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2165화 (1,922/2,000)

2165화. 팔황산으로

*

단번에 10개의 불구슬들을 베어낸 악청은 홀연히 자신이 검을 휘두르는 속도가 느려진 것을 발견했다.

터진 단시류화 불똥이 그의 몸에 묻어 미세한 시간법칙의 힘을 쌓아 이런 일을 해낸 것이다.

한립의 두 손이 현란한 금빛으로 물들었고, 두 눈에도 뇌전 실줄기들이 어려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이 정도 힘으로는 한참 부족하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가 의식을 움직이자 뒤쪽의 금색 천문이 조금 더 열리면서 뇌해에서 뇌전구슬들이 마구 쏟아져 내려 그의 합장한 손으로 응결되었다.

크윽

한립은 고통스럽게 신음했을 뿐 아니라 눈꼬리가 찢어지면서 살점이 드러나고 그 사이로 금색 뇌전이 치직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금동과 흰둥이가 동시에 한립 쪽을 쳐다보고 화들짝 놀랐다.

“아저씨, 더는 안 돼요! 몸이 버티지 못할 거예요…….”

금동이 소리를 질러 그를 말리려 했고, 흰둥이도 뭐라 하려 했으나 파풍이 달려들어 결국 말하지 못했다.

금동에게 밀리고 있던 무회가 숨을 돌리고 교활하게 웃으며 다시 달려들었다.

‘아직 부족해, 아직…….’

이를 악문 한립은 속으로 미친 듯이 외쳤다.

천장 밖에서 속도가 확연히 줄어든 악청이 여전히 다가오면서 한립이 응결한 뇌전의 힘이 무시무시한 수준에 이른 것을 보았다.

“여기까지다!”

우뚝 멈춰선 악청의 마음에 살심이 차올랐다.

그가 한 손을 들어 올리자 거대 산봉우리가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단시류화들을 쳐올리면서 모든 금색 불구슬들을 막아냈다.

동시에 그의 장검이 허공에 궤적을 남기며 횡으로 한립이 있는 방향을 갈랐다.

노란 파문이 한립을 향해 겹겹이 밀려들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 거대한 공간균열들이 생겨나 오랫동안 봉합되지 않았다.

뇌전의 힘을 원하는 만큼 모으지 못한 한립은 씁쓸히 합장을 풀어 검결을 맺으려 했다.

그때 어디선가 극강의 만황기운이 날아들어 악청의 검기 파문을 산산조각내고 파랑으로 악청마저 뒤로 물러나게 했다.

그 기운의 파랑에 옥호봉 대부분이 평지가 되었고 떨어진 암석과 꺾인 나무들이 재가 되어 황무지가 되고 말았다.

“역시 만황진령이었어!”

그 기운에 수천 장이나 밀려난 악청은 흰둥이에게 눈을 돌렸다.

흰둥이는 그의 말에 답하지 않으며 답답해했다.

백택이 금색 부적을 주며 말하길 그의 일격의 3할에 해당하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했는데 악청에게 조그만 부상도 입히지 못했다.

반대로 그와 싸우던 파풍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저 금색 부적을 자신과 싸울 때 썼으면 그녀는 뼈도 추리지 못했을 것이다.

한립은 직접적인 충격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영향을 받아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팔뚝 피부가 갈라지면서 금색 뇌전이 치직거렸다.

흰둥이 덕분에 합장을 유지한 그의 얼굴에는 기이한 붉은 기운이 올라와 있었다.

눈앞에 뿌옇게 변하고 정신마저 흐릿해졌다.

“못 버티겠느냐? 그럼 포기하고 내게 주도권을 넘기거라! 그럼 저 녀석을 죽일 수 있을 것이야. 후후.”

음산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한립은 악시가 말을 거는 것임을 깨닫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멀리 있던 악청은 한립이 한계에 이른 것을 알고 급히 달려들지 않고 기다렸다. 한립 스스로 몸이 터져 죽는다면 더욱 좋지 않겠는가.

“후후. 괜히 죽을 때까지 버텨서 나까지 죽게 만들지 말고 포기하라니까? 내가 저 놈을 죽여주면 최소한 너를 따라다니는 꼬마 녀석들은 살릴 수 있을 것 아니냐!”

악시가 그를 살살 꼬드겼고, 한립은 정신이 몽롱해졌다.

정말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차랑~.

이를 악문 그는 의식을 이용해 악시를 속박한 격원법련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하하하! 그렇지!”

악시가 광소를 터트렸다. 하지만 그의 웃음소리가 그치기 전에 사슬은 풀리다 말았다.

