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0화. 의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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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돌 천지인 골짜기 안은 이렇다 할 건물이나 식물이 없어 아주 황량했다.
곡린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떴다.
“여기쯤이어야 하는데…….”
“귀령자가 그의 궁전을 지하에 마련했다는 소리가 있어요. 입구가 어딜까요?”
남안이 주위를 살펴보았다.
한립도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 의식을 퍼트리지 않고 구유마동을 발동했다. 뭔가를 발견한 그가 번득 사라져 검은 바위 앞에 섰다.
“그게 입구라고요?”
남안은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해 이상하게 생각했다.
미소를 지은 한립이 손에서 푸른 빛 다섯 줄기를 내보내 검 허상으로 만들더니 검은 바위를 갈랐다.
검은 바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검은 빛기둥이 나와 푸른 검 허상들을 막았지만, 그때 한립이 다른 손으로 금색 뇌전을 날려 검은 바위의 측면을 깨트렸다.
쿠쿵.
검은 바위가 있던 땅이 아래로 꺼지면서 여러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검은 동굴이 나타났다. 그 아래로 계단이 구불구불 길게 이어져 끝이 보이지 않았다.
“헤헤, 솜씨가 좋습니다? 이런 숨겨진 문도 잘 찾아내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곡린이 검은 구멍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두 분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오기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곡 수사, 안내해 주시죠.”
한립의 말에 곡린도 떠들지 않고 아래로 내려갔다.
검은 음풍이 크고 작은 소용돌이를 이루어 휭휭 불었고, 귀곡성과 끔찍한 비명이 바깥보다 훨씬 크게 들렸다.
서둘러 보호막을 펼쳐 음풍을 막은 세 사람은 벽에 검은 서리 같은 게 응결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짙은 귀기와 음살기가 만나는 곳에서 형성된다는 흑음현빙(黑陰玄氷)이군요. 귀도의 음한한 속성의 선기를 만들기 좋은 재료이지요. 단단하기도 하고 의식을 공격하는 효과도 있으니까요.”
한립이 검은 서리를 알아보고 말했다.
양이 꽤 많아서 갖고 나가면 돈이 되겠지만 지금은 흑음현빙을 캐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계단의 끝에서 시야가 확 트이고 주먹 크기의 하얀 돌들이 천장을 밝히며 밝은 공간이 나타났다.
검은 벽돌을 쌓아 만든 바닥과 벽에는 이런저런 문양들이 새겨져 경건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여기까지 내려오자 음풍은 약해졌는데 음산한 귀기는 더욱 농염해졌다.
한립과 곡린은 아직 참을 만했지만 수행이 낮은 남안은 보호막을 펼치고도 한기의 침식에 이를 딱딱 부딪치며 몸을 떨었다.
한립이 그걸 보고 미간을 좁히더니 그의 손에 보라색 구슬이 들렸다.
“남안에게 지니고 있으라 하세요. 귀기의 침식에 대항하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머릿속에 제혼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소를 지은 한립은 보라색 구슬을 남안에게 던져주었다.
“지니고 있으세요.”
움찔한 남안이 구슬을 발동해 은은한 보랏빛 보호막을 펼치고는 안색이 편안해졌다.
“고맙습니다.”
손을 저은 한립이 먼저 앞으로 걸어가니 곡린과 남안도 뒤따라 대청을 통과했다.
대청 뒤쪽 방에는 구불구불한 세 갈래 길이 펼쳐져 구유마동으로도 끝을 볼 수가 없었다.
세 갈래 길을 살피려던 한립은 의식을 몸에서 떨어트리자마자 이상한 기운이 침식해 의식을 따라 혼백으로 침투하려는 것을 느꼈다.
“뭔가 이상하니, 의식을 방출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서둘러 의식을 거둔 한립은 다른 이들에게도 경고를 해주고 연신술로 괴이한 한기를 쫓았다.
“곡 수사, 귀령자가 동부 안에 다양한 수를 써놓은 것 같군요. 수사에게 의지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한립의 눈길에 곡린이 눈을 감고 금빛을 방출했다가 왼쪽 통로를 가리켰다.
“이쪽입니다.”
군말 없이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간 한립은 일각 후에 커다란 석실에 도착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은 또 두 개의 통로가 다른 방향으로 뻗어 있었다.
일행은 곡린이 가리키는 대로 주저 없이 움직였다.
음풍이 불기는 해도 귀물이 습격하는 것도 아니고,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곡린이 방향을 정해줘서 수백 리를 순조롭게 이동할 수 있었다.
곡린은 금동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했지만 한립은 긴장을 풀지 못했다.
