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4화. 검은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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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은 교삼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다고는 생각했지만 의식연계로 제혼의 의견을 구했다.
“제혼, 네가 보기에 사실인 것 같으냐?”
“주인님, 저 여인은 지금 허상에 불과해서 의식 파동을 감지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습니다.”
제혼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들렸다.
“임무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알아 오지는 못했지만, 한 수사를 이번 임무로 청한 게 저이니. 수사가 관심 있어 할 만 한 정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교삼은 한립의 유쾌하지 않은 표정을 보고 입을 열었다.
“어떤 정보 말입니까?”
“금동은 여전히 구원관에 남아 있고, 안전한 상태라는 정보입니다. 구원관 사람들은 보제연에서 시간도조 고혹금에게 선물로 바치기 위해 금동을 잡았는데, 아직 보제연까지는 시일이 남아 그때까지는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심지어 다른 선물들보다 눈에 띄기 위해 구원관에서 금동의 수행을 높이려 정성을 다하고 있다는 소식이에요.”
한립도 구원관이 금동을 잡아간 일을 알았지만 교삼이 안전하다고 확인을 해주니 안심이 되었다.
“상부에서 수사가 한 가지 일을 해주면 금동이 있는 곳과 어떻게 구할 수 있을지 알려준다고 했어요. 어떤 일인지는 저도 아직 듣지 못했고요.”
“저를 위해 교삼 수사가 애를 써주셨습니다.”
한립은 교삼의 말에 공수했다.
“한 수사도 이제 우리 윤회전 핵심성원인걸요. 윤회전이 음지에서 움직이기는 해도 자기 사람을 배신하지는 않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물론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도 윤회전에 들어가지 않았을 테고요.”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다행이네요.”
두 사람은 한담을 나누다 대화를 중단했다.
한립은 흰둥이와 제혼을 화지공간에서 불러내 붉은 가면 대신 검은 가면을 써보았다.
지켜보던 제혼과 흰둥이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의식으로도 한립의 기운을 감지할 수 없어서였다.
“윤회전이 대단하기는 하네요. 검은 가면이 둔천부보다 은신 효과가 강해요.”
흰둥이가 감탄했다.
한립은 자신의 상태에 적응하며 수결을 맺어 구불구불한 검은 수염이 난 사내로 변신했다.
“제혼, 네 원기를 좀 빌려줘야겠구나.”
손을 뻗어 제혼의 어깨를 잡은 한립이 제혼의 원기를 일부 흡수했다.
제혼은 거절하지 않고 그가 체내의 원기를 가져가게 두었다.
잠시 후, 눈을 감은 한립의 몸에 음침한 귀기가 어리면서 제혼과 기운이 똑같아졌다. 누가 보아도 귀도 공법을 익힌 수사로 볼 터였다.
“와…….”
흰둥이가 눈을 부릅떴고, 제혼도 놀라워했다.
“윤회전 검은 가면은 다른 사람의 원기를 흡수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위장할 수 있는 능력이 있구나. 단순히 기운을 감추고 외모를 바꾸는 것보다 훨씬 고명한 신통이야.”
한립이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더 안전하게 다닐 수 있겠어요. 저와 흰둥이는 그럴 수 없으니 화지공간 안으로 들어가 있을게요.”
“너희가 나를 도와 곡린과 남안을 살펴봐다오. 곡린은 육체는 강대하지만 의식이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니 제혼의 신통으로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한립은 전음으로 제혼에게 당부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주인님. 곡린에게서 눈을 떼지 않을게요.”
제혼이 전음으로 답했고, 흰둥이도 자신 있다는 듯 제 가슴을 탕탕 쳤다.
웃음 짓고 그들을 화지공간으로 들여보낸 한립이 유금성을 향해 날아올라 서쪽 입구로 들어섰다.
성안은 일월각 경매에 대해 떠들며 돌아다니는 수사들과 가끔 순찰하는 병사들을 제외하면 평온한 편이었다.
적몽 등과 싸우며 일으킨 소란이 여기까지 퍼지지 않고 일월맹에 의해 감춰진 듯했다.
유금성 번화가는 상점뿐이었고, 대부분 금색으로 화려하게 건물을 치장해 길거리 자체가 위풍당당했다.
일월맹이 구원관, 백조산, 대금원선궁 등 거대 세력들 사이에서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것은 겉만 화려하고 다른 세력에게 무해한 특성 때문일 터였다.
