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2152화 (1,909/2,000)

2152화. 쓰러트리다

*

뇌전의 제약이 사라지고 압력이 가신 제혼은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가 판관 발을 피해 한립 옆으로 날아왔다.

“평범한 귀도 술법과는 달라요……. 모든 것이 극한에 이르면 다시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간다고, 음기를 거의 양기로 전환해서……. 사악한 기운 속에 바른 기운을 담아 제가 억제하기가 힘들 것 같아요.”

제혼은 헉헉 숨을 몰아쉬며 다급히 한립에게 알아낸 사실을 알렸다.

“괜찮은 것이냐? 너를 불러낸 것도 그것을 걱정해서였다. 사대성사들 중에서도 실력이 으뜸이라니 그런 재주를 가진 것도 이상하지 않겠지.”

“아니 귀령자는 어디 간 걸까요? 이렇게 한참을 싸우고도 막상 귀령자 본인은 끌어들이지 못했잖아요.”

“끌어들이지 못했다고 누가 그러더냐?”

한립의 반문에 제혼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저 판관이 귀령자란 말씀이군요!”

옆에서 남안이 듣고 있다 말귀를 알아듣고 말했다.

한립이 대답하기 전에 고공이 어둑해 지면서 거대 판관이 다시 발을 들어 그들을 짓밟으려 했다. 이번에는 혀가 공간을 빙 둘러 그들의 퇴로를 막고 있었다.

“남안 수사, 잠시만 저 혀를 막아주세요.”

한립의 외침에 남안이 물결 문양이 수놓아진 보따리를 불러냈다.

세월탑에서 남안 오누이가 얻은 보물이었다.

그녀가 주문을 외며 손을 가져다 대자 물결 문양이 빛을 발하고 보따리 안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보따리 안에서 여덟 마리의 남색 수룡(水龍)들이 튀어나와 핏빛 혀를 향해 덤벼들었다.

근거리에서 쿠쾅쾅 하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세월탑에서 오행인공대진이 붕괴하며 정염불새가 그 안에서 하얀 불구슬을 가지고 나올 때 남안도 남색 보따리를 회수했는지 몰랐다.

세월탑에 있을 때보다 남안의 수행도 늘어 더욱 숙련된 솜씨로 선기를 다룰 수 있게 되었을 테니 한동안 혀를 막을 수 있을 듯했다.

새빨간 혀가 수룡들의 공격에 밀려 입속으로 되돌아가는데, 남안이 남색 보따리를 조종해 따라붙게 했다.

여덟 마리의 수룡들이 혀를 따라 위로 올라가 판관을 향해 다가갔다.

한편 이때 판관의 다른 발이 떨어지고 있었다.

천살진옥공과 진령혈맥을 일으킨 한립은 몸집을 백 장 가까이 키워 삼두육비의 마신으로 변한 다음, 거대한 발을 향해 뛰어올랐다.

두 개의 거원 주먹이 신발과 충돌했다.

쿵!

기파가 터져 한립이 아래로 떨어지고 거대 발이 위로 들리며 판관의 거대한 몸뚱어리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 순간, 남안의 여덟 마리의 수룡들이 혀를 따라 판관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솨아아아!

판관 머리 옆에서 수룡들이 동시에 터져 머리에 끈 관모 절반을 망가트렸다.

이어 거대 판관이 중심을 되찾기 전에 금색 빛이 별빛 장막을 드리웠다.

훅!

구불구불 이어진 산맥이 하늘에서 떨어져 판관의 머리를 내려치고 금색 강물이 허리를 감았다.

위풍당당하던 악귀 판관도 시간법칙의 제약에는 동작이 굼떠졌다.

“물러서서 가까이 다가오지 말아요.”

한립의 당부에 제혼과 남안이 뒤로 물러났다.

한립 등 뒤로 둥근 달이 떠올라 하늘로 떠오르고, 36자루의 청죽봉운검들은 공중에서 챙챙챙챙 소리를 내며 교차해 진법을 이루고 있었다.

검들은 금색 뇌전을 머금고 하늘을 겨누고 기이한 영력 파동을 분출했다.

마치 주위의 천지원기들이 검진과 하나가 되어 스스로 작은 세상을 만드는 것 같았다.

검진이 만들어지니, 공기의 흐름이 달라져 뿌옇게 하얀 안개가 흐르는 속에 금색 뇌전이 번득거렸다.

“이건, 통천검진!”

