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2140화 (1,897/2,000)
  • 2140화. 이심전심(以心傳心)

    *

    노인이 가고 주현양은 한립을 방 안으로 들인 다음 바로 손을 저어 은색 빛의 문을 불러냈다.

    말없이 그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낯선 밀실 안에 도착했다.

    “방금 본 주 장로는 금원선궁에서 제 곁에 심어 놓은 첩자입니다. 그래서 이런 연극을 한 것이니, 이상하게 생각지 마세요.”

    “염탐꾼들 때문에 주 종주께서 활동하시기 불편하시겠습니다.”

    주현양이 포권을 해보이자 한립이 미소지었다.

    “불편은요. 주 장로가 행동거지가 조심스럽기는 해도 머리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라 괜찮습니다. 이번 상부에서 내려온 지령대로 준비를 마쳤고요.”

    “교삼 수사에게 구체적인 내용을 듣지 못했습니다. 이곳으로 와서 주 종주의 안배대로 따르면 된다고 하더군요.”

    “하하, 저도 교삼 수사에게 따로 들은 말은 없습니다. 오히려 모든 걸 한 수사의 뜻에 따르고 저는 협조만 하면 된다고 했고요.”

    “제가 할 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천정이 오백만 년에 한 번 개최하는 보제연은 선계의 수많은 수사를 초대해 보제도과를 나누는 날입니다. 보통은 초대를 받은 사람만 참석할 수 있었는데 이렇게 인원수만 제한하고 자유롭게 참석자를 선발할 수 있게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요.”

    “과거에는 이렇지 않았다고요? 이렇게 바뀐 이유도 아십니까?”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윤회전 입장에서는 나쁜 일이 아니지요. 어쨌듯 대금원선역에 할당된 100개의 보제령 중 절반은 구원관과 백조산이, 남은 것에서 또 절반은 금원선궁과 일월맹이 가져가 다른 종문들은 12개를 두고 겨뤄야 합니다. 그중 하나는 반드시 수사가 따와야 하고요.”

    주현양이 고개를 저으며 설명했다.

    “어떤 세력들이 참가하며 실력은 어느 정도 됩니까?”

    “일월맹이 금원선역 중소 종문 대부분을 아우르기에 그들은 일월맹에 할당된 보제령 갯수에서 알아서 나눠 가질 겁니다. 나머지 12자리를 두고 경쟁을 할 종문이 못해도 96곳은 되겠지요.”

    “변수가 없다면 3연승은 해야 자격을 얻을 수 있겠군요. 보제연에 참석하기 위해 각 종문에서 최고의 실력자가 선발대회에 나올 테고요.”

    한립이 미간을 좁혔다.

    “그렇습니다. 다행인 건 각 종문의 조사급 장로나 장문인들은 체면 때문이라도 참가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겁니다. 몇몇 종문들은 보제도과를 위해 모든 걸 무릅쓰고 종주급이 나설 수도 있지만요.”

    “하하, 왠지 그럴 거라 짐작이 가는 사람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맞습니다, 우리 현산종과 적대 관계인 고양봉(孤陽峰) 봉주 사공건이라면 그러고도 남거든요. 음험한 소인배라 체면이고 뭐고 못할 일이 없는 자입니다! 예전에는 자기 외아들을 대신해 복수한다면서 우리 현산종의 걸출한 인재를 암살한 적도 있어요. 그러고는 고양봉에 숨어 나오지 않았고요. 우리가 어쩔 수 없이 하산에서 수행하는 고양봉 제자 수백 명을 추격하여 죽였는데도 얼굴을 비추지 않더군요.”

    주현양이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씩씩거렸다.

    “그자의 수행은 어떻습니까?”

    “예전에는 대라 초기였는데 폐관수련을 오래 했으니 삼시 중 하나라도 베어냈는지 모르지요. 초기일 때도 동급 수사들보다 실력이 있었으니 절대 얕볼 수 없는 자입니다. 선발대회에서는 사공건과 마주치지 않는 것이 최선일 테고요.”

    한립의 질문에 주현양이 진지하게 답했다.

    “추첨을 통해 상대를 정하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괜찮으시면 그자에 대한 세세한 정보를 수집해 알려주세요. 대회에서 싸우게 될 때를 대비해야겠습니다. 그 밖에 제가 주의해야 할 인물이 누가 있겠습니까?”

    “청회림(靑悔林)의 낙원산, 무극산(無極山) 조백로, 천유호(天幽湖) 자락선자……. 이런 이들도 만만치 않습니다. 종문을 대표해 나설 가능성이 크고요. 그들의 정보도 정리해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주현양은 십여 명의 이름을 줄줄 나열했다.

    “감사합니다.”

    “한 수사는 이번에 제 사제인 상척의 신분으로 대회에 참가하게 될 겁니다. 늘 바깥을 떠돌아다니며 살아와서 종문 안에서도 상척의 얼굴을 본 사람이 얼마 없고, 현수 출신으로 종문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공법도 얼마 익히지 않고 연체공법으로 태을 후기까지 이른 인물이지요. 다만 상척의 신분으로 출전을 하면 선가 술법은 사용해서는 안 될 겁니다.”

