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8화. 호랑이 굴
*
일각 후.
구원관 안, 인적 드문 숲속에 기운을 숨긴 한립이 앉아 있었다. 무성한 가지와 잎을 드리운 거목 아래 서 있어서 멀리서는 그를 발견할 수 없었다.
옥 조각을 쥐고 미간에 대어본 그는 잠시 후 눈을 떴다.
구원관 지도와 금동이 구금된 장소가 기록되어 있었는데, 구원관의 금지(禁地) 중 하나라 핵심제자들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다.
“윤회전이 내어준 지도와 남안의 것이 거의 일치하는군. 금동이 그런 곳에 갇혀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때 멀리서 굉음과 함성이 들려왔다.
“윤회전이 이번에는 제대로 움직이는구나. 못해도 억만년은 군림해 왔을 구원관 안에서 이런 소란을 피우다니.”
잠시 후 훌쩍 뛰어오른 그는 고공으로 올라가지 않고 수풀 속으로 펄쩍펄쩍 뛰어 인근의 야트막한 산으로 올라갔다.
구원관 안에는 가면을 쓴 대량의 흑의인들이 침입해 선경이나 다름없던 구원관을 전쟁터로 만들고 있었다.
구원관 깊은 곳으로 향하며 주요 거점에서 마주친 윤회전 사람들은 하나같이 수행이 높아 대라급도 보였다.
구원관에서도 많은 장로와 제자들을 보내 침입자들을 죽이고 곳곳의 금제를 발동하고 있었다.
다만 윤회전의 습격이 너무 갑작스러웠던 데다 대금원선역 곳곳에 문제가 생겨 고수들이 빠져나간 상태였다.
게다가 천정의 보제령 분배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성에 결집해 있어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진선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심지어 도조가 버티고 있는 구원관을 누가 다짜고짜 쳐들어올 줄 알았겠는가?
한립이 궁금한 것은, 이번 작전을 위해 엄청난 인력과 물자를 들였을 윤회전의 진정한 목적이 뭐냐는 거였다.
구원관 제자들도 보통이 아니라서 처음에는 당황해서 밀렸지 이제는 장로나 봉주들의 호령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각지의 금제를 이용해 대응하고 있었다.
한립은 둘 사이의 분쟁에 끼지 않고 구원관 제자의 모습을 하고 구원관 깊숙이 침투했다.
눈에 띄지 않는 신분과 복장에 난리까지 나서 그를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고, 그의 실력에 대라급 존재만 마주치지 않으면 되었다.
금방 구원관 안쪽, 아직 윤회전 사람들이 들이닥치지 않은 곳에 들어선 그는 수결을 맺어 검은 가면의 은신 신통을 일으켰다.
허상처럼 변한 그는 의식으로 탐색을 해도 발견되지 않을 터였다.
그래도 침입자가 숨어드는 것을 막기 위한 수많은 방어 금제와 탐지 금제가 있었지만, 구유동안이 진보해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반나절이 지나 어느 산봉우리에 숨은 한립은 전방의 금색 산봉우리 두 개를 응시했다.
구름까지 솟은 두 산봉우리는 하늘과 땅을 잇는 거대한 금색 기둥들 같았다.
그 중간에 통로가 하나 있고, 양 옆으로 자욱한 금색 안개가 퍼져 있어 내부 상황이 보이지 않았다.
남안이 그려준 구원관 지도에 따르면 금옥관(金玉關)이라 불리는 내관으로 통하는 입구였다.
시끌벅적한 곳은 구원관 외관이었고 가장 핵심인 구역으로 들어가려면 저곳을 지나야 했다.
윤회전이 준 정보에는 금동이 내관 금지에 갇혀 있다고 했다.
눈앞의 금색 안개는 구원관의 초절정 금제로 구원도조가 친히 펼쳐 놓아 통로를 제외하고 다른 곳을 통해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이 금옥관 같은 입구가 구원관에 총 세 곳이었다.
눈을 가늘 게 뜬 한립은 금옥관 통로가 두꺼운 금색 장막으로 막혀 있고, 그 뒤로 문양이 새겨진 금색 갑옷을 입은 수사들이 빼곡하게 지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입구를 닫아놨다고? 윤회전이 침입해서인가?”
이를 악문 한립은 화지공간으로 의식을 불어 넣어 남안과 소통했다.
