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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154화 (1,911/2,000)

2154화. 전화위복

*

뇌전 지대 중앙에 이른 한립은 양손을 뻗었다.

콰르르…….

아래쪽 뇌운(雷雲)들이 하얀 교룡처럼 몰려들며 한립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콰르르 콰쾅!

제혼은 애써 눈을 뜨면서 그 안을 살폈지만 워낙 눈이 부셔 한립의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나 천둥소리가 그치고 중앙으로 몰려들었던 뇌전들이 기둥을 이루었다가 얇고 흐릿해졌다.

놀랍게도 뇌운 위의 한립이 두 명이었다.

왼쪽의 흉악한 표정의 한립은 기쁨에 겨워 자신의 모습을 살피고 있었고, 오른쪽의 한립은 담담한 얼굴이었지만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같은 사람인데 이렇게 차이가 날 줄이야…….”

제혼이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악시 혼백의 기운이 한립 본체 혼백의 기운보다 훨씬 강했기 때문이다.

“하하. 드디어 빠져나왔다! 드디어! 하하하, 네 놈에게 억눌려 심연 속에 갇혀 있느라 얼마나 괴로웠는지 아느냐? 드디어 속박에서 벗어났으나 그 괴로움을 잊을 수 없다.”

악시 혼백이 한립 혼백을 원수를 보듯 노려보며 포효했다.

그의 포효에 안정을 찾았던 의식공간에 구름과 바람이 요동치며 이변이 벌어졌다.

왼쪽 의식공간의 먹구름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해 혈운(血雲)이 되어갔다. 반대로 오른쪽 의식공간은 운해가 더욱 조밀해져서 수시로 뇌전을 번득였다.

“내가 이 공간을 지배할 것이다!”

악시는 손을 뻗으며 한립을 향해 덤벼들었고, 한립도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양쪽의 혈운과 뇌운이 중앙으로 밀려들어 대치했다.

“후후, 지금 상태로 네가 날 어찌 상대할 것이냐?”

“내 악념에 불과한 존재가 오만방자하구나.”

두 혼백은 본체가 아니었기에 공법이나 수행은 아무 소용이 없었고 오직 의식의 힘으로 싸우는 중이었다.

악시가 기운이 앞섰기에 한립의 목을 틀어쥐자 제혼은 심장이 떨어질 것 같아 그 뒤로 날아들어 손을 뻗었다.

“크큭, 네가 나서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악시는 기다렸다는 듯 기괴한 각도로 목을 틀었다.

모골이 송연해진 제혼이 벗어나려 했으나 이미 손바닥이 악시의 등에 닿아 있었다.

무시무시한 흡입력이 악시에게서 뿜어져 나와 뜻밖에도 강제로 제혼의 혼백을 융합하려 했다.

“안 돼…….”

제혼은 후회가 되었다. 도우려던 것이었는데 이대로 악시에게 흡수당하면 주인의 처지가 더 악화될 터였다.

그때 의식세계에서 검 울음소리가 들리고 의식이 응결한 하얀 거검이 나타나 악시를 향해 떨어졌다.

“경신자!”

악시가 그걸 보고 놀라 한립을 놔두고 물러났다.

크악!

한립 혼백은 피하지 않고 하얀빛의 검에 맞아 끔찍한 비명을 흘렸다. 백 장 가까이 멀어진 악시는 등에 여전히 제혼을 붙이고 조소했다.

“후후. 보았느냐, 제혼? 저런 쓸모없는 놈을 따라 다녀봤자 무엇하겠느냐.”

“주인님의 지혜를 당신이 따라갈 수 있을까요?”

제혼은 괴이한 미소를 보이곤 수결을 맺어 악시를 향해 나머지 손도 가져다 댔다.

암홍색 빛이 손바닥에서 흘러나와 악시 주변에 원형 장막을 이루었다.

“겨우 결계 따위로 날 가둘 수 있을 줄 알았더냐? 내가 나가면 네게 죽느니만 못한 고통을 느끼게 할 것이다!”

“그럴 수 있을까?”

이때 한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악시가 봉인된 탓에 잠시 공간의 통제권이 한립에게 돌아가 의식세계가 평온해져 있었다.

* * *

같은 시각, 지하 공간.

남안이 근심 가득한 눈빛으로 한립과 제혼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혼은 두 귀에서도 핏물이 새어 나왔고, 한립은 더 참혹해서 눈코입귀 전부에서 암홍색 죽은 핏물이 줄줄 흘렀다.

그 순간, 숨을 격하게 들이마신 한립이 눈을 번쩍 떴다.

“한 수사…….”

한립은 그녀의 부름이 들리지 않는 듯 손바닥을 뒤집어 검은 수정 사슬들을 불러내 자신의 미간으로 집어넣었다.

다시 눈을 감는 한립을 보고 남안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의식세계 안.

36개의 검은 수정 사슬들 하나하나가 검은 교룡처럼 제혼에게 구금당한 악시 혼백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격원법련!”

