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2128화 (1,885/2,000)

2128화. 만보절(万寶節)

*

한립도 흰둥이의 말에 대충 상황을 파악하고 그간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이천 년에, 또 이천 년에, 나중에 구만 년 넘게 지나갔으면 10만년 가까운 세월을 여기서 보내셨다고요? 광음천선대진으로도 불가능한 일일 텐데…….”

흰둥이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다 결국 열 손가락을 다 접고 웅얼거렸다.

“바깥 시간은 얼마나 지난 것이냐?”

“50년도 안 지났습니다.”

한립의 질문에 흰둥이는 얼른 한 손을 쫙 펼쳐 보였다.

“겨우 50년이…….”

한립은 멍하니 서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걸 본 흰둥이가 한립이 정말 주화입마로 머리가 상한 건 아닌가 갸우뚱거리다 그의 기운을 감지하고 눈을 크게 떴다.

“주인님! 대라경에 이르신 거죠?”

“선원석에 아직 선령력이 남아 있다 했더니, 그랬던 거였어…….”

한립은 너무 뜻밖의 상황에 목이 메일만큼 놀라서 딴소리만 늘어놓았다.

“뭐라고 하신 거예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광음천선대진의 효과로는 백배 밖에 유속을 변화시킬 수 없어 앞서 4천 년 수행은 바깥 시간으로 40년이 걸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 후로 대진의 효율이 급격히 높아져서 만 배에 가까운 시간차를 일으켰어.”

“광음천선대진이 그렇게 대단하다고요?”

“이번에는 여러 우연이 겹쳐 그렇게 된 것 같구나. 그러다 안에 갇혀 영영 빠져나오지 못할 뻔했지만.”

한립은 웃으면서도 지난 9만여 년을 생각하면 가슴이 떨렸다.

“하하, 원래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거잖아요!”

흰둥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한립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현상을 재현할 수 있다면 앞으로 수련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보탬이 될 터였다.

“정염동자는?”

“바깥을 지키고 있죠. 저는 화지공간 금제가 풀리자마자 무슨 일인지 살피러 들어와 본 거고요.”

“내가 너희를 걱정시켰구나.”

“아니에요, 대라경에 이르시니 기분이 어떠세요?”

흰둥이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수련하던 중에 문제가 생겨서 아직 영역을 안정시키지 못했다. 시간이 남았다니 나를 위해 조금 더 호법을 서주거라.”

“알겠어요! 제가 나가서 꼬마 녀석에게도 걱정하지 말라고 알려줄게요.”

“그래.”

한립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흰둥이가 떠났다.

* * *

십여 년 뒤, 대금원선역 유금성(鎏金城).

유금성은 대금원선역 서북쪽에 있는 선역의 거대 성 중 하나로 구원관 관할의 구원성, 백조산이 있는 백조성 그리고 금원선궁이 있는 금원성과 나란히 유명한 곳이었다.

소속이 분명한 다른 세 성과 달린 유금성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곳이라 구원관, 백조산, 금원선역의 억압을 받기 싫은 중소 세력들이 연맹을 맺고 머물러 그걸 또 일월맹(日月盟)이라 불렀다.

일월맹은 구원관, 금원선궁처럼 최정상급 실력자는 많지 않았지만 잠재력이 커서 수많은 중소 세력과 산수를 품고 은근히 3대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그 유금성 안, 화려한 9층 주루에 세 사람이 독채에 앉아 술을 마시는데 그 속에 한립이 있었다.

다른 2명은 검은 치마를 입은 소녀 제혼과 하얀 장포를 걸친 소년 흰둥이였고, 그들도 용모를 달리하여 본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이제 대라경에 이른 한립은 실력에 자신이 붙어 더는 대금원선역을 피하지 않았다.

드디어 깨어난 제혼도 순조롭게 대라경에 이르러 기쁨을 더했고 말이다.

“대금원선역에 구원관, 금원선궁 사람들이 없는 곳도 있다니. 마음이 편해요.”

흰둥이는 곱게 생긴 녹색 잔을 기울이며 술맛을 즐겼다.

“그래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유금성은 일월맹이 관리한다지만 구원관과 금원선궁에서 심어 놓은 이들이 있을 것이야.”

한립이 고개를 저었다.

“제혼 누님도 있는데 걱정할 것 없잖아요. 적의 악의를 민감하게 감지하는 걸요.”

