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2126화 (1,883/2,000)
  • 2126화. 대라경

    *

    아래 회백색 안개 속에서 강한 회오리바람이 불어 안개들을 위로 밀며 세 개의 거대한 신영이 올라왔다.

    회포 사내는 멀리서 보기만 하는데도 심장이 쪼그라들 것 같았다. 감히 그가 직시할 수조차 없을 만큼 강한 수행을 지닌 존재여서 분명 태을 후기 이상일 터였다.

    세 명 중, 중앙에 선 인물은 눈꼬리가 길고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피부를 지녀 물속에서 막 건져 올린 시체 같았는데 품에 큰 눈을 가진 하얀 살쾡이를 품고 복슬복슬한 털을 쓰다듬었다.

    한립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회계에서 그를 고생시켰던 귀목이란 것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어디 비경인 것 같은데, 천지영기가 짙은 것으로 보아 선역은 맞는 것 같구나.”

    귀목은 주위를 둘러보면서도 촉룡도와 선궁의 수천 제자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회포 사내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귀목이 그 소리를 듣고 힐끔 쳐다보더니 양옆의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전부 죽여라. 혼백까지 말끔히! 그래야 다른 인족들이 모여들지 않겠지.”

    옆의 두 사람이 사라지고 위쪽 수사들 앞에 나타났다. 그 후로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비명과 절규만이 들려왔다.

    “우리가 선역으로 돌아왔다…….”

    귀목은 음산하게 웃음 지었다.

    * * *

    주원선역(周元仙域)

    무서운 소식이 선역 관할의 여덟 대륙에 퍼지기 시작했다.

    선역의 선궁 궁주이자 대라경 수사인 제호진인이 뜬금없이 광증이 발작해 선궁 백삼십여 선관들을 도륙했다는 소식이었다.

    주원선역에 머물던 수행이 깊은 감찰선사 한 명이 그를 막으려다 오히려 공격을 당해 목숨을 잃었고, 주원선역은 혼란에 빠졌다.

    제호진인은 그 뒤로 소리소문없이 잠적해 각 선역 주선방에 이름이 올랐는데 천정이 잡으려는 죄인 중에 상금이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많이 걸렸다.

    이후 그가 광증이 발작한 게 아니라 주원선궁에 침투해있던 윤회전 첩자라는 소문이 퍼졌는데, 임무를 다하고 윤회전으로 돌아가려다 들켜 이런 일을 벌였다는 이야기였다.

    * * *

    진남선역(晉南仙域)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던 선인비경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그걸 차지하기 위해 선역 4대 종문과 선궁에 피바람이 불었다.

    원래는 선궁의 주도로 네 세력이 비경 자원을 고르게 나눠 갖기로 했는데, 모든 세력이 비경 안으로 들어간 후 두 종문을 이끄는 장로와 핵심제자들의 살해당하면서 나머지 두 종문이 흉수로 지목되었다.

    이렇게 원수를 갚겠다며 4대 종문이 서로 전쟁을 벌이니 선역 전체의 기운이 꺾일 수밖에 없었다.

    선궁이 이대로 두면 선역의 안녕을 해치겠다고 생각해 나서서 막으려는데 어쩐 일인지 갑자기 4개의 종문이 검날의 끝을 진남선궁으로 돌렸다.

    종문들이 격렬히 싸우며 숨겨진 흔적을 조사한 끝에 사실 비경 안에서 일어난 일에 선궁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종문들의 연합 공격에 진남선궁은 그야말로 뒤집어졌고 선궁 궁주는 그대로 달아나 버렸다.

    * * *

    대금원선역, 구원관.

    구불구불한 산맥이 땅을 가르는 용처럼 보이는 웅장한 산맥. 수백 개의 기괴한 산봉우리 중에서 그리 높지는 않지만 수려한 풍경을 지닌 산이 하나 있었다.

    앞쪽과 오른쪽으로 새하얀 폭포가 쏟아져 내려 구슬 같은 물방울 속에 고운 무지개를 만들고 고공에서 수시로 학들이 날아다니며 충만한 천지원기가 가득한 곳이었다.

    그 산 정상, 바깥으로 볼록 튀어나온 둥그런 전망대에 암녹색 도포를 입고 연꽃 보관(寶冠)을 쓴 중년 도사가 서 있었다.

    바른 자세에 얼굴은 아주 평범했지만 얼굴이 옥처럼 윤기가 흘러 범인들은 보기만 해도 선인이라고 생각할 용모였다.

    그는 선경을 내려다보면서도 웃지 못하고 근심이 가득한 얼굴을 했다.

