    서금선이 두 앞발을 휘둘러 수십 줄기의 금색 수정빛을 뿌릴 때마다 귀물들이 잘려서 우수수 떨어지기는 했지만, 소수의 실체를 지닌 귀물들 말고 유령, 음귀 류의 귀물들은 다시 몸을 응집해 달려들었다.

    그걸 본 금동은 마음에 차지 않았던지 방대한 몸을 해체해 작은 서금충들로 이루어진 벌레 떼를 이루고 귀물들의 몸에 달라붙었다.

    속도가 느리기는 해도 확실히 서금충들이 뜯어먹는 데는 귀물들도 도리가 없었다.

    “제길, 귀물들이 너무 많아요. 주인님, 어떻게 하죠?”

    제혼이 한참을 죽였는데 까맣게 몰려드는 귀물들을 보고 입을 열었다.

    “여기서 이러고 있느니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강을 따라 이동해 보는 것이 좋겠다.”

    한립이 결정을 내리자 세 사람은 슬금슬금 강을 따라 이동했다.

    “저쪽에 다리가 있어요!”

    잠시 후, 제혼이 깜짝 놀라 외쳤다.

    그녀가 말한 곳에는 낡은 다리가 검은 강을 가로지르며 놓여 있었다.

    암홍색 다리는 아주 길어서 끝이 보이지 않았고, 부서지고 상한 곳이 많아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키하악!

    그때 귀물들이 미치기라도 한 듯 더욱 맹렬히 공격을 가해 압박감이 커졌다.

    이에 한립은 금색 도병을 한 마리 더 불러내 돌다리를 오르게 해보았다.

    도병이 돌다리를 따라 열심히 달려도 공중의 검은 구름에서 벼락을 떨어트리거나 무시무시한 뱀과 벌레들이 강에서 솟아오르지는 않았다.

    “다리를 건넌다!”

    희색을 드러낸 한립은 냅다 소매 속에서 수백 개의 굵직한 금색 뇌전을 뿜어 인근 수십 장 안의 귀물들을 싹 쓸어버리고 제혼, 금동과 같이 다리로 올라섰다.

    돌다리에 안착한 제혼은 갑자기 다리가 풀리는지 휘청거려 한립이 부축해 날아올랐다.

    “괜찮은 것이냐?”

    귀물들은 돌다리 앞에 모여 그들을 향해 분노 어린 포효만 할 뿐 단 한 발짝도 쫓아오지 못했다.

    “귀물을 억제하는 힘이 있는 다리인 것 같아요. 저도 그 영향을 받기는 하는데 심하지는 않고요.”

    깊이 숨을 들이마신 제혼은 한립의 부축에서 벗어나 그 옆에 섰다. 한립은 조심하라는 당부를 하고는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앞은 잘 보이지 않고 머리 위의 검은 안개는 너무 가까워서 숨이 막힐 것 같은 분위기였다.

    “엇!”

    제혼이 뭔가를 발견했다.

    “왜 그러느냐?”

    “앞에, 조각상이 서 있어요.”

    “조각상?”

    어리둥절한 일행은 금방 그녀가 말한 조각상 앞에 도착했다.

    사람의 모습을 했지만 보통 사람보다 두세 배는 큰 회백색 조각상은 특수한 석재로 만들어졌는지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돌다리가 그리 넓은 편이 아니라 석상이 중간에 서서 길을 막고 있었다.

    “왜 이런 곳에 조각상을 세워뒀을까요?”

    제혼이 조각상을 관찰했다.

    미간을 좁힌 한립도 구유마동을 발동해 회백색 조각상을 쳐다보았다.

    “하하……. 진선계 수사가 유명계까지 오다니!”

    그때 조각상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진선계의 언어였다.

    세 사람은 흠칫 놀라 몇 걸음 물러섰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눈썹을 끌어올린 한립이 물었다.

