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2162화 (1,919/2,000)
  • 2162화. 노인의 경고

    *

    “적몽, 곽연. 윤회전에게 침공을 당하고 구원관이 우스운 꼴을 보였구나.”

    적몽과 곽연 쪽으로 몸을 돌린 회포 노인이 가볍게 웃음 지었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 선배님. 윤회전은 천정도 신중히 상대할 만큼 거대한 적인데 순균 수사가 구원관 제자들만으로 지금까지 방어에 성공한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적몽이 어렵게 미소를 만들어 보이며 아부를 했고, 곽연은 옆에 서서 감히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허허, 그렇더냐? 네 말을 들으니 순균이 무슨 공이라도 세운 것 같구나.”

    회포 노인이 박장대소를 하는데 그 소리가 천둥처럼 대전 안을 콰릉콰릉 울렸다.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던 소리에 적몽과 곽연은 의식세계가 뒤흔들려 다급히 붉은색과 보라색 보호막을 펼쳤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폭풍우 앞에 작은 초를 켠 것 같은 꼴이었다.

    한립은 공법을 운용할 수 없어 보호막도 펼치지 못해 더욱 괴로웠다.

    화앗!

    이때 적몽의 몸에서 붉은빛이 흘러나와 그녀와 곁의 곽연을 감싸 겨우 숨을 돌리게 해주었다.

    “구원 수사, 화를 푸시지요.”

    붉은빛 속에서 홍의 노파가 나타났다.

    얼굴 가득 주름이 가득한 홍발(紅髮) 노파는 손에 학 머리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지팡이를 쥐고 표독스러운 분위기를 발산했다.

    그녀의 등장에 회포 노인이 웃음을 멈추었다.

    ‘환영 허상 따위가 이런 힘을 발휘하다니 또 다른 도조인 건가? 적몽과 닮은 게……. 설마 적융도조?’

    숨을 길게 내쉰 한립도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홍발 노파를 살폈다.

    “적융, 손녀가 내 집안에 들어와 구원관의 보물을 훔치려 했는데 누구의 지시를 받아 벌인 일인지 아십니까?”

    회포 노인의 냉랭한 물음에 한립은 노파의 정체를 확인했다.

    “구원 수사, 전부 다 오해입니다. 우리 몽이가 천정의 명을 받아 서금선과 한립을 잡으러 왔다가 이 일에 휘말린 것 같은데. 다들 병을 두고 싸우니 호기심에 끼어든 것 아니겠습니까? 구원 수사가 마음 넓게 이해해 주시지요? 한참 후배 벌이 아닙니까?”

    적몽이 웃음 지었다.

    “호기심에 여기서 이러고 있었다. 적융 수사는 우리 구원관이 재미 삼아 들락거려도 되는 곳인 줄 알고 있나 봅니다?”

    “이번 일은 확실히 우리 몽이가 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처분을 하실 생각입니까?”

    홍발 노파는 회포 노인이 얼굴을 풀지 않는 것을 보고 담담히 물었다.

    노인이 말없이 적몽과 곽연을 보는데 두 눈에서 금빛이 빠르게 뿜어져 나와 적몽과 곽연을 노렸다.

    “멈추세요!”

    버럭 성을 낸 홍발 노파가 지팡이를 들어 적몽을 향해 날아드는 금빛을 막았다.

    쾅!

    금빛은 지팡이를 통과해 한참 흐릿해진 채로 적몽의 미간으로 들어갔다.

    으악!

    적몽은 머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지만, 곽연은 이마에 금빛이 들어가자 머리가 터져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홍발 노파는 급히 붉은 수정 빛을 적몽의 몸에 주입해 그녀를 고통 속에서 구해주었다.

    “당신!”

    홍발 노파가 회포 노인을 향해 독사 같은 눈빛을 보냈다.

    “수사의 체면을 봐서 손녀는 살려 보내겠습니다. 허나 한 번만 더 구원관 안에서 난동을 부렸다가는 이렇게 쉽게 돌아갈 수 없을 겁니다. 따로 배웅은 하지 않지요!”

    냉소를 흘린 회포 노인이 소매를 펄럭여 적몽과 곽연을 어디론가로 전송해 버렸다.

    한립은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가슴이 쿵쿵 뛰었다.

    선해 보이던 회포 노인이 이렇게 손속이 독할 줄이야!

    백조산 산주를 해명할 시간도 주지 않고 죽여 버리고, 천정의 적융도조의 손녀까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혼내주었다.

    자신이 구원관에 들어와 벌인 짓은 적몽과 곽연보다 열 배는 더 황당무계했으니 그냥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가는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한립은 얼른 탈출 방법을 궁리했지만 몸은 물론 어떤 기운도 움직일 수 없었다.