흰둥이가 배시시 웃음 지었다.

제혼은 대라경에 이르러 실력이 늘어난 덕에 적의 악의적인 감정까지 읽어낼 수 있었다.

한립이 자청해 시험을 해보았는데 강력한 의식을 지닌 그도 제혼의 감지를 피할 수는 없었다.

물론 법칙의 힘으로 온몸을 감싸면 제혼의 감지를 막을 수 있겠지만, 누군가 법칙의 힘을 발동하고 다가오면 어차피 적의를 표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난 의식 방면의 법칙을 수련해서 그런 쪽으로 민감한 것뿐이야. 그렇다고 너무 마음 놓지는 마. 다른 의식 법칙을 수련한 사람들을 만나면 이것도 통하지 않을 수 있거든.”

제혼이 입을 열었다.

“진짜요?”

흰둥이가 그건 몰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의식법칙을 익힌 사람은 희소해서 그럴 가능성은 적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 그래도 네가 있어 우리가 훨씬 안전하게 지낼 수 있겠구나.”

한립이 잔잔히 웃으며 제혼에 대한 믿음을 드러냈다.

“맞아요. 제혼 누님만 믿을게요!”

흰둥이도 따라서 웃음 지었다.

“알겠어요.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더 주변을 열심히 살펴야 할 것 같아요.”

한립과 흰둥이에게 장난스럽게 눈을 흘긴 제혼이 미소를 머금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한립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금성에 온 지도 시일이 꽤 되어 여러 경로로 구원관과 금동의 소식을 알아보려 했는데 대금원선역이 뒤숭숭해서 구원관이 더욱 엄중히 내부를 관리해 알아낼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주인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보제연까지는 시간이 있으니까 누님도 당장은 괜찮을 거예요.”

흰둥이가 하는 소리를 들으며 창밖을 보고 있는데 멀리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일월각(日月閣)이라 힘 있는 서체로 적힌 대형 상점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거의 십여 리를 차지하고 선 하늘색 목재로 건축된 상점은 그 기세가 대단했다.

건물만큼 거대한 대문 앞에는 옥으로 조각한 기린상이 놓여 있었고, 하늘색 갑옷을 걸친 백여 개 이상의 현규를 지닌 병사들이 그곳을 지키고 서 있었다.

종소리를 들고 성 각지에서 둔광이 날아들어 일월각 앞에 떨어졌다.

수행이 낮지 않아 태을경인 수사들이 흥분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만년에 한 번 있는 만보절(万寶節) 아닙니까. 일월각에 평소보다 더 진귀한 경매품들이 많이 나온다던데 무엇일지 궁금해 죽겠습니다.”

“최근 들어 일월각을 찾는 사람들이 많지요! 이번 만보절을 기점으로 백조산의 명성을 이겨보려고 단단히 준비했다고 하니, 우리야 낙찰을 못 받아도 들어가 구경이라도 할 수 있는 게 다행입니다.”

“낙찰을 못 받다니요? 전 재산을 들고 왔으니 좋은 단약을 몇 병 구해와 수행을 돌파할 때 쓸 겁니다.”

“저는 만황계역으로 흉수 사냥을 가서 쓸 선기를 노려볼 참입니다.”

바깥이 떠들썩해지자 주루 안 한립도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경매가 시작되나 봐요! 우리도 어서 가봐요!”

흰둥이가 좋아하며 벌떡 일어났다.

“윤회전 기운을 숨겼어도 묵안비휴 선배님의 진령혈맥의 힘은 그리 쉽게 감출 수 있는 게 아니다. 경매회는 많은 이목이 집중될 테니 너는 나서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한립은 흰둥이가 입을 놀릴 틈을 주지 않고 금빛에 감싸 화지공간에 넣어 버렸다.

“가자.”

“네.”

한립의 말에 제혼이 빙긋 웃고 따라나섰다.

유금성에 머문 것은 구원관 소식을 알아보고 이 경매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백조산은 진선계 최상의 연기 종문으로 만년마다 한 번씩 대금원선역의 모든 분점에서 경매 방식으로 경전을 열었고, 이를 만보절이라 불렀다.

다른 상회들도 이 기간에 함께 경매를 진행해서 더욱 떠들썩했다.