이제야 제혼도 한립이 악시와 혼백을 분리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악시를 분리해야 격원법련으로 봉쇄해 둘 것 아닌가.

“그까짓 걸로 날 봉인하겠다고?”

악시가 콧방귀를 뛰고 전신에 흉흉한 빛을 일으켜 제혼을 향해 돌풍을 날려 보냈다.

한 줄기 의식에 불과한 제혼은 안 그래도 버티기 힘들었기에 돌풍에 맞은 충격으로 그대로 의식세계에서 튕겨 나갔다.

당연히 봉인도 깨졌다.

“가라!”

한립의 외침에 격원법련들의 문양에서 눈부신 금빛이 흘러나왔다.

“저건, 연신술!”

악시가 다급히 손을 뻗어 뇌전 장벽을 만들었지만 격원법련들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그걸 통과했다.

“아, 안 돼…….”

사슬에 몸을 뚫린 악시 혼백이 처절하게 외쳤지만 어떤 것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격원법련에 진작 연신술을 융합해 두었었다. 적을 상대하려 아껴둔 비술을 내게 쓸 줄은 몰랐지만.”

힘을 다 쓴 한립 혼백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힘없이 말했다.

* * *

지하 공간, 창백한 얼굴의 제혼이 한립 곁에 앉아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남안은 뜨거운 솥 안의 개미처럼 안절부절못하며 그들 주변을 맴돌았다.

“제혼 수사, 벌써 반 각이 지났습니다. 한 수사는 어째서 못 깨어나는 걸까요?”

“혼백 손상이 심해, 이렇게 빨리 깨어나실 수는 없을 거예요.”

눈을 뜬 제혼이 차분히 답했다.

“그럼 어쩌죠? 적잖이 소란을 피웠으니 귀령자 성사와 싸운 걸 알아채 곧 대라급이 나타날지 몰라요. 여기 더 머물러서는 안 될 것 같은데요…….”

걱정스러운 남안의 물음에 제혼이 입을 떼려다 고개를 돌렸다.

한립이 길게 숨을 내쉬며 눈을 뜨고 있었다.

“주인님!”

얼른 몸을 일으킨 제혼의 부름에 한립은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정말 복이 있는 분이네요.”

남안도 그가 눈을 뜬 것을 보고 다가섰다.

“주인님, 악시는 봉인해 두셨나요?”

제혼이 전음으로 물었다.

“잠시 봉인은 해두었다만 임시방편이고 오래 가둬둘 수는 없을 것이야. 하루빨리 수행을 높이지 못하면 참시에 성공하기 어렵겠구나.”

씁쓸하게 답한 한립은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혼백에서 분리된 악시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제거하기 어려워진다.

“임시방편이라도 시간을 벌어서 다행이에요.”

“일단 눈앞의 상황을 해결해 보자꾸나.”

단약을 복용하고 기운을 다스린 한립이 일어섰다.

“주인님, 그런데 기운이…….”

제혼이 한립을 아래위로 훑더니 놀라 또 전음으로 말했다.

“너도 알아보았구나. 기운이 안정되지 않기는 했지만, 참시선부는 악시 혼백을 분열해내는 작용 외에도 수행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원래 뚫어 놓았던 460개의 선규 외에 380개의 선규가 절반쯤 열린 상태이다.”

“어쨌든 이전보다 수행이 상당히 높아지신 것 같아요.”

불안해하던 남안도 한립이 깨어나고 기운도 강해진 것에 적잖이 마음을 놓았다.

“주인님, 이제 어쩌면 좋을까요? 곡린이 금동을 잡으러 간다고 한 것 같은데, 쫓을까요? 아니면…….”

제혼과 한립이 생각에 잠겼다.

“주인님! 누님 기운을 포착했어요. 저 좀 꺼내 주세요.”

때마침 흰둥이의 목소리가 한립의 머리에 울렸다.

얼굴이 밝아진 한립이 손을 젓자 흰둥이가 사람 크기의 비휴로 나타나 코를 킁킁거렸다.

“저쪽이에요!”

네 발로 무너진 지하 공간을 내달리며 흰둥이는 금방 석문을 찾아냈다.

한립과 제혼 그리고 남안이 급히 그 뒤를 쫓았다.

펑!

통로를 지나 꽉 닫힌 석문에 이르자 흰둥이가 입에서 하얀빛을 날렸다. 석문이 울리기만 하고 검은 진법 같은 게 떠올라 충격을 흡수했다.

얼굴을 굳힌 흰둥이가 다른 수를 쓰려는데 한립이 뒤따라와 손가락을 까딱했다.

여덟 줄기의 금색 비검이 날아가 뇌전 법칙을 머금고 석문으로 떨어졌다.

펑! 펑! 펑…….

연달아 금빛이 튀고 석문이 부서져 돌조각이 날렸다.

선규 300개가 반쯤 열린 그는 수행이 폭증해 같은 공격도 위력이 달라져 있었다.

“가자.”

