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2133화 (1,890/2,000)
  • 2133화. 예외

    *

    유금성 바깥의 어느 산골짜기 안 지하 계곡.

    뇌진 전송술로 이동해온 한립 일행이 땅속 계곡 옆에 나타났다.

    “한 수사, 오늘 구해준 은혜는 잊지 않고 보답하겠습니다.”

    곡린은 그를 향해 포권을 해보였다.

    “이곳에서 수사를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나저나 어째서 천정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던 것입니까? 혹시 세월탑 일 때문입니까?”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긴 이야기하기 전에 싸우기 시작했고 이전에도 달리 들은 이야기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저들이 저를 잡으려던 게 어디 한두 번도 아니고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한립은 곡린의 대답을 듣고 생각하다 옆에서 넋을 잃고 선 남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남안 수사, 구원관 사람이 어째서 천정 무리와 함께 있던 겁니까?”

    “저는, 저는……. 오라버니를 구하려고…….”

    겨우 입을 연 남안이 참담한 얼굴로 말했다.

    “남원자를, 그게 무슨 말입니까?”

    “오라버니의 혼백 한 줄기가 남아 있어 종문으로 돌아가 어떻게든 구하려 해보았는데 전부 실패했습니다. 후에 계당 장로가 음혼법칙의 대가라는 소리에 방법이 있을까 하고 사정하러 찾아갔는데. 저들이 제가 세월탑에서 곡린 수사를 본 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기운을 기억하는 저를 이용한 겁니다.”

    한립의 물음에 한숨을 내쉰 남안이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 말들을 들은 곡린이 살기를 드러냈다.

    “천정이 어째서 곡린 수사를 잡으려 했는지는 압니까?”

    “저를 이용하려 했을 뿐 구체적인 계획이나 목적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한립의 질문에 남안은 고개를 저었다.

    “한 수사, 세월탑에서 만난 회양자 무리를 기억합니까?”

    갑자기 곡린이 세월탑 이야기를 꺼냈다.

    회양자란 말에 기억을 더듬어본 한립도 눈을 빛냈다.

    “저들이 이전과 마찬가지로, 수사의 몸에서 법칙 정사를 뽑아내기 위해 잡으려던 거란 뜻입니까?”

    “그게 맞는지 아닌지는 조사해 보면 알겠죠.”

    이때 제혼이 입을 열었다.

    “조사?”

    다들 무슨 말인가 해서 그녀를 돌아보는데, 제혼이 씩 웃고는 자신의 미간에 손을 댔다.

    닫혀 있는 눈에서 암흑색 빛이 흘러나와 붉은 사슬에 꽁꽁 감긴 잔혼을 내놓았다.

    계당 장로와 똑같이 생긴 잔혼이었다.

    “자폭하기 전, 악귀를 소환해 자신의 혼백을 잡아먹게 한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잔혼을 붙든 겁니까?”

    곡린이 신기해하며 물었다.

    “제 나름의 비법이 있죠.”

    제혼은 당당히 답했다. 더 캐묻지는 않았지만 곡린의 의혹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본체가 형수(刑獸)인 아이입니다. 음혼법칙에 능하니 우리에게는 어려운 일이 제혼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지요.”

    옆에서 한립이 미소를 머금고 설명해주었다.

    남안이 그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뜨고 제혼을 보았다. 그녀가 내비친 변화를 한립도 보았지만 별말 않고 제혼에게 말했다.

    “조사해 보거라.”

    “네!”

    제혼은 발버둥 치는 잔혼에 핏빛 수정실을 주입했다.

    잠시 후 미간을 찌푸린 제혼이 핏빛 수정실을 감은 제3의 눈 안으로 되돌렸다.

    계당 장로 잔혼도 핏빛을 번뜩인 후 사라졌다.

    “어때요?”

    흰둥이가 얼른 다가섰다.

    “자폭하기 전에 대부분 기억을 미리 지워두었어요. 남은 기억도 온전치 않아 목적을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곡린 수사만 노린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무슨 뜻이더냐?”

    한립이 물었다.

    “기억에 따르면 천정은 특수한 법칙의 힘을 지닌 수사들을 잡아들이고 있는데. 곡린은 보기 드문 탄서법칙(呑噬法則)을 익혀 그들의 목표가 된 것 같아요.”

    “특수한 법칙을 익힌 수사들을 잡아 뭘 하려는 것이지?”

    “그런 기억은 전혀 없었어요. 계당 장로도 왜인지는 모르고 시키는 대로 따른 것 같아요.”

    한립은 침음했다.

    제혼이 검은 저물탁을 꺼내 연화를 시켜 내용물을 살폈다.

    “하하! 결국 제 것이 되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저물탁에서 검은 피를 꺼낸 제혼은 신이 나서 외쳤다.

    “한 수사, 제혼 수사 제발 저를 좀 도와주세요…….”

