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8화. 구원성(九元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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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은 손을 저어 회포 노인을 기절시키고 바닥에 쓰러진 그를 놔둔 채 암홍색 공간을 둘러보았다.
“비석들이 함유한 법칙의 힘이 괴이해요. 죽은 사람도 부활시키다니 무슨 법칙일까요?”
제혼이 눈을 빛내면서 광장의 비석에 관심을 보였다.
“대도삼천(大道三千)이라 하나 이 넓은 세상에 얼마나 많은 법칙이 있을지 누가 알겠더냐. 그런데 네가 관심을 보였던 이가 손중산이었느냐?”
한립이 탄식하다 화제를 돌렸다.
“아뇨, 이 여인이에요.”
제혼이 홍의 부인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한립도 시선을 돌렸다.
“보통 사람과 달리 혼백에 죽음의 기운이 깃들어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상하게 생각한 건데 알고 보니 이 비석들 때문이었어요.”
“보물의 성질이 음한해서 나와는 맞지 않으니 네게 맡기마. 이곳에 흥미가 있으면 연구해 보면서 손중산도 잘 감시하거라.”
한립은 암홍색 빛을 제혼의 몸속에 넣어주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제혼이 기뻐하며 인사를 했다.
한립은 공간을 떠나 여몽한 등과 마주치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제혼도 금방 돌아와 그의 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손에 든 염라정을 연구했다.
바깥을 보니 금강풍이 서서히 걷혀 일월신주도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10년이 흘러, 드디어 일월신주가 구원성에 도착했다.
창가에 선 한립은 전방의 거대한 성을 보면서 그간 수많은 웅장한 산맥과 성을 보아왔음에도 깜짝 놀랐다.
구원성의 첫인상은 ‘크다’였다. 성벽의 높이만 수만 장이라 하늘을 찌를 듯 솟은 거대한 산에 뒤지지 않았고 마치 하늘과 땅을 이으며 앞을 가로막은 벽 같았다.
성의 면적이 얼마나 광활한지 시선 끝까지 성벽이 이어지고 성안에 몇 개의 산맥이 들어가 있었다.
수많은 거리를 오가는 구름과 같은 수사들을 보고 있자니 이렇게 번화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립이 숨을 고르고 자리에 앉았을 때, 일월신주가 성의 안쪽으로 하강했다.
반 시진 뒤, 높은 탑을 나와 거리 인파 속에 섞인 그는 종적을 감추었다.
한편 탑 안에 있던 백의 여승 여몽한도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누군가를 찾는 듯 이리저리 오가는 사람을 살피다 실망한 눈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이미 혼잡한 길을 걷고 있는 한립은 처음 와본 곳인데도 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교삼이 구원성 상황을 미리 알려주었고, 머물 곳을 미리 일러주었기 때문이었다.
길 양옆으로 들어선 규모 있는 상점들에 각양각색의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선기, 단약, 재료 등등 없는 게 없어 유금성보다 더 상품들이 화려했다.
게다가 거리는 무슨 특별한 날을 준비하는 듯 등을 달고 다양하게 꾸며져 있었다.
눈을 빛낸 한립은 굳이 무슨 일인지 알아보지 않고 걸음을 서둘렀다.
이제 구원관 영역에 들어섰으니 곳곳에 보는 눈이 깔려 있을 터였다. 최대한 빨리 안전한 곳으로 가서 임무를 듣는 게 우선이었다.
반나절 뒤, 구원성 구석의 작은 골목으로 들어간 한립은 대문이 잠긴 작은 객잔을 찾아 돌로 만든 사자상을 보고 미소 지었다.
텅텅!
“누구십니까?”
문을 두드리자 나른한 목소리만 들려오고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주인장, 빈방이 있으면 묵어갑시다.”
한립은 대답을 하면서도 여전히 고른 박자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침묵이 이어지다 한립이 문을 두드리는 동작을 멈추었을 때, 문이 열렸다.
“방을 구하신다고요?”
열예닐곱 살의 짧은 삼베 옷을 입은 소년이 안에서 머리를 내밀고 그를 훑었다.
“그래, 구원성에서 작은 장사를 시작해 보려고 하니 반년은 머물 것이다.”
한립은 소년을 향해 암어(暗語)를 읊었다.
“아, 그러시군요. 안으로 드시지요.”
소년이 비켜서서 한립을 안으로 들인 뒤 얼른 문을 잠갔다.
객잔 안으로 발을 들이자 특수한 공간으로 전송이 되었다.
