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1화. 귀령자와의 악전고투
*
벽에 귀문(鬼文)이 빼곡하고 오목하게 들어간 자리마다 핏물이 묻어 있었다.
귀령자가 진법 바깥을 휘~ 도는가 싶더니 돌연 수결을 맺고 주문을 외웠다.
그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한립은 머릿속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박히는 듯 정신이 침침해졌다.
‘의식 법칙?’
한립은 뭔가 이상하다 여기고 연신술을 발동하는 동시에 금색 뇌전으로 몸을 외투처럼 감싸 그를 속박한 검은 빛의 실들을 녹여냈다.
옆에서 눈이 풀린 남안은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미간을 좁힌 한립이 남안을 향해 포효하며 미간에서 수정 빛을 쏘아 보내주었다.
수정빛을 머릿속으로 받아들인 그녀도 금빛 뇌전이 몸을 타고 흘러 검은빛의 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윽…….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가 정신을 차렸다.
“연신술에 벽사신뢰라? 천정의 감찰선사를 뭘로 보는 것이냐! 오늘 나를 만난 것도 나름 인연이라 할 수 있겠구나.”
귀령자는 한립에게 말하는 듯 혼잣말을 하며 괴상한 웃음을 터트렸다.
한립은 ‘인연’이란 말에 헛소리라 생각했다. 그가 원치 않는 만남은 악연일 뿐이었다.
이때 귀령자의 주문 소리가 그쳤는데도 주위의 음성들은 중첩되어 더 커져만 갔고 피비린내가 심해졌다.
“한 수사, 큰일입니다……. 귀령자 성사의 만령함선진(万靈陷仙陣)에 갇혔으니 우린 끝이에요.”
남안이 주위를 둘러보고 겁에 질렸다.
만령함선진은 무슨. 귀기가 가득한 게 영기는 찾아볼 수 없으니 만귀진(万鬼陣)이라 부르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한 한립은 검은 기둥 위로 흉악한 악귀 얼굴들이 떠올라 겹겹이 중첩되는 것을 보았다.
인족, 요족 등의 용모를 한 악귀 얼굴들은 추하고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악다구니를 하고 있었다.
뭔가 심상치가 앉았다.
귀곡성을 들으면 들을수록 피로가 쌓여 어느 순간이 되면 터질지도 모른다.
“청각을 봉하고 수정 기둥을 부숩시다!”
한립이 외치는 소리에 남안도 움직였다.
선령력으로 청각을 봉하고도 들려오는 소리가 줄기는커녕 마음속에 더 선명하게 울렸지만, 지금은 망설일 때가 아니라 남색 장검을 불러내 가까이 있는 검은 기둥을 갈랐다.
귀령자는 말릴 생각도 하지 않고 관망했다.
‘뭐지?’
남안이 섬뜩한 느낌을 받았을 때, 이미 장검에서 수백 가닥의 남색 검빛이 날아가 검은 기둥을 공격하고 있었다.
충돌음 대신 검빛들이 물을 가른 듯 그 안으로 스며들고, 멀지 않은 곳에서 쿠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둘러 고개를 돌려 보니 한립이 검결을 맺어 금색 뇌전 비검으로 검은 기둥 수십 개를 가르고 있었다.
쿠쿠쿠…….
남안 때와는 달리 금색 뇌전들이 공간을 쩌렁쩌렁 울리며 천겁(天劫)을 방불케 하는 뇌전 연못을 이루어 일대의 기둥들을 가루고 만들고 있었다.
진법 바깥의 귀령자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는지 안색이 달라졌다.
놀라운 일은 부서진 기둥에서 돌조각이 아니라 악귀 허상들을 품은 귀무(鬼霧)가 퍼져 나왔다는 것이다.
남안이 무궁무진한 귀물들을 보고 기겁한 데 반해 한립의 눈에는 반가움이 어렸다.
한립의 손짓에 금색 뇌전들이 종횡으로 교차해 거미줄을 이루고 날아드는 수많은 귀물을 푸른 연기로 태워버렸다.
“아까운데…….”
한립이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때, 전방 벽에서 핏빛이 왕성히 일고 거대한 악귀 얼굴이 떠올라 입을 벌렸다.
입안의 핏빛 소용돌이가 청죽봉운검들이 뿜어낸 금색 뇌전들을 빠르게 빨아들였다.
수많은 극양의 기운을 지닌 뇌전이 결합한 청죽봉운검은 본래 귀물의 천적이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놀란 한립이 청죽봉운검을 불러들이려 했지만 거대 악귀의 입에서 시뻘건 혀가 쑥 튀어나와 청죽봉운검 대부분을 휘감아 소용돌이 속으로 끌어당겼다.
겨우 나머지 청죽봉운검들만 회수한 한립이 한 자루의 장검으로 합쳐 손에 들고 나머지 비검들과 감응해보려 했지만 되지 않았다.
