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4화. 유명계(幽冥界)
*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곳에 매복하고 우리를 공격한 까닭은 무엇이고요?”
한립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물을 말이다! 이곳부터는 유명의 땅이거늘 너희들이 어떻게 들어온 것이냐. 삼생수로 양기를 씻었다고 하여 너희가 진선계 수사인 것을 모를 줄 안다면 오산이다! 어디서 왔든 그곳으로 되돌아가거라! 유명계는 너희 같은 것들을 환영하지 않는다.”
흑포 중년인이 냉랭히 엄포를 놓았다.
“이곳이 유명계였군요. 저희도 우연히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럼 당신은 이곳을 지키는 유명귀장이십니까?”
한립은 상대의 말에 기뻤지만 내색하지 않고 공손히 웃음 지었다.
“그냥 갈 마음이 없는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여기서 그냥 죽거라! 십방천심진(十方穿心陣)을 구축하라!”
표정이 싸늘해진 검은 중년인이 장창을 뽑아 들고 전방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의 명령에 귀물 군대가 둘로 나뉘어 두 개의 창 같은 진형을 이루고 한립과 제혼을 향해 날아들었다.
일체화된 귀물들의 속도가 불가사의할 정도로 빨라 눈 깜짝할 사이에 방대한 귀기의 파동과 바람이 밀려들었다.
놀란 제혼은 비틀거리며 압박감에 밀려났지만 한립은 우뚝 서서 손에 금색 뇌전 검을 불러냈다. 이어 수백 개의 검기가 폭발적으로 쏘아져 나가 빛기둥을 이루고 두 개의 거대한 검은 창들을 막았다.
쿠쾅! 쾅!
강력한 진동에 수많은 돌풍이 형성되어 일대를 휩쓸고 둘로 나뉜 귀물 군대가 밀려났지만 대열이 흩어지지는 않았다.
한립도 두 걸음 물러나 몸을 세울 수 있었다.
바로 그때, 그의 뒤쪽에서 검은 창 그림자가 독사처럼 심장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기습을 할 줄 다 알고 있었다는 듯 한립이 금색 뇌전 빛을 번득이자, 뇌전 검이 그의 등 뒤에 나타나 그걸 막았다.
챙!
검은빛과 금빛이 충돌하며 파문이 일었다.
곧이어 검은 창 그림자가 튕겨 돌아갔고, 이에 흑포 중년인은 놀란 얼굴을 했다.
한립이 조금 튕겨 나갔다가 돌아오며 소매를 젓자, 그의 소매에서 빠져나온 금빛이 금색 소녀, 금동으로 변했다.
“너와 제혼은 가서 저 귀물들을 정리하거라.”
금동에게 말한 한립은 다시 흑의 중년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금색 뇌검 두 자루가 중년인을 향해 날아가 거대한 가위처럼 그를 자르려 들었다.
그러자 중년인의 검은 창에서도 검은빛이 튀어나와 정확히 두 뇌검이 가로지르는 부분을 강타했다.
쩌정!
두 거검은 멈추었고, 중년인은 반탄력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걸 본 한립 이 수결을 맺어, 거검들이 극히 가까운 거리에서 흑의 중년인이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뇌전 공격을 재개했다.
그러나 이때 뇌전빛이 중년인을 감싼 가운데 검은빛이 나타나 뇌전들을 잡아먹었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중년인은 상한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었고, 오른손 소매 속에서 검은 흡입력을 발산하는 검은빛을 반짝이자 모든 금색 뇌전들이 그의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한립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천신뢰는 위력이 강하고 극양의 속성을 지녀 음귀나 관련 공법을 수련하는 이들에게 치명적이었는데 이럴 줄은 몰랐다.
한립은 머리를 굴리면서도 공격은 쉬지 않았고, 수결을 맺어 두 거검들이 수백 개의 검 그림자를 만들어내자 흑의 중년인도 쾌속으로 창을 흔들어 수많은 검은 별빛들을 뿜었다.
금속성의 충돌음이 공간을 울렸다.
제혼과 금동도 두 무리의 귀물 병사들과 엉켜 싸우고 있었다.
서금선으로 변한 금동은 전장을 누비고는 있었지만 그리 전의가 불타오르는지는 않는지 단단한 몸으로 그들을 막기만 했다.
한편 제혼은 무척 흥이 올라서 검은 짐승의 발톱인 유명귀조까지 불러내 수십 리를 초토화 시키고 있었다.
검은 광채를 내뿜어 귀물들을 잡아먹는 제혼을 보고 태을경 귀물이 분노해 검은 깃발을 마구 흔들며 막으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귀물을 잡아먹은 제혼은 마치 술에 취한 듯 몽롱한 얼굴이었지만 전신의 기운은 또렷해졌다.
“저건…….”
한편 한립과 격렬히 전투 중이던 흑의 중년인은 제혼이 귀물을 삼키는 것을 보고는 안색이 달라졌다. 순간 상대방의 주의가 분산되자 한립은 그 틈을 타 끝장을 보려 진언보륜을 불러내 회전시켰다.
