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5화. 무사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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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은 적몽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외진 곳으로 걸어갔다.
좁은 산길을 돌자 시야가 확 트이면서 금색 단풍나무들이 햇살 아래 찬란히 빛나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시야 가득 금색 단풍나무가 가득한 광경은 확실히 장관이었다.
“이런 나무를 유광금풍(流光金楓)이라 부른다죠. 보기 좋기도 하지만 나무들이 금 속성 기운을 뿜어내 몸을 단련하는 수사들에게 좋다더군요.”
적몽이 걸어가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적몽 선자께서는 견문도 넓으시군요. 연체사에 대해서도 잘 아시는 것 같고요.”
한립도 걸어오면서 공기 중의 자욱한 금빛 기운이 몸을 보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저야 그저 책에서 보아 아는 것이라, 상 수사처럼 직접 몸을 써서 수련하는 분보다는 모릅니다. 수사는 어떻게 지금의 경지에 이르셨는지요? 물론 비법이 있겠지요?”
“사람마다 체질이 달라 각자에게 맞는 방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종문 바깥을 떠돌다 보니 이런저런 인연이 닿아 현규를 뚫은 것뿐이고요. 선자의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그러셨군요. 저도 기회가 된다면 세상을 유람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고 싶네요. 안타깝게도 저는 그럴 기회가 얼마 없었고, 얼마 전 다녀온 유금성에서도 일도 잘 풀리지 않았거든요.”
빙긋 웃은 적몽이 하소연했다.
“적몽 선자 같은 분이 말입니까?”
한립은 뜨끔하면서도 차분한 마음을 유지하며 놀란 얼굴을 만들었다.
“천정의 명을 받아 유금성으로 죄인을 잡으러 갔는데, 누군가 나타나 죄인을 가로채고 제 일행들을 죽였거든요.”
적몽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천정에 대항하다니, 누가 그리 간이 크단 말입니까? 그자가 죄인과 한패였던 모양입니다?”
“그건 모르겠지만, 그자도 육신을 강하게 단련한 자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상 수사와 좀 비슷한 면이 있는 것도 같고요.”
“저를 그렇게 보시는 건, 제가 그 자일지 모른다고 의심하시는 겁니까? 본종은 보제령을 얻기 위해 수천 년 전에 은밀히 저를 산문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때부터 대회가 있기 전까지 오직 수련에만 매진했고, 산문을 나선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제 말을 믿으실 수 없다면 함께 현산종으로 돌아가서 조사를 해보시지요.”
적몽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한립이 어이없다는 듯 하하 웃고는 정색을 했다. 속으로는 그렇게 연기를 했는데도 적몽의 눈에 띄었다며 한숨을 쉬고 있었지만.
허나 적몽의 태도로 보아 아직은 그냥 의심인 것 같았다.
“그런가요…….”
미소를 머금은 적몽이 금색 문양이 들어간 하얀 구슬을 꺼내 들었다. 구슬 안에서 하얀 기류가 소용돌이치는 게 신비해 보였다.
“그게 무엇입니까?”
“주천의(周天儀)란 물건이에요. 법칙의 힘을 감응하고 조사하는 데 쓰이는데, 이걸로 수사의 기운을 확인해 보아도 되겠습니까?”
적몽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주위에서 강력한 기운이 몰려들어 한립을 구속했다.
“아니, 현수 공법을 익혔다고 해서 천정의 범죄자와 동일인이라 의심하는 것입니까? 다짜고짜 법칙의 힘을 조사하겠다니 당황스럽군요.”
한립은 난색을 표했다.
“중요한 일이라 실례를 무릅쓰고 이리 행동한 것입니다. 제가 찾는 사람이 아니라면 사과를 드리지요.”
“적몽 선자는 천정 분이시고, 적융도조의 소녀신데 일개 현산종 장로인 제가 조사를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어디 마음대로 해보십시오. 그 전에 선자가 찾는 사람이 어떤 법칙을 익혔는지 말해 주시고요.”
재빨리 머리를 굴린 한립이 차갑게 말했다.
이곳은 구원관 안이었다. 적몽의 조사에 협조하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의 주의를 끌게 되었다.
이렇게 된 것 윤회전 검은 가면이 적몽이 든 주천의보다 효과가 뛰어나길 기원할 뿐이었다.
마음을 정한 한립은 시간을 끌며 묵묵히 <대오행환세결>을 운용해 체내의 모든 시간법칙의 힘을 깊숙이 숨겼다.
의식의 힘도 최선을 다해 응축해 거두어 드렸다.
