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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158화 (1,915/2,000)
  • 2158화. 묘법과의 재전투

    *

    “동남쪽으로 길을 틀자꾸나.”

    한립의 말에 남안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고, 금동과 흰둥이도 이견이 없었다.

    잠시 뒤 수풀에서 몇 개의 둔광이 튀어나와 그들과 상반된 방향으로 달아나고 그 뒤를 십여 개의 둔광이 쫓았다.

    기운을 철저히 감춘 한립 일행은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쫓는 자들은 구원관 핵심 장로와 제자들의 복색을 하고 있었으니 쫓기는 자들은 윤회전 인물들 같아 보였다.

    눈썹을 끌어올린 한립은 마음이 뭔가 이상했다.

    가장 앞서 날아가는 검은 교룡 가면과 원숭이 가면을 쓴 사람의 파동이 익숙해 교삼과 무양임을 알아보았고, 그 뒤로 머리를 산발한 토끼 가면을 쓴 사내와 검은 면사를 드리운 삿갓을 쓴 흑의 여인도 윤곽이 눈에 익었다.

    하지만 워낙 빠르게 달아나 버려 제대로 확인할 틈이 없었다.

    무리의 가장 마지막 사람은 신분을 감출 마음도 없는지 온화하게 웃으며 수시로 뒤쫓는 추격자들을 향해 공격을 날려 시간을 끌었다.

    대금원선역 선궁 궁주 육천풍이었다.

    “저들이 구원궁까지…….”

    복잡한 표정의 남안은 가슴이 떨렸다.

    “금방 진압되지는 않을 모양이니 우린 그 틈에 빠져나가야…….”

    한립이 일행을 불러 다시 가려다 바람을 타고 전해진 기이한 파동을 느끼고 경직되었다.

    동시에 얼굴을 가린 흑의 여인의 신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익숙한 여인의 모습이 겹치면서 가슴이 격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녀가……. 정말 그녀라면…….”

    휙 고개를 돌려 도망자들이 떠난 곳을 바라보는 그의 가슴이 크게 뛰고 있었다.

    “한 수사, 시간이 없어요. 왜 그러시는 거죠?”

    남안이 이상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금동도 한립이 이렇게 격동하는 것을 오랜만에 보아 놀라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회한, 추억, 의혹 등 수많은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주인님…….”

    흰둥이도 참지 못하고 그를 불렀다.

    “꼭 확인해야 할 일이 있어 당장 떠날 수 없겠습니다.”

    안색을 바로 한 한립이 답했다.

    “네? 어째서요?”

    남안은 기겁할 소리였다.

    “사적인 일이라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남고 싶지 않다면 여기서 흩어지는 것으로 하지요.”

    한립은 길게 설명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저와 오라버니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이라 옆에서 보답하는 게 맞겠지만. 안타깝게도 제 수행에 따라다녀 봤자 짐밖에 되지 않겠죠. 더는 짐이 되지 않겠습니다.”

    곰곰이 생각을 정리한 남안이 답했다.

    “남원자의 혼백은 이제 위기를 넘겼으니,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는 화지공간의 제혼에게 직접 묻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립은 은색 빛의 문을 열어 주었고, 남안이 그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님, 갑자기 왜 안 떠난다는 거예요?”

    금동이 빛의 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

    “방금 본 윤회전 사람들 중에 익숙한 기운을 느꼈다. 내가 아는 기운과는 다르지만 내 감각과 의식 깊은 곳의 표식이 반응을 했어. 내가 찾는 여인이 아니라고 해도 그녀와 분명 연관이 있을 것이다.”

    “여인이요? 그 사람이 이렇게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요?”

    흰둥이가 그를 쳐다보았다.

    “내게는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

    입가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걸린 한립을 보고 금동은 천천히 눈을 크게 떴다.

    이전의 표정이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한립의 얼굴은 지금껏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저씨에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라면 어서 따라가 봐요.”

    눈을 반짝인 금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바로 출발하려는데 은신한 그들의 머리 위로 두 개의 둔광이 스쳐 지나갔다.

    한립이 조심스럽게 살펴보니 백조산 곽연과 적몽이었다.

    교삼 무리에게 온 정신을 팔고 있는지 아래 숲에 몸을 숨긴 그들은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저들은 또 왜 나타난 걸까요?”

    곽연과 적몽이 멀어진 것을 확인한 흰둥이가 입을 뗐다.

    “윤회전 무리를 쫓는 것 같지만, 구원관을 돕지 않고 몰래 뒤쫓는 것을 보면 남몰래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겠지.”

