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3화. 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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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음하던 한립이 호수로 뛰어들더니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호수에 담근 몸이 전신을 불에 달군 칼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고 눈앞이 흐릿해져서 풍경이 모호해졌다.
평범하게 살을 가르는 고통이면 그의 인내력에 신경 쓰지 않겠으나 이 고통은 몸과 의식을 동시에 공략했다.
“호수의 물이 바로 삼생수(三生水)였어요. 산 사람의 몸에서 양기를 씻어내 준다는 그 물이요. 조금만 참으시면 괜찮아질 거예요.”
제혼이 옆에서 설명했다.
일각이 지나자 정말 고통이 가시고 오히려 몸이 더 편안해졌다. 길게 숨을 내쉰 한립이 시각도 회복한 것을 보고 일어서려 했다.
“주인님, 잠시만요. 일단 저기 성을 좀 보세요.”
옆의 제혼이 손을 뻗어 그를 붙들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 말에 핏빛 성을 본 한립은 오랜만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텅 비어있던 성 앞에 혈홍색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양쪽으로 쭉 늘어서 있었고, 문 너머로 보이는 성 안도 북적북적해서 길을 오가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뿐 아니라 핏빛 호수 위로도 휙휙 누군가 지나다녔다.
혈갑(血甲)을 입은 병사들이 발버둥 치는 사람들을 사슬에 묶어 호수로 던지는 중이었다.
호수에 빠져 참혹한 비명을 지르던 이들은 마치 몸이 부식되는 것처럼 푸른 연기를 뿜어대다가 사슬에 묶인 몸이 반투명하게 변해 다시 병사들에 의해 성 앞으로 끌려갔다.
그런 반투명 인간들은 무리를 이루어 조사를 받은 후에야 핏빛 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혈갑 병사들은 호수에 몸을 담근 한립과 제혼을 거들떠보지 않는 게 꼭 그들을 못 보는 것 같았다.
한립에게도 놀라운 상황이었다.
“혈갑 병사들은 명계의 구혼사자(勾魂使者)들이에요. 진선계 각지에서 죽은 사람들의 혼백을 구속해 삼생호(三生湖)에서 양기를 씻겨내고 명계로 데려가는 이들이죠.”
“정말 그런 것 같기는 한데……. 이런 것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냐?”
제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한립이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삼생호에 들어가 양기를 씻어내니까 웬일인지 머릿속에 이런 기억들이 생겨났어요.”
“어떻게 이런 기억이…….”
“저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형수이기 때문에 유명의 땅과 태생적으로 연관이 있는 것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당장 이유를 알아낼 수는 없어도 눈앞의 기현상을 설명해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유명계가 정말 존재했다니! 그런데 저 구혼사자들은 어째서 우리를 보지 못하는 것이지?”
“구혼사자와 우리 같은 수사들은 음과 양의 극단에 있는 관계예요. 살아서는 서로를 볼 수 없고 오직 죽고 나서 삼생수에 양기를 씻어내야 우리 눈에 구혼사자가 보이게 되죠. 혹시 몰라서 특별한 비술을 사용해 주인님과 제 기운을 가려두었는데, 방금 생각난 술법이라 효과가 어떨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랬구나.”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오래 망설이지 않고 호수에서 날아올라 성 입구 쪽으로 날아갔다.
“주인님, 효과가 어떨지 모르겠다니까요.”
제혼이 놀라 급히 그를 따라왔다.
다행히 그녀의 비술은 효과가 상당해서 아무도 그들을 발견하지 못했고, 성문을 지키는 이들도 감응 선기 같은 것을 지니지 않아 한립과 제혼은 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방금은 너무 위험했어요.”
“네 비술이 쓸만하다는 확신이 있었다. 게다가 비술의 효과가 별로라면 계속 호수에 몸을 숨기고 있어봤자 무슨 소용이겠더냐.”
제혼의 투덜거림에 한립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어디로 가실 거예요?”
“저들을 따라가서 혼백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봐야겠다.”
한립이 가리킨 곳에는 성안의 구혼사자들이 혼백들을 이끌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아까는 텅 비어있던 거리가 인파로 가득해서 성 사람들이 그런 구혼사자 일행을 가리키며 숙덕거렸다.
이에 한립과 제혼은 그런 인파에 섞여 멀리서 구혼사자들을 따라 어느 커다란 건물 입구에 도착했다.
