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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157화 (1,914/2,000)
  • 2157화. 도망

    *

    구원관의 또 다른 화원, 정원의 가산(假山)이 들리면서 몇몇이 땅속에서 빠져나왔다.

    가장 먼저 빠져나온 청년은 한립과 백의소년, 두 여인은 남안과 금동이었다.

    제혼은 악시를 봉인하는 일로 힘을 크게 써서 화지공간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아유, 여긴 또 어디래요? 주변 기운이 아직도 구원궁 안인 것 같아요.”

    코를 킁킁댄 흰둥이가 울상을 지었다.

    “지하 통로가 무너져서 왔던 길로 되돌아갈 방법은 없으니 다른 길을 찾아봐야겠지. 남 수사, 빠져나갈 길을 알겠습니까?”

    한립이 남안을 돌아보았다.

    “구원궁은 구원관의 요충지라 저는 들어갈 자격이 안 되었어요. 저도 수사와 다를 바 없이 이곳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단 소리예요.”

    남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 들어왔으니 그녀는 종문에 잡히면 극형을 당할 대죄를 범한 것이었다.

    “다들 표정이 왜 그래요? 제가 있는데, 길 찾기 따위를 걱정하는 거예요?”

    한립이 방향을 정해 떠나려는데 금동이 자신만만하게 나섰다.

    “금동, 네가 나갈 길을 안단 말이냐?”

    눈썹을 끌어올린 한립이 물었다.

    “당연하죠! 귀곡에 갇혀 있는 동안 여기 것들이 날 여기로 데려와서 회색 옷을 입은 어떤 늙은이를 만나게 했었거든요.”

    “늙은이?”

    “저도 누군지는 몰라요. 근데 구원관에서 신분이 아주 높은지 귀령자도 굽신거리더라고요. 그 늙은이가 그나마 말이 통하고 괜찮았는데! 귀령자한테도 나한테 잘해주라고 말해주고요. 바로 폐관을 한다고 가버려서 한 번 보고 다시 만난 적은 없어요.”

    금동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그 노인에 대한 인상이 엄청 좋았던 것이 분명했다.

    “정말 길을 알겠느냐?”

    한립은 반신반의했다.

    “아이참, 아저씨! 본 선녀 말을 못 믿으면 누구 말을 믿으려고 그래요?”

    볼을 부풀린 금동이 불만스럽게 따졌다.

    그러자 한립이 답하기 전에 흰둥이가 불신에 찬 눈으로 입을 열었다.

    “누님, 이번에는 확실한 거죠? 우리가 달아날 때도 누님이 길을 안다고 해서 따라갔다가 막다른 골목에서 귀령자에게 붙잡힌 거잖아요. 그전에는 또…….”

    “뭐라고 했냐?”

    금동은 당장 흰둥이 머리에 꿀밤을 놓고 눈에 힘을 줬다.

    “아야! 아니에요, 아무 말도 안 할게요! 아, 누님 마음대로 하라고요…….”

    머리를 부여잡은 흰둥이가 연신 중얼거렸다.

    “남 수사가 길을 모른다니 금동을 따라가 보는 수밖에 없겠구나. 구원관 사람들을 마주치더라도 최대한 싸움을 피하고 이곳을 떠나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

    한립이 결정을 내렸다.

    “하하, 다들 날 잘 따라오라고요!”

    명랑하게 웃은 금동이 자신만만하게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에요! 출발!”

    그렇게 일행은 금동을 따라 오른쪽 숲으로 날아갔다.

    구원궁 안에는 건물이 많거나 담이 높지는 않았는데, 누각이나 정자 같은 게 시야를 막고 곳곳의 회랑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은 연달아 세 곳의 화원을 지나는 동안 구원관 수사를 한 명도 마주치지 않았다.

    화원을 빠져나와 영기가 자욱한 호수에 이르렀을 때 물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주 멀찍이 호수 반대편에서 여러 명이 치열하게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립은 고개를 들어 금색 결계가 쳐진 하늘과 싸움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보았다.

    “한 수사,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긴장한 남안이 물었다.

    “누님이 길을 또 잘못 찾은 거예요?”

    흰둥이도 서둘러 입을 열었다.

    “죽을래?”

    금동은 두말할 것 없이 흰둥이의 머리를 쥐어박아 소년의 목을 움츠러들게 했다.

