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3화. 제호산(提壺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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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일은 어찌 되었더냐.”
“물건을 확보했습니다.”
교삼이 오색 병을 꺼내 들었고,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던 윤회전주가 몸을 일으켰다.
등이 굽은 것처럼 보이던 그가 일어서니 체구가 건장했다.
“하하.”
오색 병을 끌어당겨 살핀 그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전주, 왜 그러십니까?”
“구원관 개산 조사답구나. 이원구에게 우리가 당한 것이야.”
윤회전주가 손목을 돌려 병을 다시 던져주었다.
“그 말씀은, 이게…….”
“모조품이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윤회전주의 말에 교삼이 깜짝 놀라 무릎을 꿇었다.
“일어나거라. 너를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대체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오색 병은 장천병을 따라 만들기는 했지만 솜씨가 일품이라 이 자체로 2품 선기는 되겠구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반드시 진짜를 찾아오겠습니다.”
교삼은 일어서지 않고 포권을 해보였다.
“소란을 피워놨으니 구원관은 물론 금원선역 전체가 방비를 단단히 할 게다. 다시 돌아갈 기회는 없을 것이야. 게다가 이원구가 나섰는데 너희가 무사히 돌아온 것은 그가 입장을 표명한 것인데 그걸 무시할 수도 없겠지.”
“저희가 무사히 달아난 게 이원구의 뜻이었다는 말씀입니까? 구원관과 천정의 관계를 생각하면…….”
“내 생각에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첫째, 우리와 죽기 살기로 싸우고 싶지는 않다는 뜻이고. 둘째, 이번 기회에 자신들의 결백을 증명하려는 것이겠지.”
“그렇군요, 천정은 곽연의 고발에 봉천선사와 곽연을 구원관에 보내 이원구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가를 조사하려 했습니다. 그 결과 봉천선사는 저희들이 죽이고 물건도 저희가 들고 사라졌으니 천정도 더는 구원관을 의심하지 않겠군요.”
윤회전주의 말에 교삼도 무슨 소린지 이해가 되었다.
“장천병은 수많은 세력이 눈이 벌게져 찾는 보물이니 그들이 보물을 잃고 오색병 같은 모조품을 만든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만 천정의 그 자를 그리 쉽게 속일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윤회전주가 웃음 지었다.
“감히 여쭙겠습니다. 구원관이 무엇을 만들고 있기에 천정이 긴장을 하는 것인지요?”
교삼이 머뭇거리다 물었지만 윤회전주는 고개를 저을 뿐 답을 주지는 않았다.
그걸 본 교삼도 묵묵히 기다리기만 했다.
“우리가 무엇을 얻었는지는 결코 바깥으로 새어나가서는 안 될 것이다. 금원선역에서의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인근 선역들에서도 철수를 시켜라.”
한참 만에 윤회전주가 내린 명에 교삼은 의아하다는 눈빛이었다.
“구원관이 무엇을 만들든 간에 우린 어떤 정보도 주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천정이 최악을 상상하고 의심이 깊어져 구원관과의 관계에 틈이 커질 것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의심의 씨앗은 심어두면 시간이 지날수록 상상도 못 하게 커지는 법이다. 우리에게는 좋은 일이니 그동안은 다른 일을 하고 있자꾸나.”
초여선역(楚余仙域)은 금원선역 인근의 북한선역의 절반밖에 안 되는 작은 땅덩어리였는데, 그 특수한 위치 덕에 꽤 번영을 이루었다.
이 선역에는 다른 중대형 종문들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가장 큰 세력으로 초여선궁과 제호산(提壺山)이 있었다.
제호산으로 말할 것 같으면 흥미로운 종문으로 촉룡도가 부흥했을 때보다 세력이 강해서 노조와 당금 장문인인 산주가 태을경 수사이고, 나머지도 대부분 금선 수사들이었다.
이 종문은 수련도 아니고, 단약이나 선기 제련도 아닌 선주(仙酒)를 빚는데 열정적이라는 점에서 아주 특이했다.
제호산 산문이 위치한 산은 꼭 술병을 닮아서 옥호봉(玉壺峰)이라 불렸고 대대로 빚어놓은 다양한 선주들이 동굴마다 가득했다.
보통 핵심 장로 이상이 되어야 들어갈 수 있는 옥호봉 술 창고에 누군가 소리 없이 동부를 뚫어놓고 겹겹이 금제를 쳐놓고 앉아 있었다.
