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7화. 다른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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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여식에서 이런 일이…….”
자락 선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탄식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습니다. 이번 일은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이곳에 계속 발이 묶여 있다가 무슨 변고라도 일어난다면…….”
백발노인이 주름진 얼굴로 걱정을 드러냈다.
“맞습니다. 이미 금제도 뚫렸겠다, 나가야 합니다. 사고라도 나면 제일 먼저 죽어 나가는 건 우리 아니겠습니까? 이대로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요.”
또 다른 수사가 낮게 속삭였다.
“갑시다. 일단 이곳을 떠나야…….”
종문 수사들이 분분히 일어섰다.
“관주의 명입니다. 아무도 함부로 구원각을 떠날 수 없다 했으니, 여러분도 남아계셔야겠어요.”
뚱뚱한 장로가 일어나 그들을 막아섰다.
“우 장로, 아까는 이곳이 구원관 중에서도 안전한 곳이라며 남아 있으라 한 것 아닙니까? 이제는 지붕이 뻥 꿇렸는데도 우리더러 남아 있으라 강요할 작정입니까?”
그걸 본 주현양이 목소리를 높였다.
우 장로도 그 점에 대해 할 말이 없기는 했다.
“우리를 막을 시간에 우 장로께서도 구원관에서 벌어지는 일을 막으러 가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희는 그저 구원관 내부의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떠나려는 것이에요.”
낙원산도 입을 열었다
“그러시다면 따로 장로를 시켜 내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도중에 개인적인 행동을 하거나 구원관을 함부로 침입하면 적으로 간주해 격살할 것입니다. 제 말뜻을 이해하셨습니까?”
한숨을 내쉰 우 장로가 경고했다.
다들 안색이 변하기는 했지만,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우 장로가 구원관 장로들을 불러들여 열두 종문 사람들을 나누어 바깥으로 안내하라 일렀다.
한립이 기회를 엿보고 있는데 주현양의 전음이 들려왔다.
“한 수사, 우리 임무는 끝났습니다. 이대로 빠져나가면 됩니다.”
“저는 일이 있어 당장 구원관을 빠져나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교삼 수사가, 한 수사가 떠나지 않겠다고 하면 보제령과 제가 지닌 물건을 교환하라 했습니다.”
주현양의 말에 한립은 망설임 없이 소매 속의 영패를 건넸다.
주현양이 동시에 옥 조각 하나를 그의 손에 건네주었다.
“저는 먼저 갑니다. 오래 머물러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은 아시리라 믿겠습니다. 몸조심하세요.”
당부를 남긴 주현양은 종문의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첫 번째 무리에 섞여 구원각을 나섰다.
한립은 손에 죈 옥 조각을 만지작거리며 적당한 때가 언제 일지 생각했다.
한 무리씩 구원각을 떠나 이제 남은 것은 호산종 장로 열댓 명과 한립이 다였다.
“남은 사람들은 자네가 구원관 바깥으로 데려다주게.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야.”
우 장로가 그들을 힐끗 보고 마지막 남은 구원관 장로에게 말했다.
“예.”
한립은 장로를 따라 가장 마지막에서 빠져나가며 곁눈질로 봉천선사를 보았다.
머리 위에 용 눈알 크기의 남색 구슬을 띄우고 옅은 남색 보광으로 몸을 감싼 그에게서 강렬한 물 속성 법칙 파동이 전해졌다.
몸의 끔찍한 상처들은 거의 치료가 됐지만 몸 안을 난도질하는 성신지력을 아직 다 제거하지 못해 기운이 불안정해 보였다.
그때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진 한립은 위기감을 느꼈다.
신분을 숨기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급격히 시간법칙의 힘을 운용한 그가 대열의 끝에서 맨 앞으로 이동했다.
그가 이동하는 사이 주변 온도가 급하강해 극한의 힘이 구원각을 뒤덮었고, 그가 스쳐 지나온 호산종 장로들이 하나씩 얼음 결정으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마저도 대전을 벗어나기 직전에 얼어붙어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심지어 주변 천장 내의 시간이 전부 동결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길.’
뼈에 스미는 한기에 <대오행환세결> 공법도 운용을 멈추고 체내의 선령력도 꽁꽁 얼어붙었다.
이런 느낌은 무척 괴이해서 격원법련으로 혼백이 봉쇄되었을 때와 비슷했다.
어쩔 수 없이 현규를 밝혀 얼음 수정 속에서 하얀 별빛을 내뿜어 보았지만 계속해서 오장육부로 한기가 스며들었다.
심장이 얼어 천천히 뛰는 것을 느끼고 급히 정염불새를 소환해 심맥을 지키라고 해야 했다.