    그 순간 남안이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제혼은 깜짝 놀라 피했는데, 한립은 그럴 줄 알았기에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제혼 수사가 음혼비술로 남원자를 살려주기를 바라고 있는 겁니까?”

    한립은 엎드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제혼 수사, 저를 도와주세요……. 어떤 대가든 치를 것이니 도와주세요.”

    남안은 고개도 들지 않고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제혼이 그 소릴 듣고 한립을 올려다보았다. 한립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전음으로 몇 마디를 건넸다.

    “……도와줄 수는 있는데 저도 처음 해보는 술법이라 성공할지는 몰라요.”

    생각을 정리한 제혼이 적당한 말을 골라 답했다.

    고개를 들어 제혼을 올려다보는 눈물 젖은 남안의 눈에 망설임이 어렸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제혼 수사께서 시도를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저는 감지덕지예요. 일이 성사될지 아닐지는 하늘에 뜻에 맡겨야겠지요.”

    “알겠어요. 그렇게까지 말하는 데 도울게요. 대신 앞으로 주인님이 무언가를 요구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겠죠?”

    “약속드릴게요.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할 것이고, 제 목숨을 대가로 하더라도 반드시 지킬 겁니다.”

    남안은 진지하게 답했다.

    “곡린 수사께서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한립이 곡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대금원선역까지 온 것은 서금선의 기운을 느껴서라서요. 중간에 사고가 있었다고 그냥 돌아갈 생각은 없습니다. 요양을 하며 천천히 구원성 쪽으로 갈 예정입니다.”

    “그렇다면 저희와 같은 곳으로 가시는군요. 함께 가시겠습니까?”

    한립의 제안에 곡린은 바로 답하지 않고 고민했다.

    상대가 의심이 많은 성격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한립은 재촉해 봤자 의심만 키울 걸 알고 가만히 있었다.

    “주인님, 왜 저런 자랑 같이 가려고 하세요? 인상이 딱 봐도 켕기는 게 많은 얼굴인데요.”

    흰둥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전음으로 물어왔다.

    “곡린은 금동의 기운에 이끌려 여기까지 온 것이다. 옆에 두고 따라가면 더 쉽게 금동을 찾을 수 있지 않겠더냐?”

    “아, 누님을 찾으려고 그러신 거예요? 그럼 좋죠!”

    흰둥이도 말귀를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이동하면 전력이 늘어 적을 상대하기는 좋겠으나 더 쉽게 행적이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적몽이 같은 방식으로 저를 추적하면 다 같이 발각되고 말 겁니다.”

    곡린은 슬쩍 한립의 의중을 떠보았다.

    “그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동행하실 마음이 있으시면 제 동천보물 안에 몸을 숨기면 될 테니까요. 적몽의 비술로도 그 안에 숨은 수사를 찾을 방도는 없을 겁니다.”

    한립이 웃으며 답했다.

    “그렇다면, 한 수사에게 폐를 끼쳐야겠습니다.”

    “아닙니다. 그저 동천 곳곳에 금제가 펼쳐져 있어 함부로 돌아다니시기 어려울 테니 죽루 안에서 몸조리를 하셔야 합니다.”

    “그러지요.”

    곡린의 대답에 한립은 은색 빛의 문을 열어 약재밭 쪽 죽루 2층 방을 내주었다.

    포권을 한 곡린은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들어선 그는 영기가 충만하고 한립 말대로 주변에 금제 진법들이 잔뜩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물론 이런 금제로 그를 가둘 수는 없지만, 이상한 짓을 하면 한립이 알아차릴 게 분명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침상으로 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남원자의 잔혼은 아주 불안정할 텐데 어떻게 도울 수 있겠느냐?”

    빛의 문을 닫은 한립은 제혼을 살폈다.

    “제가 아는 혼백을 보양하는 비술이 있어요. 일단 그렇게 혼백의 힘을 채워야 할 것 같은데 시간이 많이 걸릴 거예요. 후에 적당한 몸을 찾아 깃들게 해야 하고요.”

    “정말 감사합니다, 제혼 수사.”

    남안이 듣고 있다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수사가 고마워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주인님이에요.”

    “감사합니다, 한 수사.”

    제혼의 귀띔에 남안이 서둘러 한립에게도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무어라 답하려던 한립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다시 은색 빛의 문을 열었다.

    “제혼, 모두 데리고 동천에서 휴식을 취하거라. 남원자 수사의 혼백은 네게 맡기마.”

    한립의 분부에 제혼이 먼저 들어가고, 남안과 흰둥이도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모두 떠나고 빛의 문을 닫은 한립은 윤회전 붉은 가면을 꺼내 썼다.

    붉은 수정빛 화면이 눈앞에 투영되었다.

    그 안에는 낯익은 여인의 신영이 서 있었다.