남안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오라비와 세월탑에 들어갔을 때 탑에 설치되어 있던 통천검진을 보았었다. 한립이 펼친 검진과 규모에서 큰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천지와 분리되어 기세를 내뿜는 모습은 똑같았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더 멀리 떨어지고서야 안심이 되었다.

그때 악귀 판관도 몸을 가누고 노기를 드러냈다.

몸의 붉은 기운을 발산해 자신을 속박한 금색 빛을 상대하면서 오른손의 주홍색 붓으로 허공을 그었다.

시간법칙의 영향을 받아 움직임이 느린 편이기는 했지만 혈홍색 고대문자들이 하나씩 떠올랐고, 사람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드는 수많은 귀물들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주술문자들이 하나씩 고공으로 솟으며 귀곡성이 커져 멀리서 듣고 있는 남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제혼은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핏빛 글귀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거대 판관이 써 내려가는 문장이 완성되려 할 때쯤, 그 아래 한립의 검진도 변화가 생겼다.

콰르르…….

36자루의 청죽봉운검에서 눈부신 금빛의 뇌전빛이 흘러나와 36개의 굵직한 뇌전 기둥을 이루고 솟아오른 것이다.

이어서 악귀 판관 주변 허공이 요동치고 뇌전 기둥에서 방출된 빼곡한 검기들이 그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검기를 품은 금색 광채가 날아드는 순간, 악귀 판관도 그 압도적인 뇌전의 힘을 느꼈다.

이에 더는 허공에 글을 쓰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붓을 틀어 아래쪽을 찌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만들어 놓은 핏빛 문자들이 살아나 아래로 떨어지면서 묵직한 핏빛 기운을 드러냈다.

핏빛 문자들은 공간을 허물며 검은 흔적을 죽죽 남기고 떨어졌지만. 금빛 검기들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아 바람도 통하지 않을 만큼 빽빽하게 몰려들어 핏빛 문자들을 모두 날려 버렸다.

치지직!

몇 초 만에 검기와 뇌전에 핏빛 문자들이 버티지 못하고 흩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핏빛 문자 뒤에 거대한 손바닥이 떨어져 금색 그물을 내리쳤다.

핏빛 소용돌이를 품은 손바닥에는 커다란 금색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손바닥의 등장에 기력을 잃어가던 핏빛 문자들은 검기를 뜯으며 소용돌이 안으로 끌어들였다.

검기 그물이 뜯어지면서 검기들도 자리를 잡지 못했다.

“대라 중기 수사다운 실력입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한립은 걱정하는 기색 없이 검결을 바꾸고 조용히 주문을 외웠다.

통천검진이 공명하며 하늘 높이 솟구치던 36개의 뇌전 기둥이 악귀 판관 머리 위 허공에 모여 금색 구름을 형성했다.

수많은 뇌전 문자들이 섞여 있는 구름 속에서 정체 모를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제야 악귀 판관의 안색도 달라졌다.

아래쪽 36자루의 청중봉운검이 덜덜 떨며 뇌전을 품은 검기들을 상공의 구름 속으로 날려 보내 푸른 대나무들처럼 비검들의 본체가 드러났다.

이어서 강한 바람이 불고 금색 구름이 첩첩이 쌓인 와중에 두 개의 거대한 기둥이 나타나 그 사이로 금색의 대문이 만들어졌다.

검의 형태를 띤 문양들이 잔뜩 새겨진 더없이 강력한 검기 파동이 느껴지는 문이었다.

“통천검진에 도천신뢰까지……. 네 놈은 대체 누구냐!”

악귀 판관이 소리쳤다.

한립은 그를 상대하지 않고 두 팔을 뻗어 마친 육중한 문을 여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상공의 거대한 금문이 그의 동작에 맞게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쿠구구.

문틈 사이로 폭포처럼 금색 뇌전이 떨어져 대양을 이루고 대문의 검 문양들이 그 안에서 떠올라 청죽봉운검과 비슷한 모습으로 판관을 향해 떨어졌다.

콰르르…….

쇄애애액…….

검의 울부짖음과 뇌전의 폭발음이 천지간을 가득 채웠고, 금빛 뇌전과 검기가 폭우가 되어 쏟아지고 있었다.

그 아래 거대 악귀 판관이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괴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그가 들고 있던 두꺼운 서책이 촤르륵, 펼쳐져 핏빛과 귀곡성을 터트렸고 무수히 많은 악귀와 음혼들이 날아올랐다.

그것들은 모기처럼 작은 것부터 산처럼 큰 것까지, 형태와 기운이 제각각인 악귀들이 온 세상 원한을 다 품은 듯 울부짖으며 고공으로 솟아올랐다.