동시에 한기로 봉쇄된 구원각 안에 남색 안개가 피어올라 사람의 형상을 한 얼음 조각상들로 변했는데, 하나하나가 극히 아름다워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봉천선사는 얼음 봉쇄에 예외기는 했지만 의아한 눈으로 금원선궁 궁주 육천풍을 보고 있었다.
“육 궁주, 뭐 하는 겁니까? 갑자기 극한영역은 왜요?”
“이상하게 여기실 것 없습니다. 구원각에 들어온 윤회전 쥐새끼를 잡으려 한 것이니까요.”
육천풍의 눈길이 한립에게로 향했다.
그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본 한립은 역시 나였구나 싶었다.
놀라고 두려우면서도 의문이 일었다. 가면을 쓰고 어떤 이상한 행동도 보이지 않았는데 육천풍은 어떻게 자신을 발견한 걸까?
천살진옥공을 열심히 발동해 극한빙정(劇寒氷晶)을 뚫고 나가려 하면서 정염불새를 시켜 체내의 한기를 몰아내는 데 집중했다.
동시에 부단히 장천병의 병령에게 의식연계로 연락을 취해 부득이한 경우를 대비해 시공간초월을 준비했다.
그렇게 되면 목숨은 건지겠지만 구원관까지 와서 금동을 구하지 못하고 떠나게 된다.
“저들 중에 윤회전 인물이 있다고요?”
봉천선사가 놀라 했다.
“처음에는 확신할 수 없었는데, 영역을 펼친 순간 한 놈이 진언문의 시간공법인 <대오행환세결>을 쓰더군요.”
육천풍이 조소했다.
“그래서 이 중에 누굽니까?”
자리에서 일어선 봉천선사의 눈길에 한기가 돌았고, 그는 의복에 어린 서리를 털어내며 육천풍 옆으로 다가섰다.
“제 생각이 맞다면 주선방에서 꽤 높은 순위에 있는 한립이란 자일 겁니다.”
육천풍이 손을 뻗어 한립을 지목했다.
“한립!”
“아시는 잡니까?”
“알고 말고요. 우리 천정에 사사건건 대항하며 적잖은 소금원선궁 수사들과 궁주 동방백을 죽인 뒤 달아난 놈입니다. 천정이 적몽 선자를 파견했는데도 잡는 데 성공하지 못한 놈을 여기서 발견할 줄이야!”
“그렇다면 만만한 자는 아니겠군요.”
기뻐하는 봉천선자를 보고 육천풍이 침음했다.
“당연히 만만한 자는 아니지요, 게다가…….”
신이 나 뭐라 말하려던 봉천선사는 자신이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육천풍은 뻔히 그걸 보면서도 파고들지 않고 웃는 낯으로 물었다.
“육 궁주께서 잠시 이 자를 구금해 주시지요. 제가 천정에 아뢰고 어떻게 처리할지 결단을 내리겠습니다. 중요한 건 이 일로 우리가 엄청난 공을 세우게 생겼단 겁니다.”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봉천선사의 말에 육천풍이 속으로 욕을 했다.
한립은 자기가 혼자 힘으로 잡았는데, 왜 ‘우리’의 공이란 말인가?
아마 알아서 보고하게 두면 그마저도 거의 다 자기 공으로 돌릴 게 분명했다.
“호법을 서주시면 의식 법반으로 천정에 상황을 알리겠습니다. 술법을 펼치는 동안에는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되어서요.”
봉천선사는 육천풍이 불만스러워하는 것도 모르고 웃음 지었다.
“예, 그러십시오. 제가 호법을 서 드리겠습니다.”
육천풍의 대답에 봉천선사는 아직 부상을 다 치유하지 못한 몸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식판 크기의 하얀 옥판을 꺼내 가리켰다.
동글동글한 환형(環形) 문양들이 겹겹이 떠올라 독립된 주술문자를 이루고 빠르게 움직였다.
눈을 감고 주문을 외는 봉천선사의 몸에서 하얀 수정빛이 흘러나와 그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 시각, 얼음 조각이 된 한립은 하얀 별빛을 거두고 암홍색 빛을 일으켰다. 강렬한 혈맥의 힘을 일으킨 것이다.
진령혈맥과 천살진옥공을 결합해 삼두육비 마신 형상으로 변하고 있었는데 극한의 얼음 속성 법칙하에서 그 과정이 너무 느리게 진행되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한립은 심맥을 보호하던 정염불새를 몸 바깥으로 불러내 얼음수정을 녹였다.
“쯧…….”
변신을 거의 마칠 무렵 육천풍이 혀를 찼다.
그의 소매 속에서 남색 부적이 날아올라 한립에게 붙었다.