한립은 소년을 따라 어느 방으로 안내되었는데, 그곳에는 부티 나는 중년인이 장부를 놓고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주인님, 손님이 묵어가신답니다.”
소년이 말했다.
“성이 어떻게 되시고, 얼마나 머물다 가시렵니까?”
복스럽게 통통하게 살이 오른 장궤가 손을 저어 소년을 보내고 방문을 닫았다.
한립을 보는 시선이 냉담했다.
“한립입니다. 여기서 반년 동안 머물 예정입니다.”
곧장 이름을 밝힌 한립은 이전에 쓰던 붉은 가면을 꺼내 보인 다음 다시 넣어 두었다.
전부 서로를 확인하는 암어들이었다.
“한 선배님이셨군요! 교삼 선배님께서 언질을 해두셨습니다.”
통통한 장궤가 이제야 활짝 웃으며 살갑게 말했다.
“교삼 수사는 어디 있지?”
“교삼 선배님은 여기 안 계시고 소식만 전해오셨습니다. 이곳에서 쉬고 계시면 빠른 시일 내로 만나 구체적인 임무 내용을 알려주겠다 하셨습니다.”
“그럼 한동안 기다려야 한단 말이군.”
한립이 슬쩍 미간을 좁혔다가 폈다.
“이리로 저를 따라 오십시오.”
통통한 장궤가 그를 안내해 안쪽으로 향했다.
여러 골목을 꺾어 푸른 기와와 벽돌로 지은 깔끔한 집에 이르렀다.
“먼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을 텐데, 이곳에서 쉬시면 됩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종이를 불러다 시키시면 되고요.”
장궤가 공손히 말하고 떠나려는데 한립이 그를 불렀다.
“물을 것이 있네.”
“무엇이든 말씀하시면 말씀 올리겠습니다.”
“성에 들어와 보니 등이 걸려 있고 오색천으로 건물들을 장식해 두었던데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
“아, 모르십니까? 천정 선사가 구원관에 와서 보제성연에 갈 36명을 뽑을 예정이라 다들 그걸 준비하고 있는 겁니다.”
통통한 장궤는 뜻밖이라는 듯 답했다.
“그간 수련에 매진하느라 바깥소식을 듣지 못했네. 보제성연은 무엇인지 알겠고, 36명을 선발한다는 것은 무슨 소리지?”
“보제성연은 천정 제일의 성대한 행사라서 진선계 수사라면 참석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다들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라 천정에서 인원수를 할당하는데, 각 거대 선역 안에서도 선발이 되려고 내부 세력들끼리 경쟁이 치열하지요. 대금원선역에서는 이번에 36명이 참석할 수 있기에 많은 세력이 구원성에 모여서 경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천정 선사는 언제쯤 구원성에 도착하지?”
여기까지 들은 한립은 뭔가 알 것 같아 물었다.
“구체적인 날짜는 모르지만, 곧 도착할 것입니다.”
통통한 장궤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관련된 이야기를 몇 가지 더 묻고 보내주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 습관적으로 몇 겹의 금제를 친 그는 자리에 앉아 침음했다.
30년 내로 구원성에 와달라고 했던 교삼의 말이나 천정 선사의 도착 시기 등을 가늠하면 윤회전의 이번 임무는 십중팔구 보제연 참석자에 들기 위한 시합과 관련이 있을 터였다.
“금동, 조금만 더 기다리거라. 내 반드시 널 구해줄 것이니.”
고개를 저은 한립은 구원성 안쪽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 * *
몇 달 뒤, 이른 아침.
구원성 사람들은 해가 뜨기도 전에 생활을 시작해 거리마다 행인들이 가득했다.
어깨를 스치며 바삐 움직이는 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떠들기도 하면서 무언가를 기다렸다.
사람들 속에서 잘생긴 백의 소년이 걸으며 들리는 대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윤회전 검은 가면을 써서 기운과 용모를 바꾼 한립이었다.
“중토선역에서 온다는 선사 말입니다. 따르는 시종들이 수없이 많고 심지어 금원선궁의 궁주까지 대동해서 온다더군요. 구경할 맛이 나겠어요.”
허름한 옷을 걸친 노인이 말했다.
“천정에서 나온 선사이니 신분이 특수할 밖에요. 그러니 구원관 관주 순균진인이 직접 마중을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선사가 가지고 올 보제령(菩提令)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수사들이 어디 한 둘입니까.”
화려한 복색의 중년인이 옆에서 대꾸했다.
“보제연에 참석할 수 있는 신분증명이니 누군들 마다하겠습니까.”
또 다른 사람이 부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한립은 사람들이 떠드는 것을 들으며 멈추지 않고 걸었다.
