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3화. 본체 대 악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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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변고에 남안과 제혼이 대처하기도 전에 귀령자의 비수가 한립의 지척까지 접근했고, 이때 한립은 소모한 선령력을 회복하느라 여념이 없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창백한 귀령자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때 힘없이 앉아 있던 한립이 번쩍 눈을 뜨면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럴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지요.”
냉소를 흘린 한립은 번개처럼 뇌전을 휘감은 손을 뻗어 귀령자의 목을 틀어쥐었다.
“왜, 어떻게…….”
귀령자의 비수는 한립의 가슴 앞에서 꿈쩍도 하지 못했다.
“비축해둔 힘이 부족해서 일격에 죽이지 못할 걸 알고, 눈치껏 달아나면 그냥 보내줄 마음도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제가 힘이 빠진 척을 하자 반격하려 하더군요. 죽을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구원관 안에서 감히 나를 죽이겠단 말이냐!”
“어차피 여기까지 들어온 것, 당신을 죽이든 안 죽이든 차이가 있겠습니까? 물론 추혼술을 한 다음에 죽일 생각입니다.”
한립은 곧바로 미간에서 수정실을 뿜어 귀령자의 이마로 흘려보냈다.
“크큭, 본 좌의 의식세계를 뒤지겠다고? 초대도 하지 않았는데 들어왔으니, 걸맞은 대접을 해서 보내줘야겠지!”
뜻밖에도 한립이 귀령자의 의식세계로 의식을 흘려보내기 전에 그의 의식세계에 먼저 귀령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수정실을 회수하려 했는데 귀령자의 미간에서 우둑한 보라색 부적이 튀어나와 그의 미간을 강타했고, 끔찍한 두통을 느낀 한립이 손에 힘이 풀려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의 손에서 벗어난 귀령자가 곧장 그와 거리를 벌렸다.
“네 놈, 무슨 짓이냐!”
제혼이 노해 소리쳤다.
“대접한다지 않았더냐. 나를 위해 준비한 참시선부(斬尸仙符)를 선물해주었다. 대라경 후기에 이를 때 쓰려던 것이라 도단 수천 개보다 값진 것인데, 겨우 대라경 초기 놈에게 쓰게 되다니, 으하하! 하하하…….”
“뭐라고?”
제혼이 달려드는 것을 본 귀령자는 귀무로 흩어져 달아났다.
그는 이번 싸움으로 부상이 극도로 심해 지금의 경지를 유지하는 것도 힘들 텐데,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대라 후기에 이르는 것은 사치스러운 갈망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아무리 다급했어도 선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선부인 참시선부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으악!
폐를 찢고 나오는 듯한 참혹한 비명을 지르면서 한립은 물에서 건져낸 물고기처럼 바닥을 구르다 갑자기 꼿꼿하게 일어섰다.
“잠깐 기다려요. 뭔가 이상합니다.”
제혼이 다가가려는데 남안이 그녀를 붙들었다.
그제야 꼼짝도 하지 않는 한립을 보고는 제혼도 이상함을 눈치챘다.
얼굴에 기이하게도 두 가지 표정이 동시에 떠올라 있어 아주 괴이했다.
왼쪽 얼굴은 눈을 부릅뜨고 코에 주름이 잡힌 채 사악하게 웃고 있었고, 오른쪽은 그나마 평범했지만 미간의 주름이 고통스러움을 대변했다.
“주인님, 왜 그러세요?”
놀란 제혼의 물음에 한립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오른쪽 얼굴은 입가를 꿈틀하며 대답해주려 했지만 왼쪽 얼굴이 그냥 흉악하게 웃고 있어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건 보기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에요…….”
남안이 난색을 표했다.
그때 한립이 신음을 흘리며 남안과 제혼을 향해 달려들려고 했다. 그 모습에 겁에 질린 남안은 뒷걸음질 쳤다.
다행히 금방 걸음을 멈춘 한립은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 속에서 고개를 흔들었다.
“대체 귀령자가 무슨 수를 써서 주인님의 혼백을 이렇게 불안정하게 만든 거죠?”
그의 혼백 파동을 감지한 제혼도 안색이 달라졌다.
“참시부예요.”
“참시부가 뭔데요?”
“진선계에서 가장 귀한 부적 중 하나일 거예요. 자세한 효과는 제가 다 알 수 없지만, 대라경 수사가 삼시를 베어낼 수 있게 돕는다고 알려져 있죠.”
“삼시를 베어내는 걸 돕는다고요? 그건 대라경 초, 중, 후기의 최고봉에 이르렀을 때 맞게 되는 고비 아닌가요?”
“맞아요. 그래서 문제인거고요. 한 수사는 아직 대라 초기의 경지라 아직 삼시를 베어낼 자격이 안 되는데, 참시선부 때문에 강제로…….”
