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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143화 (1,900/2,000)

2143화. 선공

*

대회 셋째 날.

한립은 현산종 사람들을 따라 대회장으로 돌아왔다.

마지막 날이다 보니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더 많았고, 반원형 관람석에는 순균진인을 비롯한 다섯 명 외에 적몽이 앉아 있었다.

그녀를 본 한립은 마음에 걸렸다.

그녀와 얼마 전에 붙어 정말 조심하지 않으면 들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각 종문 수사들은 나와 3회전 대전 상대를 뽑아주십시오.”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고 있을 때 주관 장로가 말했다.

“상 사제, 이제 마지막 경기일세! 사제만 믿고 있겠네.”

눈을 뜬 한립이 일어서자 주현양이 따라 일어나 정중히 말했다.

이번 경기만 이기면 보제령이 손에 들어온다.

“걱정하지 마세요, 사형.”

한립의 자신 있는 미소에 주현양도 마음을 놓았다.

24개의 구슬들이 고공으로 날아올랐다가 한립 등 남은 참가자들 위로 떨어졌다.

이번에 한립이 받은 건 8번 구슬이었다.

가벼운 웃음소리와 함께 걸어오는 사람을 돌아보니 사공건이 17번 구슬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한립은 살짝 얼굴을 구겼다 폈다.

“제길, 사공건이라니!”

관중석의 주현양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한립도 대라경이라지만 상척의 전투방식을 모방해서만 싸워야 해서 제 실력을 거의 발휘하지 못했다.

대라가 되어 명성을 날린 지 오래인 사공건은 앞선 두 경기를 가뿐하게 이기고 3회전에 올라온 것이었다.

“허허, 상 수사의 운도 다했나 봅니다. 마지막 비무에서 사공건이 걸리다니요.”

옆에서 조원래가 조롱했지만 주현양은 코웃음을 치고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이제 남은 사람은 24명, 12개 비무대에서 동시에 비무를 진행할 수 있었다.

한립과 사공건이 ‘미(未)’자 무대로 올라갔다.

“이야, 고양봉 봉주까지 직접 나서다니. 낯짝이 두꺼운 것으로는 따라올 사람이 없는 자입니다.”

관중석 천성존자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문인은 참석할 수 없다는 규정도 없지 않습니까? 우리 같이 수행을 쌓는 사람들에게 앞날이 중요하지, 체면을 따진다고 실리를 포기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요.”

곽연이 말했다.

현산종, 고양봉 등 종문들은 대외적으로는 독자적으로 활동했지만 암암리에 일월맹, 백조산 등 거대 세력과 연관이 되어 있었다.

현산종은 일월맹과 관계가 좋은 편이었고, 고양봉은 백조산과 가까웠다.

“모두 그만 하세요. 제가 볼 때 현산종 상척의 실력이 남달라 꼭 사공건에게 지란 법도 없을 듯합니다.”

순균진인이 둘을 말렸다.

“그래요? 순균 관주께서 볼 때는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곁의 금원선궁 궁주 육천풍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순균진인은 그의 웃음 속에 숨겨진 칼날을 읽어내고 속으로 욕을 했다.

말이 상척과 사공건의 싸움이지, 실제로는 일월맹과 백조산의 기 싸움인데 여기서 누구를 고르든 한쪽 세력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었다.

“둘 다 강해 승부를 점치기 힘들군요. 제가 예측을 해봐야 대단한 통찰력을 지닌 육 궁주의 옥허신목(玉虛神目)보다는 정확하지 못할 테고요. 이 자리에서 봉천선사와 적몽 수사만이 안목으로는 육 궁주의 상대가 될 텐데, 그 질문은 제가 드려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순균진인은 하하 웃으며 상황을 모면하려 했고, 봉천선사가 그 말을 듣고 아니라고 하면서도 뿌듯해했다.

“제 옥허목이 순균 관주의 삼재망기술(三才望氣術)에 비하려고요. 고견을 듣고 싶으니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육천풍이 하하 웃음 지었다.

“저는 아직 안목이 부족합니다. 그보다 봉천선사와 적몽 수사의 의견을 듣고 싶군요.”

“저 둘의 실력은 비범하고, 다른 참가자들도 전투력이 상당해요. 천정에서 힘써 기른 수사들과 비교해도 빠지지 않겠습니다.”

봉천선사가 비무대의 12명을 훑고 중요한 판단은 미루었다.

“과찬이십니다. 만역의 주인인 천정에 비해서 금원선역 수사들이 부족함이 많지요.”

순균진인이 웃으며 겸손히 말했다.

“천정 휘하의 수사들도 강하지만 자원이 풍부한 금원선역이 훌륭한 수사들을 키워낸 것도 당연하겠죠. 저들도 천정을 위해 힘써야 할 텐데 말이에요.”

