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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172화 (1,929/2,000)

2172화. 귀문(鬼門)

*

촤아아!

이어서 검은빛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심해로 들어가 엄청난 파도가 일게 했다.

한립은 그리 좋지 않은 표정으로 그 뒤를 쫓았다.

경기를 안정시키지 않고 힘을 쓰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악시가 달아나 버리기 전에 잡아야 했다.

과정은 복잡했지만 악시가 지기화신의 몸에 적응해 달아나기까지 실제로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섬의 남쪽과 북쪽을 지키고 있던 금동과 제혼이 무슨 일이 벌어진 지 파악도 못 하고 서둘러 그들을 쫓았다.

천 리를 쫓았지만 악시를 찾을 수 없자 한립이 연신술을 이용해 추적하는데 금동이 쫓아와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아저씨? 참시 도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

“지기화신은 수많은 사람의 신앙의 힘을 받아들였는데, 그중에는 복수나 원망을 담은 악한 염원들도 많았던 것 같구나. 그게 악시와의 적응력을 높여서, 악시가 순식간에 지기화신의 몸을 장악하고 달아나 버렸다. 기운이 불안정한 나는 연신술도 제대로 쓸 수 없어 심해로 들어간 녀석의 종적을 놓쳐버렸고.”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던 한립이 숨을 고르며 천천히 설명했다.

이어서 도착한 제혼이 한 손은 자신의 미간에 다른 손은 전방으로 뻗고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저쪽이에요! 속도가 엄청 빠른데, 어떻게…….”

“쫓아야 한다!”

급히 제혼과 금동을 화지공간으로 들여보낸 한립은 급히 제혼이 가리켰던 방향으로 출발했다.

* * *

화지공간 안에서 제혼이 안내하는 대로 한립은 전력을 다해 이동했다.

대라 중기에 이른 그의 수행으로 수백만 리를 지나는 데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의식으로 전방의 악시가 어디로 가는지 포착을 하고 있었지만, 악시는 무슨 수를 쓰고 있는지 만 리 내로 가까워질 때마다 속도를 높였다.

그렇게 쫓고 쫓기다 어느새 흑풍해역 변두리까지 왔을 때 전방에 폭풍이 몰아치고 검은 음풍(陰風)이 하늘과 해역을 이어 앞으로 사람이 나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

“제길, 낙백량풍!”

금빛을 머금은 한립이 금색 고리를 등 뒤에서 불러내 급격히 역전시켰다.

하지만 전방의 악시는 그보다도 먼저 금빛을 일으켜 검은 음풍 속으로 몸을 던진 후였다.

“후후, 날 잡으려면 백만 년은 멀었다.”

악시는 사라지고 천지에 악시가 남긴 말만 메아리쳤다.

인상을 구긴 한립은 의식을 퍼트려 검은 음풍 지대를 탐색했지만 악시는 사라진 것처럼 감지가 되지 않았다.

악시가 후환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했지만 방금 대라 중기에 이르러 경지가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턱대고 쫓는 건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주인님, 저를 내보내 주세요.”

그의 머릿속에서 제혼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을 저은 그가 제혼을 불러내자 그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전방의 낙백량풍을 바라보았다.

“뭔가 발견한 것이라도 있더냐?”

“저 안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져요. 그리고…….”

제혼은 말을 하다가 수결을 맺어 암홍색 세 발 솥, 염라정을 불러냈다.

빛을 반짝거리는 염라정이 낙백량풍을 향해 날아들고 싶어 들썩이고 있었다.

“손중산을 불러내 보거라!”

한립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서둘러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제혼의 손짓에 허공에 파문이 일고 손중산의 신영이 떠올랐다.

그는 무슨 일인가 둘러보다 검은 음풍을 발견하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손중산, 이곳에 와본 적이 있느냐?”

“그건 아니지만, 이런 환경은 천상선역에서 염라정을 찾았던 곳과 비슷합니다.”

한립의 질문에 손중산이 이실직고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낙백량풍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주인님께서는 들어간 본 적이 있으세요?”

제혼이 옆에서 물었다.

“들어간 본 적은 있다만 걸리는 게 있어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 낙백량풍이라 불리는 것인데 내부가 끝없이 넓고 음한한 기운 속에 음수(陰獸)들이 살고 있지. 흑풍역에는 낙백량풍이 유명귀역에서 불어나온 바람이라는 전설이 전해진다고 한다.”

코끝을 긁적인 한립은 평소와 같은 어투로 말했다.

“유명귀역……. 전설이 사실일까요?”