곧바로 혈맥의 힘까지 얼어붙어 변신하려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한립 때문에 시간을 지체한 동안 봉천선사의 하얀 옥반이 빛을 감싸 무언가 흐릿한 사람 형상을 만들고 있었다.
이변이 일어난 건 그때였다.
육천풍이 정혈을 뱉어 손바닥에 핏빛 주술문자를 응결하더니 가부좌를 틀고 앉은 봉천선사의 머리통을 후려친 것이다.
실체화된 남색 빛기둥이 봉천선사의 체내로 흘러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기습을 당한 봉천선사는 눈을 부릅뜬 채 눈의 핏발을 시작으로 온몸의 혈맥이 짙은 남색으로 변하면서 뻣뻣하게 굳어갔다.
그는 물론 하얀 옥판까지 남색 얼음 결정으로 변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길게 한숨을 내쉰 육천풍이 주먹을 들어 얼어붙은 봉천선사의 육신과 그 원영까지 일격으로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저물탁과 저물반지를 주워든 그는 내용물을 살피지도 않고 꽁꽁 얼려 깨버렸다.
그것을 지켜보던 한립은 깜짝 놀라고 있었다.
천성존자가 봉천선사를 기습한 것만 해도 놀랄 일이었는데, 금원선궁 궁주가 천정의 봉천선사를 향해 손을 쓰다니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한립이 판단을 내리기 전에 구원각 곳곳에서 연달아 펑펑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같이 얼어붙어 있던 열댓 개의 얼음 조각들이 하나씩 터져 남색 수정가루들이 바닥에 수북하게 쌓였다.
이제 남은 것은 한립 한 명이었다.
“병령 선배님, 병령 선배님…….”
최악의 경우 자리를 뜨려 했으나 선령력과 시간법칙의 힘이 봉인되어서인지 병령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
위기의 순간 육천풍이 손짓을 해 남색 돌풍으로 그를 감싸고 얼음을 녹여 주었다.
자유를 되찾은 한립은 흠칫 놀라며 정염불새를 거두고 기운을 숨겼다.
“허허, 그리 조심할 것 없습니다. 내 영역 공간 안에서는 바깥으로 기운이 새어나갈 염려는 없으니.”
“당신도 윤회전 사람입니까?”
한립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물었다.
“듣던 대로 신중한 성격이군요. 맞습니다, 나도 윤회전 사람이에요. 천정에 숨어 있은 지 얼마나 오랜 세월이 지났는지 모르겠는데, 오늘 일로 신분이 노출되고 말겠군요.”
“저…….”
한립은 폐허가 된 대전을 훑었다.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보세요.”
“윤회전이 계획한 일이 이겁니까? 그리 오래 준비한 게 겨우 천정 선사 한 명을 죽이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을 텐데요.”
“하하하! 당연히 아닙니다. 이런 녀석을 죽이려고 나와 천성존자가 신분을 드러내다니요. 이건 연달아 진행되는 계획에 일부일 뿐입니다. 전주께서 이후의 일은 수사가 나서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니 알 필요도 없겠지만요.”
육천풍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말에 한립은 미간을 좁혔다.
‘윤회전 전주가 자신을 언급했다고?’
“여기는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까요? 구원관에서 여기서 있던 일을 너무 빨리 알아내면 좋지 않을 텐데요.”
“이 안의 기운은 바깥으로 전혀 새어나가지 않았고, 나머지 흔적들은 내가 지울 겁니다. 구원관에서 진상을 조사하려면 시간이 걸릴 테지요. 뭐,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곧 정체가 발각될 거였으니까요.”
한립의 질문에 육천풍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평소 대외적으로 보이던 겸손하고 온화하던 모습과 달리 자유롭고 편안해 보였다.
그는 말을 하면서 한립에게 무언가를 던져주었다. 받고 보니 구원관 내문제자의 영패였다.
“상척의 신분으로 나설 수 없으니 용모를 바꿔야겠습니다.”
육천풍이 충고했다.
“고맙습니다.”
“자, 이제 할 일을 하러 가세요.”
육천풍은 나른하게 기지개를 펴고 감사 인사를 하는 한립을 향해 손을 저었다.
상척의 모습에서 눈꼬리가 긴 평범한 소년의 모습으로 변신한 한립이 도포 허리춤에 신분 영패를 달고 포권을 해보였다.
대전 바깥으로 나가던 그는 산산조각이 난 호산종 수사들의 잔해가 서서히 육천풍의 영역에 녹아들어 기운마저 소멸하는 것을 보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가 사라지고 구원각에서 하얀 빛줄기가 날아올라 하늘 끝으로 사라졌다.
뒤이어 형편없이 망가진 건물이 무너져내려 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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