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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168화 (1,925/2,000)
  • 2168화. 조석(朝夕)

    *

    진선계의 각종 거대 세력들은 헤아릴 수 없는 세월동안 여러 경로로 비법들을 모아 참시술(斩尸術)이라 불리는 것들을 집대성했지만, 그건 종문의 일급비밀과 마찬가지라 외부인과 거래를 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윤회전을 통해 구해보려 한 것이었는데 역시나 실패였다. 이제 남은 방법이 하나밖에 없어 한립은 장천병을 꺼내들었다.

    시간법칙의 실을 대가로 치르더라도 시공간초월을 해서 미라노조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오행환세결>을 운용하며 장천병을 발동하는 동시에 병령을 불러봤지만 대답이 없었다.

    ‘어떻게 된 걸까.’

    지난번 구원관 때도 그렇고 병령과 연락이 되지 않은 지 너무 오래되었다.

    그가 고심하고 있을 때 화지공간 입구를 통해 암홍색 전음부를 품은 하얀빛이 쏘아져 들어왔다.

    한립이 그것을 잡아 비틀자 부적이 하얀빛으로 돌아가 제혼의 음성을 전했다.

    “주인님, 류낙아라는 여인이 찾아와 뵙기를 청합니다. 주인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는데 아는 분인가요?”

    “낙아가……. 동부로 들이거라.”

    “네.”

    한립의 말에 제혼이 답하고 하얀빛이 소실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감정을 다스린 한립은 화지공간에서 나와 동부의 대청으로 걸어 나갔다.

    대청에는 금동과 제혼 외에도 푸른 장포를 입은 소녀, 류낙아가 서 있었다.

    지난번에 보았을 때보다 기운이 정순해져서 대라 중기를 앞둔 것 같았다.

    “오라버니가 돌아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무사하신 것을 보니 마음이 놓여요.”

    류낙아는 한립이 들어서는 것을 보더니 격동해 품에 안겨들었다. 한립이 입을 떼기도 전에 가녀린 소녀는 품에 안겨 있었다.

    금동과 제혼의 뜨거운 눈빛을 느낀 한립은 자기도 모르게 콧등을 긁적였고, 금동과 제혼은 시선을 마주치고는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낙아, 네가 여긴 어찌 알고 온 것이야?”

    한립은 가만히 류낙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팔황산에서 수련을 하던 중에 백택 전하께 오라버니가 여기 있다고 듣고 바로 달려온 거예요.”

    류낙아가 밝게 웃음 지었다.

    마음이 따뜻해진 한립은 의식세계를 휘몰아치는 악념도 이 순간만은 조금 잠잠해 지는 것 같았다.

    “오라버니, 이제 계속 만황에서 살면 안 돼요? 수련 자원도 풍부하고 천정도 여기까지는 사람을 보내지 못하니까 좋잖아요.”

    류낙아는 기대감이 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착하구나, 네 마음은 알지만 해야 할 일이 있어 만황에 오래 머물 수는 없겠다.”

    “어쩔 수 없죠……. 오라버니는 큰일을 할 사람이니까, 붙잡아 둘 수만은 없을 거예요. 그래도 저를 보러 꼭 다시 와줘야 해요?”

    “당연하지. 시간이 나는 대로 만황에 다녀가마.”

    한립도 오랜만에 류낙아를 보아 기분이 좋아졌기에 최근 어떻게 지내는지 등을 물었다.

    그녀가 말하기를 만황의 다양한 종족들에서 뽑힌 인재들이 팔황산에 모여 백택과 악면이 펼쳐 놓은 신비한 공간에서 수련하고 있다고 했다.

    “오라버니, 눈은 왜 그렇게 된 거예요? 몸에 안 좋은 기운이 가득해 보여요.”

    근황을 이야기한 류낙아가 한립의 몸 상태를 걱정했다.

    “악시를 베고 대라경 중기로 넘어가려다 문제가 생겨서 이렇게 되었구나. 허나 걱정 말거라. 악시만 베어내고 나면 다 괜찮아질 것이야.”

    “벌써 악시를 벤다고요? 백택 전하에게 들으니, 수행이 빠르게 높아질수록 각각의 경지에서 체득해야 할 것들을 놓쳐, 뒤로 갈수록 불리하다고 했어요. 특히 대라경에 이른 후에는 각각의 선규를 뚫을 때마다 세세히 자신을 돌아보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순조롭게 참시를 진행할 수 없고요.”

    “확실히 그렇기는 하더구나.”

    한립도 깊이 공감되는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오라버니는 전승할 사문도 없고 홀로 수련을 하잖아요. 참시를 하려면 적합한 참시술은 찾은 거예요?”

    류낙아가 머뭇거리다 물었다.

    “아직 찾지 못했다. 찾으려 노력한지 오래인데 인연이 닿지 않는구나.”

