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1화. 몰래 따라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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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은 기운을 숨기고 제혼이 그 위로 의식 기운을 가리는 비술을 쓴 채로 사합원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집 안에서 폭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눈부신 금빛이 소용돌이치며 나타나 사합원을 폐허로 만들었다.
걸음을 멈춘 한립 일행은 충격을 피해 고목 뒤로 몸을 숨기고, 폐허 안에서 연기가 풀풀 날리는 와중에 여러 명이 바닥에 내려서는 것을 보았다.
금빛의 파동을 느낀 한립은 익숙한 기운에 눈썹을 꿈틀했다.
“금동이 아니었어…….”
“누님이 아니면 누구예요?”
한립의 중얼거림을 듣고 흰둥이가 의아해했다.
연기가 가신 공간에 금색 장포를 걸친 청년이 나타났다.
영준한 외모에 한립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지루하다는 얼굴을 한 대라 서금선 곡린이었다.
“휴……. 네놈들은 포기란 걸 모르는 것이냐?”
곡린이 자신을 둘러싼 수사들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와 싸울 필요 없습니다, 수사. 우리와 같이 천정으로 돌아가면, 아실 거예요. 천정은 수사를 예를 다해 손님으로 대우할 것이고, 그냥 보제성연에 참석해 주기를 청하는 것뿐입니다.”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냘픈 체구의 흑포 여인이었다.
“천정? 구원관 수사들이 아니었다고?”
제혼이 의문을 제기했다.
한립도 어째서 남안이 천정 수사들과 같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전에도 천정에게 속아 이제 겨우 세월탑에서 벗어났는데. 또 그 소리냐?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으냐?”
곡린은 냉소했다.
“오해가 있으신 듯합니다.”
흑포 여인은 무감정한 목소리로 해명하려 했다.
“예를 다해 손님으로 대우한다며? 그럼 이 몸이 초대를 거절하겠다면 그냥 보내주는 거겠지?”
“그렇게 나오겠다면, 어떤 일이 발생해도 우릴 원망하지 말아야 할 겁니다.”
여인도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닌지 싸늘하게 답하고 손을 뻗었다.
소매 속에서 붉은 안개가 불 구름을 이루어 곡린의 머리 위를 뒤덮었다.
동시에 바닥이 미세하게 갈라지고 수많은 불개미가 기어 나와 폐허의 건물 잔해를 녹이고 줄줄 흐르는 용암으로 바뀌었다.
“원수는 어떻게든 만나게 된다더니, 저건…….”
한립이 그걸 보고 여인을 알아보았다.
“주인님, 아시는 분인가요?”
흰둥이가 놀라 물었다.
“아시는 분은 무슨, 저 여인은 적몽이다. 불 속성 법칙의 힘에 능한 대라 수사로 실력이 만만치 않으니 유의해야 한다.”
한립이 꿀밤을 때려 흰둥이는 머리를 살살 문지르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불개미들은 온 바닥을 뒤덮었는데 곡린 주변으로는 접근하지 않았다. 적몽의 명령인지 아니면 불개미들이 천성적으로 서금선을 두려워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저자와 더 할 말이 있습니까? 공격합시다.”
여섯 명의 흑의인 중 체구가 크고 노쇠한 목소리를 지닌 사내가 급한 성미를 드러냈다. 그 말에 남안을 제외한 다른 이들도 분분히 공격을 개시했다.
체구 큰 노인이 먼저 맹렬히 소매를 휘둘러 새까만 안개를 둘러싼 여덟 마리 라천귀왕(羅天鬼王)들을 곡린을 향해 날려 보냈다.
“저와 비슷한 의식류 법칙을 익힌 자가 저자였네요. 저처럼 선천적으로 타고난 법칙이 아니라 음험한 쪽으로 발전이 되어 제 능력보다는 못하지만요.”
제혼이 그걸 보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까짓 걸로 날 잡겠다고?”
상대가 대라경 수사인데도 곡린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태산처럼 한 발을 쿵 떨구자 금색 파문이 발끝에서 퍼져 불개미들을 날려버렸고, 주먹 끝에서는 휘황찬란한 금빛이 불길처럼 번져 라천귀왕들을 집어삼켰다.
참혹한 비명소리 속에서 라천귀왕들이 몸이 갈라져 검은 연기로 수북하게 떨어져 내렸다.
그때 머리 위 불구름이 쿵, 터지며 기름처럼 불꽃을 곡린의 머리 위로 쏟아부었다. 동시에 커다란 금색 거검이 고공에서 수직으론 낙하해 불꽃을 가르며 곡린을 찌르려 했다.
어깨에 검이 꽂힌 곡린은 희미하게 피를 보이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나지막하게 코웃음 친 그는 금빛을 폭발적으로 일으켜 거검의 무게를 이겨내며 일어서더니 어깨의 상처까지 치유해 버렸다.
