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6화. 믿을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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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제령 수여식이 끝나서 다들 자리에 앉는데 구원각 바깥에서 쿠릉, 하는 폭음이 들리며 대전이 흔들렸다.
폭음은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연이어 들려왔다.
“어찌된 일인가?”
드디어 안색이 달라진 순균진인이 입을 열었다.
뚱뚱한 장로는 이번에는 의식비술로 알아낸 사정을 전음으로 순균진인에게만 전했다. 순균진인의 얼굴에 은근히 노한 기색이 어리고 있었다.
“봉천선사, 곽 수사, 육 궁주, 천성 수사, 본관에 일이 생겨 아무래도 제가 직접 가봐야 할 듯싶어, 죄송하지만 잠시만 기다려 주셔야겠습니다.”
“일이 있다면 가보세요. 저희야 뭐 앉아서 차나 몇 잔 더 마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곽연이 일어서서 말하자 다른 이들도 그리했다.
순균진인은 손목을 틀어 은색 불진을 꺼내 들더니 그걸로 허공을 툭 쳐서 허공의 문을 만들어냈다.
한립이 그것을 눈여겨 봐두었다. 공간법칙을 익히지 않은 순균진인이 공간을 허물어 문을 만들어 낸 것은 불진이 공간 선기란 소리였다.
“우 장로, 남아서 귀빈들을 접대하게. 나는 일을 처리하고 바로 돌아오겠네.”
뚱뚱한 장로에게 분부를 내린 순균진인이 은색 파문과 같은 문 안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다시 자리에 앉은 봉천선사 등은 가볍게 술잔을 기울이거나 담소를 나누었고, 주현양 등 나머지 열두 종문 사람들은 눈치만 보며 불편한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관주께서 금방 오실 테니 불편해 말고 쉬고 계세요.”
뚱뚱한 장로가 그걸 보고 언질을 주자 종문 사람들이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착실히 앉아 기다렸다.
그런데 일다경이 지나도록 순균진인이 돌아오지 않았다.
“바깥의 소란은 그쪽에서 움직이는 것입니까?”
한립은 주현양 가까이 앉아 전음으로 물었다.
“우리의 임무는 보제령을 얻는 것입니다. 그 밖의 것은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주현양이 전음으로 하는 말에 한립도 더는 묻지 않았다.
쿠궁!
그때 고요하던 구원각이 또 시끄러워졌다.
대전이 크게 휘청거려 내부의 물건들이 쓰러져 바닥에 나뒹굴었고 적잖은 이들이 충격에 비틀거렸다.
“대체 무슨 일일까요?”
무유호 자락 선자가 안색이 나빠지며 물었다.
다른 사람들도 표정이 가지각색이었다. 방금 강력한 위력이 전해진 곳은 구원각 인근이었던 것이다.
한립은 대전 바닥과 벽에 금색 주술문자들이 복잡하게 나타나 고계의 금제 진법을 이루는 것을 보았다.
“다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구원각은 본종에서도 중히 여기는 곳이라 독자적으로 보호 진법이 설치되어 있어 대라 중기 수사라 해도 쉽게 파괴할 수 없습니다. 결코 영수가 어찌할 수 없는 곳이지요.”
쿠앙!
우 장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폭음이 터지고 구원각이 더 심하게 흔들렸다. 대전 안의 금색 진법이 웅, 떨리며 거의 무너질 뻔한 대전을 안정시켰다.
그러자 다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했고 몇몇은 당황하고 있었다.
봉천선사 등 몇몇 만이 태산처럼 버티고 앉아 아무렇지 않게 담소를 나누었다. 마치 지금 벌어지는 일이 그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태도였다.
“우 장로, 방금 들려 온 폭음은 평범한 영수가 일으킬 수 없는 소리 같던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입니까?”
미간을 찌푸린 낙원산이 물었다.
다들 말은 안 해도 뚱뚱한 장로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함부로 추측하지 마십시오. 영수마다 신통이 달라 잡는 데 시간이 소요되고 있을 따름입니다.”
우 장로가 담담히 답했다.
“무슨 일이 난 것이면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저희가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주현양도 슬쩍 미간을 좁히고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우리 구원관이 이런 일로 외부인의 도움이 필요한 곳인 줄 아십니까?”
우 장로가 눈을 부릅뜨고 기분 나쁜 내색을 했다.
“제가 말실수를 했군요. 그럼 저희는 보제령도 받았겠다, 여기 있어 봐야 도움도 안 될 것 같은데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주현양은 급히 사과를 건넸다.