청죽봉운검의 금색 뇌전들이 사라지자 기둥들에서 빠져나온 귀물들도 한립과 남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걸 본 남안이 남색 구슬 형태의 물 속성 영역으로 수천 장을 감쌌지만 귀물들은 그 안에서 파도를 가르며 점점 다가왔다.
도처의 기둥 속에서 더 많은 귀물이 몰려들어 거의 귀물의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남안이 결국에는 막지 못하고 영역이 뚫린 순간 옅은 금빛이 그 자리를 대신하며 한립의 시간영역이 귀물들을 감쌌다.
남안의 물의 영역에서는 어떻게든 움직이던 귀물들도 한립의 시간영역에서는 꼼짝하지 못했다.
남안이 옆에서 그걸 보고 깜짝 놀라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순간, 한립은 인상을 찡그리고 손에 든 검으로 전방을 내려치고 있었다.
쿠앙!
금색 뇌전 기둥이 뻗어 나가 귀물의 홍수를 뚫어주었기에 벽의 거대 악귀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인족과 거의 비슷한 거대 악귀는 입이 너무 크다는 점이 요수와 닮아 있었고, 머리에는 속세의 황제가 쓸법한 관을 쓰고 있어 꽤 위엄이 느껴졌다.
커다란 입속 이빨 사이사이에서 희미하게 금빛이 새어 나오는데 놀랍게도 청죽봉운검이었다.
빠르게 생각을 마친 한립이 한걸음에 통로를 통과해 거대 악귀 얼굴을 향해 쇄도했다.
“끌끌, 기다리고 있었다.”
음산한 목소리가 진법 바깥에서 들려왔다.
귀령자가 열 손가락으로 빠르게 수결을 맺어 진법에 법결을 던져 넣자 한립의 영역 속에서 고정되어 있던 귀물들이 움직이며 한립을 향해 모여들었다.
“비키거라!”
한립은 손에 든 장검을 붕붕 휘둘러 금색 뇌전을 터트려 다가오는 귀물들을 연기로 만들어 버렸기에 전혀 속도가 줄지 않았다.
그가 악귀 얼굴에 거의 다다랐을 때 이상하게 귀물들이 스스로 흩어져 길을 열었다.
‘이런!’
새빨간 긴 혀가 귀물의 홍수를 뚫고 나오고 있었다.
반응 속도가 매우 빠른 한립은 움직임을 멈추는 동시에 장검의 금색 뇌전을 한 곳으로 응결해 혀를 향해 찔러 들어갔다.
그 결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콰릉!
핏빛 혀끝에서 금색 뇌전문양이 응집해 거대한 뇌전 기둥을 만들어 그의 뇌전 검빛을 뚫고 날아든 것이다.
몸이 저릿해진 한립은 선령력 흐름도 순조롭지 못했다.
“어떻게…….”
위력은 원래보다 별로였지만 분명 벽사신뢰였다.
그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혓바닥이 독사처럼 그를 감아 들려 했다.
발끝으로 허공을 박차고 뒤로 물러난 그는 수많은 귀물에 둘러싸였다. 금색 뇌전 보호막을 두르고 있다고 하나 귀물들이 끝도 없이 밀려들어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다.
망설이던 그가 손을 저어 은색 빛의 문을 열었다.
빛의 문의 출현에 움찔한 귀물들이 발광이라도 하듯 그곳으로 달려들었다.
“동천의 보물! 가지고 다니는 보물이 꽤 되는구나! 꼬마 악귀들이 정리하고 나면 본 좌도 들어가 봐야겠어.”
귀령자가 즐겁게 외치는데, 은색 빛의 문으로 앞다투어 들어갔던 귀물들이 반대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겁에 질려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은색 빛의 문이 협소해 수천수만 마리의 귀물들이 한꺼번에 나올 수 없었기에 안쪽에서 처량한 귀곡성이 들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귀곡성이 작아지고 문을 막은 귀물들도 전부 사라져 빛의 문 주위로 공간이 생겨났다.
그 안에서 안색이 약간 창백한 녹색 치마를 입은 소녀가 차분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저건?”
귀령자가 제혼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끄윽…….
문을 나서자마자 숙녀답지 않게 트림을 한 그녀는 민망하다는 듯 한립을 보았다.
“제혼, 저자도 귀도를 수련하긴 했는데 뭔가 이상한 것 같아 너를 불렀구나.”
한립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게 맡겨 주세요!”
헤헤, 웃음을 흘린 제혼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귀물들을 곳간에 쌓인 쌀알을 보듯 흡족하게 둘러보았다.
크호오…….
괴성과 함께 검은빛에 둘러싸인 그녀가 눈이 핏빛으로 물들어 거대한 검은 원숭이로 변신했다.
바늘처럼 비죽비죽 솟은 새까만 검은 털, 머리에 난 뿔과 길게 자라난 송곳니, 미간의 제3의 눈 그리고 등 뼈를 따라 솟은 날카로운 뼈 가시까지 섬뜩하지 않은 게 없었다.
