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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136화 (1,893/2,000)
  • 2136화. 재난

    *

    그렇게 18만 년 후.

    시간차공간이 흔들리다 어둑해졌다.

    금색 빛 구슬이 빠르게 줄어들어 한립이 나타났는데, 몸에서 반짝이는 금빛 선규들이 4백 6십여 개는 되었다.

    특별한 단약의 보조 없이도 18만 년을 수련한 끝에 선규 백 개를 더 뚫은 것이다.

    진언보륜이 변한 달이 떨어져 그의 앞에 떠올랐다. 마지막 도문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역시…….”

    시간도문이 다 꺼져서 시간차공간이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풀어진 거였다.

    계산해 보면 어림잡아 시간도문 하나가 백 년 정도 수련시간을 보장해 주는 듯했다. 그렇다면 시간도문을 늘려야 시간차공간 내의 수련시간도 늘릴 수 있을 것이다.

    때마침 제혼과 흰둥이도 깨어났다.

    흰둥이는 부친의 묵안비휴 혈맥의 힘을 전부 흡수해서 마치 순수한 인족 소년처럼 혈맥 기운을 흩날리지 않았고, 거의 대라 중기급으로 수행이 높아져 있었다.

    묵안비휴의 유일한 후계자였고 백택과의 관계도 친밀하니 백택이 그에게 다양한 수련자원을 보낸 것이었다.

    제혼도 기운이 강해졌지만 흰둥이보다는 못했다. 그래도 산혼귀적이 온전히 그녀의 기운과 어우러지는 것으로 보아 철저하게 연화를 마친 듯했다.

    한립도 귀기 어린 피리 소리에 가슴이 빠르게 뛰어 연신술을 발동하고서야 혼백파동을 억누를 수 있었다.

    정염동자도 수련을 마쳤는데, 잃었던 원기도 보충하고 이전보다 오히려 강해져 눈부신 불꽃을 머금고 있었다.

    “다들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한립은 제혼, 흰둥이 그리고 정염동자를 죽 훑고 미소 지었다.

    “주인님께서 이렇게 훌륭한 수련 공간을 마련해 주셨는데, 수련에 매진하지 않으면 죄송하잖아요.”

    제혼이 웃으며 답했다.

    “주인님, 그런데 왜 갑자기 술법을 멈추신 거예요?”

    흰둥이는 수련하던 비술이 중요한 고비에 이르렀던 터라 시간차공간이 사라진 게 많이 아쉬웠다.

    “시간차공간이 펼치기 쉽다고 무한정 펼칠 수 있는 줄 아느냐. 한동안은 다시 펼칠 수 없을 것이다.”

    시간도문도 빛을 잃어 천천히 회복해야 했다.

    한립은 고개를 돌려 광음천선대진 옆 선원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보았다.

    계당 장로를 죽여 그의 저물법기를 확인했는데, 산혼귀적을 낙찰받느라 다 써버렸는지 선원석이 몇 개 나오지 않았다.

    다시 시간차공간을 만들려면 도문도 회복하고 대량의 선원석도 구해야 했다.

    “바깥으로 나가면 단기간 내로 빠르게 성장할 순 없겠어요.”

    흰둥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주인님께서 힘들게 시간차공간을 펼쳐 수련을 도와주셨는데 감사를 드리지는 못할망정, 그렇게 불평하는 거야?”

    제혼이 산혼귀적으로 흰둥이의 머리를 통, 때렸다.

    귀곡성 같은 피리의 울림이 머릿속으로 흘러든 흰둥이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악!”

    혼백이 악귀에게 깨물린 것처럼 아파하며 흰둥이가 펄쩍 뛰며 소리쳤다.

    달려들어 앙갚음을 해주고 싶었지만 산혼귀적을 보니 선뜻 달려들 수도 없었다.

    “되었으니 그만하고, 화지공간에서 수행을 안정시키고 있거라. 난 나가서 바깥 상황을 살피마.”

    한립은 흰둥이와 제혼을 떼어놓고 화지공간을 떠났다.

    제혼이나 흰둥이 역시 서로 장난을 친 것이지 서로 붙을 생각은 없었기에 한립이 나가자 각자 떨어져 앉아 수련을 재개했다.

    화지공간 밖, 방안은 도병들이 지키고 있어 이상은 없어 보였다.

    고개를 끄덕인 한립이 창밖을 내다보자 아래로 금색 산맥이 찬란하게 펼쳐졌다. 산맥의 풀과 나무도 전부 금색이었다.

    지형만을 살펴서는 일월신주가 어디까지 날아온 것인지 알 수 없어 방문을 열고 나섰다.

    곧 방으로 돌아온 그는 일월신주가 벌써 절반 넘는 거리를 돌파해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한 기간 내에 구원성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한립은 어차피 화지공간에 시간차공간도 없는 터라 그냥 방 안 침상에 앉아 옥간과 서책들을 꺼내 들었다.

    유금성에서 수집한 대금원선역과 구원관에 대한 정보였다. 중요한 정보보다는 사소한 내용이라도 알아두어 나쁠 것이 없었다.

