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2171화 (1,928/2,000)
  • 2171화. 참시

    *

    한립은 제단 바깥을 살펴 섬 곳곳에서도 하늘 높이 빛기둥이 솟아 공중에 금빛 찬란한 금탑을 이룬 것을 확인했다.

    금동과 제혼이 보탑진요법진(寶塔鎭妖法陣)을 펼친 것이다.

    길게 숨을 내쉰 한립이 눈을 감고 의식을 의식세계 속으로 가라앉혔다.

    의식세계의 절반은 먹구름이 가득차고, 나머지 절반은 핏빛 파도가 출렁였다.

    격원법련을 느슨하게 푼 후, 악시의 힘은 급속도로 커져서 몇 번이나 억누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일단 악시가 생겨나면 최대한 빨리 제거해야지 본체 속에서 오래 머물수록 큰 화가 되었다.

    여전히 격원법련에 묶여 허공에 떠있던 악시가 두 손과 두 발을 늘어트리고 고개만 들어 한립을 쳐다보았다.

    “하하, 네가 오기만을 오랫동안 기다렸다.”

    “나를 기다린 것이냐?”

    “날 영원히 가둘 수 없다는 걸 알았거든. 내가 빠져나가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래, 본체의 의식과 분리된 너를 영원히 가둬둘 수는 없겠지. 그래서 오늘 너를 베어내려 왔다.”

    한립은 목을 돌리며 몸을 푸는 악시를 향해 말했다.

    “글쎄, 누가 누구를 베어낼 지는 모르는 일 아닐까?”

    악시는 두려운 기색 없이 냉소했다.

    “지금의 넌 확실히 나와 실력을 겨룰 자격이 되겠구나. 하지만 우리가 싸운다면 결국에 상하는 것은 이 몸이란 것을 잊지 말거라.”

    “난 원래 네 악에 대한 사소한 집념에서 발생된 존재이다. 망가진 몸이든 멀쩡한 몸이든 내 것이 되면 다 좋으니, 몸이 망가지는 것은 너나 걱정하면 될 것이야.”

    “그래? 너를 제거하는데 실패하면 내 혼백이 소멸하는 대가를 치루더라도 이 육신마저 없애버리고 가겠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한립이 가볍게 던진 말에 악시가 살짝 얼굴을 굳혔다 웃음 지었다.

    “너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 나를 속이고 싶은 마음은 알겠다만, 내가 육신의 주도권을 잡는다 한들 혼백이 소멸되는 것보다는 낫지 않더냐. 게다가 네가 그렇게 모질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지. 아마 그 방면에서는 내가 너보다 나을 거야.”

    “내 악념이 변한 존재라더니, 나를 이렇게 몰라서야……. 믿기지 않는다면 어디 당장 싸워보겠느냐?”

    한립은 한 손을 펼쳐 해보자는 자세를 취했다.

    그걸 본 악시는 침묵했다.

    말로는 못할 거라고 했지만 솔직히 한립은 충분히 독하고 과감한 구석이 있었다.

    “내 말을 믿는 것 같으니, 서로에게 득이 될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해볼까?”

    한립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미소를 지었다.

    “그게 무엇이냐?”

    “내 너를 위해 질 좋은 화신 육체를 구해 두었다. 네가 그 몸으로 옮겨가 연화를 하기만 하면 본체를 차지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새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한립은 악시를 빙 돌아 걸어가며 말했다.

    “으하하……. 그런 터무니없는 거짓말은 세 살 아이라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너와 난 태생적으로 경쟁할 수밖에 없는데, 내게 자유를 주겠다고? 그야 말로 후환이 무궁무진한 일이 아니냐!”

    “당장 내가 바라는 것은 참시에 성공해 수행이 높아지는 것뿐이다. 나중 일은 나중에 알아서 하면 되겠지. 내 말을 믿고 안 믿고는 네 자유다.”

    이때 한립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정말 그냥 날 속이려는 게 아니란 말이냐?”

    “그건 직접 확인해 보면 될 것이다.”

    악시의 의심스럽다는 눈빛에 한립은 웃으며 상대의 금제 일부를 개방해 지선 육체의 존재를 느끼도록 해주었다.

    “기운이 나와 잘 맞는군. 네가 정성껏 준비한 육신 같으니 한 번 믿어보마.”

    뜻밖에 악시는 육신을 살피고는 태도가 달라졌다.

    “잘 생각했다.”

    한립은 의식을 움직여 악시의 체내에 박혀 있던 격원법련들을 뽑아주었다.

    천천히 몸을 편 악시의 몸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네 정성은 감동이다만……. 화신이 아무리 좋아도 본체만 하겠느냐? 기왕 준비한 것 너나 가거라!”

    고개를 삐딱하게 비튼 악시는 한립을 향해 교활한 웃음을 흘렸다.