그 순간 구원각 전체가 격렬하게 흔들려 내부를 지탱하고 있는 목제 기둥에 균열이 갔다. 몇 겹의 금제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면 벌써 건물이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봉천선사도 얼굴을 굳히고 일어섰다.
“구원관에서 지금 뭘 하고 있는 겁니까? 그까짓 영수 몇 마리 달아났다고 이리 시끄러워서야.”
뚱뚱한 장로는 천정 선사의 질문에는 대충 넘어가지 못하고 포권을 했다.
“선사께 아룁니다. 영수산을 시작으로 구원관 각지에서 이상이 발생해 소란스럽게 해드렸습니다. 심각한 일은 아니지만 워낙 다발적으로 일어나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순균진인은 어딜 간 것이고요?”
봉천선사가 물었다.
“관주께서는 조사당 쪽 일을 처리하러 가셔서, 해결되는 대로 돌아오신다고 합니다.”
우 장로의 말을 들은 수사들이 수군수군하며 그에게 금제를 열어 자신들을 내보내 달라고 말했다.
“괜한 소리 하지들 마시고, 가만히 앉아 기다리시지요!”
우 장로가 고개를 돌려 그런 종문 사람들을 보고는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현양 등이 더는 어쩌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구원관의 기세가 대단합니다. 여기 모인 수사들은 보제령을 얻어 멀리 우리 중토선역으로 보제연에 참석하러 가게 될 손님들입니다. 구원관에서는 손님 대접을 이리하는 겁니까?”
눈을 가늘게 뜬 봉천선사가 서늘하게 물었다.
“그, 그런 것이 아니라…….”
“선사대인, 너무 나무라지 마시지요. 순균 수사가 직접 나섰는데 무슨 일이야 있겠습니까. 듣자니 바둑을 두신다던데, 저와 같이 시간을 보내시지요?”
처음부터 별생각 없어 보이던 천성존자가 일어나서 우 장로를 대신해 분위기를 풀었다.
“제가 볼 때 우 장로도 다른 뜻으로 이리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구원관에 문제가 생겼는데 외부인들을 그냥 내보낼 수도 없겠지요.”
육천풍도 일어나 거들었다.
봉천선사가 그의 말뜻을 알아듣고 자리에 앉았다.
천성존자가 그와 마주 앉아 탁자에 청옥으로 만든 바둑판과 검은색과 흰색 바둑돌을 꺼내 두었다.
관심이 없어 보이던 봉천 선사가 그걸 보고는 자신 앞에 놓인 검은 바둑돌을 꺼내 살펴보았다.
보라색 빛이 감돌고 반질반질하게 광택이 도는 바둑돌 하나하나에 밤하늘의 별빛을 받아놓은 것처럼 성신지력이 느껴졌다.
“설마 말로만 듣던 성하낙(星河落)이 아닙니까?”
“안목이 좋으십니다. 이걸 걸고 저와 바둑 1판 두는 것은 어떠십니까?”
“하하,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봉천선사가 흔쾌히 천성존자와 대국을 시작하니 이제 다른 사람들은 조용히 앉아서 바깥의 소란이 정리되기를 기다리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곽연은 그들을 힐끗 보고 육천풍과 금원선역의 비사(祕史)에 대해 논하는데 진작 술법으로 소리를 차단해 다른 이들은 엿들을 수 없었다.
고요한 대전 안에 청옥으로 만든 바닥판에 바둑돌을 올리는 소리와 봉천선사와 천성존자 사이의 대화만이 울렸다.
봉천선사는 두 손가락 사이에 낀 별빛이 반짝이는 바둑돌을 내려놓고 미소를 머금었다.
“제게 성하낙을 선물하시려고 작심을 하셨나 봅니다. 연달아 실수를 하셔서 바둑판 위의 강산을 다 내주시니 말이에요.”
봉천선자가 천성존자를 보며 웃음 지었다.
“바둑으로 제가 선사의 적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바둑판의 바둑돌들을 진법이라 생각하면 결과가 다를 수도 있지요.”
천성존자도 씩 웃어 보였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이제 제 차례입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의 봉천선사를 앞에 두고 천성존자가 들고 있던 하얀 돌을 바둑판 정중앙에 올려 두었다.
탁.
맑은 소리와 함께 청옥 바둑판에서 보랏빛 광채가 피어오르며 그 안의 성신지력이 폭발했다.
성신지력의 파급력에 탁자와 주변 의자들이 가루가 되고 관연, 육천풍이 놀라 백 장 밖으로 물러났다.