적몽이 유유히 하는 말에 다들 표정이 달라져 입을 다물었다.

“적몽 수사,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천정 직할은 아니더라도 천정과 봉천선사의 뜻에 따르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어떤 분부든 목숨을 걸고 수행할 것이고요.”

순균진인이 정색하며 말했고, 다른 이들도 분분히 천정을 존중하는 뜻을 표했다.

“농담입니다. 다들 뭘 그리 정색을 하고 그러세요?”

적몽은 입을 가리고 깔깔 웃음 지었다.

다른 사람들도 따라 웃자 어색하던 분위기가 풀렸다.

* * *

‘미’자 비무대 위.

다른 무대는 벌써 쾅쾅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한립과 사공건이 마주 보고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상 수사, 몇 해 못 본 사이에 실력이 많이도 느셨습니다. 축하할 일이에요. 이전 두 비무에서는 제 실력을 다 쓰지 않으신 거겠지요?”

“사공 장문인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실력으로 논한다면 수사도 본 실력을 숨기고 계시던데, 갑자기 강력한 공격을 해서 제가 속수무책으로 당하길 기대하고 계신 건 아니겠지요?”

사공건의 물음에 한립이 담담히 말했다. 눈을 가늘게 뜬 사공건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말 한번 잘하십니다. 실력도 말솜씨처럼 뛰어난지 확인해 볼까요?”

사공건이 소매를 펄럭여 5, 60가닥의 푸른 빛을 내뿜었다. 영기가 흘러넘치는 비검들이었다.

흐릿하게 사라진 한립은 발밑에 커다란 구멍을 뚫고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걸 본 사공건이 표정이 변해 암녹색 종을 던졌다. 종이 빙글빙글 돌며 커다랗게 변해 녹색 광채로 보호막을 드리웠다.

고풍스러운 문양이 각인된 거대한 종은 강력한 방어 보물로 보였다.

암녹색 거대 종이 나타난 뒤 사공건 뒤로 파동이 일고 금색 주먹이 나타났다.

댕!

암녹색 종 표면의 주술문자들이 마구 흔들리면서 보호막이 흩어졌다. 거대한 종조차 종이처럼 찢겨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사공건은 화들짝 놀라 빠르게 물러섰고, 구백여 개의 현규를 밝힌 한립은 또 다른 금색 주먹을 뻗으며 쫓아갔다.

허공에 집채만 한 별빛 거대 주먹이 나타나 사공건을 후려쳤다.

공간이 허물어지는 충격에 사공건은 수직으로 추락해 바닥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다.

싸늘한 얼굴의 한립은 구백여 현규를 최대한 밝혀 두 손을 교차했다.

사공건이 몸을 가누기 전, 두 별빛 거대 손이 나타나 그를 내리쳤다.

한립의 잇단 공격은 전광석화처럼 빠르고, 그 위력은 또 산이라도 허물 것 같아 사공건은 반격할 틈을 찾지 못했다.

대라 초기 최고봉인 사공건을 상대로 비무를 오래 끌면 이기기는 하더라도 신분이 노출될 것 같아 이런 수를 쓴 것이었다.

너무 빠르게 비무가 진행되어 구경하던 이들은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고, 반원형 관중석의 순균진인은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다.

한립을 보는 적몽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다들 표정이 제각각인데 천성존자는 얼굴이 밝고, 곽연은 반대로 표정이 어두워졌다.

무대 위의 사공건은 이전의 우아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별빛 거대 손이 박수를 치듯 그를 짓이기고 있어 체내의 경맥이 뒤엉키고 선령력을 끌어올리기도 힘들었다.

이를 꽉 깨문 그가 피부에서 푸른 주술문자들을 내뿜었다.

주술문자들이 푸른 장막을 이루어 두 손바닥을 밀어내고 푸른빛과 금빛이 격렬하게 충돌해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비무를 관리하는 수사들이 서둘러 술법을 펼쳐 인근 금제를 안정시키려 노력했다.

푸른 장막은 몇 초 버티지 못하고 터졌지만 사공건은 그걸 기회 삼아 몸을 회복하고 녹색 영역을 퍼트렸다.

영역 안에서 수많은 녹색 나무들이 자라나 별빛 거대 손들을 가시처럼 찔렀다. 나무에 어린 요사스러운 녹색 빛은 나무 법칙이었다.

푸푸푹!

별빛 거대 손들이 급격히 빛을 잃고 소실되었다.

마치 역량을 흡수당한 것 같은 모습에 한립이 얼굴을 굳히고 공격을 멈추었다. 눈앞의 나무 영역은 뭔가 이상해서 함부로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저 나무 속성 법칙이 좀 특이합니다.”