수많은 금색 파문이 퍼져나갔다.
하지만 그 순간, 흑포 중년인이 뭔가를 알아챘는지 그보다 빨리 물러나 금색 파문을 피했고, 전광석화처럼 검은 심연 속으로 달아나며 길게 휘파람을 불자 제혼, 금동과 싸우던 두 무리의 귀물 병사들도 즉시 철수해 그를 쫓아갔다.
“주인님, 저것들을 잡게 도와주세요!”
제혼이 안타까운 마음에 쫓으며 소리쳤다.
한립은 마침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귀물들을 향해 금빛 파문을 옮겨 백여 마리를 붙들어 두었다.
다른 귀물들은 잡힌 이들을 구하려 하지 않고 빠르게 지나갔고, 의미심장하게 한립과 제혼을 돌아본 흑포 중년인은 심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니 왜 갑자기 달아나는 거야?”
금동이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와 중얼거렸다.
한립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길게 겨뤄보지는 않았지만 결코 그보다 실력이 낮지 않았는데, 왜 포기하고 철수한 걸까?
“주인님, 구속을 거둬주세요.”
제혼은 날아들면서 중년인이야 달아나든 말든 한립을 향해 외쳤다. 한립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진언보륜을 거둬주었다.
이에 막 자유를 되찾아 사방팔방으로 달아나려던 귀물들은 검은 영역에 갇혀 늪에 빠진 듯 허우적대다 제혼의 뱃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제혼이 영역 자체를 압축해 입속에 넣어 버린 후 시끄럽던 일대가 고요해졌다.
제혼은 기운이 부쩍 늘어 벌써 대라 초기 최고봉에 가까워져 있었다.
“저들이 어째서 물러났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도 어서 자리를 뜨는 것이 좋겠다. 저곳으로 들어가 뭐가 나오는지 보자꾸나.”
한립이 심연으로 날아들고 제혼과 금동이 따라갔다.
심연으로 뛰어든 세 사람은 거대한 폭포에 휩쓸리듯 무형의 힘의 영향을 받아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았다.
끊임없이 추락하는 와중에도 한립은 시간법칙을 전력으로 발동해 몸을 통제하려 했으나 무형의 힘이 너무 세서 막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안심인 것은 금동과 제혼이 어느 쪽에 있는지는 감응이 된다는 것이었다.
고생은 오래지 않아 끝나고, 한립이 먼저 쿵! 바닥에 떨어졌다.
이어서 퍽! 퍽! 하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고 제혼과 금동이 쓰러진 그의 위로 추락했다.
제혼은 그렇다 치고 금동은 무슨 쇳덩어리가 떨어져도 이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한립은 눈을 부릅떴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제혼이 서둘러 일어섰다.
“아저씨, 나 일부러 그런 것 아니에요!”
금동도 일어나며 조금 미안한 기색을 보였다.
“다치지 않았으니 괜찮다. 내가 튼튼해서 다행이지. 그보다 이곳이 어디인 것 같으냐.”
손을 내저은 한립은 황량한 풍경을 쳐다보았다. 하늘은 어둑하고 시야도 침침해서 맨눈으로 일이십 리를 보기가 어려웠다.
휭휭 불어대는 바람에는 수시로 귀곡성이 섞여 들려오고 뼈가 시린 한기에 낙백량풍보다 몇 배는 더 견디기가 어려웠다.
얼굴을 굳힌 한립과 금동은 법칙의 힘으로 몸을 보호해 이 음산한 한기가 몸에 스며들지 못하게 막았는데, 제혼은 불편하기는커녕 어느 때보다 쾌적해 보였다.
“여기가 유명계인가 봐요. 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도착했네요.”
제혼은 배를 문지르며 확신했다.
“유명계…….”
한립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여기로 떨어지는 걸 누군가 알아챘을지도 몰라요. 어떤 위험이 있는지도 파악이 안 됐으니까 일단 다른 곳으로 가요.”
금동의 말에 한립과 제혼도 반대하지 않고 아무 곳이나 방향을 정해 날아갔다. 그 자리에서 보기에 사방팔방이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댓 개의 검은 그림자가 멀리서 날아들었다.
반인반수의 귀물들은 구혼사자나 흑포 중년인 휘하의 귀물 병사들과는 외양이 달랐다.
반인반수의 귀물들은 그들이 떨어진 곳을 둘러싸고 코를 킁킁대더니 흥분해 한 명만 남기고 한립 일행을 쫓았다.
남은 귀물이 뭐라 뭐라 날카롭게 외치자 멀리 하늘 끝에서 검은 구름이 몰려들었다.
귀물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는 구름이었다.
* * *
한립은 낯선 환경인지라 전력을 다하지 않고 적당한 속도를 유지했다.
구유마동으로 보아도 오백 리를 살피는 게 고작이었다.
“전방 천 리쯤에 큰 강이 있는데, 좀 이상해 보여요.”