    “휴, 뭐 그럴 줄 알고 있었다. 좋은 말로 해서 안 될 것 같으니 억지로라도 보내는 수밖에.”

    한립은 한숨을 내쉬며 손바닥에서 금빛 뇌전을 번득여 청죽봉운검과 똑같이 생긴 뇌전 장검을 손에 쥐었다.

    “으하하! 네가 이긴다면 날 베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보거라!”

    악시가 웃음을 터트리고는 놀랍게도 똑같이 청죽봉운검을 닮은 뇌전 장검을 만들어냈다.

    금빛이 아닌 핏빛의 뇌전이 흐르고 있었다.

    동공을 수축한 한립이 먼저 달려들며 장검을 횡으로 그었다.

    악시도 물러서지 않고 장검을 들고 한립을 향해 찔러 넣었다.

    쿵!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악시의 장검 끝에서 굵직한 핏빛 뇌전이 뻗어 나와 한 자루 창처럼 한립을 향해 다가왔다.

    공중의 한립도 장검을 휘두른 것은 눈속임이었던지 고공으로 도약하며 악시의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장검의 뇌전이 소용돌이를 이루고 악시를 중앙에 품었다.

    악시가 뭔가를 하려는데 뇌전 주술문자들이 떠올라 사슬들을 이루고 금색 사슬 우리를 만들었다.

    그 옆에 내려선 한립이 재미있다는 듯 악시를 바라보았다.

    “뇌진은 또 언제 쳐놓은 것이냐!”

    어두운 얼굴로 악시가 버럭 성을 냈다.

    “너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뇌진을 펼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너와 상의한다고 내가 시간 낭비를 할 턱이 있겠느냐?”

    한립의 말에 한참 대답이 없던 악시가 돌연 고개를 쳐들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이게 너지. 바로 이게 나고 말이야. 하하하하!”

    미친 사람같이 웃는 악시를 본 한립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악시의 웃음소리가 의식세계에 퍼져 절반을 차지한 핏빛 공간을 부글부글 끓게 만들고 있었다.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와 퍼지면서 핏빛 안개가 올라와 하늘에 혈운(血雲)을 만들었다.

    악시 발밑에서도 핏빛 파도가 치솟아 뇌전 우리를 덮었고, 파도가 지나간 다음에는 악시가 우리 속에서 빠져나와 있었다.

    한립이 그걸 보고 신중한 얼굴로 수결을 맺었다.

    쿠릉.

    천뢰가 일어나 한립 등 뒤, 나머지 절반의 의식 공간에 금색 뇌전이 빼곡히 떨어져 내렸다.

    그 아래 해역에서도 거친 파도가 일렁였다.

    의식세계에 천둥소리가 울리고 성난 파도와 격분한 뇌전이 차올랐다.

    서로를 마주 보고 선 악시와 한립은 아무 말 없이 맹렬히 충돌했다.

    그들의 돌진에 양분되어 있던 의식 공간이 철저히 혼돈에 빠져 각각 나머지 반쪽을 향해 몰려들었다.

    콰르릉!

    한립은 주먹을, 악시는 손바닥을 이용해 부딪쳤고, 두 의식의 바다도 충돌해 섞이고 있었다.

    고공에서는 혈운과 뇌전이 섞이고 아래쪽 해역에서는 파도가 서로를 부수며 철썩였다.

    한립은 혼백이 찢어질 것 같은 충격에 미친 듯이 연신술을 운용하며, 남은 모든 의식의 힘을 이용해 악시를 향해 밀어 붙었다.

    “아직도 모르겠더냐? 의식의 바다에서 우위를 점한 건 나다! 네 놈이 분노하고 미쳐 날뛸수록 내 힘만 커진단 말이다! 으하하, 그래 그렇게 더욱 분노해 날뛰어 보거라!”

    악시는 태산처럼 꿈쩍도 하지 않으면서 한립을 조롱했다.

    절반으로 양분되어 있던 공간이 한립이 전력을 다하고 있음에도 서서히 한립 뒤쪽으로 밀리고 있었다.

    그리고 점유하는 공간이 커질수록 혈홍색 기운이 물러나 점점 정상적으로 변해갔다.

    그걸 발견한 한립은 안도하기는커녕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런 현상은 악시가 그를 대신해 의식 공간의 정통을 잇고 있다는 증거였다.

    상대의 의식 공간이 그의 의식 공간을 압도하면 본체의 의식이 의식의 바다에서 배척받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 정말 한립이 쫓겨나거나 잡아먹혀 동화될 수도 있었다.

    “크핫하하! 네가 졌다. 내 너를 대신하더라도 똑같은 이름으로 선계를 휘어잡을 것이니 너무 아쉬워 말거라!”

    악시는 한립을 밀어내면서 통쾌해 죽을 것만 같았다.

    그때 피식 웃음을 흘린 한립이 입을 열었다.

    “흠, 기뻐하기에는 이른 것 같은데?”