한립이 그들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니 검푸른 석실이 나타났다.

이전 공간들과 달리 텅 비어 있지 않고 이런저런 물건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중앙에는 거대한 진법이 구궁(九宮) 형상을 이루고 있었고 그 안에 흑옥으로 만든 수정관이 놓여 있었다.

커다란 석실을 중심으로 여덟 개의 작은 방이 붙어 있는 동부였다.

‘귀령자의 동부?’

한립이 주위를 훑어보았다.

제혼은 다른 곳보다는 검은 수정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누님 기운이 저기서 느껴져요.”

흰둥이가 작은 방들 중 한 곳으로 날아가 발톱으로 할퀴었다.

쾅!

힘없이 갈라져 버리는 석문은 금제가 남아 있지 않았다.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니 거대한 우리가 남아 있기는 했는데 한쪽 구석에 누군가 갉아내서 만든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왜…….”

흰둥이는 당황했고, 한립은 얼른 구멍으로 다가가 잘린 단면을 손으로 훑어보았다.

“금동이 여기 갇혀 있다가 우리를 뜯어내고 탈출한 것 같구나. 생긴 지 얼마 안 된 자국이야.”

“달아나 버렸으면 종적을 찾을 수 없는 것 아닌가요…….”

남안이 우려를 드러냈다.

“금동은 감응할 수 없어도, 곡린을 찾으면 될 겁니다.”

한립은 차분하게 답했다.

“맞아요! 곡린이 방금 떠났으니 아직 흔적이 남아 추적할 수 있을 거예요!”

“잠깐. 이곳이 귀령자의 동부라면 그냥 갈 수는 없지 않겠느냐.”

신이 난 흰둥이가 당장 코를 킁킁거리고 가려는 걸 한립이 붙들었다.

중앙 석실을 보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어려 있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귀령자 그놈이 감히 우리 누님을 잡아갔으니 그놈 소굴을 다 털어버려요!”

하하 웃음을 터트린 흰둥이가 바로 옆방을 힘차게 걷어차고 들어갔다.

석문에 금제가 펼쳐져 있기는 했지만 그리 강력한 종류는 아니었다. 귀령자도 누군가 자신의 동부로 쳐들어와 소란을 피우는 일이 있으리란 건 몰랐으리라.

남안도 방을 골라 남색 빛을 날렸고 한립은 다른 문을 향해 손을 튕겼다.

한립의 금색 검기가 가른 문 안에는 수납장들이 연달아 있고 각종 광물과 재료들이 가득했다.

“금은문석, 화혈정, 광령옥…….”

재료들을 훑은 한립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 정도 품질에 이만한 수량이면 내다 팔아 대량의 선원석을 구할 수 있었다.

손을 저어 재료들을 모조리 화지공간에 옮겨 담은 그는 시간이 없었기에 바로 다음 방으로 건너갔다.

그곳에는 팔각형의 금색 연단로가 놓여 있었다.

쓰는 중이 아닌데도 놀라운 영력 파동이 느껴지는 연단로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게 연단실인 듯했다.

어차피 귀령자도 죽었겠다 한립은 거침없이 연단로를 화지공간에 넣어두고 세 번째 방으로 갔다.

그곳에는 검은 보호막으로 가려진 돌 탁자 하나가 다였다.

그 위로 열댓 개의 검은 수정 구슬이 놓여 있었고 그 안에서 화르륵 타오르는 불길에서 음혼의 힘이 느껴졌다.

“현음신뢰(玄陰神雷)!”

한립 뒤에서 남안이 걸어와 눈을 크게 떴다.

“현음신뢰?”

“귀령자가 개발한 음뢰신통이에요. 위력이 극히 커서 대라 초기의 존재까지 위협할 수 있죠. 아까는 귀령자가 이걸 지니고 있지 않았던 게 다행이었어요.”

남안의 설명을 듣고 눈을 빛낸 한립이 금색 뇌전을 날려 탁자 주변 검은 보호막을 부수려 했다.

그런데 열댓 개의 검은 수정 구슬들이 느닷없이 강렬한 빛을 뿜어내며 터지려는 조짐을 보였다.

안색이 변한 한립이 얼른 억제하려는데 다른 쪽에서 검은빛이 날아들어 보호막을 부수고 열댓 개의 검은 수정 구슬들을 감쌌다.

그러자 수정 구슬 안의 검은 불길이 온순해 지면서 기운이 안정되었다.

“이 음뢰들은 아직 완전히 연화가 되지 않았고, 주인님의 도천신뢰는 음기를 지닌 힘과는 상극이라 구슬을 자극한 것 같아요.”

제혼이 걸어오며 설명했다.

“그렇다면 현음신뢰는 네가 보관하면 되겠구나.”

“감사합니다, 주인님!”

한립의 말에 제혼이 감동하며 현음신뢰를 거두러 걸어갔다.

흰둥이도 날아돌아오는데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다른 방문들을 전부 부수고 보물들을 모조리 쓸어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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