유금성의 면적이 상당해서 한립은 반나절을 날아서야 동쪽의 금색 대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월주행(日月舟行)’ 네 글자가 적힌 편액이 대문에 걸려 있었고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아 떠들썩했다.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서니 수백 장에 달하는 공간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안쪽으로는 수십 개의 입구가 있었는데 그 위쪽에 대금원선역 각지의 지명이 적혀 있었고, 구원성, 금원성, 백조성 등이 적힌 입구로 드나드는 이들이 가장 많았다.
지명을 훑은 한립은 바로 구원성 통로로 향했다.
일월주행은 일월맹 휘하의 운송 기구로, 일월맹에서 만든 특수한 선박인 일월비주(日月飛舟)로 화물과 손님을 날랐다. 해와 달 그리고 별의 힘을 끌어들여 쾌속으로 비행하는 선박은 대금원선역 곳곳의 주요성을 연결했다.
일월비주는 속도도 빠르고 전송진을 이용하는 것보다는 요금이 싸서 중소세력들이나 산수들이 선호하는 운송 수단이었다.
유금성에도 구원성과 직통으로 연결된 전송진법이 있었지만 선역 각지의 전송진은 천정이 장악하고 엄격히 관리해서 검은 가면을 썼더라도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일월비주의 속도로도 30년 안에 구원성에 도착하기에는 충분했다.
구원성이라 적힌 긴 통로를 빠져나가니 넓은 대청이 나왔다.
그곳에 마련된 좌석에는 적잖은 수사들이 앉아 있었고, 하늘색 일월맹 복장을 한 수사 두 명이 서 있었다.
그중 한 명이 한립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공수를 하고 나섰다.
“일월신주를 타고 구원성으로 가십니까?”
“그렇습니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필요한 관심을 끌지 않기 위해 수행을 금선 수준으로 낮춘 상태였다.
“매달 한 대씩 출발하는데 마침 다음 선박이 하루 뒤에 출발합니다.”
중년 수사가 웃음 지었다.
“좋군요. 비용은 얼마나 됩니까?”
“구원성으로 가시려면 저희와 같이 대선박 표를 나눠 구매하시는 게 어떨지요? 선원석을 많이 아낄 수 있을 겁니다.”
일월맹 중년 수사가 답하려는데 옆에서 네 명의 금선 수사들이 걸어왔다.
그중 회포 노인이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
나머지 셋 중 흑의 청년은 나이가 많아 봐야 스무살 정도 된 것같이 풋풋한 얼굴이었고, 옆에 홍의 여인은 굴곡진 몸매에 얼굴도 비교적 예쁘장했다.
마지막으로 상아색 승복을 입은 절색의 여승(女僧)은 머리를 높게 틀어 묵고 등 뒤로 새하얀 장검을 차고 있었다.
그들을 본 한립은 속으로 움찔했다. 어찌 된 일인지 흑의 청년을 제외하고 나머지 셋 다 눈에 익었다.
회포 노인과 홍의 여인은 한립이 오광뇌역에서 본 적이 있는 손중산, 묘 선자였다.
손중산이 묘 선자와 흑갑 추한을 버리고 홀로 달아난 일로 원한을 맺은 것으로 아는데 어쩌다 또 같이 붙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백의 여승은 영환계에서 알게 된 인족 여인 여몽한과 외모가 매우 비슷해 자연히 눈길이 갔다.
세월이 오래 지났고, 두 세계가 까마득히 먼 것을 알기에 여몽한과 여승이 동일인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백의 여승은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돌렸다.
“대선박표요?”
한립이 표정을 바로 하고 물었다.
“일월신주의 객실은 대, 중, 소로 나뉩니다. 대선박 표는 선원석 3천 개, 중선박 표는 선원석 2천 개, 소선박 표는 선원석 1천 개이지요. 우리 다섯 사람이 대선박표를 나눠 사면 선원석을 아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떠십니까?”
회포 노인이 웃는 낯으로 물었다.
한립이 들으면서 가만히 일월맹 중년 수사를 보니 그는 조용히 서서 이 ‘합석’을 말리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저는 조용한 것을 좋아해서 수사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 없겠군요.”
눈을 빛낸 한립이 거절했다. 회포 노인은 실망한 듯했지만 고개를 숙이고는 물러났다.
한립은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일월맹 중년 수사에게서 소선박표 한 장을 샀다.
어차피 하루가 남았다니 바깥에 돌아다닐 것 없이 다른 이들처럼 대청에 남아 좌정이나 할 생각이었다.
적몽 등 대라급과 싸우며 원기를 소모해서 시간이 있을 때 휴식을 취해두는 게 좋았다.
암암리에 공법을 운용하면서 그는 아까 다가왔던 네 사람, 특히 백의 여승을 살폈다. 여몽한과 얼굴과 기운이 비슷한데 정말 여몽한이 맞을까?
