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7화. 몸 둘 곳 없이
*
“다들 버틸 만 했더냐?”
푸른 거대 새가 물었다.
“그럭저럭요. 그래도 천마운이 정말 무서운 거였네요. 천마 파동이 한 번씩 덮쳐올 때마다 다음번에는 버티지 못할 것 같더라고요. 숙부님이 빨리 벗어나 주시지 않았으면 환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뻔했어요.”
흰둥이가 아직도 가슴이 벌렁거리는지 조잘조잘 답했다.
“당연하지. 그러니 천외허공에서 가장 무서운 게 천마운이란 소리가 있는 것 아니냐. 이건 그래도 작은 편이고, 진짜 커다란 천마운을 만나면 나도 이렇게 빨리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천외허공이 이렇게 위험한 곳일 줄은 몰랐어요. 진짜 앞으로 얌전히 틀어박혀서 수행이나 해야지 나돌아 다니지 말고. 아, 주인님은 괜찮으세요?”
흰둥이가 혼자 중얼거리다가 한립을 돌아보았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한립은 인상을 구기고 흉흉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눈이……. 천마에게 제압당하기라도 하신 거예요? 천마, 이놈 어서 우리 주인님 몸에서 나오지 못해!”
흰둥이가 그의 눈에 어린 핏발을 보고 식겁해 펄쩍 뛰었다.
“괜찮다. 천마의 영향을 받아서 이런 것뿐이야.”
한립이 입을 열었지만 흰둥이는 물끄러미 그를 보며 걱정스러워했다.
“하하, 네 상태에 천마의 영향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줄 알았더니 잘 버텼구나. 그래도 악념은 떨치기 힘들 테지.”
푸른 거대 새가 웃음 지었다.
“선배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어떤 것도 숨길 수가 없군요.”
한립이 쓴웃음을 흘렸다.
악한 생각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지는 않아도 아예 발작하기 전보다는 심경이 불안해 시간법칙과 격원법련으로도 완전히 억제되지 않았다.
“사람의 삼시란 혼백, 의식, 원기, 마음에 모두 뿌리를 두고 있는 현묘한 것이다. 네가 무슨 수단을 써서 수행이 정점에 이르기 전에 악시를 불러냈는지는 모르겠다만, 천마운의 영향까지 받았으니 하루빨리 베어낼 궁리를 해야 할 것이야. 시간을 끌다가는 조만간 악시에게 몸을 빼앗기고 말 테니까.”
푸른 거대 새의 담담한 조언에 한립은 어두운 얼굴로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악면이 말해주지 않아도 다 아는 이야기였지만 대라 초기 최고봉에 이르기 전에 악시를 베는 것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푸른 거대 새도 더는 뭐라 하지 않고 묵묵히 길을 서둘렀다.
반나절이 지나 다시 천풍역과 청명역을 지나 지면 부근으로 내려온 그들 앞에 울창한 산맥이 나타나 있었다.
벌써 만황계역에 도착한 것이다.
다시 얼마간 더 날아가니 위풍당당한 팔황산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대단하구나.’
한립은 악면의 속도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자신은 몇십 년이 걸려서야 팔황산에서 대금원선역까지 날아갈 수 있었는데, 악면은 겨우 하루 만에 그 거리를 이동한 것이었다.
눈을 반짝인 그가 거대 새 등에서 날아내려 허공에 섰다.
“악 선배님, 만황까지 데려와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 신분이 특수해 팔황산에 머물면 말이 나올 수 있으니 여기까지만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악면도 멈춰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뜻대로 하게.”
“하하하! 한 수사, 기껏 팔황산까지 와서 잠깐 앉았다 가지도 않겠다니 그게 무슨 실례인가?”
악면이 선선히 허락하는데, 하얀빛이 번득이고 백택이 나타났다.
“백택 선배님.”
한립은 그를 향해 인사를 했고, 흰둥이도 예를 올렸다.
“구원관을 뒤집어 놓고 제법이더구만. 이원구가 어떤 인물인데 아주 된통 당하고 말았어. 아주 통쾌한 일이 아닐 수 없네! 하하하!”
“당연하죠! 저랑 주인님이 나섰는데요. 구원관 사대성사 중에 두 명이나 우리에게 혼쭐이 나서 막 울고불고 달아나고 그랬어요.”
흰둥이가 우쭐해서 자랑했다.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윤회전이 일으킨 소동에 끼어들었다 빠져나온 것뿐입니다.”
한립은 흰둥이의 허풍을 무시하고 간단히 답했다.
“구원관 소동 같은 거대한 소용돌이에 말려들었다가 멀쩡히 빠져나온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일세. 그러고 보니 떠날 때는 태을 최고봉이던 수행이 대라 초기로 훌쩍 늘었구만. 중기가 머지않았어. 악면 수사, 우리가 젊었을 때도 이렇게 빨리 성장하지는 못하지 않았습니까?”