    한립은 말을 하며 손을 저어 은색 빛의 문을 다시 열었다.

    남안이 걸어 나왔는데 여전히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이었다.

    “됐습니까?”

    “제혼 수사에게 말씀 잘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한 수사.”

    남안은 다시 예를 취했다.

    “다행이군요. 우리가 가던 방향으로 곧장 가면 구원궁 외곽에 이를 수 있을 겁니다.”

    “제가 기억하는 걸 지도로 옮겨 봤어요. 아는 것도 많지 않고 시간도 없어 상세하지는 못해도 구원궁을 빠져나가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고맙습니다. 남 수사, 선역 어딘가에서 다시 만납시다.”

    한립은 남안이 주는 옥간을 받은 다음 진심을 담아 말했다.

    * * *

    남안이 떠나고도 한립은 은색 빛의 문을 닫지 않았다.

    “앞으로는 서둘러야 할 것 같으니 너희들은 화지공간에 들어가 있거라.”

    그의 분부에 흰둥이와 금동이 반대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그런데 흰둥이가 빛의 문에 발을 들인 순간 뒤쪽에서 폭음이 들리며 금동이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주인님, 무슨 일이에요?”

    닫힌 문을 보고 의식연계로 한립에게 말을 걸었지만 한참 동안 답이 없었다.

    그 시각, 구원궁 수풀 만 리가 얼음으로 뒤덮여 빙설 공간이 형성되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선 한립과 금동은 하늘까지 솟은 두꺼운 얼음벽을 보고 있었다.

    “엄청 끈질기네!”

    금동이 짜증을 냈다.

    “피할 수 없다면 싸우는 수밖에.”

    가볍게 탄식한 한립 아래로 얼음으로 변한 나무와 풀들이 산산조각이나 가루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 얼음 숲에 만들어진 널찍한 통로에 연꽃 모양의 얼음 왕좌에 녹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물을 것도 없이 묘법선존이었다.

    “이 도적놈! 영역으로 주위를 막아놓았으니 도망갈 테면 도망가 보거라!”

    “윤회전 침략으로 구원관이 어려움에 놓인 것으로 압니다. 저 같은 무명소졸은 놔주시고 다른 곳의 대어(大魚)를 낚으심이 어떠신지요?”

    백여 장 거리를 두고 멈춰선 묘법선존을 향해 한립이 물었다.

    “안심하거라. 감히 구원관에 침입한 윤회전 것들은 단 한 명도 빠져나가지 못할 테니까! 본 좌는 네 놈과 결판을 내야겠다.”

    “저 할망구가 뭐라는 거야? 살고 싶으면 능력껏 설쳐야지. 우리 아저씨를 잡겠다고? 네가?”

    금동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그녀의 말에 묘법선존의 눈에 살기가 짙어졌다.

    “이야, 화나니까 더 못생겨 졌잖아? 그런 못생긴 얼굴로 돌아다닐 수 있는 용기는 어디서 난 거지? 우리 아저씨가 혼쭐을 내줘야 자기 주제를 알려나!”

    금동은 그걸 보고 겁먹기는커녕 실실 웃음을 흘렸다.

    “너야말로 웃기는구나! 겨우 대라 초기 주제에 나를 상대로 방자하기 짝이 없구나. 대라 초기와 중기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감도 잡지 못한 것이냐?”

    “하하, 아저씨 저 여자 좀 봐요. 귀령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직 모르나 봐요.”

    금동은 소리죽여 웃으면서 전음으로 한립에게만 들리게 말했다.

    “모르는 편이 낫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속전속결을 내자꾸나.”

    이렇게 답한 한립은 금색 광채를 퍼트려 백 리 공간을 뒤덮고 시간을 느릿하게 만들었다.

    다음 순간, 한 걸음을 내디딘 그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바람만이 맴돌았다.

    눈을 빛낸 묘법선존이 수결을 맺지도 않고 수정 왕좌에서 수정빛을 잔뜩 일으켜 수백 조각의 연꽃잎 수정으로 주위를 뒤덮었다.

    그녀 뒤에서 나타난 한립은 극한의 기운을 머금고 달려드는 연꽃잎 때문에 공간이 얼어붙는 것을 보고 급히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한발 늦었는지 종아리에 한기가 잠식해 얼음이 끼고 있었다.

    얼음 기둥을 매단 듯 다리가 묵직해진 한립은 순간 아래로 쑥 꺼지고 말았다.

    옆쪽으로 몸이 기울어진 한립이 주먹을 뻗어 바닥과 충돌했다.

