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9화. 돌아가다
*
“조, 조신 대인이시다…….”
“조신 대인께서 강림하셨다!”
“조신 대인의 비호가 오몽도에!”
광장이 끓는 물처럼 시끄러워졌고 다들 바닥에 꿇어앉아 기도를 올렸다.
이때 흐릿한 그림자가 조각상 위에 나타나 재빨리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시각, 섬 바깥에서 날아들고 있던 다른 섬의 족장들이 누군가 스쳐지나가는 것을 보고 멈춰서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이 섬에 도달하기 전에 푸른 장삼을 입은 약간 살집이 오른 의젓한 사내가 본섬에서 날아오라 그들을 맞이했다.
“낙풍 족장, 방금 섬을 떠나신 게 그 조신 대인이십니까?”
회색 장포를 입은 이종족 족장이 물었다. 의젓한 사내는 오몽도 족장 낙풍이었다.
신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낙풍은 말없이 그림자가 사라진 방향을 보았다.
“무슨 일일까요? 적이 습격이라도 하는 걸까요?”
보라색 옷을 입은 부인이 긴장해 입을 열었다.
“다들 일단 의사전으로 가서 기다려 주십시오. 저는 잠시 후 가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힌 낙풍이 다른 족장들을 향해 말했다.
그도 오랫동안 폐관수련 중이던 조신 대인이 갑자기 섬을 떠난 이유를 몰랐다.
족장들은 더 묻지 않고 의사전으로 내려가고 낙풍은 광장으로 향했다.
“족장 대인…….”
“족장 대인, 방금 조신 대인께서…….”
섬 사람들이 그를 보고 몰려들어 왁자지껄 질문을 쏟아냈다.
“다들 당황하지 말거라. 조신 대인께서는 현신하신 것을 직접 본 것은 큰 복이니, 진심을 담아 기도를 올리면 반드시 조신 대인의 비호가 따를 것이다.”
낙풍의 차분한 말에 오몽도 족인들이 크게 기뻐하며 엎드려 절을 올렸다.
“조신 대인, 갑자기 어딜 가시는 겁니까?”
그러나 의사전으로 돌아가는 낙풍은 속으로 탄식하고 있었다.
섬 사람들은 몰라도 의사전에서 그를 기다리는 족장들에게는 이렇게 대충 둘러대고 넘어갈 수 없을 터였다.
* * *
오몽도에서 수천 리 떨어진 바다 위에서 푸른 그림자가 멈춰 백장이 안 되는 검은 섬으로 내려섰다.
평범한 용모에 키가 큰 푸른 신영은 한립과 똑같이 생긴 지기화신이었다.
섬에는 푸른 장포를 입은 키 큰 사내가 뒷짐을 쥐고 서서 연노란 치마를 입은 수려한 소녀와 같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지기화신이 내려서자 뒤를 돌아본 사내도 그와 똑같이 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저씨, 이 사람이 지기화신이에요? 진짜 똑같이 생겼네요. 똑같이 피부도 까무잡잡하고 잘 생기지도 않고.”
미소를 지은 사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소녀가 지기화신 주위를 빙 돌면서 구경을 했다.
키 큰 사내와 수려한 소녀는 한립과 금동이었다.
“거의 금선 후기에 이르렀구나. 짐작하던 것보다 높아.”
이제야 한립도 한 마디를 할 수 있었다.
“당신과 연락이 끊겨 시간정사로 중수 제련을 가속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중수를 보내지 않아도 되어서 신앙의 힘의 보조를 받으면서 수련을 했습니다. 이제 3성 중수를 모으고 있고요.”
지기화신이 말했다.
듣고 있던 한립은 손을 저어 검은 구멍이 뚫리고 물빛 도문이 응결된 고리를 불러냈다.
“중수진륜은 이제 내게 무용하니 네게 주마.”
사람 절반 만하던 고리가 손바닥 크기로 줄어들어 지기화신에게 날아갔다. 지기화신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어차피 본체와 한몸과 다름없는데 고맙다고 말할 것도 없었다.
“낙풍이 그래도 능력이 있어 오몽도를 잘 이끌어 왔습니다. 눈에 차지는 않으시겠지만 한 번 가보시지요.”
지기화신은 평온하게 말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한립은 망설이다 지기화신과 금동을 데리고 오몽도로 날아갔다.