백택은 한립을 칭찬하다가 악면을 보며 웃었다.
“과찬이십니다, 선배님.”
한립은 공손히 말했다.
“너무 겸손한 것도 흠이네. 원래 운도 실력의 일부라고, 이렇게 수행을 높일 수 있었던 것도 다 자네의 복이 아니겠나. 이번 구원관 행에서 약속대로 소백을 잘 돌봐주고 평안히 만황으로 돌려보내 주어 정말 고맙구만.”
백택은 흰둥이가 어디 상한 곳은 없나 살핀 후 말했다.
“소백은 제 벗이기도 하니 당연히 최선을 다해 보호해야지요. 소백의 수행이 높아져 스스로 잘 돌보았기 때문에 제가 돌봐주었다 하기도 그렇습니다. 게다가 이번에 무사히 만황계역으로 돌아온 것도 전부 악면 선배님 덕입니다.”
“부담스러워하니 고맙다는 말은 그만하겠네. 그래도 팔황산까지 왔는데 같이 들어가세나.”
겸손함을 잃지 않는 한립을 보고 백택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선배님의 초대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만, 제가 몸이 좋지 않아 바로 수련할 곳을 찾아야 할 듯싶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한립은 사정을 설명했고, 그런 한립을 찬찬히 관찰한 백택도 기이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확실히 급히 조치를 취해야겠구만. 내 더 붙들지 않을 테니, 동쪽으로 삼십만 리 정도 가다 보면 나오는 취운산맥(翠雲山脈)으로 가보게. 그곳이 천지영기가 농염하고 가까이에 만황 부족도 없어 폐관수련을 하기에 적당할 것이야.”
“감사합니다, 선배님!”
마침 필요한 정보라 한립은 기뻐하며 고개를 숙였다.
“주인님, 저랑 같이 가면 안 돼요? 백택 전하, 취운산맥이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은데 저도 거기서 수련하면 안 될까요?”
흰둥이가 이렇게 헤어지기 아쉬운지 백택을 올려다보았다.
“안 될 말이다. 앞으로 네가 수련할 곳은 내가 다 준비해 두었으니 앞으로는 팔황산에 머물러야 할 것이야.”
당장 백택의 표정이 굳어졌다.
“……알겠어요.”
이번에는 흰둥이도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선배님들, 소백, 저는 먼저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립은 결정이 나자 공수를 한 다음, 금빛 빛줄기로 변해 동쪽으로 날아갔다.
남은 사람들이 멀어지는 그를 눈으로 지켜보고는 팔황산으로 향했다.
잠시 후 동쪽 삼십 만리 바깥의 취운산맥에 도착한 한립은, 기이하게 비취색 암석과 토양으로 이루어진 산맥이 과연 백택의 말대로 천지영기가 농염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신을 집중해 산 절벽에 동굴을 파 동부를 만들고 금제까지 일사천리로 펼친 그는 공간의 문을 열어 화지동천 안으로 들어갔다.
제혼과 금동이 입구에서 서 있다 그를 맞이했다.
“제혼, 천마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것이다. 네가 나를 도와 악념들을 억제할 수 있는지 봐야겠구나.”
한립은 긴말하지 않고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았다.
고개를 끄덕인 제혼이 한립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암홍색 빛을 강하게 일으켜 그의 전신을 두르는 빛의 장막을 형성했다.
스스스.
한립의 몸에서 흉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삼일 밤낮이 지난 후에도 몸에서 빠져나오는 흉살기는 줄지 않았고, 금동이 초조하게 한립과 제혼을 번갈아 보며 입을 떼려다 말았다.
지금이 중요한 고비인 것을 알았기에 집중력을 흩어지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가장 분한 건 자신의 신통이 한립의 상황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저씨, 꼭 이겨내야 해요!’
금동은 속으로 열심히 한립을 응원했다.
“제혼, 여기까지 하자꾸나.”
번쩍 눈을 뜬 한립이 차분히 말했다.
“주인님……. 몸의 악념이 이전과는 달라진 것 같아요.”
제혼은 명에 따라 손을 거두다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너도 알아차렸구나.”
한립이 씁쓸한 얼굴로 자세한 내용을 언급하지 않고, 입을 떼려는 금동을 손을 들어 막았다.
악념이 온몸을 지배하려고 하는데 제거가 되지 않았다.
유일한 방법은 아예 악시를 베어서 근원을 제거하는 것이었는데,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난 앞으로 시간차공간을 만들어 폐관수련을 하며 대라 중기에 이르기 위한 선규를 뚫을 것이다. 너희들도 내 걱정은 말고 수련에 집중하거라. 드넓은 진선계에서 이 만황계역 말고는 발붙일 곳이 사라졌으니, 살아남으려면 우리 전부 실력을 높이는 수밖에 없다. 그래야 후에 내게도 힘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야.”