    “그 백의 여인은 어찌 되었을까?”

    서책을 들춰보던 그는 문득 옆방의 비구니를 떠올렸다.

    수련하느라 바빠 잊고 있었던 것이다.

    눈동자에 짙은 흑자색 빛을 드리운 그가 벽 너머를 쳐다보았다. 벽에도, 옆방에도 금제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그의 구유마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옆방 백의 비구니 등은 조용히 앉아 있어 아직은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은 것 같았다.

    한립은 상대가 여몽한이 맞는지 직접 물어 확인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이지?”

    남색빛이 반짝인 방 안 벽에 원형 금제가 떠올랐다.

    “5급 정도의 금강풍(金罡風)이 접근하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일월신주는 강력한 방어 금제를 보유하고 있으니 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으나, 방 안에서 머물며 바깥출입을 삼가길 바랍니다.”

    남색 진법 안에서 온화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금강풍이라…….”

    여러 경로로 대금원선역을 조사하며 알게 된 바로 대금원선역도 소금원선역처럼 금속 속성 원기가 매우 풍부했다.

    그래서 때때로 금속 속성 원기가 요동쳐 금강풍이라는 자연재해가 발생하는데 위력이 달라 그 등급을 1급에서 9급까지로 분류해 불렀다.

    5급 금강풍이면 꽤 강한 폭풍이었지만 일월신주가 버틸 만은 했다.

    곧 멀리서 쿠르릉 하는 소리가 전해졌다.

    창을 통해 하늘 끝에서 금색 선 같은 게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금색 폭풍은 산을 무너트리고 그 안의 토사와 바위를 휘감아 올려 기세등등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저게 금강풍이로구나.”

    한립이 신기하게 보고 있는데 일월신주 바깥에 두꺼운 남색 보호막이 생겨 선박을 보호했다. 보호막 곳곳에서 별 문양이 반짝이는 게 꼭 수사의 진극막 같기도 했다.

    이때 보호막을 두른 일월신주를 금색 폭풍이 덮쳐 선실도 크게 흔들리고 곳곳에서 놀란 수사들의 탄성이 들려왔다.

    일월신주는 주술문자를 밝게 빛내며 폭풍 속에서 균형을 찾았지만 속도는 이전보다 열 배 정도 느려졌다.

    한립은 의식을 퍼트려 금강풍을 살폈다.

    그때 화지공간의 빛의 문이 열리고 제혼이 방 안으로 날아들었다.

    “주인님, 바깥에서 사람들이 겁을 먹고 있는 게 느껴져서 나와 봤어요.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심각하게 묻던 제혼도 창밖의 금색 폭풍을 발견하고 놀란 기색을 보였다.

    “이곳 선역 특유의 재해인데, 일월신주가 금강풍을 만나 승객들이 놀란 것뿐이다.”

    “그랬군요.”

    “마침 잘 왔다. 네게 부탁할 것이 있으니 말이다. 옆방의 여수사가 내가 하계에서 알고 지냈던 사람인 것 같은데 세월이 많이 흘러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구나. 대신 확인해 줄 수 있겠느냐?”

    “그럼요. 누군데요?”

    한립의 부탁에 제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옷을 입은 여승이다.”

    “미인이네요. 친하셨나 봐요?”

    제혼은 의식으로 한립이 가리키는 방향을 살피고 입을 쭉 내밀었다.

    “벗이기는 했으나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가까운 사이였다면 네게 부탁할 것도 없이 알아보았겠지.”

    고개를 저은 한립이 웃어 보였다.

    “제가 알아볼게요.”

    미소를 지은 제혼이 수결을 맺어 미간에서 그윽한 빛을 분출하려다 멈칫했다.

    “왜 그러느냐?”

    “옆방 사람들, 좀 이상해요. 저 중에 1명이 특히 흥미롭고요.”

    “흥미롭다고?”

    “곧 무슨 짓을 하려는 것 같은데, 잠시 지켜볼까요? 확인은 나중에 해도 되잖아요.”

    제혼의 말에 한립도 흥미가 생겨 구유마동을 일으키고 옆방을 관찰했다.

    옆방에서도 수사들이 놀라 수련을 중단하고 사나운 폭풍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들 금선 수사라 지금 바깥에 던져지면 뼈도 추리지 못할 게 확실했다.

    폭풍이 금빛 바람의 칼날처럼 일월신주의 남색 보호막을 마구 베고 있었다.

    퍼퍼펑!

    보호막이 깨지지는 않아도 그 진동과 굉음 때문에 수행이 낮은 이들은 기혈이 어지러워져 낯빛이 좋지 않았다.

    백의 여승 등이 있는 방은 선박 벽에 가까워 특히 소리가 크게 울려서 방 안에 열댓 겹의 금제를 펼쳐 놓고 선기를 발동해 막는데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윽!

    회포 노인의 얼굴이 붉게 변하더니 피를 토했다.

    “손 수사, 괜찮으세요?”