    “길은 제대로 찾은 것 같구나.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건 윤회전과 구원관이 교전 중이란 것이고, 그렇다면 구원궁 중심부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소리니까. 방향은 맞는 것 같아.”

    “봐봐! 내 말이 맞지?”

    금동이 한립의 말을 듣고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주인님, 윤회전이 벌써 중심부까지 쳐들어 왔는지도 모르잖아요. 잘못해서 그들이 싸우는 한가운데로 뛰어들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흰둥이는 불길한 상상에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말했다.

    “네가 아주 덜 맞아서 몸이 근질근질하구나?”

    인상을 찌푸린 금동이 소리치자 흰둥이가 쩔쩔매며 용서를 구했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윤회전이 준비를 충분히 했다지만 이렇게 빨리 여기까지 진공하지는 못했을 것이야. 게다가 구원궁 상고의 결계가 아직 깨지지 않은 것을 보면 중앙까지 쳐들어 왔을 가능성은 적다고 본다.”

    “한 수사의 말이 일리가 있어요. 구원궁은 본관에서 중시하는 곳이라 만약 뚫렸으면 이 정도 소란으로 그칠 리 없어요.”

    남안도 한립의 말에 동의했다.

    “호수를 건너 두 세력이 없는 조용한 곳을 찾아 결계를 뚫을 방법을 찾은 다음 뇌진술로 구원관을 떠나야 할 것이야.”

    한립은 무리를 이끌고 조용히 호수를 건너기 시작했다.

    호수를 건너는 동안 진하게 올라오는 영기가 그들을 감싸 몇 번의 격렬한 전투 때문에 느껴지던 피로감이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그들이 편안하게 물을 건너고 있을 때 전방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그때 뿌연 안개 속에서 튀어나온 녹색 그림자가 호수표면을 얼려버렸다.

    ‘묘법선자.’

    미간을 찌푸린 한립은 상대를 알아보았다.

    녹색 치마를 입은 아리따운 여인은 얼굴은 흠잡을 곳이 없었지만 몸매에 굴곡이 부족한 게 유일한 아쉬움이었다.

    남안은 묘법을 보고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두려움과 동시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얼굴이었다.

    “한립! 구원관 제자를 협박해서 구원궁에 들어오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게다가 서금선을 풀어줘?”

    “이 서금선은 원래 제 영충이었습니다. 윤회전이 오늘 구원관을 공격하기에 제 것을 돌려받을 적당한 때라 생각해 찾으러 온 것뿐이고요.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곳을 떠날 생각인데, 묘법 수사께서도 편의를 봐주시지요. 우리가 떠난 다음에 어서 저 윤회전 무리를 몰아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보니까 결계가 다 깨져나가려는 것 같은데요.”

    씩 웃음 지은 한립이 가볍게 답했다.

    묘법 선자도 빈번하게 웅웅 진동하는 결계를 올려다보고 생각하는 척하다 한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지독한 한기가 여섯 줄기의 수정빛으로 변해 한립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체내의 시간법칙을 운용하며 두 소매를 펄럭여 금동, 흰둥이, 남안 등을 끌어당겨 뒤로 물러난 그는 원래 있던 자리에 6개의 벽을 지닌 수정 장벽이 생겨난 것을 보았다.

    그가 빠르게 피해 장벽은 허공을 가두고 말았다.

    “엄청난 속도…….”

    놀란 묘법이 그제야 한립의 기운을 제대로 살피고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강해진 것을 알아차렸다.

    “같은 수법에 여러 번 당할 정도로 머리가 나쁘지는 않아서요. 피차 바쁜 일이 있는 듯한데, 먼저 가보겠습니다.”

    한립은 정말 그녀와 싸우고 있을 마음이 없어 시간법칙의 힘을 극성으로 발동해 흐릿하게 사라졌다.

    물론 이전처럼 묘법선존은 이미 호수를 빙 둘러 거대한 얼음 장벽을 세워 그의 갈 길을 막아놓은 상태였다.

    “내가 할게요!”

    금동이 튀어 나가 금빛으로 온몸을 감싼 후 얼음벽에 몸통 박치기를 했다.

    격렬하게 흔들린 얼음 장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결국에는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한립 일행은 구멍으로 쏙 빠져나가 다른 방향으로 쏜살같이 달아났다.

    “거기 서거라!”

    묘법이 소리를 지르며 따라붙었다.