    주현양은 걱정스럽게 여기던 부분을 언급했다.

    “현수라고요? 하하……. 마음에 쏙 드는 신분입니다.”

    그 말에 한립은 교삼이 자신을 왜 여기로 보냈는지 이해가 되었다.

    “설마 한 수사도 현수 출신입니까?”

    주현양의 놀란 얼굴을 보고 한립은 천살진옥공을 운용해서 구백여 개의 현규를 밝혔다.

    “이런, 연체술을 이 정도까지 익히셨을 줄이야! 제 사제도 수사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겠습니다.”

    주현양은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한립이 그를 너무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 현규를 다 밝히지 않았다는 것은 몰랐을 것이다.

    “별말씀을요.”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상척 사제, 나와보게.”

    얼굴을 푼 주현양이 누군가를 불렀다.

    밀실 안쪽 다른 방에서 수척하게 생긴, 바람이라도 세게 불면 쓰러질 것 같은 청년이 걸어 나왔다. 힘을 쓰기보다는 서책이나 읽는 게 어울리는 외모였는데, 그를 보고 누가 현수 출신인 줄 알겠는가?

    “사형을 뵙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한 수사.”

    청년이 방으로 들어와 공수했다.

    “현수공법을 완전히 갈무리하기까지 각고의 노력을 하셨겠습니다. 대단하십니다.”

    한립도 마주 인사를 하며 칭찬했다.

    “수사께서 한눈에 그걸 알아채신 걸 보면, 제가 그만큼 갈 길이 멀다는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유약해 보이는 청년, 상척이 눈을 빛냈다.

    “겸손하시군요.”

    “한 수사, 선발대회까지 한 달이 남아 있으니. 그동안 상척 사제의 공법이나 특성을 눈에 익혀 다른 사람들의 눈을 속일 정도로는 배워놔야 할 겁니다. 윤회전 가면을 어떻게 쓰면 되는지는 아시고요?”

    주현양이 물었다.

    “교삼 수사에게 배웠습니다.”

    “다행이군요. 시간이 빠듯하니 바로 시작하시지요.”

    한립이 상척을 쳐다보자, 상척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를 좀 하겠습니다.”

    미안함을 표한 한립은 양손으로 수결을 맺고 주술을 외웠다. 잘생긴 소년의 얼굴이 흐릿하게 변해 진짜 얼굴에 쓴 검은 가면이 드러났다.

    가면의 주술문자들이 빛을 발하고 진득한 검은 안개가 빠져나와 상척의 발밑으로 흘러내렸다.

    상척은 일순 긴장한 듯했으나 움직이지 않고 검은 안개에 휩싸였다.

    반 각이 지나 상척을 감싼 검은 안개가 한립의 몸속으로 들어가고, 한립의 외형에 급격히 변화가 생겼다.

    눈앞의 두 ‘상척’을 꼼꼼하게 훑은 주현양이 눈을 크게 떴다.

    방금 적잖은 선령력을 빼앗긴 실제 상척은 기운이 어지러워, 오히려 한립이 더 진짜 같았다.

    “윤회전에서 제작한 최고의 가면답습니다. 외양은 물론 기운까지 똑같아요.”

    상척도 한립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절묘합니다. 우리 현선종 장로들 앞에 데려다 놓아도 아무도 가짜인 줄 모를 거예요.”

    주현양이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상 수사, 이제 수사의 공법에 대해 일러주시지요.”

    한립은 달라진 외모에 적응하며 동작이나 표정까지 상척과 비슷하게 따라 했다.

    * * *

    한 달은 금방 지나갔다.

    그날 아침 구원성 안의 거의 모든 이들이 구원산 아래로 몰려들었다.

    보제연 참석자를 결정할 선발대회가 오늘 구원관 산문 바깥에서 진행되기 때문이었다.

    한립도 상척의 얼굴을 하고 주현양 및 다른 현산종 장로들과 구원산으로 가고 있었다.

    거의 평생을 떠돌며 산 상척이라도 장로 한둘과는 안면이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한립은 말투며 사소한 동작까지 상척을 그대로 따라 해서 정체를 들키지 않았다.

    구원산 아래 이른 일행은 구름이 산 정상을 가린 거대한 산맥을 쳐다보았다.

    푸른 산맥을 하얀 구름이 짙게 뒤덮고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광채가 어른거렸다. 산맥 전체를 보호하는 운해(雲海) 금제였다.

    또한 산문과 가까운 산봉우리 위에서 폭포가 쏟아져 무지개가 드리우고 멀리서 새소리와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니 선경이 따로 없었다.

    산문 앞 수백 리에 이르는 거대한 방원형 광장에는 벌써 사람 키 높이의 연무장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연무장들은 각각 진법으로 구획이 되어 있고 수많은 관중이 바닥과 고공에 빼곡하게 자리를 잡고 대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한편 한립 무리는 구원관 제자의 안내를 따라 정해진 통로를 통해 산문 쪽 반원형 단 위에 올라섰다.