    “그럼 안 되죠! 참시술의 보조 없이 참시에 성공할 가능성은 너무 희박해요.”

    “가능성이 아무리 낮다고 한들, 시도하지 않아 아예 가능성을 없애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더냐.”

    한립은 류낙아가 걱정할까 가볍게 웃음 지었다.

    “저도 최근에 대라 초기 최고봉에 가까워져서 류청 족장님이 참시술을 알려 주셨어요. 천천히 연구를 해두라고요. 오라버니에게도 잘 맞는지 한 번 보세요.”

    주변을 두리번거린 류낙아가 옥간을 하나 꺼내 한립의 손에 쥐어주고 전음으로 말했다.

    “참시술이 얼마나 귀한 것인데 족인도 아닌 남에게 전하려는 것이냐. 천호족에서 알면 큰 벌이 떨어질 것이다. 다시 가져가거라.”

    무의식중에 옥간을 받았던 한립은 바로 그걸 돌려주려 했다.

    “오라버니가 어떻게 남이에요! 술법에 금제나 표식을 심어둔 것도 아니니까, 오라버니랑 저만 아무 말 안 하면 다른 사람들은 절대 모를 거예요. 그리고 들킨다고 해도 구미선호의 진령혈맥을 타고난 전 천호족의 희망이나 다름없어서 큰일을 당하지도 않을 거고요.”

    류낙아가 씩 웃어 보였다.

    “그건……. 휴, 그렇다면 받아두마.”

    침음하던 한립은 옥간을 받아두며 솔직히 감동을 금할 수 없었다.

    “오라버니, 저도 팔황산을 오래 비울 수가 없어요. 백택 전하의 특별 허가를 받아 온 것이라 바로 돌아가 봐야 해요. 나중에 만황에 오면 꼭, 꼭 저를 보러 와야 해요.”

    바깥쪽을 살핀 류낙아가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작별을 고했다.

    한립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류낙아가 몸을 돌려 회백색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그녀가 떠나는 것을 지켜본 한립은 화지공간으로 돌아가지 않고 옥간의 내용을 확인했다.

    옥간에 적힌 내용은 다섯 글자로 시작했다.

    ‘분신참시술(分身斬尸術)!’

    내용을 읽어 내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극히 현묘한 분시참시술을 간단히 이해해 보자면 의식이 연계된 분신을 제련해 비술로 악시를 분신의 몸으로 옮긴 다음 베어내는 것이었다.

    삼시를 베어내는 일이 극도로 어려운 이유는 삼시가 본체와 하나의 의식세계와 몸을 공유해서였다.

    분신참시술의 정수는 그런 삼시를 체내에서 분신의 몸으로 이동한 다음, 삼시와 본체의 연계가 약해졌을 때 쉽게 제거할 수 있다는 데 있었다.

    이런 참시술을 쓰려면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했다.

    첫째, 악시를 이동시키는 과정을 견뎌낼 만큼 의식의 힘이 강해야 했다.

    둘째, 분신과 본체의 연계가 충분히 강해야 해서, 분신을 오래전에 제련해 두었을수록 성공 가능성이 커졌다.

    옥간 속에서 의식을 거둔 한립의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연신술을 익혀 의식이야 동급 존재를 초월했고, 의식이 연계된 분신이라면 따로 제련할 것도 없이 흑풍 해역에 지기화신이 있지 않은가!

    시간이 촉박했기에 한립은 당장 금동과 제혼을 불러들이고 동부를 정리해 북한선역으로 출발하려 했다.

    출발하기 직전에 그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팔황산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팔황산을 천 리 앞두고 멈춰 예를 올리니 그 앞에 백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허, 이제 가려는 것인가?”

    “예,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떠나려 합니다. 그간 돌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별것도 아닌 것을. 어서 출발하게, 자네의 악념이 오래 기다려 줄 것 같지 않구만.”

    “예, 그것 때문에 서둘러 떠나려 합니다. 앞날을 알 수 없다고, 혹시라도 제가 실패한다면 백택 선배님께서 소백과 천호족 류낙아를 신경 써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당연한 말을 하는군. 그래서 어디로 가려 하는가?”

    백택의 물음에 한립은 무슨 의도로 묻는 것인지 생각하느라 바로 답을 하지 않았다.

    “오해는 말게. 그리 멀지 않은 곳이면 악면이 유천신통으로 보내줄 수도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니.”

    백택은 다 안다는 듯 미소 지었다.

    “제가 백택 선배님의 뜻을 오해해 무례를 범했습니다. 저는 북한선역으로 가려고 합니다.

    한립이 그의 뜻을 알아듣고 공수를 했다.

    “북한선역? 그리 멀지는 않군. 악면 수사, 유천신통으로 한 수사를 그리로 보내줄 수 있겠습니까?”