이제 시간법칙의 힘은 거의 달걀 크기의 금색 구슬로 단단히 뭉쳐져서 기운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라 한립은 신기했다.
“그자는 다양한 공법을 익혔지만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3대 지존 법칙 중 한 가지인 시간법칙을 익혔다는 겁니다. 협조 감사드립니다.”
적몽은 한립이 비꼬는 것도 개의치 않고 주문을 외워 구슬을 발동했다.
하얀 구슬의 소용돌이가 신속하게 돌며 무형의 파동이 흘러나와 한립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피부에 금색 뇌전이 어린 검은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검은빛은 바로 상척이 수련한 법칙의 힘이었고, 검은 뇌전은 청죽봉운검의 뇌전법칙이었다.
청죽봉운검은 얼마 전 다시 제련해 속성이 달라졌기에 그걸로 그를 알아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한립은 쾌재를 불렀지만 겉으로는 얼굴을 굳히고 화가 난 척을 했다.
적몽이 예상 밖의 반응에 움찔하고도 포기하지 않고 주천의를 더욱 강하게 발동했지만 더 많은 검은 빛과 뇌전법칙이 드러난 것 외에는 다른 변화는 없었다.
“이제 됐습니까?”
한립의 냉랭한 물음에 적몽도 구슬을 거두었다.
“제가 상 수사를 오해한 것 같군요. 사죄의 뜻으로 구원성 개원루(開元樓)에서 식사를 대접하겠습니다.”
적몽이 그를 향해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됐습니다. 다른 용건이 없으시다면 저는 이만 가봐야겠군요.”
코웃음을 친 한립은 적몽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금풍림을 떠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는 적몽의 미간이 쉽게 펴지지 않았다.
그녀가 허리를 틀자 옥패가 울리는 소리가 들리고, 단풍나무 숲속에 숨어 있던 여러 기운이 사라졌다.
* * *
한립은 금풍림을 떠나 현산종 별원으로 돌아왔다.
“한 수사, 적몽이 수사의 정체를 알아보고 부른 것입니까?”
주현양이 기다리고 있다가 무슨 상황인지 알아내려 했다.
“아닙니다. 제가 육신을 단련한 방법을 궁금해 하더군요.”
한립은 이 일에 대해 사실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주현양이 교삼이나 무양 등에게 알려 계획을 바꿀지 몰라서였다.
그는 반드시 임무를 성공시키고 금동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 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하긴 저도 한 수사의 능력에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으니까요. 무슨 비결이라도 있으시다면, 제게도 알려주시지요? 5천만 선원석 정도는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안심한 주현양은 열정적으로 물었다.
“비결은요. 그저 운이 좋았던 것이죠.”
한립의 대답에 주현양은 티 나게 실망했다.
“주 수사, 저는 약속한 대로 현산종에 보제령 하나를 얻어다 드렸습니다. 제 요구조건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무양 수사께서 한 수사가 연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미 물건을 보내주셨습니다만, 보제령을 확보한 다음에 드릴 수 있을 겁니다.”
“좋습니다. 7일 후에 이야기하시죠.”
한립과 주현양은 웃으며 이야기를 마쳤다.
* * *
7일 뒤, 한립은 현산종 사람들을 따라 구원관 산문으로 올랐다.
구원관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한립은 사람들을 따라가면서 암암리에 구원관 내부를 살폈다. 진작 남안이 상세한 정보를 알려주고 구원관 지도까지 주었기에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다.
구원관은 방대한 면적을 차지하고 외관과 내관 두 부분으로 나뉘었는데, 남안의 지위가 그리 높지 않아 주로 외관에서 활동했기에 내관 지도는 완전하지 못했다.
눈앞의 외관 풍경이 남안이 그려준 지도와 일치하자 한립은 훨씬 안심이 되었다.
* * *
산 중턱 거대 궁전 앞에 이른 그들은 구원각(九元閣)이라는 세 글자를 볼 수 있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안내한 구원관 수사가 그들을 대전 안으로 이끌었다.
바깥에서 볼 때는 그리 넓지 않았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터무니없이 넓어 공간법칙이 함유된 재료와 수단으로 지은 건물 같았다.
안에는 다른 종문 사람들도 와있어서 현산종 사람들은 낯이 익은 이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대회에서 실력 발휘를 해서인지 몇몇은 먼저 다가와 말을 걸었고, 한립은 진작 ‘자신’과 그들이 어떤 관계인지 알아두었기에 자연스럽게 응대했다.
반 시진 뒤, 12개의 종문이 모두 도착하고 종소리가 울렸다.