구혼사자들이 압송한 혼백들을 건물 안으로 밀어 넣는데 양을 우리 안으로 몰아넣는 것과 다름없었다.
한립은 제혼과 시선을 마주치고는 건물이 이상한 구석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그들을 따라 들어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선 구혼사자들은 어두컴컴하고 기다란 통로로 들어갔다.
그렇게 통로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독립된 원형의 지하 공간이 나왔는데 핏빛 연못을 중심으로 따로 작은 방 같은 것들이 파여 있고, 그 안에 혼백들이 갇혀 있었다.
그리고 빈방에 새로 온 혼백들을 가두는 구혼사자들이 있는가 하면 일부는 연못가에 서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혼백을 가둬두는 곳인가 봐요.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지 다른 곳을 찾아볼까요?”
“염라정이 아직도 어딘가를 가려 하느냐?”
“염라정은 성 뒤쪽의 검은 구름 쪽을 가리키고 있어요.”
“흩어져 수색을 해봐야겠다. 이 핏빛 공간을 떠날 방법이 있는지 중점적으로 찾되 성 바깥은 수색할 것 없다. 내 의식으로 훑었지만 출구는 보이지 않더구나.”
“비술이 하루는 갈 테니까 그동안 수색을 마칠 수 있을 거예요.”
한립과 제혼은 원래 왔던 길로 돌아가나 건물의 다른 곳으로 흩어졌다.
반나절 후, 다시 원래 있던 방으로 돌아온 둘은 표정이 가라앉아 있었다.
“정 안 되면 강제로 뚫고 나갈 수 있는지 봐야죠, 뭐.”
제혼의 말에 한립이 뭐라 답하려다가 갇혀 있는 혼백들을 돌아보았다.
“왜 그러세요?”
“이곳을 떠날 방법이 하나 떠오른 것 같구나.”
“그게 뭔데요?”
“이곳은 명계처럼 보이지 않으니 저 혼백들도 영원히 여기 갇혀 있지는 않을 것이다. 저들이 진짜 명계로 보내질 때 운송 방식을 알아내면 우리도 이곳을 떠날 수 있지 않겠느냐.”
“일리가 있네요!”
“그저 언제쯤 혼백들을 운송할지…….”
“사람을 찾아 물어보면 되죠.”
제혼은 한립을 끌고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구혼사자 한 명이 잡아 온 혼백을 우리에 넣은 다음, 돌아나가려다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에 잡혀 사라졌다.
뒤이어 다른 구혼사자가 걸어오다가 누군가가 골목에서 사라진 것 같은 느낌에 그곳으로 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저 낡은 암홍색 솥 하나만 바닥에 놓여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 구혼사자는 뭐라 웅얼거리고는 골목을 돌아나갔다.
염라정 공간 안.
구혼사자가 사슬 같은 검은 빛에 묶여 있었다.
“기기기긱! 지지즉…….”
화가 난 구혼사자가 뭐라고 괴상한 말들을 쏟아내는데 악귀의 소리 같기도 하고 독충이 내는 소리 같기도 해서 귀에 매우 거슬렸다.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겠느냐?”
한립은 제혼을 보았지만, 상대는 고개만 내저었다.
“너는 어떻냐?”
한립은 곁에 선 손중산에게도 물었다.
“명계 문자를 약간 알기는 합니다만, 저들의 말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손중산도 난색을 표했다.
그는 기이하다는 얼굴이었다.
선배들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기에 갑자기 명계 사람을 잡아 온단 말인가?
“추혼술을 하는 수밖에 없겠어요.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못 알아들어도 기억은 장면 자체를 볼 수 있을까요.”
제혼이 구혼사자의 머리에 손을 뻗어 검은빛을 드리웠다가 손을 풀었다.
“알아낸 것이 있느냐?”
“주인님 생각대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명계에서 귀장(鬼將)이 와서 성안의 혼백들을 명계로 데리고 가네요. 얼추 시간을 보니 며칠 후가 그때이고요.”
“잘 되었구나. 명계의 귀장은 어떻게 이곳으로 넘어오는 것이냐?”
제혼이 기뻐하며 하는 말에 한립도 걱정거리 하나가 줄었다.
“뒤쪽 검은 구름에 공간 통로가 뚫리면 귀장이 와서 성의 혼백들을 전부 데리고 간대요.”
“그런데, 구혼사자를 잡은 게 들키는 일은 없겠지?”
“걱정하지 마세요. 구혼사자는 그 수가 아주 많고 명계 가장 외곽에서 일하는 자들이라 그렇게 자주 점호를 하지 않으니까요.”