관중석에서 순균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척의 현수 공법이 매섭기는 해도 그래봤자 수도 공법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곽연의 얼굴에도 득의양양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거야 비무가 끝나 봐야 알 일입니다.”

천성존자가 담담히 말했다.

관중석 끝에서 주현양이 두 주먹을 쥐고 긴장해 있었다.

“상 수사, 날 아주 시원하게 패던데. 이제 내 차례겠지요?”

사공건은 서늘한 얼굴로 수결을 맺었다.

무대 위 천지원기가 녹색 영역으로 급격히 빨려 들어가 영역 안의 거대한 나무들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한립에게 달려들도록 했다.

한립은 몸을 돌리며 마구 주먹질을 해서 수많은 주먹 허상으로 사방팔방을 공격했다.

후후후훅!

주먹 허상들이 달려드는 녹색 거대 나무들을 때려 터트리고 있었다.

영역의 속성을 빠르게 파악한 한립은 주먹에서 성신지력을 빼서 역량을 흡수당하지는 않으면서 물리적인 힘으로 나무들을 부수는 중이었다.

사공건은 당황하지 않고 계속해서 영역에 녹색 나무가 자라게 했다.

동시에 수십 개의 푸른 비검들이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며 검빛을 푸른 실로 만들어 터트렸다.

한립을 향해 폭우처럼 푸른 빛들이 쏟아졌다.

그 속의 한립은 길게 숨을 들이마셔 배를 불룩하게 만든 다음 목의 수십 개의 현규에서 번득 빛을 번쩍였다.

“크아앙!”

그의 괴성이 하얀 음파로 변해 만개의 음파 창을 품고 푸른 빛들을 산산조각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영역의 나무들도 휩쓸려 터져나갔다.

무대와 바깥을 격리하는 금제가 주변 수사들의 노력에도 갈라져 금이 가고 있었다.

방금 한립이 펼친 <천살진옥공>의 진옥후(鎭獄喉) 신통은 산악거원 변신 후에 쓸 수 있는 금강후보다 위력이 강했고, 천살진옥공을 대성하면서 쓸 수 있게 된 신통이라 다른 데서 쓴 적도 없었다.

반원형 관중석의 순균진인이 말없이 손을 들었다.

그의 손을 떠난 금빛이 무대의 금제에 스며들어 황금빛을 내며 견고하게 변했다.

무대 위 사공건은 음파의 위력에 안색이 안 좋아졌다.

하지만 금방 평정심을 회복한 그는 두 어깨를 털어 대량의 녹색 안개를 무럭무럭 뿜어냈다.

녹색 안개를 품은 영역의 나무들이 금속처럼 반질반질하게 광택이 일어 한립의 주먹 허상으로도 부수기가 어려워졌다.

주먹 허상으로 수십 장 거리의 나무들을 없애던 한립은 녹색 거대 나무들이 부쩍 가까워진 것을 보았다.

그는 속으로 탄식했다. 역시 단숨에 해치우지 못하니 이런 성가신 일이 생기지 않는가.

생각 끝에 그는 양손에 검은 거검을 꺼내 들었다.

거검은 그의 키보다 커 서늘하게 빛났고, 표면에 거대한 용이 1마리씩 새겨져 성신진법을 휘감고 있었다.

구천운철(九天隕鐵)을 제련해 만든 진짜 상척의 무기 흑룡검(黑龍劍)이었다.

기합을 넣은 한립은 흑룡검 두 자루를 든 채 성신지력을 폭발시켰다. 주먹 허상들보다 훨씬 파괴력이 강한 검빛들이 퍼져나갔다.

“크아앙!”

한립은 사공건을 향해 두 번째로 진옥후를 내질렀다.

하얀 음파가 이번에는 퍼지지 않고 하얀 비단처럼 주르륵 풀리며 사공건을 향해 날아갔다.

지나는 곳의 나무들이 썩은 나무처럼 퍽퍽 흩어져 길게 통로가 뚫리고 있었고, 검은 그림자로 변한 한립이 그 뒤를 따르면서 번개처럼 접근했다.

흠칫 놀란 사공건이 합장을 하고 수많은 녹색 주술문자들을 일으켰다.

“가라!”

녹색 빛이 나무들에게 뛰어들어 한데 엉켰다.

촤악!

수십 장 크기의 녹색 거인이 만들어져 출렁출렁 나무 법칙 파동을 발산했다. 키와 비슷한 청록색 장도를 든 나무 거인이 그걸로 하얀 음파를 내리쳤다.

장도가 노한 파도처럼 달려들던 하얀 음파를 가르고 한립까지 베려 들었다.

쿠쿠쿵!

영역의 힘이 녹색 거인의 움직임에 이끌리듯 한립을 덮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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