삽시간에 공간에 귀곡성과 뇌전이 폭발하는 소리가 가득 차 귀가 울렸다.

이에 한립은 금빛과 핏빛이 맞붙어 소모전이 이뤄지고 있는 고공을 올려다보며 긴장을 풀지 않고 검결을 맺고 있었다.

통천검진은 위력이 대단한 만큼 부담도 컸지만, 이 정도 검진이면 자신에게 승산이 있다고 믿었다.

쿵쿵쿵쿵쿵!

일각이 지나도 금색 뇌전과 검기의 비가 그칠 줄 모르자 귀령자도 초조해졌다.

악귀 판관의 미간에 귀령자의 모습이 떠올라 재빨리 수결을 맺고 주홍색 붓을 가리켰다. 그러자 거대 붓이 힘을 응축해 작아지면서 검처럼 핏빛으로 날아올랐다.

쉭!

검은 잔영을 남기며 한립을 향해 곧장 날아들고 있었다. 이에 전력을 다해 검진을 조종하던 한립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조금만 더 시간을 끌었으면 좋았을 것을…….”

아쉽다는 듯 중얼거리는 그의 등 뒤에서 금색 달이 떠올라 농염한 시간법칙으로 금색 공간을 만들었다.

그러자 금색 공간 내에서 주홍색 붓은 속도가 격감해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걸 보고 눈을 번득인 악귀 판관이 손을 저었다.

손바닥의 금색 문자가 성대한 빛을 뿜은 주홍색 붓에 힘을 실어 시간법칙의 압박 하에서도 무서운 속도로 움직였다.

푹!

결국 붓이 짙은 금색 영역을 뚫고 말았다.

“죽어라!”

그 순간 위쪽에서 누군가 외쳤다.

고개를 든 악귀 판관이 본 것은 거대 천문 앞에 선 거대한 신영이 장검을 들고 뛰어내리는 모습이었다. 그게 한립이 아니면 누구겠는가?

귀령자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안 돼…….”

처절한 비명을 남긴 판관의 머리가 둘로 갈라지면서 목과 몸통에 금색 실선이 생겼다.

촤악!

갈라진 악귀 판관의 몸에서 음살기가 꿀렁꿀렁 흘러나오고 녹색 귀화들이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제혼!”

한립의 부름이 있기 전, 그와 의식이 연계된 제혼은 벌써 고공으로 뛰어올라 형수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이어서 악귀보다 더 악귀 같은 형수가 크게 숨을 들이마셔 자욱하게 퍼진 검은 음살기과 녹색 귀화를 빨아들였다.

그때 상공의 금색 구름도 버티지 못하고 통천검진이 흩어졌다.

통제를 잃은 악귀들은 머리 잃은 파리처럼 날뛰다 거의 제혼에게 잡아먹히고 일부만 두꺼운 서책으로 숨어들었다.

한립이 바닥에 내려서니 남안이 서둘러 다가왔다.

“한 수사,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단약을 두 알이나 꺼내 삼킨 한립이 손을 저었다.

36자루의 청중봉운검들이 그의 체내로 돌아갔다. 함유한 도천신뢰가 거의 바닥나 한동안은 검진을 펼칠 수 없을 터였다.

“귀령자 성사는…….”

남안이 좋지 않은 안색으로 물었다.

“신뢰의 위력이 강해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한립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피로감과 몸이 텅 빈 느낌에 두 팔을 휘적이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걸 본 남안이 급히 손을 뻗어 부축하려다 한립의 손에 제지당했다.

“기운을 너무 소모한 탓이니, 조금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

한립이 차분히 말하고 그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았다.

그가 무사한 것에 한숨을 돌린 남안이 고개를 들어 무너져 내린 지하 공간 천장으로 새어드는 햇살을 보았다.

그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한립 옆까지 닿아 있었다.

그리고 마무리를 한 제혼은 시원하게 트림까지 한 다음 사람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한립이 휴식을 하는 것을 보고는 방해하지 않고 두꺼운 서책으로 다가가 살펴보았다.

이때 남안이 그녀에게 다가가 무어라 말하려다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몸을 굳혔다. 그녀가 움직이는데 그녀의 그림자가 따라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자리에 남은 그림자에서 검은 인영이 튀어나와 악귀 머리 모양의 손잡이를 지닌 비수로 한립의 심장을 찌르려 했다.

마른 얼굴의 냉랭한 눈빛이 분명 귀령자였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