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9화. 찾아 헤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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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지공간 안, 제혼이 수결을 맺은 채 전신 원반을 들고 묘법선존의 용모를 흉내 내다가 연락을 끊었다.
“주인님 일이 잘 풀리셔야 할 텐데.”
붉은빛을 반짝여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제혼이 중얼거렸다.
“준비도 충분히 하셨고, 때도 적당하니 될 거예요. 제 장로란 자, 욕심이 많아 장로회에 들어갈 생각에 가짜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을 거고요.”
옆에서 흰둥이가 말했다.
금옥관 앞.
“성사대인께서 명을 내리셨으니 이제 되었지요? 제 장로, 금제를 열어주세요.”
남안이 전신 원반을 거두며 다 들으란 듯이 말했다. 제 장로는 남안이 확실한 이유를 만들어 주는 것에 기뻐했다.
“물론 묘법성사의 명에는 따라야지요. 그런데 그자는 누굽니까?”
막 문을 열려던 제 장로가 한립을 보았다.
내뿜는 기운이 미약해 신경 쓰지 않다가 막상 금제를 열려니 신경이 쓰였다.
“주옥이라는 내문 제자입니다. 입수한 소식이 이 아이와 연관이 있어 직접 보이려 데려가는 길입니다.”
“제자 주옥이 인사 올립니다.”
한립은 황공하다는 듯 인사를 하고 얼른 허리춤의 신분 영패를 보였다. 영패에 새겨진 모습으로 변신한 터라 들킬 리 없었다.
제 장로는 길쭉한 옥구슬인 옥규(玉圭)를 들어 한립의 영패를 가리키고는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허상의 모습을 눈앞의 소년과 비교했다.
그러면서 의식으로 한립의 체내를 훑은 그는 이상이 없자 옥규와 의식을 거두었다.
“여봐라, 금제를 열어라.”
제 장로의 명에 8명의 병사가 앞으로 나서서 거대 깃발을 흔들었다.
깃발이 펄럭일 때마다 요란한 금빛 광채가 파도처럼 퍼져 나와 금색 구슬을 이루고 회전했다.
거기에 제 장로가 금색 영패를 꺼내 수정빛을 드리우니 구슬에 8개의 주술문자로 갈라져 금색 장막으로 녹아들었다.
두꺼운 장막에 천천히 틈이 벌어져 한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통로가 생겼다. 남안이 기뻐하며 안으로 들어가고 한립이 뒤따랐다.
그들이 지나고 제 장로가 영패를 발동해 통로를 닫으려 할 때,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그들이 막 금제를 빠져나오자마자 금옥관 입구 인근 허공에서 암홍색 빛이 튀어나와 쏜살같이 통로를 지났다.
“막아야 한다. 어서 통로를 닫아!”
안색이 확 달라진 제 장로가 소리쳤다.
그의 영패에서 금빛이 날아가 보호막으로 흘러들고 다른 수사들이 깃발을 펄럭여 통로의 봉합 속도를 높였다.
동시에 제 장로는 입에서 하얀 거검 두 자루를 불러내 엄청난 잔영을 남기면서 허공에 교차하게 했다.
암홍색 파동을 분출해 거검을 튕겨낸 것은 붉은 장포를 입은 소녀, 교삼이었다. 몸의 굴곡이 분명한 그녀는 그림과 같은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남안은 갑작스러운 사건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한립은 알고 있었는지 태연했다.
교삼은 한립이 있는 방향을 향해 입꼬리를 올려주고는 손을 들어 올려 까딱했다.
그녀 옆에서 은색 빛의 문이 나타나 물 만난 고기처럼 윤회전 수사 수백 명이 빠져나왔다.
“쳐라! 금옥관을 장악해!”
교삼의 명에 윤회전 수사들이 제 장로들을 향해 달려들어 공격을 퍼부었다.
제 장로는 눈이 찢어질 것처럼 눈을 부릅떴지만 응전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인 것은 천여 명에 이르는 구원관 제자들이 있어 수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점이었다.
두 세력이 맞부딪치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갑시다.”
한립이 멍하니 있는 남안을 끌고 멀어졌다.
“하하, 고마웠습니다. 이번 임무가 끝나는 대로 사례를 하지요.”
교삼의 웃음소리가 그의 머릿속에 울렸지만 한립은 대꾸하지 않고 날아갔다.
“윤회전 사람들이 나타날 걸 알고 있었던 건가요?”
남안이 물었다.
“지금 그런 걸 궁금해할 때도 아니고. 묻지 말아야 할 질문은 하지 않는 게 수사에게도 좋을 겁니다.”
냉랭히 대답한 한립은 다른 생각에 빠졌다.