    홍의 부인이 그걸 보고 서둘러 물었다.

    흑포 청년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살폈는데 백의 여승은 눈빛에 흔들림이 없었다.

    삼각 눈 사내가 회포 노인을 힐끗 보며 무시하는 눈빛을 보냈다.

    “괜찮습니다. 며칠 전 전투 중에 내상을 입은 터라 쉽게 기운이 어지러워진 듯싶습니다.”

    심호흡을 한 회포 노인이 손을 저었고, 홍의 부인과 흑포 청년도 안심했다.

    “금강풍이 오래 지속되면 다들 암암리에 내상을 입을 테니, 제가 공간선기를 발동해 음파를 막아 보겠습니다.”

    단약을 삼킨 회포 노인이 망설이다가 말했다.

    “공간선기요? 그럼 너무 좋지요. 저도 저 소리 때문에 괴롭던 참입니다.”

    홍의 부인이 찬성했다.

    “손 수사에게 방법이 있다면 도움을 주시길 청합니다.”

    흑포 청년도 고통스러운지 서둘러 동조했다.

    “근데 그 공간선기라는 것, 아무렇게나 발동할 수 있는 겁니까?”

    침상의 삼각 눈 사내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아, 사실 망가지기는 했어도 5품 선기라 발동을 하려면 모두가 힘을 모아주셔야 합니다. 원기를 꽤 허비해야 할 테고요. 네 분께서 도와주실 의향이 있으신지요?”

    회포 노인이 답했다.

    “원기를 소모하는 게 고통을 참고 앉아 있는 것보다야 낫겠지요.”

    눈 깊은 곳에 탐욕이 스친 삼각 눈 사내가 말했다.

    홍의 부인과 흑포 청년도 고개를 끄덕이는데 백의 여승만 아무 소리가 없었다.

    “여 선자께서는 어떠십니까?”

    회포 노인이 돌아보니 여승이 생각에 잠겼다.

    바깥의 금강풍이 더욱 세차게 불면서 선박을 울리는 소리도 커지고 그녀의 호흡도 가빠지고 있었다.

    “손 수사에게 모두를 편안하게 해줄 보물이 있다니, 저도 돕겠습니다.”

    여승의 목소리는 샘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처럼 맑고 듣기 좋았다.

    처음으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한립의 눈이 밝아졌다. 목소리도 여몽한과 똑같았다.

    “좋습니다, 시작하죠.”

    희색을 드러낸 회포 노인이 입에서 뿜어낸 건 암홍색 세발솥이었다.

    투박한 외형에 꽃과 벌레, 물고기 등 다양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남은 자리에는 오밀조밀 고대문자가 가득했다.

    한립도 세발솥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돌연 몸을 떤 그가 솥의 고대문자들을 뚫어지도록 바라보았다.

    “주인님?”

    제혼이 그의 이상을 감지하고 부르는데도 못 들은 것처럼 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회포 노인이 입에서 금빛을 뿜어 솥에 불어 넣자 암홍색 빛이 물처럼 서서히 퍼져나갔다.

    “다른 분들도 선령력을 불어넣어 주세요!”

    노인의 말에 홍의 부인 등이 각자의 선령력을 세발솥에 주입했다.

    웅!

    세발솥이 강한 흡입력을 발휘해 순식간에 그들의 선령력을 3할은 집어삼켰고 암홍색 빛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바깥에서 들려오던 시끄러운 소리가 사라지자 백의 여승 등의 얼굴도 편해졌다.

    “감사합니다.”

    회포 노인이 네 사람을 둘러보며 감사를 표하는데, 뱀 모양의 진녹색 검이 그의 배를 뚫고 나왔다.

    뱀 모양 검에서 녹색 빛이 솟구쳐 노인을 휘감는 중이었다.

    삽시간에 피부가 녹색으로 물든 노인은 그대로 쓰러져 숨을 쉬지 않았다.

    그 순간, 삼각 눈 사내가 세발솥 옆에 나타나 노란 거대 손으로 보물을 가로채려 했다.

    “뭐 하는 짓이냐!”

    흑포 청년이 분노해 소리쳤다.

    백의 여승과 홍의 부인도 놀라고 화가 났지만 말없이 그를 지켜보았다.

    냉소를 흘린 삼각 눈 사내는 그들을 상대하지 않고 세발솥을 거둬들이는 데만 집중했다.

    그 순간, 자욱하게 방을 감싸고 있던 암홍색 빛이 허물어지며 다섯 사람을 감싸고 신속히 솥 안으로 사라졌다.

    방 안에는 이제 덩그러니 세발솥만 떠있었다.

    그때, 파문이 일고 한립과 제혼이 나타났다.

    평정을 되찾은 한립은 암홍색 솥 표면의 고대문자들을 자세히 살폈다.

    “다들 안으로 빨려 들어간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나올 때까지 기다려볼까요?”

    제혼도 솥을 보다 물었다.

    한립은 말없이 묵묵히 있다가 입에서 푸른 화염을 뿜어 세발솥을 달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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