“저기! 왔습니다!”
누군가 소리치자, 거리 안 사람들이 잡담을 멈추고 고공을 올려다보았다.
백의 소년의 행색을 한 한립도 걸음을 멈추고 군중들 틈에서 고개를 들었다.
태양과 같은 눈부신 금빛이 떠올라 주위로 일곱 빛깔 광채를 흩날려 하늘의 구름이 곱게 물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던 성안 사람들의 목이 뻣뻣해질 때쯤, 불경 소리 같기도 하고 악기 소리 같기도 한 음률이 들리고 화려한 빛이 성 밖에서 성벽을 뛰어넘어 성안으로 이어졌다.
금제 진법이 백 장 너비의 통로를 열어 그 화려한 금빛을 받아들였다.
성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통로에 오채색 연꽃 허상들이 떠올라 진한 향기를 뿜고 있었다.
쿠쿠쿠…….
금색 마갑을 걸친 거대 기린 8마리가 쿵쿵쿵쿵 오채색 연꽃 다리를 건너고 그 뒤로 길게 금갑 기병들이 커다란 수레를 호위하며 뒤따랐다.
백옥 난간이 세워진 수레 위에는 금관으로 머리를 올려묶은 각진 얼굴의 키가 큰 사내가 서 있었다. 눈이 가늘고 길며, 콧대는 높으면서 입술은 가늘어 거만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다지 호감 가는 인상은 아니라 얼굴만 봐두고 걸음을 돌리려던 한립이 그 옆의 두 사람을 보고 미미하게 표정이 달라졌다.
평범한 체격에 평범한 얼굴을 가진 사내는 선궁 복색을 하고 있어 사람들이 떠들던 대금원선역 선궁 궁주 육천풍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옆의 붉은 치마를 입고, 호리호리한 몸집에 절색의 얼굴을 한 여인은 딱 봐도 적몽이었다.
‘적몽이 왜?’
그가 놀라고 있을 때 성의 안쪽에서 십여 개의 광채가 날아들어 오색 꽃길에 내려섰다.
도착한 선사 무리에 비하면 훨씬 평범한 등장이었지만 구원성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환호를 했다.
맨 앞에 선 암녹색 도포를 입고 머리에 연꽃관을 쓴 사내가 구원관 관주 순균진인일 게 분명했다. 특별할 것 없는 각진 얼굴에 눈코입도 평범한데 꼿꼿한 자세와 표정에서 위엄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뒤에 두 명의 도인이 서 있었는데, 마르고 광대뼈가 돌출된 턱에 산양 수염을 기른 노인은 눈빛이 매우 맑았고 오래된 회백색 도포를 입었음에도 속세를 초월한 고인의 풍모가 느껴졌다.
또 다른 마흔 줄의 우람한 사내는 화려한 보라색 도포를 입고 머리에 특별한 장신구 없이 상투를 틀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분명한데 표정이 딱딱한 게 불가의 천왕상(天王像)이 따로 없었다.
순균진인 뒤에 선 두 사람의 신분을 추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구원관 두 관주일 것이다.
회백색 도포를 입은 노인은 양균자, 보라색 도포를 입은 중년인은 뇌균진인이라 불렸다.
그 뒤로 공손한 자세를 한 십여 명의 제자들이 뒤따랐는데, 한립도 한 명은 아는 얼굴이었다. 그를 쫓아 죽이려 했던 묘법선존이었다.
묘법도 선사들 틈에서 적몽을 찾아 서로 째려보고 있었다. 한립을 놓친 일로 둘 사이의 원한이 생긴 게 분명했다.
“봉천선사(鳳天仙使)께서 먼 걸음을 해주셨습니다. 멀리까지 배웅을 나가지 못해 실례를 범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요.”
순균진인이 낭랑한 목소리로 의례적인 인사를 건넸다.
“아닙니다, 순균진인.”
* * *
멀리서 둘이 한담을 나누는 것을 보고 한립은 사람들을 틈을 벗어나 객잔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자신이 머무는 집 앞에 키가 큰 청년과 백의 경장 차림에 삿갓으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서 있었다.
“용오 수사, 안에 들어가 차 한 잔 마실 수 있을까요?”
삿갓을 쓴 여인이 빙긋 웃으며 말을 걸었다.
“교삼 수사?”
한립은 확인하듯 물었다.
“천정 선사도 도착했고, 이제 임무 내용을 알려드릴 때라 찾아왔습니다.”
“들어가시죠.”
한립이 손을 저어 금제를 풀고 두 사람을 안으로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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