    “이름이야 말해도 모를 것이고, 저도 당신들처럼 진선계에서 온 사람입니다. 오랜만에 동향 사람들을 만나니 참으로 반갑군요!”

    조각상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어려있었다.

    “정말 진선계 사람이란 말입니까?”

    “그렇다마다요! 무토선역(戊土仙域) 토황종(土皇宗) 출신입니다. 엉겁결에 유명계로 흘러들었지만요. 그보다 당신들은 무엇을 하러 유명계에 온 겁니까?”

    조각상의 질문에 옆에 선 금동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금동의 눈빛이 달라진 것은 아주 찰나였지만 한립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셋 다 산수로 당신과 마찬가지로 공간균열에 휩쓸려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한립은 차분히 답했다.

    “그랬군요! 쯧쯧, 하필 맹귀황원(猛鬼荒原)에 떨어지고 운이 안 좋았습니다. 귀물들을 뚫고 여기까지 온 게 천만다행이에요.”

    “유명계에 대해 잘 아시는 것 같습니다?”

    “하하, 잘 아는 것은 아니고요. 어쨌든 이곳에서 한동안 생활을 했었습니다.”

    “어째서 이 다리에 석상이 되어 서 있는 겁니까?”

    한립은 침묵하다 물었다.

    “휴, 나라고 이러고 있고 싶겠습니까? 적의 비술에 당해 이곳에 봉인되고 만 것이지요.”

    탄식 어린 조각상의 말에 한립은 놀라지 않았다.

    구유마동으로 고명한 봉인이 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저 그 안에 무엇이 봉인되어 있는지는 그의 안력으로도 확인할 수 없었다.

    “크흠……. 동향 사람들을 이런 곳에서 만난 것도 인연이고. 수사들의 질문에도 다 답을 주었으니, 일단 나를 좀 이곳에서 꺼내주고 계속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조각상이 희망을 품고 물었다.

    “구해 줄 수 없는 것은 아니나, 저희가 이곳에는 처음이라 그전에 유명계에 관한 정보를 들었으면 합니다.”

    “물론 말해드리지요! 다른 곳은 몰라도 흑하역(黑河域)에 대해서는 잘 압니다.”

    “흑하역이 유명계의 지명인 겁니까? 유명계에 이런 계역이 몇 개나 됩니까?”

    “유명계도 영토가 광활해서 구체적으로 얼마나 넓은지는 유명계 사람도 모를 거예요. 내가 아는 곳도 흑하역, 지명역(地冥域), 염라역(閻羅域) 이 세 곳뿐입니다.”

    한립은 ‘염라역’이란 말에 주목했으나 티를 내지는 않았다.

    “흑하역에 대해서부터 말해주시지요.”

    “흑하역은 면적이 억만리 이상이고, 여기 이 흑하(黑河) 때문에 흑하역이라 불리는 겁니다. 맹귀황원, 불사삼림(不死森林), 혈혹협곡 등 일흔여덟 개 지대를 품고 있는데, 귀물의 수가 많고 종이 다양하기는 하지만 지능이 높은 건 또 얼마 되지 않아…….”

    조각상은 줄줄 아는 바를 읊어댔고, 한립은 그걸 듣고 유명역에 대한 대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곳도 진선계, 마역, 회계 등과 다를 바 없이 다양한 종족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흑하역, 지명역, 염라역에는 각각 어떤 강력한 존재들이 머물고 있습니까? 그들의 실력은 어떠하고요?”

    “그걸 나라고 알겠습니까. 그냥 듣자니 유명계의 3대 거물이라는 혈려, 명왕, 귀무가 각 지역을 통치한답니다. 흑하역은 혈려 관할인데 다른 지역은 모르겠어요. 유명계에 지능이 있는 귀물이 드물어서 정보를 얻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 셋의 실력이 엄청나다던데, 정확히 얼마나 강한지는 모를 일이지요.”

    “염라역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있으십니까?”

    “거긴 가본 적이 없어서……. 듣기로, 그곳 귀물 종족의 실력이 강하고 관리가 엄격해서 여기 흑하역처럼 혼란스럽지는 않답니다.”