눈을 가늘 게 뜬 제혼은 왠지 들뜬 목소리였다.

“낙백량풍에 관심이 가는 모양이구나.”

“네, 너무 들어가 보고 싶어요. 그래도 될까요?”

제혼이 한립을 향해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염라정과도 연관이 있는 듯하니 나도 무슨 일인지 알고 싶구나. 하지만 들어가기 전에 한동안 폐관수련을 해야 한다. 네가 호법을 맡아다오.”

“네!”

제혼은 손중산을 다시 염라정에 가두었고, 한립은 그녀를 데리고 잘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섬으로 내려가 임시 동부를 만들고 화지공간 안에서 기운을 다스렸다.

그렇게 폐관에 들어간 지 어언 20년이 흘렀지만 시간차 공간의 가속 덕분에 실제로는 반나절밖에 지나지 않았다.

검은 낙백량풍 앞으로 돌아온 한립은 제혼과 나란히 서서 손중산을 불러냈다.

그를 보는 손중산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반나절 전에 기운이 불안정해 보이기에 요양을 좀 해야겠다 싶었는데 지금은 그런 기색이 전혀 없어서였다.

무슨 대라경 수사에게 특효인 묘약이라도 먹은 것일까?

손중산은 무척 궁금했지만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고 한립과 제혼의 분부를 기다렸다.

“가자. 그 녀석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금빛으로 자신과 제혼 그리고 손중산까지 두른 한립이 낙백량풍을 향해 쉭, 날아들었다.

금빛으로 변한 세 사람은 낙백량풍 깊은 곳을 향해 나아갔다.

낙백량풍은 여전히 음기가 자욱하고 냉랭한 바람이 미친 듯이 불었지만 이전에 왔을 때보다 훨씬 수행이 높아진 한립은 아무렇지 않게 이동할 수 있었다.

실망스러운 일은 음풍에 잡아먹히기라도 한 것인지 시종일관 악시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밖에 낙백량풍 안에 득실득실하던 음수들도 어쩐 일인지 보이지 않았다.

꽤 깊은 곳까지 와서 제혼이 웅웅거리는 염라정을 들고 아래쪽을 가리켰다.

한립은 망설임 없이 염라정이 원하는 곳으로 날아갔다.

내려가면 갈수록 골수에 스며드는 냉기가 심해져서 한립의 금빛으로도 온전히 막아낼 수 없게 되었다.

손중산이 파리한 안색으로 입을 떼려는데, 그의 등 뒤에서 파동이 일고 검은 안개를 두른 삼지창이 불쑥 튀어나왔다.

챙!

검은 삼지창은 금빛을 때리고 아무 소득 없이 튕겨 나갔다. 그걸 본 한립이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예전에 낙백량풍을 지나가려 했을 때도 겪은 일이었다.

이번 것은 훨씬 강력해서 적어도 금선경에 버금가는 존재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손은 가만히 두지 않아, 한립의 손끝에서 금색 뇌전이 날아가 검은 삼지창을 쫓았다.

펑!

검은 삼지창은 물론 주변 수십 장 내의 낙백량풍이 뇌전에 갈기갈기 찢어져 거무스름한 사람 형태의 생물이 노출되었다.

사람의 몸에 검은 비늘 갑옷을 두르고 뒤쪽에 꼬리를 늘어트린 생물은 꼭 악귀 같이 생겨서는 놀란 얼굴로 꽥 소리를 지르면서 달아나려 했다.

한립이 대충 손을 까딱여 검은 악귀를 격살하려는데, 검은 광채가 먼저 날아가 귀물을 감쌌다. 곁의 제혼이 손을 쓴 것이다.

슉!

검은 광채에 붙들린 귀물은 반항할 겨를도 없이 제혼의 뱃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술이라도 취한 듯 멍하니 맛을 음미하던 그녀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음, 진짜 오랜만에 별미예요. 이렇게 맛좋은 혼백의 힘은 오랜만인 것 같아요.”

제혼은 입술을 핥으며 입맛을 다셨다.

“그냥 평범한 귀물처럼 보이던데 뭐가 다르더냐?”

“몸에 품고 있는 음혼(陰魂)의 기운이 차이가 있어요. 질이 좋기도 하고, 제 몸과도 잘 맞고요. 다른 귀물보다 수행이 훨씬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오, 그렇더냐.”

신이 난 제혼을 보고 한립은 생각에 잠겼다.

“한 선배님, 제혼 선배님, 이곳의 한기가 너무 세서 저는 도저히 버티지를 못하겠습니다.”

