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2125화 (1,882/2,000)

2125화. 백귀(白鬼)

*

한립은 아직도 콰르릉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뇌역을 돌아보고 다른 방향으로 튀어 나가려 했다.

그때 눈썹을 꿈틀한 그는 재빨리 수결을 맺어 윤회전 가면을 쓰고 전방 허공에 화면을 띄웠다.

그가 등록한 시간법칙 물건을 찾는다는 임무에 누군가 답을 한 것이었다.

신이 나서 임무를 확인하던 한립이 순간 멈칫했다.

붉은빛이 모여 만들어낸 호리호리한 인영은 붉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기운이 익숙한 교삼이었다.

“교삼 수사? 시간법칙을 지닌 재료를 가지고 있다고 연락한 사람이 수사였습니까?”

“정말 오랜만이네요. 제가 한 수사의 임무를 거짓으로 수락했을 리 없죠.”

교삼은 가볍게 웃으며 팔뚝 절반 크기의 푸른 고목을 불러냈다.

“감사합니다, 제가 급히 필요로 하던 물건이 맞습니다. 선원석을 얼마나 드리면 되겠습니까?”

한립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물었다.

교삼이 들고 있는 물건은 미라노조가 그에게 주려던 것과 동일한 종류의 재료였다. 다섯 개의 시간법칙 보물 중 동을신목의 시간정사가 가장 부족했는데 마침 그걸 교삼이 찾아 연락을 취했다.

가슴이 뛰면서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 그냥 시간법칙을 함유한 물건을 찾는다고만 올렸는데 교삼이 그가 필요로 하던 재료를 가지고 나타난 건 놀라 만한 일이었다.

“태세선부에서 저를 도와주셨는데 제대로 사례할 시간도 없었네요. 한 수사께서 필요하시다면 고작 재료일 뿐인데 그냥 드리겠습니다.”

교삼은 긴말하지 않고 바로 수결을 맺은 손을 뻗었다. 전송진법에 녹색 빛이 반짝이고 고목이 떠올랐다.

한립은 고목을 보고도 손을 뻗어 가져가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태세선부 일은 그 안에서 이야기가 끝난 것으로 압니다. 이렇게 귀한 보물을 그냥 받을 수는 없지요. 가격을 알려주시거나 필요한 물건을 말씀해 주시지요.”

“그냥 받을 수 없다 하시니 조건을 제시할게요. 구원관 임무가 시작되면 저를 위해 한 가지 일을 해주세요. 그럼 재료의 대가는 받은 것으로 하죠, 어떤가요?”

“어떤 일인지 분명히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려운 일이나 수사를 위험에 처하게 할 일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은 상세하게 말씀드리기가 어렵지만요.”

“그렇다면……. 그렇게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윤회전이 구원관을 노리고 벌이는 임무는 언제 시작되는 겁니까?”

한립은 잠시 고민하다 고목을 거두고 물었다.

“곡절이 좀 있어서 미뤄졌어요. 너무 오래는 아니고, 길어도 백 년 안에는 시작될 거예요.”

교삼의 대답에 한립도 걱정이 줄었다.

백 년 내면 흰둥이도 구출 작전에 참여했다 돌아갈 수 있었다.

“한 수사,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대금원선역은 너무 혼란스러우니 가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조용한 곳을 찾아서 수련하고 계시면 확정되는 대로 알려드릴게요.”

교삼은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하게 충고했다.

그 말에 한립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들은 몇 마디 한담을 더 나누다가 연락을 끊었고, 그제야 고목을 꺼내 살피는 한립의 눈에 희열이 차올랐다.

이걸로 다섯 시간법칙의 힘이 균형을 이루면 대라경 진입은 성공한 것과 다름없었다.

고목을 잘 넣어둔 한립은 만황계역 안쪽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흉수들이 가득해도 만황계역이 대금원선역보다는 안전했다. 교삼도 그에게 지금은 대금원선역에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팔황산에서 여기까지 오며 만황계역 내부 사정에도 익숙해져서 금방 비교적 안전한 곳을 찾을 수 있었다.

구불구불한 산맥 사이사이에 수원은 풍부하고 땅속에는 지열도 충만해 안개가 뿌옇게 낀 장소였다.

한립은 산맥을 꼼꼼히 살펴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봉우리 중 하나를 골라 아래쪽에 임시 동부를 마련한 다음 층층이 금제를 쳤다.

모든 게 수도 없이 해본 일이라 장소를 물색해 수련할 동부를 마련할 때까지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한립은 화지공간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선원석과 세월신등 내의 시간법칙의 힘에 한계가 있어 시간차공간을 유지하고 있지는 않았다.