    “염라역에 혹시 염라부라는 곳이 있습니까?”

    한립이 직접적으로 물었다.

    “염라부요? 예전에 어느 귀물에게 추혼술을 써서 기억 속에 그런 곳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염라역 변두리에 있는 곳이라던데, 신비로워 보이더군요.”

    멈칫한 조각상이 애써 기억을 떠올리듯 떠듬떠듬 말했다.

    “그곳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도 기억하십니까?”

    “이곳에 봉인된 세월이 길어서 기억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시도는 해볼 수 있겠지요.”

    그의 말이 끝나자 한립이 곁눈질로 제혼을 보며 전음을 보냈다.

    “제혼, 네 생각에 저자가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더냐?”

    “봉인되어 있어 혼백을 감응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어투로 보아 거짓말 같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그런 위장에 능한 자일 확률도 있어요.”

    제혼이 전음으로 답했다.

    마음을 정한 한립이 입을 열려는데 옆에서 금동이 입을 열었다.

    “무토선역 토황종 사람이면 토황종 어느 파 제자였지?”

    한립과 제혼이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다.

    “오, 우리 토황종에 대해 잘 아시는 분이군요. 난 토황종 고죽봉 제자입니다. 고죽봉 봉주 악정 문하에 있었고요.”

    놀란 듯 말이 없던 조각상이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금동은 말없이 한립에게 눈을 깜빡여 보였다.

    한립은 금동이 어떻게 무토선역에 대해 잘 아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고 넘어갔다.

    “좋습니다. 봉인을 풀어 드릴 테니, 대신 우리를 염라부로 안내해 주시지요.”

    “풀어주기만 한다면 내 어디든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한립의 결정을 듣고 조각상은 무척 기뻐했다.

    “제혼, 네 도움이 필요하겠구나.”

    미소를 지은 한립이 제혼에게 도움을 구했고, 제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한 금제가 아니라 힘들 텐데, 내가 이곳에서 그간 연구한 내용을 알려드려도 되겠습니까?”

    “괜찮습니다. 강대한 봉인이기는 하나 시간이 흘러 기운이 유실되어 허점이 생겼군요.”

    한립은 조각상의 제안을 거절하고 제혼에게 전음으로 방법을 일러준 다음 바로 술법을 펼쳤다.

    제혼은 왼쪽, 한립은 오른쪽에 서서 각각 조각상을 향해 빛다발을 쏘아 보냈다.

    한립은 선령력으로 오른쪽에 붙은 봉인 부적을 공략하고, 제혼은 법칙의 힘으로 조각상의 몸을 뒤덮고 있었다.

    봉인 부적에서 녹색 불꽃이 일더니 아래로 타고 내려가 조각상을 한 바퀴 빙 돌고 다시 처음 그 자리에서 만났다.

    제혼이 부단히 법칙의 힘을 주입해준 덕에 눈부신 붉은빛이 반짝이면서 돌처럼 굳었던 조각상의 피부를 한 겹씩 벗겨내고 봉인되어 있던 대상이 나타났다.

    놀랍게도 반라의 근육질 몸통에는 머리가 달려 있지 않고 가슴에 금색 광택이 도는 눈이 붙어 있었다.

    “웬 괴물이…….”

    금동이 그걸 보고 헛바람을 들이켰고, 제혼의 미간에도 주름이 잡혔다.

    “선계의 존재가 아닌 듯싶구나.”

    그때 그들의 귓가에 한립의 전음이 들렸다.

    키득키득.

    기괴한 웃음소리가 머리 없는 사내의 몸에서 들려와 한립 일행이 거리를 두고 물러섰다.

    “드디어 빠져나왔다! 드디어! 크하하핫.”

    머리 없는 사내의 웃음소리 속에는 진득한 원한이 실려 있었다. 조각상에서 들려오던 말소리와는 완전히 달랐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