“윤회전이 구원관에 침입했다면 금옥관이 닫히는 건 당연하다고 봅니다. 구원관에서 정말 중요한 장소는 다 내관에 있으니까요.”
남안이 전음으로 답했다.
“통과할 방법이 있겠습니까?”
한립의 물음에 화지공간 안 남안이 침음했다.
남원자를 구하기 위해 이미 많은 정보를 넘겼지만 그다지 중요한 정보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금옥관은 달랐다. 이런 정보를 남에게 알린 걸 들키면 구원관에서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었다.
“남안 수사, 구원관이 지금 난리 통이라 누군가 우리를 신경 쓰고 있지도 않고. 수사는 얼굴을 노출한 적이 없어 들킬 리도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는 하나 구원관에는 능력자가 많답니다. 기이한 탐색술이나 점술을 사용하면 영원히 숨길 수 있는 비밀은 없겠죠. 수사에게 기밀을 알려드릴 수는 있으나 제게 두 가지만 약속해 주세요.”
“무얼 말입니까?”
“첫째, 제혼 수사께서 오라버니를 깨워주시기를 바래요.”
남안이 곁의 제혼을 바라보았다. 그녀 옆에는 제혼과 흰둥이가 조용히 서 있었다.
곡린은 그 자리에 없었지만 제혼은 겹겹이 금제를 펼쳐 그를 경계했다.
“그럴게요.”
제혼이 한립과 암암리에 상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남안이 고마워하며 제혼을 향해 예를 취했다.
“두 번째 조건은 무엇입니까?”
“구원관 기밀을 누설하고 더는 관내에서 지낼 수 없으니 저와 오라버니를 한 수사가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
고개를 조아린 남안은 한립이 놀랄만한 말을 했다.
“날 더러 수사와 남원자를 받아달라고요?”
제혼과 흰둥이도 놀란 얼굴이었다.
“함께 지내면서 수사의 실력이나 성격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생각해요. 한 수사의 실력이면 저희를 보호해줄 수 있겠죠.”
남안의 차분한 말에 한립이 생각에 잠겼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확실히 말해둘 것이 있습니다. 흰둥이, 제혼과 달린 수사와 남원자에게는 의식 비술을 펼쳐두어야 안심이 될 것 같습니다. 후에 믿을 수 있다고 여겨지면 비술은 거두어 주겠습니다. 또한 수련에는 참견하거나 도움을 주지 않을 것이니 알아서 살아갈 궁리를 해야 할 겁니다.”
“좋아요.”
한립과 남안 둘 다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한립은 너무 흔쾌히 답하는 그녀의 모습에 조금 이상하다고 여겨 제혼을 시켜 의식에 손을 써두게 했다.
“가라!”
수결을 맺은 제혼의 손길에 검은빛이 고리로 변해 남안의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렸던 그녀는 금방 평정을 되찾고 불만스러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남 수사는 의지도 굳은데, 안목도 정확하네요. 주인님께 몸을 의탁한 걸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제혼이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결정을 지지했다.
“맞아요!”
흰둥이도 옆에서 웃음 지었다.
그들의 말에 남안이 눈을 반짝였다.
“됐으니, 다른 이야기는 그만하고 금옥관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군요.”
한립이 입을 열었다.
“네, 규정대로라면 금옥관은 관주, 부관주 혹은 네 명의 성사에게 허락을 받은 사람만 진입할 수 있어요. 하지만 윤회전이 침입한 비상사태이니 합당한 이유를 대면 안의 금문위가 문을 열어줄지도 모르죠.”
표정을 바로 한 남안이 진지하게 답했다.
“합당한 이유라는 게 어떤 것이 있을지 아시겠습니까?”
“다른 호위라면 몰라도 저곳을 지키는 금문위를 상대로라면 제게 한 가지 방법이 있어요.”
한립은 남안과 전음으로 세부적인 내용을 상의했다.
“……위험하기는 해도 시도해 볼 만 하겠습니다.”
한참 뒤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님, 저들을 속이고 안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아직 윤회전이 이곳까지 쳐들어오지 않아 내관은 평화로운데, 만에 하나 들켜 주인님 홀로 적들에게 포위당하게 되면 너무 위험할 것 같아요.”
제혼이 끼어들어 걱정을 표했다.
“추측이지만 지금 상황에 내관에 고수들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네 걱정도 일리가 있으니 안전을 위해 윤회전에 연락을…….”