섬에 가까이 이른 한립은 금동을 화지동천으로 돌려보낸 다음 만규공적술을 운용해 기운을 숨기고 섬으로 잠입했다.
아직도 섬 사람들은 광장을 떠나지 않고 열성적으로 기도를 올리는 중이었다. 지기화신이 조각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본 그들은 조신이 떠나지 않았다는 것에 환호하다가 흩어졌다.
의사전 안.
낙풍이 상석에 앉아 차를 음미하고 있었고, 그 양쪽으로 마련된 자리에 족장들이 앉아 오몽도 조신이 섬을 떠난 일에 대해 의논을 하는 중이었다.
“낙 족장, 예전에 우리가 모일 때는 얼굴을 보여주시지 않다가 오늘 갑자기 조신 대인이 나타나 섬을 떠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느 이종족 족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몽도는 물론이고 다른 섬의 조신들도 섬을 떠나는 일이 흔치 않았다. 신앙심으로 힘을 쌓는 그들에게 섬은 중요한 공간이었다.
게다가 인근 해역은 거의 오몽도 손에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이제와서 조신이 직접 나설 일이 뭐란 말인가?
이런저런 추측들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조신대인께서는 일대를 순찰하시고 벌써 섬에 돌아오셨습니다.”
찻잔을 내려놓은 낙풍이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방금 지기화신이 보내온 전음을 듣고 마음을 푹 놓은 것이다.
다른 족장들은 의심스런 눈빛을 보내다 곧 의사전을 뒤덮는 막대한 힘을 감지하고는 그제야 그 말을 믿게 되었다.
논의를 마친 족장들이 조각상에 예를 올리고 섬을 떠나자 낙풍은 황급히 섬의 금지구역에 있는 조신전(祖神殿)으로 향했다.
지기화신은 평소 섬 중앙, 거대 조신 석상 밑에 세워진 조신전에서 수련을 했다.
낙풍이 대전 앞에 이르렀을 때는 문이 열려 있어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대전 안에는 지기화신이 방석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조신 대인을 뵙습니다.”
낙풍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조회는 어떻게 되었더냐?”
천천히 눈을 뜬 지기화신이 물었다.
“몇 섬을 제외하고는 다들 호시탐탐 벗어날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조신 대인께서 방금 섬을 떠나신 것을 알고는 무슨 일인지 떠보느라 난리더군요.”
“상관없다. 진선경에 이른 네 수행만으로도 그들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야.”
“오몽도는 오직 조신 대인의 비호에 기대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인의 존재가 오몽도의 근간인 것을요. 저도 항시 그것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지기화신의 말에 낙풍이 서둘러 포권을 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섬을 돌아보니 썩 잘 꾸려나가고 있더구나.”
이때 낙풍 뒤에서 같은 목소리가 들리고 한립이 나타났다.
소스라치게 놀란 낙풍이 고개를 들고 한립을 보더니 안색이 변했다.
“류, 류, 류 대인이십니까?”
한립은 멈칫하다가 자신이 류석이란 이름을 썼던 것을 기덕하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
“류석 대인!”
낙풍이 바로 납작 엎드려 절을 하려 했다.
“그럴 것 없다. 이번에 돌아온 것은 네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이다.”
한립은 무형의 힘으로 낙풍이 엎드리지 못하게 하고 말했다.
그 말에 지기화신과 낙풍 모두 놀란 눈치였다.
“말씀하시지요. 대인의 명이면 저희 오몽도는 불구덩이 속이라도 뛰어들 것입니다.”
낙풍은 즉시 답했다.
“흑풍해에서 한동안 수련하려 하니, 오가는 사람이 드문 무인도를 찾아주어야겠다.”
“그런 곳이 있습니다. 무상도(無霜島)라고 흑초수역(黑礁水域) 쪽에 있는 무인도인데, 주변에 암초가 워낙 많고 파도가 센 데다 섬에 아무것도 없어 주변 만 리내에 다니는 이들이 거의 없지요.”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본 낙풍이 생각나는 곳을 말했다.
“무상도에 진법을 펼치는 것을 도와야겠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포권을 하는 낙풍에게 한립은 미리 상세하게 그려둔 도안과 검은 저물반지를 내주었다.
“진법도이고 나머지는 필요한 재료이다. 반드시 이레 내로 완성해야 할 것이야.”
“예, 바로 착수하겠습니다.”