진작 가루가 되어 사라진 탁자 위에는 청옥 바둑판 대신 푸른빛으로 이루어진 바둑판이 떠서 가로세로가 교차하는 19개의 선이 길게 이어져 봉천선사를 옥죄고 있었다.
빛의 바닥판 위에 올려진 하얀 바둑돌들이 복잡한 성신진법을 형성해 보랏빛으로 일렁였다.
그때 맞은 편에 선 천성존자가 맑은 얼굴로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오늘 중요한 일이 있어 선사의 머리를 좀 빌려 써야겠습니다.”
기합을 터트린 천성존자의 손짓에 하얀 바둑돌들이 어린아이 팔뚝 굵기의 별빛 교룡으로 변해 봉천선사의 급소들을 노리고 날아갔다.
이 모든 일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 봉천선사는 제대로 반응할 틈도 없이 법칙의 힘을 격발해 겨우 남색 물의 갑옷만을 만들어 걸쳤을 뿐이었다.
“천성존자, 당신 미친 겁니까!”
관연이 깜짝 놀라 말리려 날아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수십 마리 별빛 교룡들이 봉천선사의 물의 갑옷 속으로 헤엄쳐 들어갔다.
증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물의 갑옷은 신비로웠고, 백조산 산주 곽연이 거의 근접해 있었다.
육천풍도 그의 뒤를 쫓아 따라오고 있었다.
“선사대인, 생각했던 것보다 능력이 있기는 하지만 아쉽게 되었습니다.”
탄식한 천성존자가 수결을 바꾸며 폭발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봉천선사의 물의 갑옷 속을 헤엄치던 별빛 교룡들이 눈부신 하얀빛을 뿜으며 기함할 만한 성신지력을 방출하고 있었다.
쿠아아…….
강대한 성신지력이 봉천선사 지척에서 터져 하얀 소용돌이를 이루며 솟아올랐다.
휘이이잉!
그 성신지력 돌풍에 주변 백 장의 허공이 찢겨나갔다.
보호진법이 펼쳐지자 구원각 천장에도 커다란 구멍이 뚫려 그곳을 통해 빠져나간 천성존자가 무지개처럼 변해 날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노한 곽연이 고개를 돌려 육천풍을 향해 소리쳤다.
“육 궁주, 선사를 돌봐주세요! 저는 천성을 쫓겠습니다.”
푸른 베틀 북을 불러내 위에 오른 곽연이 보라색과 푸른색 두 가지 빛을 반짝이고 고공으로 사라졌다.
지붕까지 함께 쫓아갔던 육천풍이 그걸 보고 굳은 얼굴로 내려왔다. 다른 사람들은 꽁지 빠진 새처럼 놀라 대전 구석으로 물러서 있었다.
다들 자신들이 무엇을 본 것인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일월맹 천성존자가 갑자기 천정의 전령 선사를 죽이려 한 것이 맞는 건가?
육천풍은 다른 이들을 돌볼 겨를 없이 대전 안의 하얀 소용돌이를 주시했다.
하얀 소용돌이가 이제야 점점 약해지더니 별빛으로 흩어지며 봉천선사의 몸뚱이를 떨구었다.
물의 갑옷이 사라진 봉천선사는 의복이 갈기갈기 찢겨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보다 심각한 것은 단전을 포함한 요혈이 성신지력 폭발로 찢겨나가 남은 성신지력이 작은 칼날처럼 아직 몸속을 파고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큭
억눌린 신음을 흘리는 봉천선사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분노했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살아오며 이렇게 심하게 다친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천성존자의 암습은 그의 자존심에 크나큰 모욕을 안겼다.
“전 선역의 힘을 빌려 모든 일월맹 수사들을 도륙하고 말 겁니다.”
봉천선사가 분에 차 중얼거렸다.
“일단 몸을 추스르시지요. 육 산주가 천성존자를 잡으러 갔으니, 그때 따져도 늦지 않을 겁니다.”
미간에 주름이 잡힌 육천풍이 말했다.
금원선궁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일월맹 수사들이 한둘도 아닌데 그들을 다 도륙하겠다고?
“어찌 되었든 천성 그 개자식과 일월맹이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할 겁니다.”
상처가 아픈지 얼굴을 일그러트린 그는 현산종 등 열두 종문 사람들을 훑었다. 체면이 땅에 떨어졌다는 생각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이에 종문 사람들은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다른 곳을 쳐다보기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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