한립은 가면을 발동하려다 동작을 멈추고 씩 웃음 지었다.
“주인님?”
“윤회전에 연락할 것도 없겠구나.”
제혼은 한립의 결정을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더는 말리지 않았다.
“남안 수사, 가봅시다.”
한립이 손을 저어 남안을 불러냈다. 남안은 남색 피풍의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려 얼굴은 드러나지 않았다.
“누구냐? 누가 감히 금옥관을 함부로 들어가려 하는 것이냐!”
금빛 장막 안에서 금갑 거한이 나와 소리쳤다.
얼굴 가득 검은 수염을 기른 근육질의 사내는 기세가 대단했다. 대라 초기에 이른 사내였다.
“제 장로, 접니다.”
남안이 피풍의를 풀어 얼굴을 드러냈다.
“남안 수사? 여긴 무슨 일입니까?”
금갑 거한이 남안의 얼굴을 확인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중요하게 보고할 일이 있으니 금옥관을 열어주세요.”
“지금 적들이 구원관을 침입해 세 곳의 관문이 다 굳게 닫혔습니다. 특수한 명령서가 없으면 들어갈 수 있는데, 명령서를 받아온 것입니까?”
“전 묘법성사의 명을 받아 바깥의 상황을 파악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급히 나가느라 명령서를 받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소식이라 어서 전해야 하니 도와주세요.”
정중히 말한 남안이 연녹색 영패를 꺼내 보였다.
“묘법성사의 영패!”
제 장로는 영패를 보고 태도가 공손해졌다.
사대 성사들은 관주, 부관주 다음으로 구원관에서 지위가 높아 장로인 그와는 비할 수 없었다.
남안의 말을 의심할 여지도 없는 게, 그도 산수라 남안 남원자 오누이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서 그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남 수사가 묘법성사의 명을 받았다지만 저도 금옥관을 지키라는 명을 받은 처지라 부탁을 들어드릴 수 없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제가 알아 온 정보는 지금 바깥에 있는 적들의 목적에 대한 거예요. 상부에 보고하면 중상이 내려지겠지요. 다만 저는 신분이 낮아 직접 고할 수 없고 성사 대인을 거쳐야 하고요. 늘 장로회에 들어가고 싶다지 않으셨습니까? 이번에만 도와주시면 묘법성사께 청해 제가 힘을 써보겠습니다.”
남안은 제 장로에게만 들리게 전음을 보냈다.
구원도조가 펼친 금옥관 금제는 아주 강력했지만 전음을 막는 효과는 없었다.
“정말입니까?”
“저희가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고, 제 말을 못 믿으십니까? 이번에 수사가 저를 도와주시면 제가 그 답례를 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음……. 그렇다면 묘법성사께 전신을 보내 상황을 설명하고 관문을 열라 명령을 내려 달라 해주세요.”
“저도 그러고 싶죠. 아까부터 계속 연락을 취하고 있는데 답이 없으십니다. 아무래도 다른 일로 바쁘신 것 같아요.”
망설이는 제 장로를 향해 남안이 남색 전신 원반을 들어 보여주었다.
“부관주들은 물론 다른 성사대인들도 전부 바깥에서 적을 막고 계시잖아요. 그분들이 제가 보고를 하기 전에 정보를 얻으면 모든 게 허사가 됩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날리실 건가요?”
남안은 조급히 재촉했다.
제 장로가 입술을 달싹이기만 하고 결정을 못 내리는데 남안의 전신 원반에서 녹색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묘법선존이었다.
“연락이 되었습니다.”
남안이 크게 기뻐하고 제 장로도 희색을 드러냈다.
“남안, 무슨 일이냐? 지금 바쁜 용무를 처리 중이니 짧게 말하거라.”
묘법선존이 냉랭히 말했다.
“예, 성사대인! 명을 받들어 적들을 염탐하다가 아주 중요한 정보를 알게 되어 보고를 드리러 가는 길입니다. 금옥관이 폐쇄되어 지나지 못하고 있으니 제 장로에게 명을 내려주시지요.”
“얼마나 중요한 소식이기에 직접 보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냐? 제 장로, 금옥관을 열어주게. 관주께는 내가 이야기하지.”
묘법선존의 허상이 금제 뒤쪽의 제 장로를 향해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급히 답하는 제 장로를 본 묘법선존의 허상이 사라졌다. 곁에 선 한립의 눈에 웃음기가 스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