제혼의 포효소리에 귀물들의 간이 쪼그라들어 물러섰다.
“형수, 형수라고…….”
귀령자가 놀라 중얼거렸다.
눈을 부릅뜬 그는 격동한 것 같았는데, 좋아하는 것인지 두려워하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멀리서 남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평소 소녀의 모습을 한 제혼을 봐온 그녀는 말이 없기는 해도 꼬마 아가씨라고만 생각해 왔는데 본모습이 저렇게 무시무시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형수로 돌아간 제혼은 콧김을 흥 불어 대량의 광채로 수많은 귀물을 끌어당겼다.
석실 안에는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는 귀물들의 흐느낌으로 가득 찼다.
귀령자가 그걸 보고 입꼬리를 끌어올리자, 한립이 예리하게 상대의 표정을 포착하고 제혼에게 전음을 보냈다.
“조심하거라.”
제혼이 대답을 하기 전에 진법 바깥의 귀령자가 귀무로 흩어졌다.
별안간 석실이 크게 흔들리면서 바닥 곳곳에서 동글동글한 핏빛 고리가 떠올라 사방을 비추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부지불식간에 다른 공간으로 빨려 들어와 돌기둥들이 보이지 않았고 제혼이 열심히 삼키던 귀물들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남안이 당황한 얼굴로 한립 옆으로 날아들었다.
“귀령자 성자가 영역에 능통해 진작 천인경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아무래도 영역 공간 안에 들어온 것 같아요. 귀역(鬼蜮)이라 불리는 공간이에요.”
“흥, 내부 정보를 잘도 빼돌리는구나. 네년부터 처단해야겠다.”
남안이 조심스럽게 말하는데 누군가 질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에 보랏빛을 번득인 한립이 사방을 살펴도 귀령자의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조심!”
그때 미간을 찌푸린 그가 남안의 팔을 잡아 자신 쪽으로 당겼다.
그녀가 서 있던 지면에 핏빛 소용돌이가 생겨나 피 칠갑을 한 악귀 팔이 쑥 튀어나왔다.
한립은 검을 휘둘러 금색 뇌전으로 핏빛 소용돌이를 내리쳤다.
소용돌이 속에서 핏빛이 번지다 사라진 다음, 그들 세 사람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든 한립은 산만한 거대한 신영이 발을 들어 그들을 으깨려는 것을 발견했다.
흉악하게 생긴 거대 물체는 만령함선진에서 보았던 거대 악귀 머리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검은 서책과 주홍색 붓을 든 모습이 염라대왕의 수하라는 판관(判官)과 같은 모양새였다.
‘설마 영역의 역령?’
떨어지는 판관의 신발 밑에 새겨진 환형 문양을 본 한립이 생각했다.
제혼이 형수로 돌아갔는데도 저 악귀 판관에 비교하면 체구가 작았다.
그러나 어차피 귀도(鬼道) 술법이라 여긴 제혼은 등 뒤의 검은 뼈 가시에 밝은 빛을 머금고 대뜸 판관의 발을 향해 뛰어올랐다.
“안 돼…….”
한립이 그걸 보고 말리려 했으나 이미 제혼의 등 가시가 판관의 신발 밑 진법에 충돌한 후였다.
동글동글한 핏빛 고리들이 신발 밑창에서 흘러나와 장벽처럼 제혼을 막아서고 힘껏 눌렀다.
한립이 서둘러 도우려 했지만 판관의 머리가 꺾일 수 없는 각도로 꺾이며 입을 벌려 긴 혓바닥을 화살처럼 쏘았다.
그의 머리통을 노린 전광석화와 같은 공격이었다.
혀에서 혼백을 뒤흔드는 악취를 느낀 한립은 시간법칙을 운용해 번득 사라져 자리를 피했다. 그 찰나의 순간, 혀의 뇌전문양이 사라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크아악!
그때 제혼이 괴성을 터트리고 등 가시에서 강렬한 하얀 빛을 방출해 핏빛 장막을 뚫었다.
그러나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대량의 금빛이 흘러내려 진법을 이루고 더욱 단단히 제혼을 억눌렀다.
수십 자루 청죽봉운검이 함유한 뇌전의 힘이었다.
음기를 지닌 상대를 제약하는 청죽봉운검의 신뢰는 제혼에게도 통해서 만발하는 금색 뇌전에 제혼의 등이 까져 흐물흐물해지고 있었다.
힐끗 그걸 본 한립이 눈을 매섭게 뜨고 양손으로 검결을 맺었다.
청죽봉운검들이 부들부들 떨며 한립에게 돌아오고자 했으나 핏빛에 갇혀 그러지 못했다.
판관의 거대한 발이 코앞까지 들이닥치자 기합을 넣은 한립은 혀를 향해 겨누고 있던 청죽봉운검을 위로 번쩍 들어 정신을 집중했다.
촤지직!
귀령자의 통제를 받던 수십 자루 청죽봉운검들이 공명하며 떨어져 나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