    “겨우 그 정도 거리야, 얼마든지요.”

    백택이 쳐다본 허공에서 악면이 나타났다.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천정의 수배령이 내려져서 한 수사가 함부로 돌아다니기 어려운 형편이 아닙니까.”

    “감사합니다, 백택 선배님, 악면 선배님.”

    한립은 백택이 말하는 유천신통이 뭔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도움을 주겠다니 진심으로 고마웠다.

    “내가 제일 성가셔하는 게 서로 고맙네 어쩌네 하면서 시간때우는 것이야. 한 수사, 준비하게.”

    악면은 그런 인사치레를 정말 민망해하는지 그냥 손을 저어버렸다.

    펄럭인 그의 소매에서 푸른빛 한 덩이가 나와 확 커지더니 반투명한 새로 변해 한립을 한입에 집어삼켰다.

    너무 빨라서 한립이 피하고 말고 할 시간도 없었다.

    반투명한 거대 새의 뱃속에 들어간 한립은 법칙 파동을 품은 구름 모양 주술문자들에 둘러싸여 엄청난 속도로 날아갔다.

    사방에서 밀려드는 압박감에 꼼짝도 못 하고 끌려가듯 이동하는데, 그 속도가 그가 둔광을 일으킨 것보다 얼마나 빠른지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십여 시진 뒤.

    반투명한 푸른 거대 새는 허공 난류를 지나 공간을 뚫고 울창한 수풀 위에 도착했다.

    펑!

    거대 새가 산산조각이 나서 푸른 기류로 흩어지고 드디어 속박에서 벗어난 한립이 금빛을 반짝이며 섰다.

    의식을 퍼트린 그는 희색을 드러내며 어느 언덕 위 성 앞에 내려섰다.

    성문에는 명구성(明丘城)이란 글자가 적혀 있었다.

    와본 적은 없지만 촉룡도로 가면서 들어본 적 있는 황란대륙에 있다는 성이었다.

    “하루 만에 여기까지 오다니 유천신통이 범상치가 않구나.”

    도조의 신통은 놀라웠다.

    팔황산과 북한선역의 거리를 생각했을 때 전송진도 이용하지 못하고 주구장창 날아왔으면 백년이 걸려도 올 수 있을까 말까 했다.

    그런 거리를 악면은 손을 휘, 저어서 날려 보낸 것이다.

    한립은 멀리 팔황산 방향을 향해 예를 취하고 흑풍해역이 있는 곳으로 출발했다.

    * * *

    북한선역, 흑풍해.

    푸른 해역 위로 바람이 불면서 물결이 넘실넘실 일었다.

    드넓은 해역 어딘가에 면적은 그리 넓지 않지만 겹겹이 진법으로 둘러싸인 섬들이 본섬과 연결되어 북두칠성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해가 뜨려고 하늘이 밝아지자마자 본섬의 중앙 광장에 수십만 명이 몰려들어 거대한 석상에 절을 올리고 흩어졌다.

    두 팔을 펼쳐 천하를 살피는 듯한 사람 모양 조각상이었다.

    하늘 위로 휙휙 뭔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사람들은 익숙하다는 얼굴이었다.

    “호자야, 조신(祖神) 대인의 비호가 있었기에 인근 수십 개의 섬들이 전부 우리 오몽도 휘하에 들어오지 않았더냐. 그 섬들의 족장들이 매년 이날이 되면 직접 오몽도로 찾아오고 말이다.”

    흩어지는 사람들 중 까무잡잡한 피부의 백발노인이 역시 까무잡잡하고 다부지게 생긴 꼬마를 데리고 가다 뿌듯하게 말했다.

    “할아버지는 매년 이날만 되면 같은 소리를 하세요? 귀에 딱지 앉겠어요.”

    호자가 질린다는 듯 투덜거렸다.

    “허허, 네가 뭘 아느냐. 옛날에 말이다…….”

    “알아요, 다 안다고요. 오몽도가 외적에 의해 멸망할 뻔했는데 조신께서 제때 나타나 다 무찔렀다면서요.”

    노인이 옛일을 이야기 시작하기도 전에 백 번 가까이 들은 이야기라 호자가 서둘러 말을 끊었다.

    “알면 되었다. 그 후로 한참 동안 조신께서 나타나시지 않으니 그게 안타까운 일이야.”

    “할아버지! 저길 좀 보세요.”

    노인이 애석하다는 듯 몇 마디를 더하려는데 손자가 소리를 질렀다

    다들 웅성거리며 걸음을 멈추고 광장을 돌아보고 있었다.

    노인도 고개를 돌리니 거대한 조각상이 마치 빛으로 목욕하는 것처럼 눈부신 남색빛을 내뿜고 있었다.

    거대한 남색 보석이 햇살에 반짝이는 것처럼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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