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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137화 (1,894/2,000)
  • 2137화. 인과(因果)

    *

    백의 여승 등은 눈 깜짝할 사이에 암홍색 공간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2, 30리 정도의 공간은 바닥과 하늘이 전부 암홍색었고,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음산한 기운과 압력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들이 서있는 광장에는 9개의 암홍색 비석이 서서 진법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중 세 개는 이미 부서져 있었다.

    또한 광장 주변으로 들어선 높다란 건물들도 거의 무너져 내리고 바닥에는 움푹움푹 파인 자국이 많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것 같았다.

    네 사람은 놀라 서로 싸우기보다는 일단 주변을 살폈다.

    이때 회포 노인의 시체가 부풀어 올라 사람 크기의 핏덩이로 변했는데 녹색 반점이 드문드문 보이는 게 무척 끔찍했다.

    삼각 눈 사내를 포함한 네 사람이 놀라 뒤로 물러섰고, 핏덩어리는 빙글빙글 돌며 삼각 눈 사내를 쫓았다.

    기겁한 사내가 입에서 검은 방패를 불러내 앞을 막았는데 커다란 핏덩어리가 부딪쳐 그를 멀리까지 튕겨냈다.

    이어 삼각 눈 사내가 몸을 가누려 할 때 등 뒤에서 아홉 자루의 금색 장도가 날아들어 그를 노렸다. 매미 날개처럼 얇은 장도들의 칼자루에는 머리 둘 달린 요수가 새겨져 있었다.

    당황한 사내가 어깨를 털어 녹색 장막을 펼쳐 아홉 줄기의 금색 장도를 막았지만, 장도의 칼자루에 있던 머리 둘 달린 짐승 조각이 입을 벌려 금색 음파를 방출했다.

    음파에 둘러싸인 삼각 눈 사내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멈춰서 녹색 장막을 찢고 달려든 장도들에 의해 조각이 났다.

    이때 잔해 속에서 녹색 빛이 달아나는데, 사내의 원영이었다.

    순간, 허공에 금색 손바닥이 나타나 녹색 빛덩이를 잡아챘다. 흑포 청년이 손을 쓴 것이었다.

    “연암, 내게 이래라저래라 하더니 꼴좋구나. 내 네 혼백을 음화(陰火)로 백 년 동안 달구어 죽느니만 못한 고통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흑포 청년은 녹색 원영을 손에 넣고 득의양양하게 웃어댔다.

    백의 여승은 흑포 청년의 흉악한 기세가 싫었지만 감정을 억누르고 홍의 부인과 같이 다가갔다.

    “철 수사, 연암은 탐욕 때문에 손 수사를 기습해 죽였으니 죽어 마땅합니다. 허나 이 공간이 괴이하니 일단 함께 조사를 해보시지요.”

    여승이 말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얼른 표정을 바로 한 흑포 청년은 녹색 원영과 금색 장도 아홉 자루를 거두고, 삼각 눈 사내의 잔해에서 저물법기와 녹색 뱀 모양 검을 거두려 했다.

    그때 광장에서 암홍색 빛이 일어 삼각 눈 사내의 잔해와 녹색 검이 사라졌다.

    “연암은 죽어 마땅하나 이곳을 조사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두 분 다 얌전히 구는 게 좋을 거예요.”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회포 노인이 번득 나타나 웃음 지었다.

    “어떻게……. 연암에게 당하신 것 아니었습니까?”

    흑포 청년이 노인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두 분?”

    백의 여승은 노인의 말을 곱씹고 안색이 달라졌다. 동시에 그녀의 옆에서 하얀빛이 날아들었으나 미리 알아차려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흑포 청년은 등 뒤에서 날아든 미세한 붉은빛을 피하지 못하고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두 사람 뒤에서 홍의 부인이 무표정하게 손을 거두고 있었다.

    “둘이 한 패였군요!”

    백의 여승이 수백 장 거리를 두고 물러나 눈을 치켜떴다.

    “하하, 제법 똑똑하십니다. 허나 여기까지 들어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회포 노인이 담담히 웃고 손을 저었다.

    그러자 광장에 남은 여섯 개의 비석에서 수많은 암홍색 광선이 튀어나와 그물을 이루고 백의 여승을 덮쳤다.

    또한 비석 중 하나에서 거대한 얼굴이 떠올랐는데, 그 흉측한 모습이 악귀나 다름없었다.

    악귀 얼굴은 입에서 붉은빛을 내뿜어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던 흑포 청년을 감쌌다.

    이에 백의 여승이 그걸 보고 즉시 광장 바깥으로 벗어나며 보라색 뇌전을 일으켜 영역으로 자신의 몸을 보호했다.

    콰릉!