교삼은 그가 금동을 구하기 위해 어떻게든 관문을 넘을 걸 알고 뒤를 밟고 있었다. 계략도 이런 계략이 따로 없었다.
“알겠어요. 금동 수사를 구하는 게 우선이죠. 위치가 어디죠? 구원관 길은 익숙하니 제가 안내하는 게 나을 거예요.”
남안은 한립이 그다지 유쾌한 기분이 아닌 걸 알고 화제를 돌렸다.
“귀곡(鬼谷)에 갇혀 있다고 합니다. 이게 구원관 내관 지도입니다.”
“귀곡이요? 제가 알기로 사대성사 중 한 명인 귀령자가 그곳에서 수련할 텐데요.”
“귀령자가 그곳에 머문단 말입니까?”
미간을 좁힌 한립은 그제야 납득이 되었다.
금동을 잡아간 것도 귀령자라고 했으니, 귀령자의 근거지에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귀령자는 대라경 중기에 이르렀고, 괴이한 귀도법칙(鬼道法則)을 익혀 성사들 중에서도 최고라고 꼽힙니다. 윤회전의 침입으로 귀곡에 없을 수도 있지만 혹시 모르니 대비를 해야 할 거예요.”
남안은 참지 못하고 충고를 건넸다.
“조심하겠습니다.”
미소를 지은 한립이 손을 저어 검은 기운으로 남안을 감쌌다. 무형의 허상이 된 그들은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검은 가면은 본인뿐 아니라 인근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남안은 이채를 띠다 정신을 차리고 길 안내에 집중했다.
구원관 외관이 웅장한 건물들로 거대 종파의 위엄을 살렸다면, 내관은 산봉우리와 골짜기를 거의 그대로 살리고 건물들은 얼마 되지 않아 천지원기가 바깥보다 훨씬 풍부했다.
내관에도 발동된 금제가 있기는 했지만 외관보다는 나았다. 아무래도 세 개의 관문이 뚫리지 않을 거라 여긴 듯했다.
반나절 뒤, 두 사람은 어느 산골짜기 인근에 소리 없이 내려섰다.
흙과 암석이 새까만 골짜기 상공에는 두꺼운 먹구름이 드리워 강력한 독성을 지닌 수분기를 내뿜고 있었다.
뼈가 시린 음산한 바람이 산골짜기 안에서 불어 나오고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높아졌다가 낮아졌다 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한립과 남안은 골짜기와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음풍이 바늘처럼 몸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여기가 귀곡이군요?”
“와본 적은 없지만 어떤 곳인지 들었어요. 이렇게 귀기가 음산하게 깔린 곳이라 귀곡이라 불린다더군요. 지도상의 위치도 여기가 맞고요.”
남안이 확신하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눈을 감고 금동을 감지해 보려다 아무 소득 없이 눈을 떴다.
“기운이 느껴지지 않나요?”
남안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유금성에서 금동의 존재를 감지할 수 없던 것은 거리가 멀어서라고 여겼지만 지척에서 감지가 안 되는 것은 이상했다.
감응을 방지하는 봉인 안에 있는 걸까? 아니면 윤회전이 잘못된 정보를 준 걸까?
귀기가 가득한 산골짜기는 그도 들어가기 꺼려졌고, 저 안에는 대라 중기의 귀령자가 버티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들어가시기 전에 금동이 안에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하지 않을까요? 윤회전 정보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잖아요.”
제혼이 그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전음을 보냈다.
“저 좀 내보내 주세요, 주인님! 제가 누님이랑 오래 붙어있어서 어느 정도 감응이 가능해요.”
흰둥이가 소리쳤다.
“그래, 네가 해보거라.”
한립이 소환해 주자 흰둥이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미간에서 수정빛을 일으켰다.
“안 돼요. 누님 기운을 감응할 수가 없어요.”
금방 눈을 뜬 흰둥이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도 친히 배양한 영수인 금동을 감지하지 못하는데, 흰둥이가 감응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제 어쩌죠?”
“우린 못해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초조해 보이는 흰둥이를 향해 웃어준 한립이 화지공간에서 다른 사람들을 불러냈다. 곡린이었다.
“한 수사, 동행을 하겠다고 했지 무슨 죄인처럼 금제에 갇혀 있겠다고 한 건 아니었습니다.”
좋지 않은 표정으로 주위를 살핀 곡린이 한립을 향해 불만을 토로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제혼이 민감한 편이라, 제가 대신 사과를 드리지요.”
한립이 공수를 했다.
“그런데 여긴 어딥니까?”
“구원관 안입니다. 혹시나 들킬지 모르니 의식을 퍼트리지는 마시고요.”