한립은 팔황산을 떠나 어떻게 마지막 시간법칙 물건을 찾아 대오행환세결의 균형을 극대화할까 고민하다가 윤회전을 통해 만보절을 알게 되고 한시름을 놓았었다.

만보절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시간법칙 물건을 구하려 마음을 먹었을 때, 뜻밖에도 교삼이 찾아 헤매던 물건을 구해다 주었다.

그렇다고 해도 만보절을 놓칠 수는 없었다.

구원관에 이르기 전에 그도 실력을 더 높여야 했고, 제혼도 대라경에 이르렀는데 손에 익은 선기가 없어 준비가 필요했다.

백조산은 구원관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어 만보절 기간에 유금성으로 향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한립과 제혼은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해 수행을 태을경 후기로 억누르고 일월각으로 들어갔다.

더 낮은 수행으로 꾸밀 수도 있지만 어차피 낙찰을 받으려면 거액을 써야 해서 그게 더 눈길을 끌 수 있었다.

“선배님들, 일월각 경매회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일월각 집사 제자 남미라 하옵고, 두 분의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남색 치마를 입고 눈썹까지 하늘색인 아름다운 소녀가 다가와 말을 거는데 금선 후기 수사였다.

“그래.”

한립은 담담히 답했다.

“두 분께서는 태을옥선 중에서도 최고봉의 존재이시니 귀빈실로 모시겠습니다.”

남미는 설명하고 안내를 시작했다.

“일월각 경매회에 어떤 물품이 나올지 목록을 볼 수 있겠느냐? 내 미리 수중의 선원석을 적절히 분배해 두고 싶구나.”

한립은 소녀를 따라가며 말했다.

“예, 선배님들. 여기 있습니다.”

남미가 남색 옥간을 두 개 꺼내 한립과 제혼에게 바쳤다.

“보통 다른 경매회는 경매물품을 미리 공개하지 않아 이익을 극대화하고 호기심에 더 많은 사람을 불러들이려 하는데, 일월각 경매회는 특이하구나.”

“일월맹 맹주께서 직접 정하신 규칙입니다. 맹주께서는 거래에는 솔직함이 기본이라 하시며 그런 사사로운 방법으로 이익을 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일월맹이 오늘날 이렇게 발전한 것도 귀빈들을 정성을 다해 모시기 때문이고요. 경매물품 목록은 일월각을 찾아주시는 모든 분이 받으실 수 있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일월맹 맹주에 대해 언급하는 남미의 밝은 얼굴에서 맹주에 대한 존경이 느껴졌다.

“훌륭한 마음가짐을 지닌 분이구나.”

눈썹을 끌어올린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옥간 안에는 다양한 경매품의 이름과 가격 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저 순서만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았는데, 경매 참석자들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장치 같았다.

“두 분 선배님께서는 따로 찾으시는 게 있으신지요? 혹시 대라경에 오를 준비를 하고 계신 것입니까?”

“하하, 우린 산수들이라 그냥 일월각 경매회가 있다기에 와본 것뿐이다.”

“그러셨군요. 저희 일월각은 이번 경매회를 위해 선기, 단약, 재료, 공법 등 귀한 물건들을 많이 구해다 놓았습니다. 보시다가 마음에 차시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 경매에 참여해 주세요.”

남미는 깊이 파고들지 않고 싱긋 웃음 지었다.

한립이 경매에 관한 이런 질문을 할 때마다 남미는 예의 바른 태도로 자세히 설명해 주어 그를 만족시켰다.

제혼은 둘이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는 것을 보고 입을 비죽이다 토라져 목록만 살폈다.

남미를 따라가니 금방 독립된 귀빈실에 이를 수 있었다.

기다란 의자와 선과와 차가 준비된 하얀 돌 탁자가 놓여 있었다.

가구의 배치가 정갈하면서도 공기 중에 그윽한 향이 돌아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 주었고, 정면에 투명한 재료로 창이 뚫려 거대 광장을 내려다볼 수 있게 되어있었다.

2, 30리에 달하는 광장의 수많은 좌석에 벌써 사람들이 가득 차서 경매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한립이 있는 곳과 같은 귀빈실들이 부채처럼 펼쳐져 광장 위 공중에 떠있었다.

“물러가 봐도 좋다.”

“예, 분부가 있으시면 종을 울려주시면 됩니다.”

남미는 노란 종을 탁자에 올려두고 얌전히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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