거검을 조종하던 왜소한 흑의인이 그걸 보고 검결을 맺어 금색 거검에 더욱 무게를 실었고, 곡린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버텨내고 있었다.
“하하, 이게 다냐?”
곡린이 비웃음을 터트렸다.
“서금선의 몸이 더할 나위 없이 단단하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직접 보니 별 것도 아니구나.”
냉소한 적몽의 손짓에 대량의 불개미들이 곡린의 몸을 타고 올라갔다.
불개미들이 지나는 곳마다 용암에 그을린 검은 흔적이 나타났다.
힐끔 그걸 본 곡린은 두 팔에 힘을 주어 금빛을 방출했다. 기괴한 주술문자가 실린 금빛에 불개미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고 어깨를 짓누르던 거검도 밀려 올라갔다.
그 틈에 바닥을 쿵, 찍은 곡린이 화살처럼 먼 곳으로 달아나려 했다.
그런데 상공으로 떠오르자 하늘 위가 어둑해지더니 검은 안개가 응결한 거대 귀물이 구름 속에 빠져나와 그를 꿀꺽 삼켜버렸다.
거대 귀물의 입속에서 곡린은 의식이 아득해져 반항할 틈도 없이 반투명한 회색 사슬에 몸이 뚫렸다.
사슬의 회색 안개가 서늘하게 몸속으로 스며들어 선령력 흐름을 동결시켜 버렸다.
나머지 네 사람이 그를 쫓아 화염, 푸른빛, 검빛, 주먹 허상 등을 곡린의 몸에 날려 보냈다.
곡린은 안색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그들의 공격을 맨몸으로 다 받아냈다.
“몸은 강해도 제가 의식을 붕괴시켜버리면 그만입니다. 바보가 되기는 하겠지만 뭐 데려가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음혼(陰魂法則)을 익힌 덩치 큰 사내가 탁한 목소리로 말하고 짧은 검은 피리를 꺼내 입가에 댔다.
멀리서 그걸 본 한립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피리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이상한 음파가 퍼져, 담담하던 곡린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의식세계에 무형의 톱이 들어와 그의 혼백과 의식세계를 슥슥 갈아내는 느낌이었다.
오랫동안 수련을 해서 대라 수사들 중에서도 의식이 강한 편이라 자부했건만 저 피리 소리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덩치 큰 사내가 피리를 더 날카롭게 불어대자 톱이 수많은 송곳으로 흩어져 의식세계 곳곳으로 침투했다.
크악.
등골이 서늘해지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대비하고 있던 한립 일행에게도 피리의 음파 공격이 도달했다.
비슷한 법칙을 수련한 제혼의 방어력이 가장 강했고, 연신술을 익힌 한립은 의식 자체가 강했다.
묵안비휴의 힘을 전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흰둥이는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지만 벌써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제혼이 그걸 보고 미간의 제3의 눈을 뜨더니 암홍색 광선을 한립과 흰둥이의 미간으로 쏘아 보내주었다.
한립은 의식이 맑아지고 흰둥이도 이전처럼은 힘들지 않았다.
“오, 그렇게 찾을 때는 보이지 않더니 이렇게 만나는구나. 한립, 네 놈이 제 발로 찾아올 줄이야.”
돌연 적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신영이 그들 머리 위에 떠있었다.
한립은 더는 숨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흰둥이와 제혼을 데리고 공중으로 떠올랐다.
제혼이 진작 암홍색 영역을 방출해 자신과 두 사람을 보호하고 있었다.
“저를 그리 찾으셨다니.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적몽 선자…….”
한립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빙긋 웃음 지었다.
“한 수사…….”
멀리서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있던 남안이 그를 보고 놀라고 있었다.
적몽은 그를 훑고 가슴이 섬뜩해졌다.
“대라경이면 또 어떻단 말인가. 아직 삼시를 참해본 적도 없는 애송이 주제에.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온 적몽은 냉소했다.
대라 초기 이후로 삼시 중 하나를 베어낼 때마다 경지가 높아져 전부 베어내야 도조경에 이를 수 있었다.
삼시를 베어내는 일은 매우 위험했지만 일단 성공하면 실력이 확연히 늘어 대라 초기와 중기 혹은 중기와 후기 수준 차이는 엄청났다.
적몽은 수적으로도 자신이 우세했기에 한립을 잡을 거라 여겼다. 유일하게 조심해야 할 것은 지난번에 그가 도망칠 때 썼던 비술이었다.
그녀는 바로 붉은빛을 일으켜 거대한 구슬처럼 주변 수백 리를 감쌌다.
한립 무리는 온도가 급격히 상승하는 것을 느끼며 적몽의 영역에 둘러싸였다.
사방에 불빛이 가득하고 여덟 줄기의 화염 폭포가 하늘에서 떨어져 지면의 용암 호수로 흘러들고 있었다.