    영역에서 보라색 뱀과 같은 뇌전들이 암홍색 그물에 달려들어 틈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물이 찢어져 벌어진 순간, 백의 여승은 영역을 빠져나와 그물을 벗어나려 했다.

    “영역을 수련하다니! 허나 그런다고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눈썹을 끌어올린 회포 노인은 한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쿠쿵.

    암홍색 공간에 같은 색깔의 산봉우리 허상이 응결되어 무시무시한 압력으로 뇌전 영역을 부수고 백의 여승을 내리눌러 광장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이어서 그녀가 떨어진 곳에 있던 비석에 거대한 악귀 얼굴이 떠올라 입에서 붉은빛을 뿜어 백의 여승을 제압했다.

    이제 백의 여승도 흑포 청년처럼 꼼짝하지 못하게 되었다.

    회포 노인이 서서히 공중에서 내려와 홍의 부인 뒤에 섰다.

    그러나 홍의 여인은 표정이 없었다. 아니, 표정이 없는 게 아니라 마치 괴뢰처럼 아예 감정이 없는 듯했다.

    “손중산. 모든 게 당신의 음모였군요. 우리를 이 공간 안으로 끌어들인 이유가 뭡니까!”

    백의 여승은 그런 흥의 여인을 힐끗 보고 소리쳤다.

    회포 노인은 대답하지 않고 손을 저어 검은 저물반지와 녹색 검을 불러들였다. 삼각 눈 사내의 물건이었다.

    백의 여승과 흑포 청년이 지니고 있던 저물법기들도 노인에게로 날아들었다.

    “하하, 좋았어!”

    저물법기 안을 살핀 노인의 안색이 훤해졌다.

    “보물을 노리고 우리를 해친 겁니까? 일월신주는 단속이 엄격하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선박에 오를 때 모든 선실의 수사들의 신분과 인원수를 확인해 갔어요. 도착지에서 수가 맞지 않으면 일월맹에서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백의 여승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흑포 청년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흐흐흐, 괜한 걱정을 다 하십니다. 난 당신들을 죽이지 않고 이 구구염라대진(九九閻羅大陣)의 귀령(鬼靈)으로 만들 겁니다. 이렇게 이전과 똑같이 돌아다닐 수 있게요.”

    회포 노인은 음산하게 웃으며 수결을 맺었다.

    또 다른 비석에서 떠오른 악귀 얼굴 조각이 핏빛으로 삼각 눈 사내의 잔해를 빨아들여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러다 토해낸 삼각 눈 사내는 이전과 용모와 기운이 똑같았지만 홍의 부인처럼 표정이 멍했다.

    “어떻습니까? 이래도 일월맹에서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럴 수가…….”

    백의 여승과 흑포 청년의 얼굴에 절망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오, 그런 기묘한 수도 있다니 재미있구나.”

    갑자기 광장에 또 다른 목소리가 울렸다.

    “누구냐!”

    화들짝 놀란 회포 노인이 주위를 살피며 부지런히 수결을 맺었는데, 공간은 전혀 달라지지 않고 백의 여승과 흑포 청년을 제압하고 있던 붉은빛만 사라졌다.

    광장의 비석들도 빛을 잃고 암홍색 산봉우리도 사라져 공간 전체가 고요해졌다.

    서둘러 몸을 일으킨 백의 여승과 흑포 청년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염라정(閻羅鼎)은 내 것인데 어찌! 완벽하게 제련을 마친 보물을 빼앗아 갈 수 있단 말인가!”

    얼굴을 일그러트린 노인이 괴성을 질렀다. 양손으로 아무리 열심히 수결을 맺어도 공간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 보물의 이름이 염라정이란 말이지?”

    공중에 한립과 제혼이 나타나 천천히 내려왔다.

    “네놈들! 감히 염라정을 빼앗으려 들어? 죽여버리겠다!”

    회포 노인은 두 눈이 핏빛으로 물들어 양손을 움직였다.

    쿠앙!

    수십 개의 눈부신 보광이 노인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품계가 높은 선기와 강력한 부적 그리고 불 구슬 같은 소모성 보물들이 한립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제혼이 앞으로 나서서 몸에서 눈을 찌를 듯한 검은빛을 방출해 회포 노인의 모든 선기와 부적들을 감싸 버렸다.

    검은빛 속에서 선기와 부적들이 늪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대다 제혼의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

    “다,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얼굴이 하얗게 질린 노인도 겁을 먹었다.

    백의 여승과 흑포 청년도 한립과 제혼의 헤아릴 수 없는 수행을 느끼고 안색이 달라졌다.

    “네 수행으로 이렇게 많은 선기와 보물들을 모으려면 얼마나 많은 이들을 속여 죽였을지 알만 하구나.”