    “교삼 수사, 드디어 연락을 주십니다.”

    한립은 교삼인 것을 확인하고 미소 지었다.

    “죄송해요, 요즘 일이 너무 많아서 이제야 연락할 시간이 생겼어요. 그런데, 한 수사의 수행이 또 늘었군요. 설마 벌써 대라경에 이르신 겁니까?”

    “안목이 좋으십니다. 어떻게 제 수행을 알아본 것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부족하지만 예전에 어느 선배님께 망기술(望氣術)이란 것을 배웠거든요. 투영이나 안색만을 보고도 대략적으로 상대의 수행을 판단할 수 있는 잔기술이에요. 그보다 한 수사께서는 지금 어디쯤 계십니까?”

    교삼은 그 이야기를 오래 하고 싶지 않은지 웃으며 말을 돌렸다.

    “대금원선역입니다. 해야 할 일 있어서요.”

    한립은 교삼이 일전에 한 경고를 떠올리고 침묵하다, 사실대로 말했다.

    “괜찮아요. 대금원선역의 상황이 일전과는 달라져서 지금은 괜찮을 겁니다.”

    교삼의 말에 한립이 그녀를 지긋이 보았다. 그녀도 대금원선역에 있다는 말로 들렸다.

    “제게 연락을 취한 건, 임무가 드디어 시작해서인지요?”

    “맞습니다. 지금 대금원선역 어디쯤이시죠? 30년 내로 구원성에 도착하실 수 있나요?”

    “가능합니다.”

    “다행이네요. 한 수사께서 이미 대라경에 이르렀다니 이걸 받아주세요.”

    교삼은 수결을 맺어 무언가를 전송시켰다.

    검은 가면이었는데 그가 지닌 가면과 똑같이 생기고 미간에 용오라고 적혀 있었다.

    “윤회전은 남색, 푸른색, 검은색, 붉은색 네 가지 색깔의 가면을 써서 신분과 지위를 나타내죠. 그 검은 가면은 윤회전의 진정한 핵심 인원이라는 표시고요.”

    “윤회전에서 저를 핵심성원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입니까?”

    검은 가면을 받은 한립이 눈을 반짝였다.

    “안 그래도 전주께서 한 수사의 소문을 듣고 만나보려 하셨지만 워낙 일이 많아 적당한 기회를 찾지 못하셨어요. 허나 핵심성원은 재능이 탁월해야 할 뿐 아니라 윤회전에 큰 공을 세워야지만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단시간에 대라경에 이른 수사라면 재능 쪽으로는 부족함이 없겠지만, 아직 공이 부족하니 이번 구원관 임무를 마치면 정식으로 승급이 될 거예요. 미리 검은 가면을 내드리는 이유는 구원관에는 고수들이 구름처럼 많고 구원도조가 있어 붉은 가면으로는 기운을 숨기기가 부족해서고요.”

    교삼은 빠르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윤회전 전주가 날 안다고?’

    한립은 속으로 뜨끔했다.

    윤회전 전주라면 윤회전을 건립해 감히 천정이라는 방대한 세력과 대적하는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또 다른 도조일 가능성이 컸다.

    그런 인물이 자신을 신경 쓰고 있다는데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전주와 교삼 수사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짤막하게 감사 인사를 한 한립은 의식으로 검은 가면을 점검하고 얼굴이 밝아졌다.

    분명 손에 들고 있는데도 의식으로 허공을 훑는 것처럼 전혀 기운을 감지할 수 없었다.

    “같은 윤회전 소속이고, 한 수사는 제가 추천해서 윤회전에 들어온 사람이니 당연히 할 일을 한 겁니다. 구원성에 도착하시면 성 바깥 봉운객잔(峰雲客棧)으로 가세요. 윤회전의 숨겨진 거점이니 안심하고 머무셔도 됩니다.”

    교삼이 웃으며 말하는데 한립은 가면을 챙기고 말이 없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교삼이 움찔해 물었다.

    “이제 제게 임무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해주실 때가 된 듯싶어서 말입니다.”

    “제가 한 수사를 믿지 않아 말씀드리지 않는 게 아니라, 저도 정말 이번 임무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습니다. 알려드리고 싶어도 알려드릴 게 거의 없어요.”

    “우리가 하루 이틀 안 사이도 아니고 그런 말로 넘어가려 하시지 마시지요. 수사가 윤회전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신분인지는 몰라도 보통 성원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어떻게 구원관 임무에 대해 전혀 모를 수 있단 말입니까? 협력하려면 서로 신뢰를 쌓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한립은 계속해서 교삼을 떠보았다.

    “정말 아는 게 없습니다. 이번 구원관 임무는 중대해서 고위층이 직접 나섰기에 저는 연락책에 불과합니다. 구체적인 사정을 알 리 없지요.”

    교삼이 쓴웃음을 지었다.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