    옥을 깎아 만든 3층으로 된 거대한 패루(牌樓)가 산수화와 같은 녹음과 어우러져 녹색으로 빛났고, 그 위에 구원성경(九元勝境)이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패루 뒤로 구불구불하게 난 산길이 구름 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반원형 단 위에 준비된 자리에는 바깥처럼 사람들이 가득 앉아 십여 개의 연무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현산종 사람들은 중앙과는 거리가 있는 좌측으로 안내받았고, 종주 주현양은 인근의 다른 장문인들과 인사를 나눈 다음 자리를 잡았다.

    “바깥을 떠돌던 상척 장로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만날 기회가 없어 아쉬웠는데 어느 분이신지요?”

    백발노인이 몸을 기울여 현산종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주현양이 준 자료에 있어 한립도 그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무극산 산주 조원래였다.

    이번에 무극산에서 출전하는 태을 후기 수사인 조백로가 그와 같은 항렬의 동생이었고, 얼음 속성 법칙의 힘을 쓴다고 했다.

    “상 사제. 조 산주께서 얼굴을 익히고 싶다고 하시니, 나와 인사를 하게.”

    주현양이 웃으며 한립을 불렀다.

    “조 산주를 뵙습니다.”

    앞으로 나선 한립은 조원래를 향해 예를 올렸다.

    수척해 보이는 한립을 아래위로 훑은 조원래는 하얀 비단 장포를 걸친 청년과 시선을 교환했다. 둘이서 전음으로 뭐라 떠들고 있는 것 같았다.

    한립이 백의 청년이 조백로임을 알아보고 눈인사를 했다.

    “뛰어난 수행을 티를 내지 않고 기운이 바르니 주 종주가 대회에 내보낼 만한 인재입니다. 상척 수사가 나섰으니, 현산종이 보제령을 받을 가능성이 크겠습니다.”

    조원래는 훌륭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줄줄 칭찬을 늘어놓았다.

    썩 괜찮은 인사치레였지만 한립은 그가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주현양도 그걸 알고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조백로가 이 ‘상척’을 만나 싸우게 되면 좋은 구경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그가 조원래와 서로를 추켜세우며 실속 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대나무 무늬가 들어간 푸른 장삼을 걸친 우아한 사내가 단정하게 차려입은 수려한 여인들을 데리고, 단 위로 올라와 다른 쪽 좌석으로 걸어갔다.

    그들을 본 주현양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조원래도 그들을 보고는 싫어하는 기색이 스쳤다.

    “아주… 자기는 군자입네 하고 차려입은 걸 좀 보십시오. 사공건 저자가 위선자인걸 금원선역에 모르는 이가 누구라고 저러고 다닌답니까?”

    조원래는 목소리를 낮출 생각도 않고 투덜거렸다.

    사공건이 자리에 앉아 곁의 여인이 건네주는 차를 받아들고 있다가 그 말을 듣고 이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한립이 보기에도 겉보기에는 고상해 보이는 사내였다.

    눈썹을 끌어올린 사공건은 조원래와 주현양에게 도발하듯 입꼬리를 올려주고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아니, 저놈 대제자는 물론 고양봉 장로들도 대동 안 하고 여제자들만 끌고 나온 겁니까?”

    조원래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직접 나서서 까마득히 어린 후배들과 경쟁을 하겠다는 뜻이겠지요.”

    예상하고 있던 주현양이 곁눈질을 했다.

    “아니, 그게 말이…….”

    조원래는 말문이 턱 막혔다.

    선발대회에 종주급이 나오면 안 된다는 규칙은 없지만, 체면이 있지 보통 장문인이 직접 나서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만에 하나 지기라도 하면 종문 전체의 체면이 깎이는 일이었다.

    대앵-

    이때 구원산 산문 안쪽에서 맑은 종소리가 들려왔다.

    산골짜기마다 종소리가 웅웅 메아리치고 고공에서 무지개가 내려와 반원형 단 위로 떨어졌다.

    무지개가 걷히고 다섯 사람이 등장했다.

    선발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온 여러 종문의 수사들이 의복을 정돈하고 일어서서 그들을 향해 예를 올렸다.

    한립도 주변 사람들을 따라 하며 새로 등장한 이들을 살폈다.

    중앙에 선 금색 관을 쓰고 천관(天官) 복색을 한 이는 구원관 관주 순균도인이었고, 그 오른쪽에 평범한 체구와 용모를 지닌 온화한 인상의 사내는 금원선궁 궁주 육천풍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각자 데려온 이들은 처음 보았지만 예전에 주현양에게 들은 이야기로 대략 신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왼쪽에 뽀얗게 살이 오른 배불뚝이 자포 노인은 일월맹 맹주 천성존자, 오른쪽에 머리를 높게 올려 묶고 이마에 하얀 잔머리를 드리운 퍽 준수하게 생긴 길쭉한 사내는 백조산 산주 곽연이었다.

    흑산선역 야학곡에서 알고 지내던 경양상인 말로는 곽연 산주가 벌써 백조산의 5대 산주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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