    한립이 회포 노인을 보고 담담히 말했다.

    회포 노인은 사시나무 떨듯이 몸을 달달 떨었다.

    “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선배님들.”

    여승과 청년이 앞으로 나서 허리를 굽혔다.

    한립은 흑포 청년은 대충 손을 저어 공간에서 내보내 버렸다.

    그걸 본 여승은 살짝 몸을 떨었지만 더욱 공경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수행이 높을수록 성격이 괴팍한 이들이 많아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었다.

    “이름이 무엇이지?”

    한립은 백의 여승 앞으로 걸어가 질문했다.

    “선배님께 아룁니다. 저는 여몽한이라 합니다.”

    여몽한이 사실대로 답했다.

    “풍기는 기운으로 보아 하계에서 비승한 수사겠구나. 어디에서 비승을 하였지?”

    “예, 저는 하계 출신입니다. 영환계에서 왔고요.”

    한립의 말에 멈칫한 여몽한은 고분고분 답했다.

    “과연 영환계 출신이었어. 그곳 특유의 기운이 느껴져서 그럴 줄 알았다. 나도 영환계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니 우리가 인연이 있구나. 체내에 뇌원(雷元)의 힘이 느껴지는데 익힌 공법이 고명하지 않아 아쉽구나. 마침 내게 뇌전 속성의 공법이 있으니 영환계 출신의 인연을 생각해 내주마. 열심히 익혀 보거라.”

    미소를 지은 한립은 보라색 옥간을 꺼내 여몽한에게 주었다.

    옥간에 적힌 것은 <오뢰정법진경>에 적힌 뇌전 공법 중 하나였다.

    여몽한은 당황스러웠지만 보라색 옥간을 받아들었다.

    눈앞의 사내가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다고 느꼈지만 어디서 보았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한립은 더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손을 저어 바깥으로 내보내 주었다.

    “주인님 벗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어째서 그냥 보내세요?”

    제혼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지금 내가 정체를 밝히면 여몽한에게도 좋을 것이 없고, 내게도 좋을 것이 없다. 이렇게 영환계에서의 인과(因果)를 매듭짓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한립이 고개를 저으며 하는 말에 제혼이 미소를 지었다.

    한립은 회포 노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선배님…….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귀신이 홀렸는지 욕심 때문에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지만, 염라정을 바칠 테니 제발 다르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회포 노인은 털썩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네게 보복을 하려는 것이 아니니 걱정할 것 없다. 네가 벌인 일들은 나와 무관하니까. 그보다 몇 가지 질문에 착실히 답해주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한립이 무슨 정의의 사도도 아니고, 그 역시 사람을 죽이고 그 물건을 챙긴 일이 적지 않았다.

    물론 전부 그에게 악의를 지니고 있거나 악행을 일삼는 자들이었고, 회포 노인처럼 오로지 욕심에 눈이 멀어 살생한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무엇이든 숨김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회포 노인이 기뻐하며 외쳤다.

    “염라정은 어디서 난 것이지?”

    “천상선역(天殤仙域)의 어느 유적 안에서 찾은 것입니다.”

    “천상선역?”

    한립도 웬만한 선계의 선역들에 대해 알았지만 그런 이름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

    “작은 선역으로 영력도 희박해서 천정도 그곳으로 통하는 전송진을 설치하지 않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곳이지요. 저도 원수에게 쫓겨 달아나다가 공간균열에 휘말려 거기까지 갔던 것이고요.”

    “나름 솔직하구나.”

    한립이 열심히 이야기하는 회포 노인을 쳐다보았다.

    “선배님께서 물으시는데 어찌 거짓으로 답하겠습니까.”

    “솥 표면에 염라부(閻羅府)라는 지명을 보았다. 아는 것이 있더냐?”

    한립이 원기를 소모해가며 진언전령법(眞言轉靈法)까지 써서 강제로 염라정의 통제권을 빼앗은 것도 ‘염라부’라는 세 글자 때문이었다.

    시공간초월에서 돌아와 염라부의 소식을 알아보려고 애썼지만 자료를 찾을 수 없었는데 실마리를 발견한 것이다.

    “염라부요? 저는 처음 듣습니다. 아마 천상선역의 어느 지역이 아닐지요. 구유염라(九幽閻羅)라는 곳 가까이에 ‘염라’라는 말이 들어가는 지명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노인의 말에 한립이 미간을 좁히고 제혼을 보았다.

    제혼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착실히 답해주었으니, 약속을 지켜 목숨을 살려주겠다. 잠시 이곳에 머물다 나중에 나를 천상선역으로 데려다주면 널 풀어주마.”

    “감사합니다, 선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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