“네 힘을 빌리기는 하겠지만 전부는 필요 없거든.”

한립이 조소했다.

“네 놈…….”

격원법련을 느슨하게 만들자 아직 다 열리지 않은 선규들이 놀랍게도 절반이 열려 기운을 보충하고 몸을 가눌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한립은 두 손목을 돌려 뇌전을 갈무리하면서 무시무시한 파동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란 악청은 한립이 대체 무슨 수로 한계를 극복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퍼트려 두었던 영역을 체내로 수축해 기운을 폭발하면서 거검을 들지 않은 다른 손으로 법결을 맺어 짙은 흙 속성 법칙을 검신에 흘려 넣었다.

검신에 일곱 개의 산봉우리 문양이 다시 떠올랐다.

악청의 손짓에 검빛이 천지를 좌우로 나누며 일곱 개의 산봉우리들을 하나씩 날렸다.

이때, 한립의 돌연 수결을 바꿔 가치 활을 쥔 듯한 자세로 응결된 뇌전빛을 날렸다.

쉬이익!

천뢰를 응결한 금색 화살이 순식간에 첫 번째 산봉우리를 관통했다.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금색 화살은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으로 일곱 개의 봉우리를 전부 관통해 악청에게 날아들고 있었다.

그러나 대라 후기인 악청도 당황하지 않고 극히 빠르게 반응했다.

거검 검날을 앞에 두고 몸을 옆으로 틀어 급소를 보호한 것이다.

쿠쿠쿵…….

화살이 어찌나 빠른지 거검을 뚫고 악청의 왼쪽 가슴을 뚫고는 뒤쪽 산에 떨어질 때까지 충돌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강력한 충격을 받은 악청이 수천 장을 밀려나 운석처럼 바닥으로 추락했다.

쿵!

연기가 치솟은 곳에는 반경 천 리 규모의 땅이 함몰되고 말았다.

그러나 고공의 한립은 함몰된 땅에 떨어진 악청을 볼 수 없었다.

전신이 새까맣게 타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는 데다 두 눈동자마저 칠흑같이 변해 고공에서 추락하고 있었다.

36자루의 청죽봉운검들이 마지막 남은 힘으로 그를 받치고 천천히 바닥까지 호송해주었다.

무회와 파풍은 기함했다. 대라 후기의 악청이 겨우 대라 초기의 한립에게 나가떨어지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투지가 불타오르지 않았다.

금동과 흰둥이가 그들이 놀라는 사이 전장을 벗어나 급히 한립 쪽으로 날아들었다.

그들도 악청이 떨어진 곳은 살피지 않았다.

“아저씨…….”

금동이 한립을 부축하며 얼굴을 구겼다.

한립은 지금 몸에 힘도 빠지고 의식세계는 산사태가 난 것처럼 엉망이라 겨우 꺼낸 단약을 입에 넣을 힘도 없었다.

그걸 본 흰둥이가 서둘러 단약을 대신 입에 넣어주었다.

“가자.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다.”

단약을 삼킨 한립이 급히 말했다.

금동은 말없이 그를 한쪽 어깨에 메고 출발하려 했다.

“가긴 어딜 간단 말이냐?”

그때 멀리서 노호성이 들려왔다.

굳이 어디서 들려온 것인지 찾을 것도 없이 연기 속에서 주먹만 한 구멍이 뚫린 거검을 든 비늘 갑옷 사내가 날아오르고 있었다.

비늘 갑옷이 망가진 가슴 부분에는 나선형의 구멍이 뚫려 황금색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주변의 새까맣게 탄 피부는 울퉁불퉁하게 화상 흉터가 생겨 있었지만.

“대라 후기 수사는 정말 만만히 볼 수 없군요.”

한립이 다가오는 악청을 보고 탄식했다.

“겨우 대라 초기 수사가 내게 중상을 입히다니,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일게다. 오늘 네 놈의 뼈까지 갈아버리지 않으면 본 좌의 화를 풀 길이 없겠다!”

악청은 정말 열을 받았는지 힘을 주어 말했다.

금동이 심각한 얼굴로 한립을 내려놓고 그와 흰둥이 앞을 막아섰다.

“누님…….”

흰둥이가 그런 소녀의 등을 보고, 금동을 불렀다.

“대라 후기 수사가 그리 대단하던가?”

그 순간 아무 징조도 없이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늘 끝에서 들려온 소리가 제호산 영역 전체를 울리는 듯했다.

“누구냐!”

멈칫한 악청이 고공을 올려다보며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맑았던 하늘이 어두워져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한립은 기뻐하며 하늘을 뒤덮은 방대한 그림자가 수축해 삿갓을 쓴 거한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검은 수염이 수북하고 눈이 움푹 들어간 사내는 팔대 진령왕 중 하나인 유천곤붕 악면이었다.