“한 수사는 구원관에 쫓기고 있던 것 아닙니까? 대담하게 구원관 안에 들어와 있고 대단하십니다.”
“처리할 일이 있어서요.”
담담히 웃음 지은 한립은 윤회전의 구원관 침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여기서 날 불러낸 이유가 있을 텐데요?”
“예, 수사를 성가시게 해드릴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제가 듣기로 서금선 한 마리가 이 골짜기 안에 숨어 있다는데 금제가 겹겹이 펼쳐져 있어 도저히 기운을 감지할 수가 없습니다. 수사가 동족이니 이 앞에 서금선이 있는지 확인을 부탁드리려 합니다.”
“이 안에 서금선이 있다고요? 한 수사도 서금선을 잡으려는 겁니까?”
눈이 밝아졌던 곡린은 곧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하하, 일전에 만난 적이 있는 서금선인데, 제 물건을 하나 갖고 사라져서 그걸 되찾으려 합니다.”
한립은 하하 웃으며 말했다.
“아, 그랬군요. 그렇다면 제가 골짜기 안에 서금선이 있는지 확인을 해드리겠습니다.”
곡린이 그를 지긋이 보다 웃음 지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곡린의 눈에 희색이 어렸다.
“맞습니다. 이 안에 서금선이 있어요. 그런데 골짜기 안이 아니라, 지하에 있는 것 같군요.”
“그게 사실입니까?”
한립도 내심 기뻐했다.
“큼, 다른 일은 몰라도 동족을 찾는 데는 제가 한 실력 합니다.”
곡린이 득의양양하게 답했다.
그는 몰랐지만 한립은 그가 아니라 화지공간의 제혼에게 물은 것이었다.
“곡린의 의식 파동으로 미루어 보아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아요.”
제혼의 전음이 들렸다.
“잘 됐어요! 어서 누……. 서금선을 잡으러 가요!”
흰둥이가 흥분해 소리치다 한립이 눈을 부릅뜨자 헛웃음을 흘렸다.
“곡 수사, 폐가 안 된다면 안내를 부탁드려도 될지요?”
한립이 곡린을 향해 물었다.
“여기가 구원관 안이면 용담호혈(龍潭虎穴)이나 마찬가지란 소린데, 서금선을 감응해 줬으면 되었지 안내까지 하라는 건 과분한 요구 같습니다.”
곡린이 냉소하며 거침없이 말했다.
“강요하려던 건 아닙니다. 원하시는 게 있으면 말씀하시지요.”
한립은 화내는 기색 없이 미소를 유지했다.
“제가 수련에 중요한 기점이라 대량의 원기가 필요해서요. 다른 건 되었고, 선원석 오천만 개 정도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뭐 비슷한 가치의 보물도 좋고요. 그럼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 드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날강도!”
곡린의 요구에 흰둥이가 버럭 성을 냈다.
“저는 제안을 한 것이니 응하고 말고는 한 수사가 알아서 하시면 됩니다.”
곡린은 흰둥이가 뭐라든 상대하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좋습니다. 그 대신 서금선을 찾으면 보수를 드리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곡린을 바라보던 한립이 선선히 답했다.
“하하, 호탕하십니다. 약속한 겁니다?”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시죠. 흰둥이 너는 제혼과 같이 화지공간에 숨어 있거라. 나와 남 수사 그리고 곡 수사만으로도 수색하는 데는 충분하니.”
흰둥이는 바깥에 남아 있고 싶었지만 한립의 시선에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흰둥이를 화지공간으로 돌려보낸 한립이 검은 가면을 이용해 자신과 남안 그리고 곡린을 검은빛으로 감싸고 골짜기 입구로 날아갔다.
골짜기 안쪽에서 불어나오는 음풍에 강렬한 흉살기와 원기가 담겨 있었다.
잘린 머리가 산을 이루고 그 아래로 핏물이 모여 줄줄 흐르는 흉흉한 광경이 세 사람의 마음을 잠식했다.
한립은 연신술을 운용해 살기를 잠재우고, 곡린은 대수롭지 않게 전신에 금빛을 흘려보내 살기의 침식을 막았다.
남안만이 안색이 안 좋아졌다가 무언가 비술을 사용하고 회복되었다.
“남 수사는 저 안에 데리고 들어가기에는 몸이 좀 약한 것 아닙니까?”
곡린이 슬쩍 남안을 보고 한립에게 말했다.
“남 수사, 힘들면 화지공간에 들어가 있어도 됩니다.”
“견딜만해요. 제가 구원관에 대해서는 그나마 아는 게 있으니 도움이 될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들을 보고 웃음을 흘린 곡린은 더는 말하지 않고 천천히 골짜기 안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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