침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청년은 검은 가면을 쓰고 무어라 중얼거렸는데, 공법이나 주문이 아닌 단순히 투덜거리는 소리였다.
실망한 눈빛으로 길게 숨을 내쉬고 가면을 벗은 그는 평범한 용모를 지닌 한립이었다.
“주인님, 어떻게 됐어요?”
흰둥이가 걸어와 물었다.
“무슨 일인지 몇 달째 교삼과 연락이 되지 않는구나.”
“달아나다 구원관에 잡히기라도 한 걸까요?”
“글쎄다, 그보다 금동은 어디로 간 것이냐?”
“누님은 또 몰래 술을 훔쳐 마시러 갔어요. 여기 술은 진짜 끝없이 들어가는 것 같아요.”
그 말에 살짝 미간을 찌푸린 한립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제호산은 다른 건 별거 없지만 술 빚는 솜씨는 호언 도인 이상이라 확실히 온갖 맛좋은 선주들이 많았다.
특히 선계 여수사들을 겨냥해 만든 무미낭(武媚娘)이란 술은 맛이 달콤하면서도 취하면 기분이 몽롱하니 좋아져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금동도 여기에 온 뒤 무미낭에 빠져 있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누군가 자기 머리통보다 커다란 검은 술단지를 들고 걸어 들어왔다.
“아저씨, 나 왔어요…….”
술기운으로 얼굴이 발그레해진 금동이 술단지를 안은 채 한립 옆에 앉았다.
“그만 훔쳐 마시라고 말하지 않았더냐.”
“안 훔쳐 마셨는데요? 여기 있는 무미낭은 전부 내 거에요.”
그러면서 금동은 술단지를 들어 한립에게 보였다. 그곳에는 구불구불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제호산 사람들이 이걸 보면 우리의 행적을 들키게 될 것이다.”
제혼이 술단지에 이름을 새겨놓은 것을 본 한립이 정색을 하고 혼냈다.
그의 질책에 금동이 얼른 술기운을 흩어버렸다.
“들키면 뭐요? 맨날 여기 틀어박혀 있으려니까 답답해 죽겠어요.”
소녀가 입을 비죽였고, 그걸 본 한립은 얼굴을 풀고 탄식했다.
“윤회전이 대금원선역에서 난리를 치고 그쪽은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지만 주변 선역들은 끓는 기름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우리가 초여선역에 오자마자 천정 감찰선자가 따라붙은 것을 알지 않더냐.”
“칫, 내가 얌전하길 바란다면 그냥 술 마시게 두세요!”
금동은 골이 나서 툴툴거렸다.
한립이 뭐라고 하려다 안색이 달라졌고, 뒤이어 하얀 빛기둥이 동부 지붕에서 수직으로 떨어졌다.
콰콰쾅!
옥호봉 동쪽을 무너트린 하얀 빛기둥 주변에는 다섯 사람이 서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시퍼런 피부색에 짙은 눈썹을 지닌 위엄 있어 보이는 사내였다.
상반신에 금색 비늘 갑옷을 걸친 그는 대라 후기의 기운을 발산했다.
그 좌우로 선 남녀 중 사내 쪽은 고령의 나이로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데 눈동자에 금색 파문이 일었고, 그 옆의 여인은 젊기는 했으나 인상이 좋지 못했다.
둘 다 천정 감찰사 복장을 하고 비닐 갑옷 사내 옆에 공손히 서 있었다.
그리고 세 사람 뒤로 훨씬 수행이 떨어지는 코가 붉고 마른 노인과 금색 장포를 입은 중년인이 서 있었다.
마른 노인은 머쓱하게 서서 수시로 빛기둥에 파인 산봉우리 쪽을 보며 안타까워했는데 금포 중년인은 시선을 돌리지 않고 말없이 서 있었다.
한 명은 제호산 노조, 다른 한 명은 초여선역 궁주로 나름 이곳에서 하늘과 같은 신분들이었는데 세 사람 앞에서는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그들 뒤로 빼곡하게 초여선역 수사들과 제호산 장로 제자 수천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위쪽으로 10명의 감찰선사 복장을 한 천정수사들이 중앙의 동그란 은색 거울을 들고 옥호봉을 비추고 있었다.
“악청 대인, 제가 볼 때 제호산에 숨어 있는 것은 멀리 달아나지 못한 잡졸들일 겁니다. 육천풍이나 천성존자 같은 거물이 발견된 것도 아닌데 여기까지 직접 오셨군요.”
감찰선사 여인이 비늘 갑옷 사내에게 말을 붙였다.