“악 숙부님이, 어떻게 오셨어요?”

흰둥이도 기뻐했다.

금동은 악면을 아래위로 훑으며 오랜만에 경외감 비슷한 것을 느꼈다.

“내가 찾으러 오지 않았으면, 한립 저 녀석 때문에 네가 여기서 죽을 뻔하지 않았느냐.”

악면이 한립을 흘기며 답했다.

그 한 마디에 금동은 경외감이 싹 달아나 노기등등하게 눈을 부릅떴다.

“주……. 한 수사 탓이 아니에요. 제가 꼭 돕고 싶다고 억지를 쓴걸요.”

흰둥이가 얼른 해명했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자꾸나.”

악면은 몸을 돌려 악청 무리를 보았다.

“사라진지 오래라는 유천곤붕이 세상에 남아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저 꼬마 녀석의 신분이 심상치 않은 모양이군요.”

놀란 눈빛이 차차 가라앉은 악청이 차분히 말했다.

“썩 꺼지거라.”

악면은 군더더기 없이 원하는 바를 전했다.

그러자 이미 중상을 입은 데다 도조급 만황진령을 앞에 두고 악청도 자살행위를 할 수는 없었다.

“선배님, 당시 만황이 얻은 교훈을 잊지 마십시오.”

그는 이 말을 남기고 무회, 파풍과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감사합니다, 악 선배님.”

기운을 약간 차린 한립이 몸을 바로 하고 악면을 향해 포권을 해보였다.

“더 쉬게. 내가 보호해줄 것이니 더는 귀찮게 구는 녀석은 없을 것이야.”

악면이 미간을 좁히고 말했다.

사실 정말 한립에게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흰둥이의 안위가 그에게 그만큼 중요했기에 투덜댄 것뿐이었다.

한립은 자리에 앉아 운기조식을 했다.

조금 전 싸움으로 기운을 과도하게 소모한 것은 물론 악시의 속박까지 절반 정도 풀어버려 참시를 위해 남겨둔 시간이 더욱 줄어들었다.

“약속시간이 다 되어가서 안 그래도 너를 데리러 가려고 했는데, 네가 백택이 준 부적을 써버린 것을 감지하고 서둘러 오는 길이다.”

악면이 흰둥이를 향해 말했다.

“제가 약속한 시간이 되어도 안 돌아올까봐 걱정하신 거예요?”

흰둥이의 말에 악면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안심하세요, 악 숙부님. 이번에 돌아다녀 보니까, 제가 얼마나 부족한지 알았어요. 돌아가는 대로 폐관수련에 들어가 아버지께 물려받은 힘을 온전히 계승하기 전까지는 나오지 않을 거예요.”

“그걸 깨달았다니 많이 늘었구나.”

악면은 그제야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보고 있던 금동의 입가에 미소 비슷한 것이 어려 있었다.

한 시진이 지나서야 한립이 눈을 떴고, 악면은 그와 인사를 하고 흰둥이를 데리고 떠나려 했다.

“악면 선배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무엇이지?”

한립의 말에 악면이 멈칫해 그를 바라보았다.

“팔황산에 돌아가실 때 저도 데려가 주실 수 있는지요?”

“오, 웬일인가. 자네가 팔황산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예, 폐가 되지 않는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한립은 공수를 해보였다.

구원관 일도 마무리되었고 이제는 수행을 높이는 일이 급했다. 그러나 그 일이 있고 선역 전체에 수배령이 내렸을 테니 어디로 가도 안전하지 않았다.

천정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팔황산이야 말로 그가 수련하기 적합한 곳이었다.

“내 데려가 주겠네.”

미소를 지은 악면이 손을 저었다.

푸른 바람이 불어와 한립은 자기도 모르게 떠올랐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고 몸을 가눌 수 없어 놀란 그가 시간법칙을 이용해 벗어나려는데 발끝이 부드러우면서도 탄성이 있는 곳에 닿았다.

철퍼덕 주저앉은 한립은 바닥을 살피고 안색이 변했다.

그가 앉은 곳은 푸른 거대 새의 등 위였는데, 이건 새라기보다는 끝이 보이지 않는 대륙 같았다.

악면이 유천곤붕 본체로 돌아간 것이다.

이 거대한 푸른 새의 등 위에서 한립은 마치 좁쌀 같아 보였다.

흰둥이 역시 그의 앞에 주저앉아 놀라움과 함께 약간의 흥분과 동경을 느꼈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