“주인님, 그 대나무 비검들의 제련은 어떻게 되셨어요?”

흰둥이가 그가 들어온 것을 보고 달려왔다.

“잘 마쳤다.”

“주인님이 더 강해졌다는 소리네요! 이제 대금원선역으로 누님을 찾으러 가는 건가요?”

한립의 말을 듣고 흰둥이가 기뻐하며 외쳤다.

“지금은 안 된다. 지금 내 수행으로는 너와 함께 움직이더라도 구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아. 허나 막 시간보물을 얻어 한동안 폐관을 하면 대라경에 이를 수 있을 것 같구나.”

“대라경! 시간법칙을 수련한 주인님이 대라경까지 되면 엄청 강해지겠네요. 분명 누님을 구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대라경 돌파를 위한 시간이 적잖이 걸릴 텐데 2백 년 안에 누님을 구하러 갈 수 있을까요…….”

만황으로 돌아가 봐야 하는 흰둥이는 걱정이 되는 것 같았다.

“내가 대라경에 이른다 해도 금동을 확실히 구할 수 있을 거라 장담할 수는 없다. ……반드시 우리에게 이로운 시기를 기다려야겠지. 어쨌든 되도록 시간을 맞춰볼 것이야.”

한립은 화지공간 다른 쪽의 하얀 불 구슬을 향해 수결을 맺은 손을 뻗었다.

금빛이 날아들자, 불 구슬이 휙휙 두 바퀴를 돌더니 정염동자로 변해 날아왔다. 한립 옆에선 정염동자가 재잘재잘 떠드는데 불의 본원법칙이 상당히 늘어 있었다.

“난 대라경 돌파를 위해 폐관 수련에 들어가야 한다. 비록 바깥에 방어 금제를 펼쳐두었다고 해도 너희 둘이 강적의 침임을 대비해 줘야겠구나.”

“주인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만 믿으시면 돼요!”

흰둥이가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답했다. 정염동자도 연달아 뭐라 소리치고 바깥으로 날아갔다.

미소를 지은 한립은 광음천선대진과 균천일귀를 발동해 화지공간 내부의 시간 유속을 바꾸었다.

누각 안으로 들어간 그는 녹색 고목부터 꺼내 대오행환세결을 운용했다.

* * *

북한선역, 고운대륙 바깥의 해역은 예로부터 동류해역(東流海域)이라 불리는 곳이 있었다.

늘 얼어붙어 있는 해역에서 절대 얼지 않는 짙은 쪽빛 해역이었다.

그 아래 만장 해구(海溝)는 아주 깊은 곳까지 통해 있는데, 그곳에 놓인 회백색 비석이 예전 기세등등했던 촉룡도 관할의 동천비경 ‘부산(浮山)’ 비경 입구였다.

촉룡도의 중요한 자원 산지 중 하나로 한립도 명을 받아 주둔했던 적이 있지만 이제는 북한선궁의 비경이 되어 그들을 위해 영약을 생산해 바치고 있었다.

부산(浮山) 비경 안, 높은 청록색 산봉우리 위 백석 광장에 회백색 장포를 입고 온 얼굴에 수염이 쭉쭉 뻗은 중년 사내가 백옥 술병을 들고 광장 난간에 앉아 잔뜩 취해있었다.

눈에 핏발이 선 채 천장 산봉우리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는 촉룡도 36명의 부도주 중 한 명으로 당시 권세가 상당했지만 변고가 일었을 때 제때 반군에 붙지 못해 종문의 중앙세력에서 밀려났다.

그 후, 겨우 백여 년 만에 이런 외진 곳으로 보내져 부산(浮山) 비경을 책임지고 있었다.

예전 전도가 무한했던 그와 비교하면 처량한 결말이 아닐 수 없었다.

“흥, 그 역도들도 좋은 꼴은 못 보지 않았던가?”

촉룡도 역도들도 선궁의 개가 되고 말았으니 회백색 장포 사내는 앙천대소(仰天大笑)하며 입에 술을 콸콸 쏟아부었다.

멀리 그의 직계 제자 둘이 그걸 보고 조용히 전음으로 떠들고 있었다.

“사부님이 또 정신이 오락가락하십니다. 저런 말을 남들이 들었다가는 우리도 좋은 말을 못들을 텐데요…….”

“당초 조상 덕에 사부님의 제자가 되었구나 싶었는데,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두 사람은 사부님을 보다 아래쪽 심연 바닥의 잿빛 안개를 내려다보았다. 떠다니는 산봉우리들의 그림자가 언뜻언뜻 보이다가 말다가 했다.