한립과 제혼은 그 후에도 며칠 동안 염라정 공간을 떠나지 않고 손중산에게서 명계 문자를 배웠다.
구혼사자에게 추혼술을 써 명계 언어에 대해서도 대략적인 지식을 쌓은 제혼까지 더해지자 한립도 어느 정도 명계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레 뒤, 핏빛 성 뒤쪽의 검은 구름이 요동치더니 강대한 파동이 일었다.
수많은 검은 주술문자들이 나타나 회오리치면서 검은 통로를 만들고 있었다.
이때 그 끝 모를 새까만 통로 안에서 검은 장포로 전신을 가리고 새까만 방망이를 든 구혼사자들보다 훨씬 단정하게 생긴 사내가 나타났다.
언뜻 보기에는 보통 사람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성안의 구혼사자들은 아침 일찍부터 검은 구름 앞에 모여 혼백들을 모아 놓고 기다리고 서 있었다.
“출발한다!”
검은 귀장이 방망이를 들고 명계의 언어로 말하자, 구혼사자들이 호송해온 혼백들을 전방으로 냅다 집어 던졌다.
검은 통로는 강력한 흡입력을 방출하고 있어 날아오른 혼백들을 쏙쏙 빨아들였다.
성안에 모아둔 혼백의 수량이 그리 많지 않아 금방 검은 통로 안으로 다 들어갔고 검은 귀장이 바로 뒤따랐다.
검은 통로는 두 번 반짝이다 빠르게 닫히기 시작했다.
통로가 완전히 닫히기 직전 두 개의 흐릿한 그림자가 번개처럼 튀어 나가 그 안으로 들어갔다.
한립과 제혼은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어지러운 느낌에 몸을 찢을 것 같은 힘을 느꼈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버텼다.
그런 느낌이 잠시 후 사라지고 그들은 검은 공간 안에 도착해 있었다.
그들 앞에 거대하기 짝이 없는 심연이 펼쳐졌는데, 폭만 수천 장에 양쪽으로 뻗어있는 새까만 길은 어디로 통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속에서 무럭무럭 검은 기운이 피어났다. 그것은 짙은 음한의 기운 외에 일종의 귀기가 어린 기운이었다.
“이곳이 명계? 그렇지는 않아 보이는데.”
제혼이 눈을 반짝이다가 염라정을 꺼내 보았다.
암홍색 작은 솥은 반짝거리면서 심연 아래쪽으로 가고 싶어 했다.
그녀가 바로 움직이려는데 한립이 팔을 잡았다.
“기다리거라.”
“네? 왜 그러세요?”
이상하게 생각하는 제혼을 두고 한립은 전방의 심연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웃음 지었다.
“숨지 말고 나오시지요.”
제혼이 흠칫 놀라 한립이 보고 있는 곳을 보았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오, 내 존재를 감지해 내다니 의식의 힘이 보통이 아니구나.”
곧이어 쇠를 긁는 것 같은 듣기 싫은 목소리가 뜻밖에도 진선계 언어로 대답을 해왔다.
그리고는 전방 허공에 검은 기운이 뭉쳐 별안간 수천 장 크기의 검은 구름으로 변하더니 그 안에서 귀곡성이 뻗어 나왔고, 화살처럼 한립과 제혼의 의식을 공격했다.
제혼은 신음을 삼켰고, 한립도 미간을 좁히고 의식으로 혼백을 보호해 귀곡성의 영향을 받지 않으려 했다.
검은 구름 인근의 음산한 바람이 자욱하게 퍼지는 것을 보고 한립은 오른손을 뻗어 금색 뇌전 기둥을 날렸다.
이어 음풍이 걷히고 검은 구름 위에 나타난 것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이, 삼천 마리의 귀물들이었다.
귀물들은 검은 삼지창을 들고 진법을 형성하고 있어 훈련을 잘 받은 군대 같았다.
한립은 귀물들이 아닌 그 앞의 한 사람을 향해 경계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키가 크고 평범한 사람처럼 생긴 중년인은 두 눈에서 굉장한 핏빛을 발하면서 그들을 향해 흉악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중년인은 진짜 같기도 하고 환영 같기도 한 검은 장포를 입고 바람이 불어 올 때마다 장포자락에서 악귀 허상들을 내뿜었다.
등 뒤에 멘 기다란 검은 창도 흉흉한 기운이 느껴져 위협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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