구원관에서 지위가 높은 귀령자의 동부 안을 이렇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게 이상했다.
곡린이 미간에 금빛을 반짝여 금동의 위치를 찾더니 어딘가로 걸어갔다.
긴 회랑의 끝에는 대형 석실이 만들어져 있었다.
텅 빈 이전 석실들과 달리 이곳에는 몇 사람이 두 팔을 벌려도 안을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검은 돌기둥 들이 양쪽에 쭉 늘어서 있었다.
수정이나 옥으로 만들었는지 투명한 검은 기둥에 귀물과 비슷한 문양 그리고 주술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정체는 알 수가 없었다.
검은 돌기둥들이 늘어서서 만들어진 통로 깊은 곳에 굳게 닫힌 푸른 대문이 보였다.
한립은 무턱대고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남안에게 물었다.
“남 수사, 이곳이 뭐 하는 곳인지 아십니까?”
“저도 모르겠어요.”
“돌기둥의 문양은 유명문(幽冥文)”
남안은 고개를 저었는데 곡린이 돌기둥을 보다 말했다.
“유명문이요?”
“전설 속의 구유명계(九幽冥界)에서 쓴다는 문자입니다. 저도 아주 오래전에 고서에서 본 것이 다고요.”
“구유명계? 세상에 그런 곳이 있단 말입니까.”
한립이 눈을 반짝였다.
“있답니다. 세상 만물이 윤회하는 곳이라는데, 가본 사람이 극히 드물어 점점 전설 속의 이야기로 치부되었지요.”
“그럼 곡 수사는 유명문을 읽을 줄 아시는 겁니까?”
윤회에 대해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니라 구유명계에 진작부터 강한 호기심을 지니고 있었는데, 아직은 그곳이 존재한다는 확실한 증거를 접하지 못했다.
“그냥 그런 문자구나 하는 것이지, 읽지는 못합니다. 돌기둥의 문자들은 봉인 비슷한 작용을 하는 것 같으니 만지지만 않으면 별일 없을 듯싶어요.”
곡린의 설명에 한립은 알겠다고 답했다. 그도 그렇게 추측하고 있었다.
“곡 수사, 서금선이 이쪽에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그리 멀리 있지 않을 겁니다. 유명문까지 출현하고 슬슬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게 저 앞에서 뭐가 나올지 모르니 계속 갈지 말지는 한 수사가 결정하세요.”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야 없지요. 제가 앞장설 테니 곡린 수사가 중간, 남 수사가 마지막에서 따라오는 게 좋겠습니다.”
한립의 제안에 남안은 당연히 이견이 없었다.
“한 수사가 길을 터준다면야 저야 좋지요. 제가 서금선이지만 몸이 튼튼한 것 말고 다른 능력은 수사보다 못하니까요.”
곡린이 웃으며 답했다.
“그럼 가볼 테니, 두 분 다 조심하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남안이 미소 지으며 곡린의 시야 밖에서 그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한립도 미소를 머금고 먼저 대청으로 들어섰다.
발소리만 울리고 한동안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돌기둥으로 둘러싸인 대청 중간까지 왔을 때, 작지만 사삭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심!”
한립이 금빛으로 몸을 보호했다.
대청 안의 돌기둥 위로 검은 그림자들이 우글우글 올라와 꿈틀거리고 있었다.
한립이 머리를 굴리다 땅을 박차고 전방을 향해 쏜살같이 뛰어가자 남안도 그를 뒤쫓았는데, 곡린만이 앞으로 가지 않고 번개처럼 뒤로 물러났다.
그걸 본 한립이 눈을 가늘게 뜨고 뭔가를 하려는데 돌기둥의 검은 빛이 수많은 화살처럼 그들을 쫓기 시작했다.
검은빛 안에서 들리는 처절한 포효소리에 대청이 웅웅 울리고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곡린을 관리할 틈도 없이 서둘러 연신술을 펼쳐 혼백을 안정시킨 한립은 금빛 뇌전 채찍을 일으켜 사방의 검은 빛을 갈겼다.
청죽봉운검이 함유한 뇌전의 힘은 도천신뢰로 진화해 금빛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무언가 타들어가는 냄새가 났다.
남안도 열댓 개의 남색 비검을 불러내 절묘한 검진을 이루고 검은빛을 막았다.
검진의 위력이 상당한지 검은빛들이 부딪칠 때마다 부들부들 떨리면서도 버티고 있었다.
피부가 황금 색깔로 변한 곡린은 검은빛을 막지 않고 그것에 부딪힌 충격까지 이용해 더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몸에 옅은 자국이 남기는 했지만 간지럽지도 않는 수준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검은빛의 공격 범위를 벗어난 곡린이 석실 입구에서 두 손을 펼쳤다. 금빛이 날아가 석실 벽을 때리고 펑! 펑! 가루가 터졌다.