    강력한 힘에 지면의 얼음이 산산조각이 나면서 그는 반탄력으로 튕겨 올라 종아리에 은색 화염이 일어 얼음을 녹여 주었다.

    그때 머리 위로 눈꽃송이 모양의 수정이 드리워 현묘한 남색 빛으로 여섯 면의 수정 벽을 이루고 그를 가두었다.

    익숙한 수정벽을 본 한립은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저었다. 같은 수에 또 걸리다니…….

    냉기가 풀풀 날리는 수정벽에서 은빛이 어려 한립의 그림자를 비추었다.

    여섯 개의 면에 각기 다른 표정의 자신이 서 있었지만 한립은 서둘러 공격하지 않고 청죽봉운검 한 자루를 불러냈다.

    그러나 벽에 비춘 그림자들은 청죽봉운검을 불러내지는 못했다. 자신의 모습을 따라 할 뿐 법기를 복제하는 능력은 없는 환상 같았다.

    검결을 맺은 그가 검에 금색 뇌전을 가득 일으켜 위쪽으로 내질렀다.

    동시에 여섯 개의 투영들이 그의 동작을 따라 하며 검 대신 맨손으로 주먹을 쥐고 중앙의 한립을 공격했다.

    순식간에 삼두육비 마신 형상으로 변한 한립은 여섯 개의 팔로 그들의 주먹질을 막아냈다.

    다음 공격이 있기 전에 위쪽에서 뇌전 교룡이 눈꽃송이 수정을 뚫고 날아올라 바깥에서도 한립이 보였다.

    게다가 여섯 갈래로 나뉘어 있던 눈꽃송이의 두 조각이 부서진 채였다.

    묘법선존은 깜짝 놀랐다.

    지난번까지만 해도 저 안에 갇혀 속수무책이던 한립이 이렇게 강해진 것이 불가사의해서였다.

    그러나 그녀는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왕좌에서 일어나 공중으로 떠오르고, 왕좌는 바닥으로 내려보냈다.

    그리고 손목을 돌려 불러낸 남색 장검은 보광이 반지르르한 게 품계가 높은 선기 같았다.

    “숨어 있지 말고 같이 덤비거라!”

    묘법선존이 소리쳤지만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금동이 워낙 겁이 많으니, 괜히 아이를 놀라게 하지 마시지요.”

    한립이 미소를 지었고, 그 말에 묘법은 눈가를 꿈틀했다.

    감히 홀로 쳐들어와 구원관 서금선을 잡아먹고 금제에 갇힌 기간에도 난리 친 것을 다 보았는데 겁이 많다고? 금동이 겁이 많다고 치면 세상에 담이 큰 이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나오기 싫다면 끌어내는 수밖에!”

    냉소를 흘린 묘법이 장검을 고공으로 날려 보냈다.

    양손으로 빠르게 수결을 맺어 고공을 가리키자 하늘 위에 뿌옇게 냉기를 품은 안개가 퍼져 떨어져 내렸다.

    한립도 안개에 둘러싸여 검은 든 손이 서늘해졌고 부지불식간에 몸에 서리가 앉았다.

    훅!

    고공에서 남색 빛이 번개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수많은 남색 검기들이 비처럼 그를 노리고 쇄도하는 중이었다.

    눈을 가늘게 뜬 한립이 시간법칙의 힘을 분출했다.

    금색 빛이 성대하게 번져 둥근 달이 되어 하늘에 걸리고 수많은 금색 광선들이 뭉쳐 안개를 구금했다.

    그런데도 남색 검기들은 여전히 빠른 속도로 하강하고 있었다.

    눈동자에 보랏빛을 일으킨 한립은 그 원인을 알아냈다.

    검기 아래 공간에 한기가 응결해 한립의 시간법칙을 배척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한립은 기합을 넣으며 손에 든 검으로 고공을 갈랐다.

    촤아악!

    검 끝에서 금색 뇌전실들이 채찍처럼 뿜어져 나가 찬란한 금색 무지개다리를 이루고 수백 수천 개의 남색 검기를 받아냈다.

    콰콰콰쾅!

    남색 빗물이 금색 무지개다리 위로 쏟아지는 아름다운 광경에 귀청이 울리는 폭음이 터져 나왔다.

    결국 눈부신 금색 뇌전빛이 남색 검기의 차가움에 얼어붙어 쾅, 깨지고 나머지 검기들이 떨어졌다.

    그러나 묘법의 기대와 달리 한립은 벌써 그 자리에 없었다.

    그때, 이변이 벌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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