한립은 영역을 펼치고 진언보륜을 불러내 광음천선대진의 보조를 받으며 시간차공간을 발동했다.
시간 유속이 만 배는 빨라지고 있었다.
제혼과 금동은 여전히 그가 걱정되었지만, 마음을 정돈하고 각각 한립의 좌우에 자리를 잡고 수련을 시작했다.
한립은 바로 수련을 시작하지 않고 귀령자 동부에서 가져온 귀한 재료들을 전부 윤회전을 통해 팔아치웠다.
선원석이 충분하지 않아 넉넉하게 여분을 만들어 놓아야 했다.
수련 준비를 마친 그는 눈을 감고 <대오행환세결>을 운용해 나머지 선규들을 뚫으려 했다.
‘흠?’
시작하자마자 선규를 뚫는 과정이 너무 순조로웠다.
이 대로면 몇 년 지나지 않아 새로운 선규를 뚫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악시를 격발해서 나머지 선규들이 절반 정도 열린 것과 연관이 있는 건가?”
이런 짐작을 하던 한립은 잡생각을 떨치고 선규를 뚫는 데 집중했다.
* * *
10여 년 뒤.
한립 어깨에서 금빛이 반짝이고 새로운 선규가 뚫렸다.
한립은 기뻐하다 웃음기를 거두었다.
선규를 뚫어 수행이 약간 늘어난 순간 의식세계에 봉인해 둔 악시의 힘도 약간 늘어났기 때문이다.
“후후.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라. 네 힘이 늘수록 내 힘도 강해질 테니! 이 봉인에서 벗어나는 날 네 몸은 내 것이다!”
그의 생각을 알았는지 악시가 음흉하게 웃음 지었다. 한립은 악시가 뭐라든 신경 쓰지 않고 다음 선규를 뚫기 위해 눈을 감았다.
* * *
시간이 지나 삼만 년의 시간이 훅 지나갔다.
이제 그의 몸에는 839개의 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기운이 크게 늘어 묘법선존, 귀령자 등과 같은 대라 중기에 맞먹을 정도였다.
다만 흉살기도 진해져서 미간에 검은 기운이 맴돌고 악귀 얼굴을 닮은 칙칙한 주술문자가 번들거렸다.
금빛을 거둔 한립이 눈을 떴다.
핏빛이 눈동자 절반을 잠식해서 붉은 부분은 광기가 가득하고 정상인 부분은 누구보다 평온해 차이가 분명했다.
수련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게 순조로워서 이제 선규를 하나만 더 뚫으면 중기에 이르기 위한 선규는 채울 수 있었다.
아직 참시를 위한 준비는 끝나지 않았지만 이대로 계속 시간만 끌 수도 없었다.
머릿속에서 수시로 악시의 실성한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와 그처럼 의식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으면 진작 이성을 잃었을 것이다.
곁의 금동과 제혼이 그가 깨어난 것을 느끼고 천천히 수련을 마쳤다.
삼만 년은 그들의 수행에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고, 한립의 안위가 걱정되어 신경이 분산되다 보니 티가 나게 수행이 늘지 않았다.
“아저씨 괜찮은 거예요? 선규가 늘긴 늘었는데…….”
금동이 한립의 절반만 붉어진 눈동자와 전신을 휘감은 칙칙한 기운을 보고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견딜 만하니 걱정하지 말거라.”
“주인님, 남은 선규들을 다 뚫으셨으니 이제 참시를 하시려는 건가요?”
제혼이 한립의 선규들을 살피고 물었다.
“그렇기는 한데 이곳에서는 아니다.”
이렇게 답한 한립은 무언가를 묵묵히 고민했고, 금동과 제혼은 그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았다.
“……금동, 제혼. 참시를 위해 준비할 것이 있으니 너희가 바깥에 나가 호법을 서주어야겠다.”
수결을 맺어 영역을 거둔 그가 입을 열었다.
금동과 제혼이 반대하지 않고 나간 뒤, 한립은 윤회전 가면을 쓰고 거래면을 살펴보았다.
수련하는 동안 윤회전에 거액, 진귀한 보물 혹은 시간도단 등을 걸고 대라 초기에 악시를 참하는 방법과 그 깨달음을 담은 경전을 구한다는 임무를 등록해 두었는데 연락이 없었다.
안타깝기는 했지만 예상한 바였다.
대라경 수사들도 많지 않은데 그들이 초기, 중기, 후기의 절정기에 필요로 하는 참시를 하는 방법이 쉽게 나돌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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