“그리 서두를 것은 없다. 여기 수련에 필요한 영약과 선초이니, 오몽도를 위해 쓰거라.”
한립이 하얀 저물반지를 하나 더 꺼내 주었다.
“감사합니다, 류 대인…….”
낙풍은 그걸 받아들고 내용물을 확인해 보기도 전에 절을 올렸다.
그가 떠나고 한립의 시선이 지기화신에게 향했다. 마음이 통한 듯 지기화신도 그를 바라보며 눈이 마주쳤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지기화신을 보는 한립은 마음이 조금 이상했다.
의식 한줄기와 탄혼화(誕魂花)를 이용해 만든 화신은 진작 독립적인 의식을 갖게 되었기에 그와 단절된 오래 세월 동안 수행과 함께 지능도 높아졌다.
어떻게 보면 상대는 자신이면서 자신이 아니었다.
만일 선계에서 변고를 당해 어느 날 죽게 된다고 하더라도 지기화신이 남아 있는 한 진정한 의미의 신혼(神魂) 소멸은 되지 않는 셈이었다.
주입해 둔 자신의 한 줄기 의식으로 언제든 화신의 절대적인 통제권을 빼앗아 올 수 있었지만 그건 최악의 경우에만 쓸 방법이었다. 자아를 잃게 되면 더 이상 자신을 대신해 이곳을 지키지는 못할 것이다.
“부탁이 있다.”
한참 만에 한립이 말문을 뗐다.
“당신과 저는 본래 한 몸이었습니다. 부탁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군요.”
지기화신이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망설이던 한립은 자신의 얼굴을 쓸어 금제를 거두고 미간의 검은 기운과 특수한 주술문자를 노출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지기화신은 한립의 이상을 알아차리고 깜짝 놀라워했다.
의식연계가 되어 있다지만 오랜 세월 만나지 못했으니 바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낼 수 없었다.
“난 수행이 대라 초기 최고봉에 머물러 있다. 악시의 침식을 당하면서 참시 고비를 앞두고 있지.”
“대라, 대라경 수사!”
이번에는 지기화신이라도 놀라고 말았다.
섬사람들의 강렬한 신앙의 힘을 통해 순탄하게 수련을 해왔기에 지기화신도 그리 느리지 않게 성장해 왔는데, 한립의 기상천외한 수련 성과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다.
“참시에 관련한 일로 제가 도움이 될 일이 있단 말입니까?”
“그래, 삼시를 베어내는 것은 쉽지 않지. 삼시의 본성은 곧 집념이라 수사가 삶을 살아가는 동안 점점 커져 스스로의 의식의 힘만으로 베어내려면 그 어려움이 상상을 초월한다. 운 좋게 귀한 참시술을 얻었는데 그 비술을 이용해 악시를 네 몸으로 이동시킴으로써 성공확률을 대폭 높일 수 있을 듯 싶구나.”
“어떤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겁니까?”
“참시의 과정은 본래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아서 순간의 실수로도 내 의식이 악시에게 잡아 먹혀 성정이 판이하게 달라지고 악시가 몸을 지배할 수도 있다. 그밖에 참시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걸 네 몸에 봉인해야 해서 높은 확률로 악시가 네 지선 육체를 점유할 수도 있다.”
“저를 악시를 담는 용기로 쓰겠다는 겁니까?”
지기화신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렇다.”
“당신이라면 그런 일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네게 도움이 되는 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오몽도가 다른 섬들을 지배하면서 신도들이 크게 늘었음에도 네가 오랜 세월 태을경에 이르지 못한 원인은 알고 있겠지. 신앙의 힘을 받아들이는 수련법 자체에 한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맞습니다.”
한립의 물음에 지기화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지선의 육체가 갖는 속박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다면, 더 이상 신앙의 힘에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면 어떻겠느냐?”
“이 몸을 어떻게 제련했는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지선의 몸이 오몽도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는 당신보다 더 잘 알 테고요. 그런 관계를 어떻게 끊어낸단 말입니까?”
지기화신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랜 세월 수련을 하며 네 지선의 몸은 오몽도와의 연계가 더욱 끈끈해졌을 것이다. 허나 악시의 힘은 더 강대하지. 일단 악시가 몸에 들어가면 자신이 적응하기 위해서라도 내부에서 대라의 기운으로 지선의 몸을 개조할 텐데, 신앙의 힘을 끊어내는 정도야 간단하지 않겠느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