“천 리쯤에? 제혼, 얼마나 멀리까지 살필 수 있겠느냐?”
제혼의 말을 들은 한립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귀기가 진해서 최선을 다해도 이천 리까지 밖에는 살피지 못할것 같아요.”
“금동, 너는?”
“난 이런 쪽으로 약하잖아요. 칠, 팔 리 정도요. 그런데 왜요? 아저씨가 내 의식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물은 건 처음인 것 같아요.”
금동은 웬일이냐는 표정이었다.
“아니다. 나도 오백 리까지 밖에는 볼 수 없다. 제혼이 그나마 가장 나으니 앞으로 탐색은 제혼에게 맡겨야겠구나.”
“제 체질 때문인가 봐요. 처음부터 이곳이 익숙하기도 했고요……. 탐색은 제게 맡겨주세요!”
정말 천 리를 날아가니 제혼이 말한 검은 강 인근에 다다랐다.
면적이 굉장히 넓어 한눈에 끝이 보이지 않았고 무슨 바다처럼 파도가 쳐서 검은 물보라가 일었다.
더 이상한 것은 파도가 심하게 치는데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그저 검은 안개 같은 게 피어올라 떠다닌다는 거였다.
강 수백 장 위쪽 허공에 두꺼운 검은 구름이 껴서 수시로 검은 뇌전빛을 번득였다.
한립은 일단 인근에 멈춰 섰다.
“제혼, 건너편이 보이느냐?”
“아니요, 저도 안 보여요.”
한립이 물어보자 눈동자에 검은빛을 드리웠던 제혼이 고개를 저었다.
“진짜 이상하네. 이렇게 파도가 심한데 어떻게 소리가 안 나죠?”
금동이 손을 저어 산만한 금빛으로 강물을 때렸다.
금빛은 파도 속으로 소리 없이 스며들어 파문도 만들지 못했고, 그걸 본 세 사람은 동시에 미간을 좁혔다.
금동의 금빛은 산봉우리도 가볍게 잘라낼 수 있었는데 이 검은 강은 전혀 반응이 없었다.
“방대한 귀기와 침식의 힘이 느껴져요. 몸에 강물이 닿지 않게 하는 게 좋겠어요.”
검은 강을 바라보던 제혼이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방법을 생각해서 강을 가로지를까요, 아니면 빙 돌아가 볼까요?”
금동은 한립에게 의견을 구했고, 한립이 고민을 해보다 손을 저었다.
그의 소매에서 금색 콩알이 튀어나와 도병으로 변해 땅에 내려섰다.
“가보거라.”
한립이 도병의 체내에 금색 뇌전을 주입하자 도병은 금색 뇌전 문양을 밝히고 검은 강으로 날아갔다.
콰릉!
그런데 도병이 강을 얼마 건너기도 전에 공중의 검은 구름에서 사발 굵기의 까만 벼락이 떨어졌다.
영력 파동을 잃고 새까만 돌덩이처럼 변한 도병이 검은 강물에 떨어졌다. 일렁이는 강물 속에서 귀를 찌르는 귀곡성이 울려 퍼졌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시무시하게 생긴 벌레와 뱀 괴물들이 삽시간에 도병을 감싸고 뜯어먹었다.
괴물들은 강 바깥에 선 한립 일행을 흉흉히 노려보다 물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평온해진 검은 강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만 같았다.
“음……. 강을 건너는 건 쉽지 않겠어요.”
금동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구름 속의 검은 뇌전은 선령력을 침식하는구나. 너희나 내가 벼락을 맞아도 버티기 쉽지 않을 것이야. 아무래도 강을 따라 가봐야겠다. ……그렇지, 염라정이 아직도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더냐?
“염라정을 까먹을 뻔했네요!”
한립의 언급에 제혼이 눈이 밝아져서 염라정을 불러냈다.
둥실 떠오른 염라정은 평소보다 몇 배는 밝은 빛을 발산하며 주위의 귀기와 공명했지만 어딘가로 가려고 하지는 않았다.
“유명계의 기운을 감응했던 건가 봐요. 이 안에서는 소용이 없겠어요.”
제혼은 아쉬워했다.
“그래도 염라정의 반응을 보면 유명계와 관련이 있는 물건인 것은 확실하지 않더냐. 어쨌든 잘못 찾아온 것은 아니었어.”
한립은 실망하는 기색 없이 미소 지었다.
염라정이 속한 땅이 이곳이라면 염라부도 여기 있을 가능성이 컸다.
“주인님 말씀이 맞아요. 이곳을 잘 찾아봐요.”
제혼도 수긍했다.
그들은 상의 끝에 상류 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그때 제혼의 안색이 달라졌다.
“큰일이에요, 귀물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수가 엄청나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먼 하늘에서 귀물들이 몰려들었다.
마른하늘에 벼락이 치고 귀물들의 괴성에 하늘이 울렸다.
“싸워야겠구나.”
눈을 반짝인 한립이 청죽봉운검 36자루를 불러내 주변을 지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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