이에 돌기둥의 검은 빛이 급격히 밝아져 더는 한립과 남안을 공격하지 않고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후웅!
바닥에서 떠오른 짙은 검은 빛이 유명문으로 변해 거대한 진법을 형성하고 엄청난 한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몸이 묵직해진 한립은 바닥으로 떨어져 검은 진법에서 피어오른 검은빛의 실에 사로잡혔다.
몸이 천근만근이라도 되는 것처럼 팔과 다리를 가누기 어려웠다.
남안은 더 심각해서 그보다 먼저 떨어져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곡린, 뭐 하자는 겁니까?”
한립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처음부터 상대를 완전히 믿지는 않았지만, 이곳 금제를 꿰고 있을 줄은 몰랐다.
거액의 선원석을 원하는 것처럼 꾸며 그들을 이곳으로 유인한 것이다.
“구원관까지 데리고 들어와 주어 정말 고맙습니다, 한 수사. 게다가 서금선과 이렇게 가까운 곳까지 데려와 주다니 덕분에 수고를 덜었어요.”
곡린은 거만한 웃음을 지었다.
“당신의 목적도 그 서금선이었던 겁니까? 여기에 와본 적이 있는 것 같군요.”
“뭘 다 알면서 아직도 모른 척입니까. 서금선들은 원래 서로 잡아먹으며 진화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녀석이 내 분신을 잡아먹었으니 원래 내 것이었던 힘을 되돌려 받는 것뿐이에요.”
“분신을…….”
금동이 잡아먹었다는 구원관 서금선이 곡린과 연관이 있는 듯했다.
“잡담은 여기까지. 난 갑니다. 귀령자가 곧 올 테니, 둘은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세요.”
곡린이 몸을 돌려 빠져나가려는데 석실의 석문이 쾅! 열렸다.
석실 안 공기가 더욱 어둑해지면서 음풍이 크게 불어 세 사람을 덮쳤다.
“빌어먹을! 너무 빨리 왔잖아!”
곡린이 화가 나 두 손을 교차했다.
수많은 수정 빛이 곡린의 몸에서 터져 나와 거대한 금색 검 허상을 이루고 공중의 검은 그림자를 베었다.
쉭!
검은 그림자에서 방출되던 무시무시한 기운에 틈이 생기고 곡린이 얼른 금빛으로 변해 빠져나가려 했다.
“넌! 구원관에서 도망갈 땐 언제고, 감히 돌아와?”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집채만 한 검은 손이 곡린이 변한 금빛을 할퀴었다.
비늘이 덕지덕지 붙고, 기다란 손톱에는 기괴한 저주와 문양이 가득 새겨진 거대 손이 허공에 다섯 개의 검은 흔적을 남겼다.
촤악!
그러자 곡린이 변한 금빛이 여섯 조각이 났는데, 그 잔해가 사람 머리통만 한 금색 딱정벌레들로 변해 대청 입구로 달아나 버렸다.
탄성을 내지르며 나타난 검은 장포를 입은 청년은 눈빛이 음산했다.
‘귀령자.’
한립이 그를 보고 중얼거렸다.
곡린이 달아나는 것을 보면서도 귀령자는 쫓지 않았다. 서금선보다는 눈앞의 한립이 그의 시선을 더 끌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장천병이 한립에게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여기서 가장 난감한 것은 남안이었다.
구원관 제자인 그녀가 외부인을 안으로 끌어들인 셈이었는데, 또 한립이 남원자를 구할 유일한 희망이라 도와줘야만 했다.
“쯧쯧! 바깥의 도적을 끌어들이다니 죽어 마땅하구나.”
귀령자가 남안을 향해 음산하게 말했고, 남안은 변명하지 않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대라 중기 수사를 앞에 두고 한립도 여유를 부릴 수는 없어 포권을 해보였다.
“제가 오늘 구원관을 찾은 것은 제 영충을 되찾기 위해서입니다. 때마침 구원관에 외부세력이 쳐들어와 소란스러운 것으로 아는데, 저는 보내주시고 그들을 막는 데 힘쓰시지요? 금옥관을 지나오는 길인데 거기서 윤회전 인물들을 보았습니다.”
귀령자는 냉랭히 그런 그를 보며 이 침입자들을 어떻게 처단할까만 생각했다.
한립도 자신의 몇 마디에 상대가 설득될 거라 여기지 않아 말을 하며 눈동자에 보랏빛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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