장내가 엄숙해진 가운데 봉천선사, 순균진인, 육천풍, 곽연, 천성존자 등이 안쪽에서 걸어 나왔다.
순균진인 뒤로 구원관 장로 몇이 따라왔는데 적몽이 보이지 않아 한립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봉천선사, 순균관주를 뵙습니다.”
“모두 일어나세요. 오늘은 보제령을 수여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비무에서 승리한 수사들은 앞으로 나서시지요.”
다들 예를 올리자, 순균진인이 미소를 띠고 말했다.
한립 등 12명의 승자들이 순균진인과 봉천선사 앞에 일렬로 섰다.
순균진인이 옆으로 비켜서고 봉천선사가 앞으로 나서서 허공을 향해 포권을 했다.
“보제령을 청합니다.”
그의 목소리에 허공에 요란한 금빛이 어려 네모난 금색 보석함으로 바뀌었다.
봉천선사는 보석함을 향해 목례를 한 뒤 손을 저어 그 안의 고풍스럽게 생긴 영패 12개를 모두에게 보였다.
대전 안 사람들이 영패를 보고 격동했다.
한립도 다른 이들을 따라 영패에서 시선을 못 떼는 척했지만 사실 별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목적은 금동을 구하는 것이지 보제령이 아니었다.
지금 자신의 실력에 구원관에 들어가는 것은 맨몸으로 호랑이 굴에 뛰어드는 것과 같았기에 윤회전이 실력 발휘를 할 때 함께 움직이는 게 최선이었다.
한립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봉천선사가 12개의 영패를 보석함에서 불러내 나눠주었다.
영패를 받은 한립은 묵직한 중량감과 서늘한 촉감을 느끼면서 그 안의 기이한 기운을 감지했다.
“보제령은 지존 대인께서 직접 제련하신 물건이니, 보제연에 참석하기 전까지 잘 보관하게.”
시간도조가 직접?
봉천선사가 하는 말에 한립은 영패를 자세히 살피려다가 그냥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요지승경(瑤池勝境)에서 개최될 보제연에는 보제령 하나로 3인까지 입장할 수 있으니, 그 안에서 어떤 수확을 얻게 될지는 각자의 운을 봐야겠지.”
봉천선사는 이렇게 말하며 물러섰다.
후오오-!
그 순간 느닷없이 괴수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전해졌다.
구원각 장로들의 표정이 변하고, 순균진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곁의 키 작고 뚱뚱한 수염 노인에게 무슨 일이냐는 눈짓을 보냈다.
수염 노인은 두 손가락을 펴들고 두 눈을 부릅떴다가 답했다.
“영수산(靈獸山)쪽 우리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벽안기린(碧眼麒麟)이 놀라 우리를 뚫고 나와 난동을 부리고 있다고 합니다.”
“대라급 영수인 벽안기린이면 길을 잘 들여 항상 온순하지 않았는가. 갑자기 난동이라니? 산양장로는 뭐 하고 있단 말인가.”
순균진인이 담담히 물었다.
그리 큰일이라 생각하지 않는 표정으로 질책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관주께 아룁니다. 산양 장로는 하계 산원계에 태을 초기 흉수가 나타나 창생을 위협한다는 소식에 급히 내려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뚱뚱한 장로가 공손히 답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깥에서 잡다한 영수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뚱뚱한 장로는 급히 사정을 알아보고 조금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관주, 영수산의 다른 영수 우리들도 벽안기린이 망가트리는 바람에 일흔여 마리의 영수들이 달아났답니다. 영수산을 벗어난 영수 중 두 마리가 가화원(稼禾園)으로 뛰어들어 모용 장로가 제때 막지 못했으면 심어 놓은 영초들이 상할 뻔 했다고 하더군요.”
“귀빈들을 모셔놓고 이런 일로 접대에 소홀할 수 없지. 뇌균 사형에게 소식을 전해 대신 처리하게 하게.”
“예.”
순균진인의 명에 뚱뚱한 장로가 눈을 감고 연락을 취했다.
“작은 사고가 있는 모양이에요. 손님을 모셔놓고 부족한 모습을 보이는군요.”
순균진인이 봉천선사 등에게 웃으며 양해를 구했다.
“괜찮습니다. 영수가 달아났으면 잡아 오면 그만이지요.”
봉천선사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하하, 별일도 아닌 것을요.”
천성존자 등도 웃음 지었다. 그러나 보제령을 받으러 온 종문 사람들은 나서서 말할 처지가 아니었기에 조용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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