좋은 풍경도 계속 보면 질리는데 심연 안개야 말할 것도 없었다.

부우-

그 순간 심연 아래에서 호각소리가 울렸다.

놀란 제자들이 회포 사내를 보았으나, 술에 취해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쓴웃음을 지은 제자들이 몸을 날려 아래쪽으로 속히 내려가 보았다.

그들이 천 장을 내려가기 전에 안개 속에서 미친 듯이 누군가 올라왔다. 산골짜기 안에서 영초를 채집하던 외문 제자 수천 명이 광증이라도 발작한 듯 앞다투어 올라오고 있었다.

“크, 큰일 났습니다! 백귀(白鬼), 백귀들이 몰려옵니다…….”

누군가 놀라 소리치는 소리와 처참한 비명과 절규가 맞물렸다.

두 제자는 안색이 달라져 큰소리로 물었다.

“진법이 막아주고 있을 텐데, 무슨 일이 난 것이냐?”

“모, 못 막습니다……. 백귀들이 미쳐 날뛰고…….”

누군가 뜨문뜨문 소리쳤다.

“어떻게 된 것이냐!”

회포 사내의 제자 중 하나가 얼이 빠져 날아든 제자 하나를 붙들고 질문했다.

“아래쪽 백귀들이 미쳤습니다……. 안개 범위를 벗어난 것은 물론 진법으로도 막을 수 없는데 수천, 수만의 백귀들이 뛰어올라 진법을 부수고 있어요!”

겨우 진정한 촉룡도 수사가 서둘러 답했다.

안개 안에서 쿠쿵하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대량의 그림자들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진법, 진법을 펼쳐라!”

당황한 첫 번째 제자가 명을 내렸으나 이미 혼란에 빠진 수사들이 말을 들을 리 없었다.

“누구든 달아나는 자, 목숨을 잃을 것이다!”

이때 머리 위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회포 사내가 하늘에서 뚝 떨어져 공중에 떠서는 취기를 날려버리고 이전의 위풍당당한 기도를 드러내고 있었다.

금선 중기 수사의 기운이 퍼져 수사들을 안정시켰다.

“겨우 백귀의 기습이다. 오래전에도 발생했던 일이고 당시 이곳에 머물던 장로에 의해 평정이 되었었지. 오늘은 내가 있는데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이냐! 당장 진법을 펼쳐라!”

사내의 말에 죽자사자 달아나던 촉룡도 제자들도 냉정을 되찾고 서로서로 모여 각기 다른 진법을 펼쳤다.

그들이 방어태세를 갖추었을 때, 안개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백귀들이 튀어나와 부산(浮山)에 바짝 붙어 위로 치솟기 시작했다.

“죽여라!”

회포 사내의 지엄한 명령에 부산(浮山) 비경 안에는 쿵쿵거리는 전투 소리가 가득 찼다. 화염 덩어리와 얼음송곳들이 떨어지고 눈부신 빛이 날아갔다.

비경은 다채로운 빛과 공격들로 혼란 그 자체였다.

백귀들이 각종 공격에 목숨을 잃고 떨어졌으나 더 많은 백귀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달라붙어 올라오고 있었다.

“뭔가, 이상한데…….”

회포 사내도 그걸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의식으로 심연 깊은 곳을 수색하려는데 무언가에 막혀 더 아래는 살필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더 많은 백귀들이 올라와 촉룡도 제자들을 따라잡기 직전이었다.

회포 사내는 거대한 푸른 고리를 등 뒤로 불러내고 그 속에서 검기를 품은 빛을 뿜어 대량의 백귀들을 제거했다.

하지만 백귀들이 죽어 나가 시체가 산을 이룰수록 불안감이 커져 갔다.

이 백귀들은 안개를 벗어나 공격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마치 무언가에 쫓겨 필사적으로 달아나려는 듯 보였다.

대체 저 아래 뭐가 있기에?

의혹이 깊어질 때 안개 속에서 푸른 피부를 지닌 건장한 원숭이들이 펄쩍펄쩍 뛰어올라 백귀들을 쫓아 죽이면서 올라왔다.

백귀들은 청피(靑皮) 원숭이들의 상대가 되지 못해 도륙을 당하고 있었다. 손에 낭아봉을 든 원숭이들은 백귀들을 죽이고 산봉우리 위 인족들을 흉흉하게 노려보았다.

“사부님, 저것들은 무엇입니까?”

두 제자가 회포 사내 옆으로 돌아와 겁에 질려 물었지만 사내도 몰라 답해줄 말이 없었다.

*

1