남안의 설명을 들을수록 제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일반적으로 대라경 수사들은 참시 고비를 맞기 전에 다양한 수단을 준비해 두고 조용한 동부를 찾아 들어갔다. 그렇게 만반의 대비를 해도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컸는데 하물며 한립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막을 방법이 없을까요?”
제혼이 한립에게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귀령자가 참시부를 발동해 놔서 우리가 막을 방법은 없을 거예요. 한 수사가 스스로 부적을 억누를 수 있기만을 바라야겠죠.”
남안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답했다.
이미 선부의 위력이 개방되었는데, 어떤 대라 초기 수사가 이겨낼 수 있단 말인가?
그때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한립이 멈칫 멈추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져 제혼을 향해 달려들었다.
제혼이 미처 다른 수를 내지 못하고 두 팔을 교차해 앞을 막았다.
다섯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말고 그녀의 팔을 내리친 한립은 이미 온 얼굴이 흉악하게 변해 기괴하게 웃는 입가로 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흐흐, 넌 이 자와 기운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구나…….”
제혼은 산이라도 무너트릴 것 같은 힘에 두 팔이 부러질 것 같은 상태에서 튕겨 나가 폐허 속 벽에 부딪혔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그녀는 입을 손으로 막았지만 울컥 피를 토하고 말았다.
한립이 흉악한 얼굴로 광소를 터트렸다.
남안은 그 표정과 분위기가 한립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고, 제혼도 팔의 핏물을 털어내며 심란한 얼굴이었다.
“피해요!”
남안이 제혼을 향해 무어라 이야기하려는데, 제혼이 눈을 번득이고 소리쳤다.
놀란 남안은 빠르게 폭발적으로 백여 장을 물러섰다. 그녀가 비켜선 자리에 폭음과 함께 깊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정신을 놓고 수행이 더 강해진 것 같아요!”
“참시부가 발동되어 악시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 같아요. 이러다가 한 수사가 악시를 베어내는 게 아니라 악시에게 본체의 의식과 몸을 빼앗기겠어요.”
남안은 제혼 옆으로 번득 이동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악시든 뭐든 아무래도 몸을 가누지 못하시는 것 같으니까, 제압해야겠어요.”
제혼은 신중하게 결정을 내렸다.
“어떻게 하려고요?”
“잠깐만 붙들고 있어 주면 내가 알아서 할게요.”
제혼의 제안에 남안이 뭐라 물으려는데, 전방의 깊은 구덩이에서 한립이 튀어나와 이쪽을 향해 쾌속으로 달려들었다.
그가 열댓 장까지 다가서자 그 압박감이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다.
이미 눈을 감은 제혼은 수결을 맺은 채 비술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남안은 이를 악물고 남색 보따리를 꺼내는 수밖에 없었다.
솨아아.
물소리가 들리고 남색 보따리에서 열 마리의 남색 수룡들이 튀어나와 압박감을 뚫고 한립을 향해 돌진했다.
후오오!
괴성을 지른 한립이 먼저 달려든 두 마리 수룡을 주먹으로 터트리는 사이, 나머지 여덟 마리가 양쪽으로 흩어져 뇌전의 기운을 품은 수많은 수뢰를 터트렸다.
뇌전 속에서 고통스럽게 몸을 웅크린 한립은 암홍색 기운을 불러내고 있었다. 전신의 혈맥의 힘을 동원해 강대한 파동으로 수뢰의 뇌전을 밀어낸 것이다.
“됐나요?”
비틀거리면서 코와 입가에 피를 흘린 남안이 소리쳤다.
곁의 제혼은 눈을 감고 어떤 반응도 없었다.
수룡들이 더는 버티지 못할 것 같자, 남안은 입에서 정혈을 뿜어 보따리 안에 스며들게 했다.
여덟 마리의 수룡들이 입에서 남색 수정 구슬 형태의 뇌전을 분사해 중앙의 한립을 공격했다.
쿠쿠쿠쿵!
뇌전 구슬이 한립 가까이에서 폭발해 뇌전 기둥을 이루고 솟구쳤다.
그 후 수룡들도 버티지 못하고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흩어져 사라지고 말았다.
뇌전이 가시고 모습을 드러낸 한립은 온몸이 까맣게 그을리기는 했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자신을 향해 씩 웃는 한립의 표정에 남안은 피가 얼어붙는 듯했다.
“끝났어…….”
짙은 흉살기와 악념(惡念)에 휩싸인 남안이 뻣뻣하게 굳어 고꾸라졌다.
“죽어 마땅한 것들.”
한립이 음산하게 웃으며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데 눈동자에 이채가 어리면서 동공의 핏기가 가시고 그대로 쓰러졌다.
이어서 누군가 번득 나타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제혼…….”
남안이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안심했다.
한립의 머리 위에 손을 얹은 제혼은 파문처럼 암홍색 파동을 출렁출렁 흘려보내고 있었다.