참다못해 손중산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얼굴이 파랗다 못해 거의 흙빛이 된 그는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한립이 그를 보다 제혼에게 고개를 돌렸다.

“쓸모없는 것!”

미간을 찌푸린 제혼이 손중산을 염라정 안으로 돌려보냈다.

“뭐가 있을지 계속 가보자꾸나.”

한립은 아래쪽을 보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렇게 반나절이 지나도록 끝이 없는 심연을 내려가듯 바닥이 보이지 않았고, 한기는 이제 무시무시한 경지에 이르러 한립도 약간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한참을 더 내려가고서야 음풍이 줄어들면서 드디어 바닥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한립과 제혼은 기뻐하며 속도를 높였다.

바로 그때 전방 허공에서 느닷없이 혈홍색 소용돌이가 나타나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고 강력한 흡입력에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주변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을 때는 핏빛 공간 안이었고, 중간에 거대한 혈홍색 호수가 있어 잔잔히 물결쳤다.

신선한 핏물 같은 호수는 피비린내는 나지 않고 냉기만 풀풀 솟아올랐다.

그 뒤쪽으로 거대한 혈홍색 성이 서 있고, 성문에 귀문(鬼門)이라는 두 글자가 위풍당당하게 적혀 있었다.

순간 한립과 제혼의 눈에서 놀라움이 일었다.

‘귀문……. 섬뜩한 곳이구나. 설마 정말 명계인 걸까?’

의식을 방출해 혈홍색 성을 훑은 한립은 코끝을 긁적였다. 성의 면적은 상당했는데 살아 있는 사람은커녕 생물체 자체가 없었다.

흔한 쥐나 풀벌레 한 마리 없다는 소리였다.

제혼은 말없이 성 너머 공간을 보고 있었다.

핏빛 성 뒤쪽 공중에 검은 구름 같은 게 떠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의식으로도 꿰뚫어 볼 수 없자 한립은 구유마동으로 구름을 살폈다.

그 순간, 검은 구름이 진동하면서 막대한 위압감을 발산해 그의 시선을 튕겨냈다.

두 눈이 찌르는 것처럼 아파와 한립은 피눈물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주인님!”

“괜찮다. 검은 구름이 괴이하니 함부로 염탐하지 않는 편이 좋겠구나.”

제혼의 걱정에 한립은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동자는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위험한 곳 같아요. 그냥 떠나는 게 좋겠어요.”

“이 핏빛 공간이 너무 견고해서, 일단 들어온 이상 나가고 싶다고 쉽게 나가지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온 것 살펴나 보자꾸나.”

제혼은 한립의 차분한 모습에 검은 구름을 바라보다 그를 따라 날아갔다.

성 앞에 이른 그들은 열려 있는 성문 사이로 마차 10대가 동시에 달리고도 남을 것 같은 대로와 그 옆으로 들어선 높은 건물들을 볼 수 있었다.

건물들도 문이 활짝 열려 그 안의 대청이 드러나 있었다.

의식으로 살폈듯, 사람이라고는 없는 성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

미간을 좁힌 제혼은 무의식중에 한립 곁에 섰다.

“뭐 하는 곳인지 확인해 볼까?”

한립은 성큼 성 안으로 들어섰다.

‘귀문’을 지날 때 한립은 자기도 모르게 몸이 바르르 떨렸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었고, 따라오는 제혼을 보니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빠르게 성을 둘러본 그들은 성이 진선계의 평범한 성과 다를 바 없이 있을 것은 다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심지어 솥이며 다기까지 다 있는데 사람만 없었다.

“다들 이주라도 한 것인지…….”

제혼이 사방을 살피다 어느 민가의 탁자에 올려 있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 안에는 옅은 색의 붉은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어?”

제혼이 놀란 얼굴을 했다.

“왜 그러느냐?”

“주인님, 얼른 저를 따라오세요!”

한립의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고 제혼은 무엇을 알아낸 것인지 그를 잡아끌어 성 바깥의 핏빛 호수로 데리고 갔다.

“여기서 무엇을 하려고?”

“그만 물으시고 어서 호수로 들어가 보세요.”

제혼이 먼저 호수로 뛰어들어 머리만 남겨두고 몸을 담갔다.

찡그려졌던 그녀의 얼굴이 곧 편안해졌다.

한립은 바로 뒤따르지 않고 핏빛 호수에 의식을 퍼트렸지만 음한한 기운이 가득한 것 외에 특별한 점은 없었다.

“제 생각이 맞았어요! 주인님도 어서 들어와 보세요!”

제혼은 기뻐하며 그의 손을 붙들고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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