    발밑에 거대한 눈꽃 모양의 얼음을 만들어낸 그녀는 허공을 미끄러지듯 가르며 굉장히 빠르게 그들을 쫓고 있었다.

    한립은 진작 시간영역을 펼쳐 놓기는 했지만 겨우 십여 장만 통제해 빠르게 이동하는 데에 집중했다.

    “그냥 죽여버리고 가면 안 돼요?”

    금동이 인상을 찡그렸다.

    “따돌린 다음에 이야기하자꾸나.”

    한립의 말에 금동과 흰둥이는 약속이라도 한 듯 알겠다고 답하는데 남안만 뭘 하려는 건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다음 순간, 그들 주변에 은색 뇌전 기둥이 몰려들어 가느다란 뇌전 실로 흩어져 뇌진을 이루었다.

    콰릉, 천둥소리가 들리고 그들이 사라졌다.

    * * *

    급히 뒤쫓던 묘법선존은 한립 무리가 사라진 허공에 미약하게 남은 탄 냄새를 맡았다.

    표정이 어두워진 그녀가 번뜩 전방으로 튀어 나갔다.

    백여 리 거리를 두고 깊은 숲속 정자 위에 은색 뇌진이 나타나 한립 일행을 떨구었다.

    도착하자마자 주변을 살핀 한립은 숲의 상공은 물론 고즈넉한 오솔길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금동, 여기가 어디인지 알아보겠느냐?”

    “전혀 모르죠. 날 데려왔던 이들이 구원궁을 한 바퀴 빙 돌면서 구경을 시켜준 것도 아닌데 여기가 어딘지 어떻게 알겠어요?”

    금동은 왠지 모르게 토라져서는 불퉁거렸다.

    “구원궁을 벗어났을지도 모르잖아요.”

    “흰둥아, 넌 머리가 너무 해맑아. 저 머리 위에 뭐가 있는지 안 보여?”

    흰둥이의 말에 금동이 소년의 머리를 탁! 치면서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에는 금색 결계가 엄밀하게 펼쳐져 있었다.

    “구원궁 결계는 외부와 내부를 가르는 특수한 것이라 내 뇌진술로도 바로 전송해 나갈 수 없더구나. 결계 내부에서 전송 가능 거리도 훨씬 짧아졌고.”

    한립이 설명해주었다.

    “그러니까, 아까 그 여자를 싹 죽여버리고 가던 길로 갔으면 좋잖아요.”

    금동은 두 손을 펼치면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구원관 조사당이 구원궁 안에 있다고 했다. 순균진인이 조사당을 지키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데, 싸움을 벌였다가 그를 끌어들이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건…….”

    “그런 것을 따지기보다는 방향을 찾아서 달아날 궁리를 해보자꾸나. 윤회전 무리가 진압되면 빠져나가기가 더 힘들어질 것이야.”

    한립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수사, 말씀이 옳아요.”

    남안이 동조했다.

    종문에 대역죄인이나 마찬가지인 그녀도 구원관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길을 찾아요?”

    금동이 고개를 흔들었다.

    “전송진을 펼칠 때 특별히 서쪽으로 이동하게끔 해놓았다. 동쪽으로 돌아가면 아까 가던 경로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야.”

    “역시 주인님은 생각이 깊으세요!”

    한립의 말에 흰둥이가 감탄했다.

    “아니, 넌 못 본 사이에 수행보다 아부 떠는 솜씨가 더 늘어난 것 같은데.”

    금동이 이상한 생물체를 본다는 듯 혀를 찼다.

    “하하, 누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흰둥이가 쓴웃음인지 모를 웃음을 흘렸다.

    그들은 수풀을 지나 동쪽으로 길을 잡았는데 오래지 않아 한립이 주먹을 들어 금동 등에게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한 수사, 무슨 일이 있나요?”

    남안이 조마조마하며 묻는데 한립은 답하지 않고 무언가를 집중해서 듣다가 몸을 돌렸다.

    “저쪽에서 누군가 싸우고 있다. 수가 적지 않은 것으로 보아 윤회전 인물들이 발각되어 싸우는 듯하니 돌아서 가야겠다.”

    “이상하네. 왜 난 아무 소리도 안 들리지?”

    금동이 의아하다는 듯 혼잣말을 했다.

    남안과 흰둥이도 귀를 쫑긋 세워보았지만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한립도 이상했지만 금방 납득이 되었다. 악시와의 소동으로 신체와 오감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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