주변 공기가 지글지글 끓고 용암 호수가 땅의 수원을 증발시켜 깊은 고랑이 나타나고 있었다.
목이 바싹 마른 흰둥이는 영역 안에서 구워지는 기분이었다.
“저 여자 쉬운 상대는 아닌 것 같아요.”
흰둥이가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지난번에 싸울 때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던 것 같구나.”
한립도 얼굴을 굳혔다.
“계당 장로가 검구 장로와 같이 서금선을 맡아주고, 다른 이들은 나를 도와 저자를 잡는다!”
적몽이 명을 내렸다.
음혼법칙을 수련한 덩치 큰 사내와 금색 거검을 조종하던 왜소한 사내가 알겠다고 답했다.
다른 두 흑의인은 적몽 옆으로 날아들었다.
“제혼, 네가 가서 먼저 곡린을 구해주거라.”
“네.”
고개를 끄덕인 제혼이 자리를 뜨려 했다.
“내 영역을 네 마음대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으냐?”
적몽이 눈을 치켜뜨고 소리쳤다.
크게 출렁인 용암 호수에서 화염 거인이 일어나 거대한 장검을 들고 제혼의 앞을 막아섰다.
그걸 본 제혼은 코웃음 쳤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검은 귀물 발톱이 나타나 단박에 화염 거인을 조각냈다.
방금 얻은 유명귀조의 위력에 만족한 제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려나간 화염 거인 조각은 용암 호수로 흘러들어 다시 불길이 되었다.
“그런 화령(火靈)은 끝없이 만들 수 있다.”
조소한 적몽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용암 호수에 격렬히 파도가 일며 화염 거인들이 잇달아 일어나 화염 거검을 들고 한립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립은 가볍게 손을 저어 만들어낸 은은한 금색 영역을 적몽의 화염영역에 중첩시켰다.
영역 안의 시간유속이 변화하며 화염 거인들이 휘두른 거검도 느릿하게 움직였다.
제혼은 쏘아져 나가며 유명귀조를 휘둘러 수십 개의 발톱 흔적으로 화염 거인들을 자르고 곡린 쪽으로 향했다.
그 순간, 하늘에서 떨어지던 용암 폭포를 화염 교룡이 거꾸로 타고 올라와 제혼의 머리를 물어뜯으려 했다.
제혼은 거리낌 없이 유명귀조의 신통을 발휘해 화염 교룡도 찢어버렸지만, 교룡은 거인처럼 녹아내리지 않고 붉은빛 속에서 회복해 계속 달려들었다.
“신경 쓰지 말고 가거라.”
제혼의 귓가에 한립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혼은 그 말을 믿고 더는 반격하지 않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교룡이 입을 쩍 벌렸을 때, 어디서 물소리가 들리고 바닥에서 금색 강물이 뿜어져 나와 제혼을 대신해 교룡의 입을 막았다.
제혼은 물길을 타고 교룡을 스쳐 곡린이 있는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곡린은 자신을 구하러 온 제혼과 한립을 보고 복잡한 눈빛을 했다.
그걸 본 계당 장로의 피리연주 소리가 달라졌다. 음파가 퍼지지 않고 한곳으로 뭉쳐져 제혼을 향해 쇄도했다.
입꼬리를 끌어올린 제혼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녀석을 잡아먹으면 또 실력이 얼마나 늘까?
계당 장로는 소녀가 씩 웃으며 드러낸 하얀 치아를 보면서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 * *
적몽이 콸콸 흘러나오는 금색 강을 보고 뜻밖이라는 시선을 보냈다.
“벌써 조물경 영역을 제련했다고? 허나 겨우 강줄기로, 그것도 정순한 물 속성 법칙의 힘도 아닌 것으로 나를 어쩔 수는 없을 것이다! 하하하.”
적몽의 웃음소리가 빠르게 잦아들었다.
강렬할 시간법칙 파동이 천지를 진동시키더니 수려한 산세를 지닌 산맥과 드넓은 푸른 숲, 그리고 태양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월궁에 있다는 달을 닮기도 한 금색 구체가 하늘에 떠올라 주변의 수많은 별과 같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대라 초기에 완벽한 조물경 영역을 완성했다고?”
적몽은 믿을 수가 없었다.
영역을 제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어서 부단한 노력과 시간 그리고 막대한 자원이 필요했다. 거기에 기연도 필수였고 말이다.
게다가 평범한 조물경 영역은 원시적인 풍경과 역령을 만들어내는 것에 그쳐 그녀의 화염 폭포와 화염 거인들이 그러하듯 투박한 면이 있었다.
어디 한립의 영역처럼 산과 물이 조화를 이루고 해와 달 그리고 별까지 전부 갖출 수 있단 말인가.
이제는 적몽도 한립의 실력을 얕잡아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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