    이때 뒤쪽 광장에서 푸른 장포를 입고, 마른 얼굴에 하얀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걸어왔다.

    “제자 청허가 순균 사숙을 뵙습니다.”

    노인은 중년인 앞에서 극히 공손히 예를 올렸다.

    순균 사숙이라 불린 중년 도사는 ‘순균진인’이자 구원관 개산노조의 관문제자로 종문에서 배분이 극히 높은 선역의 명사였다.

    “조사하라던 것은 어찌 되었느냐?”

    “장천병이 선역에 나타난 게 확실하고, 한립이라는 수사의 수중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한립?”

    “북한선역 출신으로 촉룡도에 잠시 머물었는데, 아무래도 실락계면 중 소남주(小南洲) 계면 군락에서 비승한 하계 수사로 보여집니다.”

    “오, 실락계면에서 비승을 했다면 보통은 아니겠구나. 비승대에 기록이 남아 있더냐?”

    순균진인이 물었다.

    “있기는 한데……. 그를 맞이했던 고승이라는 석기전 수사가 그를 자신의 종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는지 일부러 정보를 숨겼습니다. 이상한 일은 후에 한립은 석기전으로 가지 않고 가는 도중에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더냐?”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인지 지금은 알아내기 어렵고, 그 후 3백 년 뒤 천정 자료에서 촉룡도 전복 사건에 그자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여러 선역을 돌아다니며 누차 천정과 충돌했지만 요행히 달아났고요. 마지막에는 소금원선궁으로 쳐들어가 궁주 동방백을 죽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수행은 어느 정도이지?”

    “태을경 최고봉이라 합니다.”

    “겨우 태을경 수사가 홀로 선궁에 들어가 궁주를 죽여? 실력이며 담이 허투루 볼 자가 아니구나. 사섬도 그에게 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남안 사질이 돌아와 종문에 보고하기로 사섬은 그의 손에 죽은 것이 맞다고 합니다. 후에 묘법 사매가 직접 나섰으나 적몽이 끼어드는 바람에 한립을 놓쳤고요. 그 뒤로 다시 행적이 끊겨 어디 있는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장천병에 관한 일이니 더 관심을 쏟거라. 장천병을 되찾는 것은 우리 구원관에 의미가 있는 일이야.”

    “묘법 사매가 아직 그를 쫓고 있고, 구원관 영위(影衛) 3분의 1이 그 일에 배치되었습니다. 일단 찾아내기만 하면 반드시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순균진인의 말에 청허가 답했다.

    “선계의 혼란이 가중되고 우리가 관할하는 선역들도 최근 평안하지 못하구나. 천성선역(天星仙域)과 동주선역(同舟仙域)의 소란이 더 심해져서 부관주 둘이 어쩔 수 없이 그곳으로 나가 있고, 4대 성사 중 묘법도 없으니 너희 셋밖에 남지 않았다. 8대 존자 중 절반도 다른 선역에 나가 혹시 모를 변고에 대비하고 있는데, 다른 도조들의 폐관을 방해할 수도 없고…….”

    순균진인이 탄식했다.

    “장문 사숙께서는 안심하셔도 됩니다. 저희가 금원선역을 철저히 방어하고 있는데 누가 감히 일을 벌일 수 있겠습니까?”

    “그보다 그 서금선 아이는 어찌 되었느냐?”

    “처음에는 떠들썩하게 소란을 피우는데, 어찌나 힘이 좋은지요. 이제는 제법 얌전해져 구원관 안에서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 마음대로 부릴 수 없는 것을 빼면 절반쯤 구원관 사람이 다 되었습니다.”

    청허는 금동을 떠올리고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사부님께서 그 아이를 보시고 내력이 깊다 하시며 아주 마음에 들어 하셨다. 보제연으로 보내지지 않을지도 모르니 다른 선물을 준비해두어야 할 것이야.”

    “예!”

    순균진인의 명에 청허가 고개를 조아렸다.

    * * *

    만황계역.

    안개가 자욱한 산맥에 오색 벼락이 쉼 없이 떨어져 하늘과 땅을 뒤흔들었다.

    그 아래 산속, 생긴 지 얼마 안 된 동굴 안에서 미간에 금색 자국이 있는 수려하게 생긴 사내아이와 은색 불새가 놀라 엄청난 천기원기들이 몰려들어 그들 앞 은색 빛의 문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쳐다보았다.

    비휴 흰둥이랑 정염불새였다.

    “이건…….”

    흰둥이가 놀라 정염불새를 보았다. 정염불새는 얼른 은염 소인으로 변신하더니 하얀 옷을 입은 아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20년 만에 대라경에 이르셨다고? 진짜 대단한 분이야.”