    이때 구원노조가 뒷짐을 쥐고 천천히 걸어와 그를 보는데 얼굴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요동쳤다.

    한립은 자신의 두 눈을 지긋이 쳐다보는 노인의 시선에 모든 비밀을 밑바닥까지 들킨 기분이었다.

    회포 노인은 급히 입을 열지 않고 그의 주위를 빙빙 돌며 살피다 손을 저었다.

    주변으로 진한 금빛이 퍼져나가 대전을 감쌌는데 마치 금을 녹여 만든 구슬처럼 외부와 내부를 철저하게 격리하면서 엄청난 중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금동과 제혼 심지어 청죽봉운검과의 의식연계까지 단절되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병령 선배 역시 이번에도 소통이 되지 않아 시공간초월로 달아나는 것도 불가능했다.

    “선배님…….”

    눈앞의 노인이 말할 생각이 없어 보이자 한립이 공포를 억누르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노인이 손을 뻗어 그의 가슴팍에서 무언가를 불러들이는 게 아닌가!

    한립은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에게 장천병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인계에서부터 그의 일생은 장천병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노인은 병을 살피다 다시 돌려주었다.

    얼떨떨한 얼굴로 손에 병을 쥔 한립이 노인을 쳐다보았다.

    “장천병 만큼 뜨거운 감자는 없을 것이다. 이걸 잃는 것이 꼭 화라고 할 수 없고, 이걸 얻는 것이 꼭 복이라 할 수 없는 법. 우리 구원관은 이런 보물을 지니고 있을 수 없으니 그리 원하면 네가 가지고 있거라.”

    노인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제약이 풀린 한립은 무슨 일인지 도통 알 수 없었지만 연유를 묻지 않고 품에 장천병을 잘 숨겼다.

    “선배님의 말씀은 저를 죽이지 않겠다는 뜻인지요?”

    “오늘 넌 구원관을 평안히 떠날 수 있을 뿐 아니라 한동안은 구원관 수사들의 추격도 받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 기간이 지나면 윤회전의 인사들과 똑같은 취급을 당하며 금원선역에서 발을 붙일 수 없게 되겠지.”

    “제가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묻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주시는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모든 것이 운명으로 정해진 일이고, 인과(因果)인 것이다. 윤회대도 속에서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는 거겠지. 하늘이 너를 내 앞에 보낸 것을 보면 빚진 은혜를 갚아 그 인과를 마무리 지으라는 뜻이 아니겠더냐.”

    마치 추억을 회상하는 듯 노인을 느릿느릿 말했다. 무슨 운명이니 인과니 윤회니 하는 소리에 한립의 의문은 깊어졌다.

    “제가 전에 선배님께 은혜를 베푼 적이 있다는 소리십니까?”

    “지금의 수행으로는 현생의 궤적을 보는 것이 다일 테니, 윤회 속에 얽힌 인과를 말해 주어봤자 너는 모를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것으로 너와 나의 인과는 끊어졌다는 것만 알아두거라.”

    노인은 큰 짐을 덜어버린 얼굴이었다.

    “선배님 말씀은 제가 윤회의 과정 중에 선배님을 만나 은혜를 베푼 적이 있고, 그 후에 혼백이 윤회를 거쳐 지금의 제가 되었기에 그 은혜를 갚는 거란 말씀 같습니다.”

    한립으로는 깜짝 놀랄 말이었다.

    노인이 그 말을 듣고 괴이하다는 듯 그를 보다 화제를 돌렸다.

    “서금선을 불러내 보거라. 그 아이에게도 할 말이 있다.”

    노인의 말 한마디에 한립은 금동과의 연계가 돌아온 것을 감지했다.

    잠시 망설이던 한립은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금빛이 반짝이고 고운 자태의 금발 소녀가 나타나 그 곁에 섰다.

    “아저씨, 아까는 연락이……. 어, 그때 그 늙은이 아니야?”

    그녀는 노인을 보더니 뜻밖이라는 듯 말했다.

    “못 본 사이에 벌써 이만큼이나 자란 것이냐?”

    노인이 익숙하다는 듯 웃음 지었다.

    “아저씨, 전에 말했던 내게 잘해줬다는 노인이에요.”

    금동은 한립을 향해 해맑게 웃었다.

    “금동, 예의를 갖추어라. 이분은 구원관 노조시다.”

    한립은 금동이 평소처럼 입을 함부로 놀려 일을 낼까봐 급히 말렸다.

    “금동, 너와 내 인연도 깊다고 할 수 있는데 그냥 내 밑으로 들어와 제자가 되는 것은 어떻겠느냐?”

    노인이 금동을 향해 물었다.