허나 영환계를 떠날 때 만해도 원영기에 이르지 못한 그녀가 평범한 자질에 어떻게 벌써 금선이 되었단 말인가.
류낙아가 수행이 맹진해 벌써 대라경에 이른 것은 그녀의 천부적인 재능에 만황진령 구미선호족의 혈맥 그리고 천호족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어서였다.
백의 여승은 일개 산수로, 선박을 이용할 뱃삯도 아까워서 다른 이들과 동승을 하는 마당에 어디 그런 재력이 있겠는가. 아마 여몽한과 비슷하게 생긴 다른 사람일지도 몰랐다.
회포 노인 등은 다른 수사들이 올 때마다 같이 동승을 하자며 말을 붙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대청으로 모여들었는데 대부분이 미리 배표를 사두고 시간이 되어 온 것이었다.
회포 노인 등은 예닐곱 사람에게 더 물어 겨우 동승할 사람을 구했는데 삼각형 눈매를 지닌 사납게 생긴 금선 사내였다.
의복이 추레하고 피부도 퍼석한 게 한눈에 보기에 산수였다.
다섯 사람을 모은 회포 노인 등은 앉아서 일월신주의 출발을 기다렸다.
반나절이 지나 대청 안이 가득 찼을 때 출발 시각이 되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저를 따라가시지요.”
두 일월맹 수사들이 대청의 깊은 곳으로 걸어갔다.
다른 사람들을 따라 우르르 또 다른 회랑으로 들어가니 거대한 광장이 나왔고, 그 위에 산만한 거대 선박이 달걀처럼 타원형의 모습을 하고 정박해 있었다.
‘이게 일월신주로구나. 생김새부터 독특하긴 하군.’
한립은 선박에 빼곡하게 새겨진 성신지법들을 보면서 적린공경 안에서 보았던 성신금제를 떠올렸다.
일월신주 안은 총 10층으로 나뉘어 각각 크고 작은 방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한립은 자신의 표에 적힌 대로 방을 찾아 들어갔는데, 딱 한 사람이 몸을 누일 만한 공간에 침상과 작은 탁자만 들어 있었다.
호사스러운 생활을 추구하는 편도 아니라 그냥 침상에 자리를 잡은 그는 의식을 퍼트려 주변을 살폈다.
벽마다 금제가 펼쳐져 있었지만, 그의 의식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음?”
공교롭게도 회포 노인 등 다섯 명이 머무는 큰 방이 바로 옆이었다.
그가 있는 작은 방보다는 넓어도 사람이 다섯이나 되다 보니까 공간이 넉넉하지 않았고, 침상도 하나 탁자와 의자도 하나씩뿐이었다.
“협소하기는 한데, 그럭저럭 잘 지내봅시다.”
회포 노인이 웃음 지었다.
백의 여승과 묘 선자는 좁은 실내를 보고 안색이 어두워졌다.
“침상이 하나니 여 선자와 묘 선자께서 그리 앉으세요. 우리 사내 셋은 알아서 쉬면 됩니다.”
흑의 청년이 백의 여승의 표정을 보고 말했다.
‘여 선자!’
한립이 그걸 듣고 있었다.
그런데 흑의 청년의 말을 들었음에도 삼각 눈 중년인은 말없이 침상으로 걸어가 먼저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당신…….”
흑의 청년이 인상을 굳혔다.
“돈은 똑같이 냈는데 먼저 앉는 사람이 임자이지요. 하하, 여인에게 잘 보이고 싶으면 그건 알아서 하세요. 저는 그런데 신경 쓸 생각 없으니.”
삼각 눈 중년인이 냉소하고 아예 침상에 드러누웠다.
흑의 청년은 속으로 화가 치밀었다. 가문 안에서 신분이 높은 그가 언제 이런 푸대접을 받아보았던가.
청년이 주먹을 불끈 쥐고 뭔가 하려는데 삼각 눈 중년인이 독사처럼 서늘한 눈길을 보았다.
순간 식은땀이 흐른 흑의 청년은 머리 위에 얼음물이 쏟아진 듯 놀라 잠자코 서 있었다.
“기왕 한 선실을 쓰게 된 것, 이것도 인연인데 귀하게 여깁시다. 임 수사께서 피곤하신 듯하니 쉬게 두고 우리는 바닥에 앉아 휴식이나 취하지요.”
회포 노인이 나서서 분위기를 풀었다.
흑의 청년은 씩씩거리다 그걸 기회 삼아 물러났고, 삼각 눈 중년인도 하하 웃고 누운 김에 눈을 감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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