    다음 순간, 광활한 크기의 태극문양인 음양쌍어도(陰陽雙魚圖)가 한립과 악시의 발아래 나타나 거대한 거울처럼 그들을 받쳐 올렸다.

    악시와 한립은 각각 음과 양을 뜻하는 검은 물고기와 하얀 물고기의 눈 자리에 서 있었다.

    “아냐. 안 돼, 이럴 수는…….”

    악시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포효했다.

    음양쌍어도의 검은빛과 하얀빛이 회전하면서 의식 공간의 형세를 뒤집어 놓고 있었다.

    “베어라.”

    한립의 양 주먹이 맹렬히 아래쪽으로 내리꽂혔고, 의식 공간 중간에서 거대한 물결이 치며 분리된 공간이 드디어 하나가 되었다.

    * * *

    그 시각 무상도 제단 위.

    아까부터 눈코입귀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던 한립은 두 눈에서 검은 빛덩어리를 방출했다.

    강대한 선령력이 외투처럼 검은 빛덩어리를 감쌌지만, 검은 빛덩어리는 포기하지 않고 방향을 틀어 다시 한립의 미간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 한립이 앉은 하얀 물고기 문양의 눈에서 현란한 빛이 피어올라 검은 빛덩이를 지기 화신의 미간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안 돼…….”

    십여 초간 고요했던 제단에 불만이 그득한 말소리가 들렸다.

    지기화신이 눈을 뜨고 흉흉한 얼굴로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불경소리가 악시의 심경을 어지럽혔고, 화신의 육체는 마음대로 통제가 되지 않아 더욱 그를 노하게 했다.

    반대로 맞은편에 앉은 한립은 입가의 피가 흐르고 꼴은 볼썽사나워도 팔백사십여 개의 선규를 뚫어 벌써 대라 중기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악시가 몸을 떠난 건 선령력 일부를 빼앗긴 것과 같아서 대라 중기의 경지에 안착하려면 기운을 다스릴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아마 공을 좀 들여야 몸을 길들일 수 있을 것이다.”

    차분하게 한마디를 한 한립은 눈을 감아버렸다.

    악시도 자신의 몸에 박힌 사슬들을 보고 한립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이 육신을 감옥 삼아 그를 가둬두려 한 것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얼른 진정하고 육신을 연화시키려 해보았다. 악시의 힘이 육신에 흐르자 생기라고는 없던 몸에 변화가 생겼다.

    남색 수정 같았던 몸이 정상적인 사람의 몸으로 변하는 중이었다.

    체내에서는 영력이 위아래로 흐르며 고르지 못했던 길을 가지런히 뚫고, 멈춰있던 심장도 뛰기 시작했다.

    좌정하고 있는 한립이 의식 한줄기를 분리해 지선 육신의 변화를 주시하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눈을 뜨려 했다.

    악시와 지기화신의 몸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잘 맞아서 개조 속도가 너무 빨랐다.

    잠시 수련을 멈추고 진법을 이용해 악시를 제압하려는데, 이변이 생겼다.

    그와 마주 앉은 악시가 먼저 움직인 것이다.

    뿌연 남색 광채가 가득한 몸에서 하늘을 찌르던 흉살기가 소실되고 짙은 물 속성 법력이 퍼져나갔다.

    ‘이런!’

    한립은 고개를 들어 머리 위의 금색 보호막을 보았다.

    금색 보호막은 불가의 진언(眞言)인 범음진압(梵音鎭壓)을 이용해 흉살기가 가득한 악시를 겨냥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악시가 지기화신과 결합하고는 흉살기를 감쪽같이 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

    쿵!

    악시는 곧장 남색 물결을 터트려 사슬들을 흩어버리고 금색 보호막을 향해 뛰어오르려 했다.

    탁.

    금색 보호막이 흩어지는 대신 남색 물결이 물방울로 변해 쏟아져 내렸다.

    “어딜 가려는 것이냐!”

    한립이 다섯 손가락을 굽혀 악시의 발목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악시의 발목이 돌연 액체로 변해 흘러내리면서 한립은 헛손질을 하고 말았고, 악시는 제단을 벗어나 고공으로 올라갔다.

    이를 막으려 금색 보호막 안에 떠있던 휘황찬란한 7층 금탑이 빠르게 하강해 악시를 덮었다.

    한립도 제단에서 사라져 고공으로 악시를 쫓으러 갔는데, 콰콰쾅 하는 경천동지할 폭음과 함께 금탑이 갈라지며 검은 빛줄기가 그곳을 빠져나갔다.

    그걸 본 한립의 이마에 선명하게 핏줄이 섰다.

    악시는 자신이 곤경에서 벗어나려고 중수진륜을 터트려버렸다!

    “이 몸은 잘 받아두겠다! 우린 다시 만나도록 하지!”

    고공에서 원한 어린 악시의 말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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