그런데 눈에서 살의가 번득인 비늘 갑옷 사내가 노호성을 터트렸다.
“육천풍 그 자식은 정체를 숨기고 있다가 봉천선사까지 죽여 천정의 체면을 땅에 떨어트렸네! 그놈이 아니라 윤회전 역도라면 누구든 뼈를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것이야!”
악청이란 사내는 천정의 신관으로 그 품계와 신분이 어마어마했다.
이번 대금원선역 사고는 실로 그 여파가 컸기에 천정이 이런 자를 보내 금원선궁을 맡기게 된 것이다.
고공의 동그란 은색 거울에서 고리형 문양들이 나타나며 빛기둥의 범위가 좁아지더니 하얀빛에 속박을 당한 세 사람이 지하에서 끌려 나왔다.
한립은 가면을 써서 신분을 감추지 않았다. 어차피 옆에 금동과 흰둥이가 있는데 정체를 감출 수는 없어서였다.
천정 수사들은 한립을 알아보고 놀라며 기뻐했다.
“한립!”
감찰선사 노인이 입이 찢어지게 웃었다.
“파풍, 무회, 저놈이 한립이라고?”
악청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대인께 아룁니다. 한립이 확실합니다. 적몽이 몇 차례나 꼭 잡아야 한다고 연락을 취해왔던 자입니다.”
파풍이라 불린 감찰선사 여인이 노인보다 먼저 답했다.
“내가 틀리지 않았어. 직접 온 보람이 있구만.”
악청은 한립을 보다가 금동과 흰둥이에게 시선을 돌리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남들은 금동의 정체만 알아보고 흰둥이의 실체는 모를 수 있었지만 그는 아니었다.
흰둥이야 말고 그의 눈에 꼭 잡아야 할 대어(大漁)였다.
거울이 뿜어낸 하얀빛은 강렬한 공간법칙의 힘이 담겨서 한립 일행은 산에 깔린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저들의 수행이 예상보다 높구나. 내가 어떻게든 금제를 풀어볼 것이니 금동은 흰둥이를 데리고 먼저 떠나거라. 대라 후기 녀석은 반드시 나를 쫓을 것이니 따돌리고 만황계역으로 가마. 너희는 팔황산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
한립은 적의 전력을 파악하고 금동과 흰둥이에게 전음을 보냈다.
“아저씨, 그냥 나랑 같이 다 패버리고 가요!”
금동이 서둘러 말했다.
“누님, 나도요! 나도!”
흰둥이도 소리쳤다.
“백택 선배님께서 나와의 동행을 허락하시며 당부한 말씀을 잊어서는 안 된다. 네게 무슨 일이 생기면 신의를 잃는 일이 아니겠더냐.”
한립은 진지한 목소리로 전음을 보냈다.
“하지만…….”
“걱정 말거라. 너희만 무사히 벗어나면 반드시 따라갈 것이야.”
말을 마친 한립은 눈을 감고 <대오행환세결> 공법을 묵묵히 발동했다.
그가 막 영력 파동을 일으켰을 때, 새로운 금원선궁 궁주가 된 악청이 피식 실소했다.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것들.”
은색 거울이 쿠릉, 하는 소리를 내더니 뇌전 문자들을 일으켜 어른 팔뚝만 한 보라색 뇌전들을 미친 듯이 쏘아 보냈다.
치지지지…….
한립 일행을 향해 보라색 뇌전들이 쇄도했다.
금동이 돌연 등 뒤에서 얇은 수정 날개를 펼치더니 법칙의 힘으로 만들어낸 투명한 날개로 세 사람을 감쌌다.
대부분의 뇌전은 날개에 가로막혔고 나머지는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때 한립의 신형은 그 속에서 사라진 뒤였다.
악청이 가장 먼저 발견하고 그를 찾았으나, 한립은 벌써 거울 아래에서 청죽봉운검을 들고 금색 뇌전을 분출하고 있었다.
그 순간 은색 거울의 주술문자가 또 변해서 물 속성 법칙의 힘을 지닌 남색 광채를 뿜어냈다.
거울을 베려던 한립은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노한 파도와 같은 광채를 버텨내며 거울을 쳐냈다.
충돌로 인한 강렬한 파동에 태을 초기 수행을 지닌 주변 순찰선사 10명이 몸을 흐느적거렸다.
그러나 10 대 1이었고 강력한 거울 보물의 보조가 있어 결국에는 한립의 일격을 버텨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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