    흰둥이가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

    * * *

    그 시각, 화지공간 안.

    폭풍처럼 몰려드는 천지원기가 작은 동천 공간에게는 폭격과 같았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했다.

    공간의 대나무 숲이 사사삿, 흔들리며 뿌리에서 미친 듯이 천지원기를 빨아들여 화지동천 전체로 힘을 날렸다.

    대나무들은 물론 그걸로 지은 죽루도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크기가 커졌고, 약재원 안의 영약들은 특수한 영액을 뿌려주기라도 한 듯 씨앗에서는 싹이 트고 꽃봉오리는 꽃망울을 터트렸다.

    심지어 극히 느릿느릿 자라던 양생수(兩生樹)도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죽루 앞 금색 연꽃이 심어진 연못도 부글부글 끓어올라 자욱하게 수증기를 만들고 연꽃이 그 안에서 무려 49송이의 꽃을 피워 연못을 뒤덮었다.

    화지공간에 변화를 일으킨 천지원기는 일부였고, 대부분은 죽루 안쪽으로 쏟아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 안에 앉은 한립은 오색광채 속에서 옥같이 투명하게 변한 피부 속으로 금색 혈관을 노출하고, 단전 안의 원영 소인이 시간법칙 파동에 쌓여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죽루로 몰려든 천지원기가 그의 몸을 응결하며 그의 힘이 되어갔다.

    화지공간 바깥의 흰둥이는 겨우 20년도 안 되었다고 느꼈지만, 내부의 한립은 광음천선대진의 보조로 무려 2천 년을 보냈다.

    2천 년 동안 오직 수련에만 매달려 다섯 가지 시간법칙 보물들의 원만한 균형을 되찾고 대라경에 도전한 것이다!

    눈을 꼭 감고 있던 한립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또렷한 금빛이 그의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와 주변의 천지원기를 휘감고 몸속으로 돌아 들어갔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는 깊게 숨을 내쉬면서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영력 흐름과 의식을 다스렸다.

    이제 죽루 바깥의 세세한 변화와 움직임도 코앞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느낄 수 있었다.

    * * *

    죽루 바깥으로 나온 한립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은하수 속의 별빛에 시선을 빼앗겼다.

    별빛들이 반짝이는 흔적을 남기며 홀연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은하수 안에서 시간법칙의 힘이 흐르고 있다는 기이한 느낌이 전해졌다.

    공간 전체가 멈춘 듯 시간법칙파동에 둘러싸인 그는 양손으로 수결을 맺어 <대오행환세결> 공법을 운용해 보았다.

    진언보륜 등 다섯 가지 보물이 줄줄이 떠올라 하늘 위 은하수 속으로 솟구쳤다.

    법칙 물건들이 함유한 시간정사들이 분분히 흘러나와 은하수 속에 융합되더니 하늘에서 떨어진 금빛이 화지공간을 채우고 충만한 법칙 파동을 일으켰다.

    놀란 한립은 시간정사들이 허공으로 녹아버린 줄 알고 자기도 모르게 손을 휘저었다.

    은은한 금빛 구슬과 같은 빛의 장막이 퍼져 거대한 시간영역을 이루고 화지공간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한립은 영역을 통해 흩어진 시간정사들을 불러 모으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고, 오히려 시간법칙 보물들이 영역과 감응하더니 투명한 도문까지 떨어져 나와 공간과 융합되려 했다.

    영역 안에 강렬한 파문이 일고 진언보륜이 한립을 떠나 고공에 떠올라 달처럼 매달렸다.

    둥근 달이 터트린 그윽한 금빛 달빛이 영역 전체를 비추었다. 동시에 환진사루도 땅으로 떨어져 바닥에 금빛 모래를 깔았다.

    그걸 본 한립은 무언가를 예감했다.

    이번 시간법칙 물건들의 변화는 이전과는 뭔가 달랐다.

    “설마 조물경에 이르려는 건가?”

    스스로 이런 생각을 하고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가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광음정병이 천천히 기울어지더니 금색 모래 바닥 위로 금색 액체를 줄줄 흘려보냈다.

    물은 모래 속으로 스며들지 않고 맹렬한 강줄기로 바뀌어 금빛 공간을 흘러 다녔다.

    물길을 따라 고르던 바닥의 지형이 울퉁불퉁하게 바뀌어 산악과 평지를 형성했다.

    이어 동을신목 허상이 금빛 산으로 떨어져 마른 초원에 불을 붙인 것처럼 울창한 수풀을 퍼트리고 있었다.

    모든 것들이 하늘의 둥근 달의 보우를 받아 하나의 세계로 융합되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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