두 눈에 핏발이 서서 눈가에도 핏물이 고인 제혼의 상태로 보아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비술을 펼치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다른 손으로 재빨리 수결을 맺어 자신의 미간을 짚었다.
살이 갈라지며 핏빛 제3의 눈이 나타나 그 안에서 덩굴처럼 수정실이 한립의 미간으로 이어졌다.
윽…….
핏빛 수정실이 한립의 미간으로 들어간 순간 제혼이 비명을 흘리며 두 눈을 감았다.
다음 순간, 제혼의 의식은 한립의 의식세계에 들어와 있었다.
처음으로 들어가 본 한립의 의식세계는 상상을 초월하게 광활한 세상이었다.
다만 폭풍이 불어 수천 마리 천룡들이 하늘과 땅을 헤집는 듯했고, 두꺼운 먹구름이 껴서 천둥소리가 그치지 않는 상황이었다.
쿠릉.
의식세계가 홀연히 밝아지며 두꺼운 벼락이 제혼의 의식으로 떨어졌다.
서둘러 벼락을 피하며 날아간 그녀가 천 장을 벗어나기도 전에 폭풍이 만들어낸 천룡이 날아들었다.
“주인님, 어디 계세요!”
마음이 급해진 제혼이 소리쳤다.
어서 한립의 혼백을 찾지 못하면 침입자인 그녀에 대한 의식세계의 반격이 더 거세질 터였다.
맹렬히 고개를 저은 제혼이 고개를 들어 먹구름을 올려다보았는데 흐릿하게 누군가의 신형이 보였다.
희색을 드러낸 그녀가 상공으로 날아오르니 뇌전이 가득한 운해가 펼쳐졌다.
쿠릉.
벼락이 내리쳐 세상을 밝혔을 때 누군가가 외롭게 홀로 서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한립이었다.
“주인님…….”
제혼의 외침이 하늘을 울리고, 뇌전 구역에서 어렵게 걸음을 옮기려던 한립이 고개를 돌렸다.
절반은 신중하고 절반은 흉악한 얼굴이었다.
“네가 어떻게 여길 들어온 것이냐?”
같은 질문이었지만 중첩된 목소리의 절반은 놀라 묻는 것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분노해 따지고 있었다.
‘안 돼, 의식마저 분열되었다고?’
그걸 본 제혼은 위험을 감지했다.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벼락이 발밑에서 올라왔다.
놀란 제혼이 피하며 한립을 향해 날아드는데 그 뒤로 콰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대량의 뇌전이 뒤쫓고 있었다.
한립이 오른손을 들어 얼른 뇌전을 흩어주었다.
“혼백마저 분열되어 의식세계를 온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얼른 떠나거라. 이러다 큰일 날 수 있다.”
“기왕 온 것 내가 이놈을 잡아먹는 걸 보고 가거라. 내가 의식세계와 육신을 지배한 후에도 나를 따르겠느냐?”
표정을 일그러트린 한립은 연달아 말했다.
“참시선부가 발동되었으니 이제 방법은 하나뿐이에요. 잠시 주인님의 혼백을 봉인했다가 방법이 생기면 다시 깨워드릴게요.”
제혼은 악시의 말은 대꾸하지 않고 말했다.
“하하. 그걸 대책이라고 세운 것이냐? 날 너무 우습게 봤구나.”
악시의 목소리가 울렸다.
“소용없다. 악념이 수면으로 떠올랐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이 의식에 뿌리를 내릴 것이야. 나와 악시를 동시에 재웠다가 깨워도 그때는 이미 의식 전체를 점령당해 있을 것이다.”
한립이 말했다.
제혼은 난감해 어찌해야 할지 생각에 잠겼다.
“그와 나는 약속을 했다. 일단 뇌전을 이용해 혼백을 분리한 다음에 각자 능력껏 싸워보자고.”
한립의 오른쪽 얼굴이 결연히 말했다.
“아직 대라 초기 최고봉에 이르시려면 멀었는데 어떻게 악시를 참하시려고요.”
“방법이 이것뿐이니 어쩔 수 없지 않더냐. 당장 이곳에서 나가거라.”
“뭔 말들이 그리 많은 것이야? 더는 우리 일에 끼어들면 네년부터 죽이겠다.”
돌연 악시가 눈을 부릅뜨고 제혼을 향해 소리쳤다.
“주인님께서 그리 선택을 하셨다면 더는 말리지 않겠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주인님을 따를 거고요……. 그게 악시라 해도.”
제혼은 탄식하듯 말했다.
“네가 그리 고분고분하게 나오니 내가 네 주인의 생혼을 죽이는 걸 볼 기회를 주마. 하하하…….”
악시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 말에 제혼이 입을 다물고 옆으로 물러나 한립의 혼백이 한 걸음 한 걸음 뇌전 지대 중앙으로 향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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