    “싫은데, ……요? 겨우 귀곡에서 달아나 이제 구원관을 빠져나가려는데 내가 여길 왜 남아요.”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 강제로 구금되는 것이 아니라 내 관문제자가 되어 순균과 같은 항렬이 되는 것이니까. 생각이 있느냐?”

    “그래도 싫어요. 뭐 우리가 서로 말이 좀 통하기는 해도 난 이미 주인이 있으니까.”

    금동은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

    “그렇다면 억지로 붙들어 두지는 않겠다. 이건 이별 선물이라고 해두마.”

    회포 노인이 기분 나빠하는 기색 없이 용 눈알 크기의 단약을 금동에게 던져주었다.

    “와, 고마워요! 역시 좋은 사람! 잘 먹을게요.”

    거침없이 선물을 받은 금동이 입이 찢어지게 웃었다.

    한립은 할 말이 없었다. 구원관 노조 앞에서 이럴 수 있는 것은 진선계에 금동 말고는 없을 것이다.

    백조산 산주가 저승에서 이걸 보았으면 화가 나서 피를 토했을지도 몰랐다.

    “이제 너희도 가봐도 좋다.”

    허허 웃음 지은 노인은 한립을 바라보다 손을 저었다.

    금빛 공간에 눈을 찌를 듯한 은색 문이 나타나 그 맞은편으로 짙푸른 해역이 보였다.

    “가자.”

    금동을 불러 문 안으로 들어가려던 한립이 그 앞에서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돌렸다.

    “선배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내 이름? 하……. 이름으로 불려본 것이 언제인지 모르겠구나. 난 이원구라 한다.”

    대답을 들은 한립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이 경직되었다.

    그러나 그가 무슨 말을 하기 전 노인이 소매를 펄럭여 만든 강풍으로 그와 금동을 은색 빛의 문 너머로 밀어버렸다.

    “속히 떠나서 다시는 구원관에 발을 들이지 말거라.”

    노인의 경고를 끝으로 은색 빛의 문은 닫혀버렸다.

    “아저씨, 이제 어디로 갈까요?”

    금동이 주위를 둘러보다 한참이 지나도 한립이 말이 없자 그를 돌아보았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의 한립은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이원구’라는 세 글자만 가득했다.

    혼백으로 시공간초월을 했을 때 능운자라는 늙은 도사의 몸에 들어가 그 제자인 이원구를 마주쳤었다.

    자신이 그에게 <범성진마공>과 <탁천마공>을 전수해 주지 않았던가!

    이원구가 말했던 은과가 그것이었을까?

    하지만 당시에 이원구는 그가 시공간초월을 한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어떻게 자신을 알아볼 수 있단 말인가?

    한립은 돌연 이원구의 말이 떠올랐다.

    ‘윤회…….’

    윤회법칙은 시간, 공간과 더불어 삼대 지존 법칙으로 불리면서도 가장 비밀이 많은 법칙이었다.

    “아저씨? 아저씨! 왜 멍을 때리고 있어요. 이제 어디로 가냐니까요?”

    금동이 그의 팔을 붙들고 흔들었다.

    소녀의 행동에 정신을 차린 한립이 주위를 둘러보니 망망대해였다.

    “구원관 영역을 벗어난 것 같구나. 안전을 위해서라도 어서 대금원선역을 빠져나가는 것이 좋겠다.”

    남안이 준 지도를 꺼내 미간을 대어본 한립이 결론을 내렸다.

    * * *

    몇 달 뒤.

    잿빛의 흐릿한 공간에 푸른 치마를 입은 아리따운 여인이 암홍색 강줄기를 따라 수정돌로 이루어진 무지개다리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커다란 삿갓을 쓰고 두툼한 갈의를 입은 윤회전주가 다리 위에 앉아 그녀를 등지고 낚싯대를 물에 드리우고 있었다.

    “전주를 뵙습니다.”

    교삼은 그 아래 서서 사내의 뒷모습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수행이 또 늘었구나. 미간의 표식이 어둑해진 것으로 보아 부상을 당한 것 같은데 다 나은 것이냐?”

    전주는 물을 내려다보며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전주께 아룁니다. 별 것 아닌 부상이었고, 이제는 괜찮아졌습니다.”

    “흙이 모여 산을 이루고 거대한 성을 무너트리는 것은 작은 틈일 때가 많다. 구원관의 방법은 만만치 않으니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야.”

    윤회전주가 물속에 드리운 낚싯대가 튕겨 올라오며 수정 실에 걸린 암홍색 수정 물고기가 날아올라 교삼의 미간 속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무의식중에 피하려던 교삼이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수정 물고기를 받아들였다.

    얼굴에 붉은 기운이 어렸던 그녀는 혈색이 돌아오고는 기운이 안정되었다.

    “감사합니다, 전주.”

    부상이 씻은 듯이 나아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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